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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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53)는 1937년 기공되어 1941년 취역한 영국 해군의 킹 조지 5세급 전함이다.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비스마르크를 상대로 교전했으며, 1941년 12월, 일본군의 공격으로 HMS 리펄스와 함께 말레이 해안에서 침몰했다. 이 사건은 전함의 취약성을 드러내며 해전의 양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전통적으로 국왕이 즉위한 후 최초로 건조하는 전함에 국왕의 이름을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당시 국왕은 조지 6세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 함급의 1번함은 'HMS 조지 6세'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조지 6세의 아버지 조지 5세 때에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의한 해군휴일(Naval Holiday) 시기여서 열강들의 신형 전함 건조가 금지되었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또한 그의 형인 에드워드 8세는 세기의 스캔들이라 불린 왕관을 건 사랑으로 스스로 퇴위하여, 그 짧은 치세와 이 함급의 건조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1번함에 아버지의 이름인 '조지 5세'를 붙이고, 형 에드워드 8세 시대의 칭호인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2번함에 붙여주었다. 조지 6세 자신의 이름은 즉위 전 칭호인 요크 공작의 이름을 따 '듀크 오브 요크'(Duke of York)를 3번함에 남겼다.[52]
1937년 1월 2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캐멀 레어드사의 버켄헤드 조선소에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끝난 직후 건조가 시작되어 1939년 5월 3일에 진수되었다.[2] Prince of Wales영어는 원래 King Edward VIII영어로 명명될 예정이었으나, 에드워드 8세의 퇴위 후 1937년 1월 1일 비르켄헤드의 캐멀 레이드 조선소에서 기공 전에 함명이 변경되었다.[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간의 군비 경쟁을 막기 위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각 국가가 건조할 수 있는 함선의 수와 주력함의 톤수를 제한했다.[2] 1930년 런던 조약을 통해 제한이 연장되었으나, 일본과 이탈리아가 조약에서 탈퇴하면서 영국은 해군 내 현대적인 전함 부족을 우려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해군성은 새로운 ''킹 조지 5세''급 전함 건조를 명령했다. 당시 조약 조항으로 인해 주무장은 포로 제한되었고, 이 함들은 조약을 준수하며 건조된 유일한 전함이었다.[3]
1941년 5월 24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덴마크 해협에서 독일 해군의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만나 후드와 함께 포격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후드는 비스마르크의 포격을 받고 침몰했고,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도 함교에 피격당해 퇴각했다. 리치 함장은 무사했지만, 항해장이 전사했다.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비스마르크의 연료 탱크와 보일러실에 피해를 주는 전과를 올렸다.
2. 함명의 유래
3. 건조
1940년 8월, 장비 장착 중 독일 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폭탄 한 발이 함선과 젖은 선창 벽 사이에 떨어져 100톤 규모의 부두 크레인을 간신히 빗나가 빌지 킬 아래 수중에서 폭발하여 함선의 좌현에서 약 약 1.83m 떨어진 5.25인치 포의 후방 구역 근처에서 폭발했다. 외판이 약 6.10m 거리에서 찌그러졌고, 리벳이 튀어나왔으며, 손상된 구역의 좌현 바깥쪽 격실에 상당한 침수가 발생하여 좌현으로 10도의 경사가 생겼다. 지역 소방서와 조선소의 공동 노력으로 물을 퍼 올렸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나중에 영구 수리를 위해 드라이 도크에 들어갔다. 이 피해와 주포 및 포탑의 인도 문제로 인해 완공이 지연되었다.[4]
