김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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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두봉은 1889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주시경의 제자로서 한글 연구에 헌신하며 국어사전 편찬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기여했다. 해방 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노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역임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수반이 되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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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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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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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두봉 |
한자 | 金枓奉 |
로마자 표기 | Gim Dubong |
다른 로마자 표기 | Kim Tubong |
호 | 백연 |
다른 호 | 백련, 배못 |
출생일 | 1889년 2월 16일 |
출생지 | 부산, 조선 (대한제국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
사망일 | 1958년 3월 ~ 1960년 사이 (69~71세)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종교 | 대종교 |
기타 별명 | 태항산 호랑이 |
정치 경력 | |
정당 | 조선공산당 (1925년 ~ 1946년) 조선신민당 (1946년) 북조선노동당 (1946년 ~ 1949년) 조선노동당 (1949년 ~ 1958년) |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6년 8월 28일 ~ 1949년 6월 30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20일 |
전임 | (직책 신설) |
후임 | 김일성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부위원장 | 김책 김용범 박헌영 김일성 허가이 주녕하 홍명희 김원봉 |
총리 | 김일성 |
군사 경력 | |
복무 | 조선의용군 조선인민군 |
복무 기간 | 1938년 10월 10일 ~ 1952년 11월 15일 |
계급 | 조선인민군 책임고문 |
지휘 | 조선의용군 최고사령관 |
근무 | 조선의용군 총본부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한국전쟁 |
학력 | |
학력 | 배재학당 중퇴 (1913년) |
명예 졸업 | 배재대학교 (사후, 1984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김돈홍 |
자녀 | 김해엽 (딸) 김상엽 (아들) |
친척 | 4촌 김맹련 5촌 조카 박차정 조카사위 김원봉 6촌 동생 김약수 |
2. 생애
김두봉은 1889년 2월 16일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한문과 한학을 배우며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1908년 서울로 상경하여 기호소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주시경의 하기강습소에서 한글과 국어연구법을 배웠으며,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했으나 1913년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배재학당을 중퇴했다. 이후 최남선이 운영하던 광문회에서 한글을 연구하며 잡지 "청춘" 등을 편집했다.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노력했으며, 주시경 선생 밑에서 한국어를 연구하고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다.[1] 주시경 사후에는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국어사전인 《조선말본》을 집필, 1916년 4월에 완성하여 발행했다.[1] 1916년 음력 8월에는 대종교 교주 나철을 따라 강화도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수행하던 중 나철의 순교를 목격하기도 했다.[1]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으로 이동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935년,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1938년 조선의용대 결성에 참여했다.[1] 1942년에는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여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설치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끌었다.[14] 1944년에는 연안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에는 학교를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개편하고 교장으로 취임했다.[1]
1945년 8.15 광복 이후 북한으로 돌아와 조선신민당 위원장, 북조선로동당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 남북협상에 북측 대표로 참가했고, 같은 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다.
1946년 10월 김일성 대학의 초대 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실제적인 총장은 부총장인 한빈이었다.[19]
한국 전쟁 전후 김두봉은 김일성에게 집단 지도 체제를 요구하는 등 비판을 강화했고, 1957년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58년 3월에는 8월 종파 사건의 주동 혐의로 당에서 제명 및 숙청되었으며,[1] 1961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1]
2. 1. 생애 초반
1889년 2월 2일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 근처에서 태어나, 조선 시대에 가정교육을 받았다. 1908년 서울로 올라와 경성학교, 배재학교를 거쳐 보성고보를 졸업했다. 1913년 한국청년회에 가입했고, 1914년 배재학교를 떠났으며, 《소년》 잡지 편집자로도 활동했다.1908년 보성전문학교(보성고보) 졸업 후, 훈민정음을 연구하던 주시경과 긴밀히 협력했다. 주시경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보급에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김두봉은 교사로 일하면서 1916년 말모이 편찬에 참여했다.[1]
2. 1.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889년 2월 16일 지금의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에서 김돈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적개심을 갖던 김두봉은 아버지 김돈홍 밑에서 한문과 한학을 배우면서 일본인이 세운 보통학교에는 입학을 거부하였다. 선친의 영향으로 엄격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 그는 1908년 단신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기호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기호소학교를 졸업한 김두봉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한 뒤, 1908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어 배재학당으로 진학했다.낮에는 학교 생활을 하면서 김두봉은 밤에는 보성고보의 국어 교사였던 주시경이 운영하는 하기강습소에 다녔다.[11] 하기강습소는 1917년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되었고, 김두봉은 1914년까지 하기강습소 야간반에 다니며 한글, 국어연구법을 배웠다.