1941년 1월 19일에 존 리치 함장 지휘하에 취역했지만 3월 31일까진 완성되지 못했다.[52]
4. 구조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원래 ''킹 에드워드 8세''로 명명될 예정이었으나, 에드워드 8세의 퇴위 후 1937년 1월 1일 비르켄헤드의 캐멀 레이드 조선소에서 기공 전에 함명이 변경되었다. 1939년 5월 3일에 진수되었으며, 전쟁 선포 당시에도 여전히 장비를 장착 중이었다. 건조 일정은 단축되었지만, 포탑의 늦은 인도로 장비 장착에 지연이 발생했다.[4]
1940년 8월 초,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독일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다. 폭탄 한 발이 함선과 젖은 선창 벽 사이에 떨어져 빌지 킬 아래 수중에서 폭발, 함선의 좌현에 피해를 입혔다. 외판이 찌그러지고 리벳이 튀어나왔으며, 상당한 침수가 발생하여 좌현으로 10도 경사가 생겼다. 지역 소방서와 조선소의 공동 노력으로 침수된 물을 퍼 올렸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영구 수리를 위해 드라이 도크에 들어갔다. 이 피해와 주포 및 포탑 인도 문제로 완공이 지연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주력함에 대한 긴급한 필요성이 있었으므로, 격실 공기 테스트, 환기 테스트 및 빌지, 밸러스트 탱크 및 연료 유 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테스트는 연기되었다.[4]
4. 1. 설명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건조 당시 배수량 36727ton, 만재 시 43786ton의 배수량을 가졌다. 전체 길이는 약 227.08m, 선폭은 약 31.39m, 흘수선은 약 8.84m였다. 설계상 메타센터 높이는 표준 배수량에서 약 1.83m, 만재 배수량에서 약 2.44m였다.[5][6]
4개의 프로펠러 샤프트를 구동하는 Parsons 기어드 증기 터빈으로 추진되었다. 증기는 8개의 Admiralty 보일러에서 공급되었으며, 통상적으로 100000shp를 냈지만, 강제 통풍을 사용하면 110000shp까지 낼 수 있었다. 최고 속도는 28kn이었다.[3][9] 연료유 3542ton, 경유 180ton, 예비 급수 256ton, 담수 444ton를 실었다.[10] 1941년 3월 31일 전력 시험에서, 42100ton 배수량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228rpm에서 111600shp로 28kn를 달성했으며, 연료 소비율은 0.73 lb/shp였다.[11]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27kn 속도로 3100nmi의 항속 거리를 가졌다.[12]
4. 2. 무장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10문의 BL 14인치 (356 mm) Mk VII 함포를 탑재했으며, 이 함포는 Mark II 2연장 포탑 1문과 Mark III 4연장 포탑 2문(전방 1기, 후방 1기)에 장착되었다. 함포는 40도까지 올려 3도까지 내릴 수 있었고, 포탑의 선회 범위는 "A" 포탑 286도, "B" 포탑 270도, "Y" 포탑 270도였다. 유압 구동 방식의 선회 및 장전 속도는 초당 2도와 8도였다. 일제 사격의 무게는 약 7234.79kg였고, 40초마다 발사할 수 있었다.[13]
부무장으로는 8기의 2연장 포좌에 장착된 16문의 QF 5.25인치 (133 mm) Mk I 함포가 있었으며, 각 포좌의 무게는 81톤이었다.[14] Mk I 함포의 최대 사거리는 45도 고각에서 약 22009.61m였고, 대공 천장은 약 14935.20m였다. 이 함포는 70도까지 올릴 수 있었고, 5도까지 내릴 수 있었다.[15] 통상 발사 속도는 분당 10~12발이었지만, 실제로는 분당 7~8발만 발사할 수 있었다.[14]
또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32문의 QF 2 파운드 (1.575인치, 40.0 mm) Mk.VIII "폼폼포" 대공포와, UP 발사기 80기를 탑재했다. UP 발사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영국 해군이 사용한 단거리 로켓 발사 대공 무기였다.[12]
5. 실전