1910년 일제는 이완용 등을 앞세워 그해 8월 22일 강제 합병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한일 완전합병을 선포했다. 국권이 피탈되자 김두봉은 안교재, 남형우, 신배부, 이경희 등 동료들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1913년 대동청년단이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활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배재학당을 중퇴해야 했다. 배재학당을 자퇴한 김두봉은 당시 최남선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에 입사하여, 한글을 연구하며 회보와 잡지 "청춘" 등을 편집했다. 이때부터 한글학자로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 1. 2. 한글 연구와 대종교 입교
그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대종교에 입교하여 교인이 되었다. 동시에 유명한 국어학자인 주시경 선생 밑에서 한국어를 연구했고 조선어사전 말모이 편찬에도 참여했다.[1] 주시경이 한글 국어사전인 우리말본을 짓고 가르치는 일에 감격한 김두봉은 사전 만드는 일을 곁에서 돕고 있었다.[1] 그러나 주시경이 1914년 7월 27일 한창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스승의 뜻을 계승하여 한글 국어사전인 《조선말본》을 쓰기 시작한다.[1]1916년 4월 조선말본이 드디어 완성되어 서울에서 세로 쓰기로 조선말본을 편찬, 발행할 수 있었다.[1] 이 국어사전은 당시 서울말을 기준으로 하고, 우리말 이해를 위해 순한글로 집필하되, 옆에 한자를 써놓았다.[1] 1916년 음력 8월 대종교 교주 나철의 시봉자(侍奉者) 6명 중의 한사람이 되어 나철을 따라 강화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하던 중, 8월 15일 나철의 순교를 목격하고 내려온다.[1]
1908년 보성전문학교(보성고보)를 졸업한 김두봉은 당시 훈민정음 연구를 시작한 보성고보의 언어학 교수 주시경과 긴밀히 협력하였다.[1] 주시경은 15세기 세종 대왕이 창제한 한국 문자(훈민정음)의 보급에 평생을 바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김두봉은 또한 교사로도 일하였다.[1] 1916년에는 최초의 한국어 사전인 말모이 편찬 작업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였다.[1]
2. 2. 일제강점기 활동
김두봉은 조선 시대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태어났다. 저명한 조선어 학자 주시경 밑에서 배우며 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으로 이동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후 김두봉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하위 섹션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2. 2. 1. 독립운동
1919년 3·1 운동 이후, 김두봉은 독립운동 단체 회원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 당시 그는 처음으로 공산주의에 접하게 되었고, 민주당을 지지한 후 1920년에 결국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24년 그는 아동 교육 및 학교 교육 부서의 책임자를 맡아 부서장으로 재직하며 한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쳤다. 중일 전쟁 이후, 그는 상하이에 있던 한국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으로 망명하였고, 김두봉은 독립운동 단체의 수장이 되었으며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의 상충하는 견해들을 통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으나, 일본의 탄압으로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국민주국 임시정부 위원이 되어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동휘 등을 통해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1920년 조선공산당(상하이파)에 입당하였다.[1]
1935년, 의열단 단장으로 일본에 저항한 경력이 있는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1938년 조선의용대 결성에 참여하였다.[1] 1942년 4월 30일, 조선의용대와 함께 중국공산당 본거지 옌안에 도착하여 펑더화이의 영접을 받았다.[1] 김두봉은 오랜 정치 활동 경력과 인망, 그리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기에 중국공산당이 추진한 국제 통일전선 노선의 이상적인 대상이었다.[1] 같은 해 7월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했다.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조선의 혁명 지도자", "조선 혁명의 대선배"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중국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았다.[1] 이는 중국공산당 입장에서 당내에 끌어들이는 것보다 당 외에 머물게 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2. 2. 2. 김진익 등과의 갈등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 아나키스트 계열 독립운동가 김진익과 사상적으로 가까워졌다.[12][13] 그러나 김두봉의 첩과 김진익이 성관계를 맺고 그 첩이 임신하면서, 김두봉은 이들과 결별했다. 또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김규식, 김원봉의 노선에도 불만을 느껴 충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2. 2. 3. 임시정부 탈퇴, 화북 독립동맹 결성