이후 처칠 수상을 태우고 대서양 헌장 체결에 참여했으며, 지중해에서 할버드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1년 10월 25일, 처칠 수상의 강력한 요청으로 일본군 남하 저지를 위해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12월 2일, 리펄스와 함께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토마스 필립스 중장의 지휘 아래 동양함대의 기함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 중임에도 최신 전함인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동양함대에 배치하여 일본군의 남하를 저지하려 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일본 해군 항공기(96식 육상공격기, 1식 육상공격기)의 뇌격과 폭격을 받고 HMS 리펄스와 함께 말레이 해안에서 침몰했다. 추진축 부근에 어뢰가 명중하면서 대량 침수가 발생했고, 조타 불능 상태에 빠졌다. 발전기 고장으로 전력도 떨어져 후방의 13.3cm 연장 양용포와 조타 장치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속력 저하와 경사로 인해 양용포 운용이 어려워진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추가적인 어뢰와 폭탄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필립스 중장과 리치 함장을 포함한 수백 명이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33]
말레이 해전에서는 '행동 중'인 전함이 항공기 공격만으로 격침되어, 대공포를 많이 갖춘 신식 전함이라도 항공기 공격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5. 1. 덴마크 해협 해전
1941년 5월 24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덴마크 해협에서 독일 해군의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을 만나 후드와 함께 포격전을 벌였다. 이 해전에서 후드는 비스마르크의 포격을 받고 침몰했다.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첫 일제사격 후 1번 포탑이 고장났지만, 세 번째 사격에서 비스마르크의 연료 탱크와 보일러실에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조타함교가 피격당해 퇴각했다. 리치 함장은 무사했지만, 항해장이 전사했다. 홀랜드 중장 전사 후,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워커 소장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5월 25일, 연료 부족으로 추격을 뿌리치고 로사이스에서 6주간 수리받았다.
5월 23일 밤, 덴마크 해협을 초계 중이던 중순양함 2척이 비스마르크 부대를 발견하자, 홀랜드 전대는 구축함을 남기고 진격했다.
5월 24일 아침, 아이슬란드 근해 대서양에서 홀랜드 전대(후드, 웨일스)는 뤼첸스 부대(비스마르크, 프린츠 오이겐)와 덴마크 해협 해전을 벌였다. 독일 측은 프린츠 오이겐이 선두, 비스마르크가 후방에 있었다. 후드는 프린츠 오이겐을 비스마르크로 오인해 포격했고,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비스마르크를 공격하여 포화가 분산되었다. 독일 측은 두 척 모두 후드를 목표로 포격했다.
포격전 개시 10분도 지나지 않아, 비스마르크의 다섯 번째 일제 사격이 후드에 명중하여 격침시켰다.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후드 잔해를 피하려 우현으로 방향을 틀어 독일 함선에 더 가까워졌다. 후드와 같은 항적이었기에 독일군은 조준 수정 없이 효과적인 사격을 가했다. 비스마르크 주포탄이 웨일스 함교에 명중, 리치 함장 등 3명을 제외한 함교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이 해전에서 웨일스에 명중한 탄환은 비스마르크 15인치 포탄 4발, 오이겐 8인치 포탄 3발이었다. 항해장[53] 등 장교 2명, 하사관 11명이 전사하고 장교 1명, 하사관 및 병 8명이 부상당했다. 수선 아래 명중탄으로 400톤의 침수가 발생했고, 주포도 잇따라 고장났다.
덴마크 해협 해전에서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주포 고장을 겪었다. 첫 일제 사격 직후 A(1번) 포탑이 고장났지만, 세 번째 사격으로 비스마르크 연료 탱크와 보일러실에 피해를 입혔다. 비스마르크에 14인치 주포탄 3발, 프린츠 오이겐에 14인치 주포탄 1발(불발)이 명중했다. 웨일스가 비스마르크에 가한 피해는 예상보다 컸다. 함 중앙부 명중탄 1발은 불발이었으나, 다른 1발은 2번 보일러실 보일러 2기를 파괴, 승무원 5명을 부상시켰다. 함수 좌현 수선부 명중탄(불발)은 연료 탱크 2개를 관통하고 연료 공급 밸브를 파괴, 1,000톤의 연료 손실을 초래하여 작전에 지장을 주었다.
5. 2. 대서양 헌장
HMS Prince of Wales영어는 윈스턴 처칠 수상 일행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너 뉴펀들랜드 래브라도까지 갔다. 1941년 8월 10일부터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회담이 시작되었고, 8월 12일에 HMS Prince of Wales영어 함상에서 대서양 헌장이 체결되었다.[27]
로시스에서 수리를 마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윈스턴 처칠 수상과 함께 비밀리에 열린 대서양 회담(암호명: ''리비에라'')을 위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25] 8월 5일, 루스벨트는 대통령 요트에서 순양함 에 탑승했다. 는 매사추세츠에서 플레센티아 만과 아르젠티아 뉴펀들랜드 자치령으로 이동했으며, 순양함 와 구축함 5척이 호위했다. 8월 7일에 도착했고, 은 대통령이 여전히 탑승한 것처럼 뉴잉글랜드 해역을 순항하면서 미끼 역할을 했다. 8월 9일, 처칠은 구축함 HMS ''립리'', 및 의 호위를 받으며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탑승하여 만에 도착했다.[26] 뉴펀들랜드의 플레센티아 만에서 루스벨트는 구축함 로 이동하여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서 처칠을 만났다. 회담은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에서 진행되었으며, 회담 종료 후 대서양 헌장이 발표되었다.[27]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8월 18일 스캐퍼 플로우로 돌아왔다.[25]
5. 3. 지중해 임무
1941년 9월,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지중해에서 H 기동부대에 배속되었다. 9월 24일, 알반 커티스 중장의 지휘 하에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로드니, 순양함 케냐, 에든버러, 셰필드 및 유리알러스, 그리고 구축함 12척으로 구성된 제2 기동부대의 일원이 되었다. 이 기동부대는 지브롤터에서 몰타로 향하는 보급 수송 작전인 할버드 작전을 호위했다.[28] 9월 27일, 수송대는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을 받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133mm 함포로 여러 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8] 그날 늦게, 이탈리아 해군의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 전함 ''로드니'', 항공모함 아크 로열이 요격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수색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송대는 더 이상의 사고 없이 몰타에 도착했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지브롤터로 돌아간 후, 10월 6일 스카파 플로우에 도착했다.[25]
5. 4. 동양 함대 파견
1941년 10월 25일, 윈스턴 처칠 수상의 강력한 요청으로 일본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파견이 결정되었다.[25] 11월 28일 콜롬보에 도착했고, 12월 2일에는 리펄스와 함께 싱가포르에 도착했다.[25] 토마스 필립스 중장의 지휘 아래 동양함대의 기함이 되었다.[29] HMS 인터미터블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자메이카 근처에서 좌초되어 합류하지 못했다. 대체 항모 HMS 허미스(Hermes)도 속도가 느려 배치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최신 전함인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동양함대에 배치했다. 이는 처칠과 영국군이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HMS 리펄스를 통해 일본군의 남하를 저지하거나 단념시키려는 의도였다. 처칠은 비스마르크 한 척에 영국 해군이 농락당하고, 티르피츠가 전략적 장애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당시 일본 해군이 보유한 나가토급 전함을 제외한 다른 전함들은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고, 나가토급이나 이세급은 미 태평양 함대에 대응해야 했기에,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대항할 전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군의 육상 부대 수송에는 전함 호위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으며(제로센 같은 당시 상식을 뛰어넘는 항공 전력은 고려하지 않음), 이를 조달할 수 없는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 작전 수행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당시 상식으로는 항해 중인 전함이 항공기 공격으로 격침될 수 없다고 여겨졌다.
곤도 노부타케가 지휘하는 일본 제2함대는 공고급 고속전함 2척(공고, 하루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주간 화력으로는 동양함대보다 열세여서 야간 전투를 통해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군은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보다 38cm 포를 가진 HMS 리펄스의 장거리 포격을 경계했다. (실제로는 포의 앙각 차이로 인해 최대 사거리는 HMS 리펄스보다 공고가 더 길었다.)