1940년 김두봉은 민족혁명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김원봉이 의열단을 중심으로 개편한 조선의용대의 편집위원이었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와 합작하게 되자 함께 활동했지만,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투쟁을 하자는 그의 의견이 거부되면서 중경을 떠나 한인촌이 밀집한 화북으로 갔다. 이때 벙어리 행세를 하며 어린 딸을 데리고 화북으로 이동했다고 한다.1942년 4월, 옌안에 도착한 김두봉은[14] 군사단체를 조직하고 조선인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한빈, 박효삼 등과 사회주의 청년들이 자원하였고,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한 최창익 일파와 옌안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김무정도 합류했다. 그해 7월,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14] 1942년 7월 10일에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를 설치, 김두봉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최고책임자 겸 통수권자로서 독립동맹은 정치단체로, 의용군은 군사단체로 조직했다.
2. 2. 4. 광복 직전
1944년 김두봉은 10개의 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 지역지대를 설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고 독립동맹의 주석으로서 중국 공산당과 연계,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1] 같은 해 연안(延安)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에는 학교를 군관양성소로 개조,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다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1]thumb
2. 3. 해방 후 정치활동
1945년 8.15 광복 이후, 김두봉은 다른 당원들과 함께 분단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많은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김두봉과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소련 점령 하에 있던 현재의 북한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4] 1946년 2월, 김두봉은 조선신민당 위원장이 되었고, 같은 해 8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되자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의 실권은 부위원장인 김일성이 장악했다.[4]1948년 4월에는 남북협상에 북측 대표로 참가하여 김구, 김규식 등과 회담했다. 같은 해 9월 8일, 제1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어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이 선포되자, 헌법 규정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은 의례적인 것이 중심이었고, 수상인 김일성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1949년 6월 30일, 북조선로동당이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로동당을 흡수하여 조선로동당으로 개편되자, 김일성이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김두봉은 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2. 3. 1. 해방과 귀국
1945년 광복 후 일본의 패망을 예측했던 김두봉은 9월 3일 귀국을 결정하고 의용군 4개 대대를 인솔하고 연안에서 4천 7백리나 되는 한반도를 향해 걸어서 왔다. 당시 중국 화북 지역엔 철도가 없었고 교통시설은 파괴되었으며 일반 차량마저 없는데다 의용군의 군용차량도 없었다.[4] 열악한 환경에 귀국하는 길에 중국에서 새로 만난 아내는 연락이 끊긴 채 그대로 중국에 남아있게 됐고, 연안에 데리고 있던 14세 된 딸 김해엽은 데리고 왔으나 중경에 남아 소학교에 다니던 12세 된 아들 김상엽과는 생이별을 하는 등 가정적인 불행을 겪었다. 11월 말 평안북도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광복 직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다시 만주로 추방되자 김두봉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항의하였다.[4]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15]
1946년 2월 8일 평양으로 가 북조선신민당 당수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16][17] 2월 21일과 22일 양일에 걸친 회의에서 인민회의에서 상임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18] 3월 연안에서 함께한 공산주의 운동가들과 함께 독립동맹을 정당으로 바꾼 조선신민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8월 소련군의 압력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을 추진하게 되었다. 1946년 8월 김두봉의 조선신민당은 김일성의 조선공산당과 합당하였다. 이때 남한에 있던 조선신민당은 백남운의 지도하에 놓이게 되었다. 북조선노동당 통합창당 후 그는 북조선노동당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10월 김일성 대학이 설립되자 초대 총장에 임명되었다. 총장은 김두봉이지만 명예직에 불과했으므로 실제적인 총장은 부총장인 한빈이었다.[19]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자, 12월 김두봉과 다른 당원들이 분단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많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김두봉과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소련 점령하에 있던 현재의 북한에 거주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김두봉은 새로운 인민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인민당은 노동당으로 합병되었다. 그는 1948년에 위원장이 되었지만, 처음부터 실질적인 권력은 김일성 수상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회담에서는 김일성과 함께 북측 대표로 참가하여 남측 대표인 김구, 김규식과 회담했다. 같은 해 9월 8일, 제1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어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되자, 김두봉은 헌법 규정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수행하는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은 의례적인 것이 중심이었고, 수상인 김일성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1949년 6월 30일, 북조선노동당이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노동당을 흡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 정당인 조선노동당으로 개편되자, 김일성이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김두봉은 당 부위원장이 되었다.
2. 3. 2. 제1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여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북측 대표로 참가하여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주영하 등과 함께 남측 대표인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회동하였으며, 김일성과 함께 단독으로 남측 대표의 주장격인 김구, 김규식과 4김회동을 하였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20]2.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국가 수반
1948년 9월 8일, 제1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다음 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헌법 규정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었다.[4] 그러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국가원수로서의 권한은 의례적인 것이었고, 실권은 수상인 김일성이 장악했다.[4]2. 4. 1. 한국 전쟁 전후
1948년 5월 남북협상이 종결된 뒤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계획한다. 8월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구성하고 박헌영, 홍명희, 김일성 등과 함께 남측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에게 참석을 부탁하는 사자를 보냈으나 거절당하였다.[21]1948년 9월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가 구성되자, 의회의장격인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동시에 형식적으로나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직을 맡게 되었으나 실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다.[21] 이 무렵부터 그는 김일성 체제에 불만을 품고, 연안파 중진들과 함께 저항하였다.
1950년부터 시작된 한국 전쟁에서는, 개전 여부를 둘러싸고 김일성과 대립했다는 주장이 있다. 개전을 강행하려는 김일성에 대해 김두봉은 개전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한편, 조선인민군제6사단 제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던 최태환의 증언에 따르면, 김두봉은 개전 직전인 6월 23일 제6사단 간부들 앞에서 시국 연설을 하며, 마지막에 “서울은 한반도의 심장부이다. 심장을 장악하면 전신을 장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서울을 장악하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한 것과 다름없다. 우리는 1주일 안에 서울을 장악하고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새 대통령을 선출하여 남북통일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6]
최태환 조선 인민군 중좌는 김두봉에게 "현 정세에 보고가 있겠습니다" 그러더니 울면서 "서울이라는 것은 조선의 심장부다. 우리 몸에 심장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 심장을 장악하고 8월까지는 기어코 통일 정부를 구성하자고 말했다고 한다.[22]
다른 계파와 경쟁관계 중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북한 내에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연안파의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1952년 김두봉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높아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당을 대표하여 신년사를 발표할 수 있었다.