12월 6일, 일본군 수송선단이 처음 발견되었다. 이틀 뒤, 일본 항공기가 싱가포르를 폭격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대공포가 발사되었지만, 명중탄은 없었고 일본 항공기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런던 해군본부로부터 영국 함대에 적대 행위 개시 명령이 전달되었고, 그날 저녁 필립스 제독은 영국 공군(RAF)의 방어적 공중 엄호를 확신하고 출항했다. 당시 제1해군 함대는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순양전함 ''리펄스'', 구축함 일렉트라, 익스프레스, 테네도스, 뱀파이어로 구성되었다.[31]
출격 목적은 코타바루의 일본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것이었지만, 12월 9일 오후 I-65가 영국 함대를 발견했고, 저녁에는 일본 공중 정찰에 탐지되었다. 이때 영국 공군 전투기 지원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자정에 일본군이 말라야 쿠안탄에 상륙하고 있다는 신호가 수신되었다. 제1해군 함대는 조사를 위해 방향을 돌렸다. 12월 10일 02:11에 함대는 다시 일본 잠수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08:00에 쿠안탄 근처에 도착했지만, 보고된 상륙은 기만 작전이었음을 확인했다.[31]
5. 5. 최후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일본 해군 항공기(96식 육상공격기, 1식 육상공격기)의 뇌격과 폭격을 받고 HMS 리펄스와 함께 말레이 해안에서 침몰했다.[31]
두 번째 공습에서 추진축 부근에 어뢰가 명중하면서 추진축이 뒤틀렸고, 회전하는 터빈 샤프트 끝부분이 격벽을 연타하며 파괴되었다. 이 치명적인 손상으로 대량 침수가 발생했고, 조타 불능 상태에 빠졌다. 발전기가 물에 잠겨 고장나면서 전력도 떨어져 후방에 있는 4기의 13.3cm 연장 양용포와 조타 장치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속력이 저하되고 경사로 인해 양용포 운용이 어려워졌으며, 조타 장치도 사용할 수 없었던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세 번째 공습에서 어뢰를 맞았다. 회피 기동도 대공 사격도 하지 못한 채 500kg 폭탄이 명중했다. 어뢰 6발과 폭탄 1발을 맞은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는 13시 15분에 퇴함 명령이 내려졌고, 13시 20분에 전복되어 침몰했다. 필립스 중장과 리치 함장을 포함한 수백 명이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33]
이전에는 타란토 해전이나 진주만 공습에서 '정박 중'인 전함이 공습으로 침몰했는데, 이는 항구에 정박 중인 상태에서 공습을 받아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말레이 해전에서는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만반의 준비를 한 '행동 중'인 전함이 항공기의 공격만으로 격침되었다. 대공포를 많이 갖춘 신식 전함이라도 항공기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또한 전략적으로도 일본군이 거의 피해 없이 최대 장애물인 동양함대 주력을 궤멸시키고 이 방면 작전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격침 보고를 들은 윈스턴 처칠은 "그 배가!"라며 절규했고, "전쟁 전체에서 이 보고를 빼고 나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준 보고는 없었다."라고 이야기했다.
6. 격침 이후
영국 해군의 최신예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작전 중 적의 공습만으로 격침된 사실은 세계 해군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후 해전의 주역이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진주만 공격과 말레이 해전에 자극을 받아 경항공모함 힌덴부르크의 건조 재개를 명령했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다. 북해의 전함 티르피츠와 샤른호르스트는 영국군의 보급에 큰 장애가 되었다.