이후, 독재 체제를 확립하려는 김일성에게 집단 지도 체제를 요구하는 등, 김두봉은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강화해 나갔다. 김두봉 등 연안파와 김일성 등 만주파의 대립은 심각해졌고, 결국 1957년 9월 20일에 김두봉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고, 최용건이 후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2. 4. 2. 실각과 최후
1956년 일부 연안파 간부들이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8월 종파 사건이 발생하면서, 김두봉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1][2]1958년 3월 3일부터 3월 4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조선로동당 제1차 대표자회 직후, 연안파 숙청 때 '8월 종파 사건'의 주동 혐의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반혁명종파분자로 공격받아 3월 4일 최창익, 서휘 등 연안파, 박헌영 등 국내파와 함께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 결의로 당에서 제명 및 숙청되었다.[1] 고령으로 사형은 면했으나, 평안남도 순안군 산골 오지의 한 지방협동농장으로 끌려가 중노동을 강요당하며 농사일을 하다가 1961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향년 75세였다.[1]
한국 전쟁 이후, 김두봉은 김일성의 독재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의견이 있다. 그는 1958년 3월 제거되었고,[1] 1956년 8월 종파 사건[2]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다. 김일성의 다른 많은 정치적 반대자들처럼,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는지 아니면 유배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 없이 사라졌다. 그는 1960년대 언젠가 북한 내 구금[3] 중 처형되었거나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5. 사후
1961년 대한민국의 장면 정권은 화해 무드 조성을 이유로 김두봉과 홍명희 등을 남한으로 초청하려 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그가 실각당한 뒤였다.[1]1980년 초에는 그가 실각 이후 대한민국에 남파 간첩으로 보내졌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2]
3. 저서
- 《조선말본》
- 《깁더 조선말본》
- 《말모이》(공저)
조선어문연구소와 과학원에서 한글 맞춤법(1948년)과 한글 맞춤법(1954년) 편찬을 주도하며, 한국어 연구에 기여한 업적을 남겼다.
4. 평가
1948년 12월 25일 소련군이 조선에서 철수하기 직전, 조선을 담당하던 레베제프는 모스크바에 43명의 조선 지도자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김두봉은 "학자이자 혁명가로서 조선 인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높은 인망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7]
연안파의 지도급 인물이었지만, 특별한 정치적 야망이 없었고, 사람들과 다투는 것을 싫어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신중한 인물이었다.[7]
마오쩌둥과 소련 간부 미코얀은 그를 "인격자", "학문이 있는 사람", "정치적으로 탄탄한 사람"으로 평가했다.[7]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한민국 국회 의원인 김약수는 그의 재종질이었다. 의열단 단장을 지낸 김원봉은 그의 종질녀(종질녀는 그의 이종사촌 누이의 딸)인 박차정의 남편이었다.[7]
5. 기타
조선어문연구회와 과학원에 있으면서 조선어 신철자법과 조선어 철자법을 펴내는 일을 주도하여 한국어 연구에 공헌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편 김두봉은 어느 공산주의 단체에도 가입하거나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김두봉은 연안으로 가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와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와 대립했다고 한다.
상해에 있을 때는 한때 인성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하다 인성학교 교장에 추천되었는데, 한번은 공산주의자들이 학교를 집회 장소로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김두봉은 신성한 교육 장소를 정치적인 투쟁장으로 쓰는 것을 허락할 수 없고, 남의 나라 조계 안까지 와서 정치 투쟁을 하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며 이를 거부했다. 김두봉의 거절에 앙심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은 집단으로 김두봉과 인성학교를 비난하는 성토를 했다. 이에 격분한 김두봉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학교를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1927년 독립운동가 김구의 배우자 최준례가 상하이의 불조계 보경병원에서 사망하자 최준례의 비문을 지었다. 비문은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죽음"으로 순 한글체였다. 이는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인 대한민국 ㅂ해 ㄱ달은 대한민국 6년 1월이라는 뜻이다. 이 일을 계기로 1948년 남북협상 때 김구가 자신보다 10년 연하인 김두봉에게 인형이라 부르며 깎듯하게 대하게 되었다.
1948년 12월 25일 소련군이 조선에서 철수하기 직전, 조선을 담당하던 레베제프는 모스크바에 43명의 조선 지도자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김두봉은 "학자이자 혁명가로서 조선 인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높은 인망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연안파의 지도급 인물이었지만, 특별한 정치적 야망이 없었고, 사람들과 다투는 것을 싫어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신중한 인물이었다.
마오쩌둥과 소련 간부 미코얀은 그를 "인격자", "학문이 있는 사람", "정치적으로 탄탄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한민국 국회 의원인 김약수는 그의 재종질이었다. 의열단 단장을 지낸 김원봉은 그의 종질녀(종질녀는 그의 이종사촌 누이의 딸)인 박차정의 남편이었다.[7]
6. 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김돈홍(金敦洪) | ? | ? | |
본인 | 김두봉(金枓奉) | ? | ? | |
딸 | ? | ? | ? | |
딸 | 김해엽(金海燁) | 1941년 | ? | |
아들 | 김상엽(金相燁) | 1943년 | ? | |
아우 | 김두백(金枓白) | ? | ? |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학회 사건 증인 |
4촌 누이 | 김맹련(金孟蓮) | ? | ? | |
4촌 매부 | 박용한(朴容翰) | ? | ? | |
외당조카 | 박문희(朴文熺) | ? | ? | |
외당조카 | 박문호(朴文昊) | ? | ? | |
외당조카 | 박차정(朴次貞) | ? | ? | 김원봉과 혼인 |
외당조카 | 박문하(朴文夏) | ? | ? | |
당백(숙)부 | 김은홍(金殷洪) | ? | ? | |
6촌 | 김약수(金若水) | 1890년 | 1964년 | 본명 김두전(金枓全) |
백부 | ? | ? | ? | |
종형 | 김두복(金枓馥) | ? | ? | |
당질 | 김종엽(金鍾燁) | 1897년 | 1969년 | |
당질 | 김도엽(金度燁) | 1899년 | 1937년 | |
당질 | 김규엽(金圭燁) | 1908년 | ? | |
백부 | ? | ? | ? | |
종형 | 김두수(金枓首) | ? | ? | 김두봉과 4촌, 김두복과도 4촌 |
당질 | 김주엽(金周燁) | 1902년 | ? | |
당질 | 김시엽(金時燁) | 1904년 | 1949년 | |
족형 | 김두연(金枓演) | ? | ? | 김두봉과 같은 항렬, 관계 불명 |
족질 | 김응엽(金應燁) | 1911년 | ? |
김두봉은 같은 김해 김씨인 김원봉과 가까운 친척으로 오해되기도 했으나, 그의 돌림은 두자 돌림으로 김원봉과는 항렬자가 다른 먼 친척뻘이 된다. 다만 그의 외조카 박차정이 김원봉의 후처가 되었으므로, 모계로는 김원봉과 처당숙-처조카사위가 된다. 그의 일가 친척은 대부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7. 관련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Journal of Korean Affairs
https://books.google[...]
1975-05-22
[2]
서적
Tyranny of the Weak: North Korea and the World, 1950–1992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013-06-18
[3]
서적
From Stalin to Kim Il So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https://books.google[...]
Hurst & Company
2018-05-22
[4]
간행물
藤井(1990年)、114-115ページ
1990
[5]
뉴스
A North Korean lesson in photoediting
https://www.nknews.o[...]
2017-01-21
[6]
간행물
6·25 전쟁 50년의 재조명 ⑤-人民軍 참전자들의 證言『환영 인파를 볼 수 없었다. 그때서야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https://monthly.chos[...]
월간조선
2019-06-11
[7]
웹사이트
조선어학자 김두봉 선생 조카 박차정
http://www.yangsanil[...]
2023-09-15
[8]
기타
[9]
웹사이트
태항산 호랑이 김두봉 (상) - 주간경향
http://weekly.khan.c[...]
[10]
기타
[11]
웹사이트
http://playculture.c[...]
[12]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998
[13]
서적
동녘에 해가 뜨면
좋은글
1998
[14]
서적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15]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6]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17]
서적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6
[18]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19]
서적
김학철 평전
실천문학사
2007
[20]
뉴스
북한 '인공기'의 유래
http://news.donga.co[...]
donga.com
[21]
기타
[22]
웹사이트
KBS 한국전쟁 3부 폭풍
http://www.kbs.co.kr[...]
201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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