침몰 사건은 버크닐 판사가 주재하는 조사 대상이었지만, 함선 침몰의 진정한 원인은 전후 잠수부들이 잔해를 조사한 후에야 밝혀졌다. 해군 건설 국장의 침몰 보고서에 따르면, 함선의 대공포는 어뢰가 투하되기 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고, 승무원들이 대공포 운용에 더 훈련받았다면 공격을 막을 수도 있었다.[35][30]
6. 1. 영향
영국 해군의 최신예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작전 중 적의 공습만으로 격침된 사실은 세계 해군 관계자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이후 해전의 주역이 전함에서 항공기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는 (항공모함이 아닌 육상 기지 항공기에 의해) 공해상에서 해군 항공력만으로 침몰한 최초의 주력 함선이었으며, 이후 해전에서 이 등급의 함선이 담당하는 역할이 줄어들 것임을 예고했다. 하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스 침몰에는 열대 기후의 습한 환경으로 인해 표면 감시 레이다가 작동하지 않아 조기 경보 장치를 사용할 수 없었던 점, 첫 번째 어뢰 공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점, 발전기 손실로 인해 많은 전동 펌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함선의 일부 구역이 암흑 상태에 놓이고 침수 피해를 막으려던 손상 복구반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는 점 등이 요인으로 지적된다.[34]
침몰 사건은 버크닐 판사가 주재하는 조사 대상이었지만, 함선 침몰의 진정한 원인은 전후 잠수부들이 잔해를 조사한 후에야 밝혀졌다. 해군 건설 국장의 침몰 보고서에 따르면, 함선의 대공포는 어뢰가 투하되기 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고, 승무원들이 대공포 운용에 더 훈련받았다면 공격을 막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했다.[35][30]
6. 2. 해저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침몰 지점은 비교적 얕은 바다로, HMS 리펄스 정도는 아니지만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도 비교적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수심에 가라앉아 있어 맑은 날에는 수면에서 선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다. 선체는 완전히 뒤집힌 상태로 가라앉았으며, 해저 조사에서 측면에 크고 작은 4개의 파손된 구멍이 발견되었다. 선수에 파손된 구멍은 완전히 관통되었다. 우현 바깥쪽 스크루축 부분의 파손된 구멍은 500kg 폭탄의 폭발로 인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해저 조사는 두 번 실시되었고, 최근 조사에서는 구멍 중 하나가 토사로 묻혀 관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침몰 당시 탄약고 유폭이 없어 선체에 큰 손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군의 전투 보고에는 어뢰 명중 수가 6발 이상인데, 해저 조사에서 발견된 구멍 수와 차이가 나는 이유는 폭탄의 지근탄을 어뢰로 오인했거나 같은 곳에 명중한 것을 중복해서 계산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비스마르크의 선체 조사에서도 비슷한 보고가 있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는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아닌) 육상 기지 항공기에 의해 공해상에서 해군 항공력만으로 침몰한 최초의 주력 함선이었으며, 이후 해전에서 이 등급의 함선이 담당하는 역할이 줄어들 것임을 예고했다. 하지만 ''프린스 오브 웨일스'' 침몰에 기여한 요인으로, 열대 기후의 습한 환경으로 인해 표면 감시 레이다가 작동하지 않아, 제53기동부대가 가장 강력한 조기 경보 장치 중 하나를 사용할 수 없었고, 첫 번째 어뢰 공격으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 종종 지적된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붕괴를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발전기의 손실로, 이로 인해 많은 전동 펌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추가적인 전기 고장으로 인해 함선의 일부 구역이 완전한 암흑 상태에 놓였고, 침수 피해를 막으려던 손상 복구반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34]
침몰 사건은 버크닐 판사가 주재하는 조사 대상이었지만, 함선 침몰의 진정한 원인은 전후 잠수부들이 잔해를 조사한 후에야 밝혀졌다. 해군 건설 국장의 침몰 보고서에 따르면, 함선의 대공포는 어뢰가 투하되기 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고, 승무원들이 대공포 운용에 더 적절하게 훈련받았다면 공격을 막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했다.[35][30]
잔해는 수심 약 67.97m의 물속 에 거꾸로 놓여 있다.
영국 해군의 화이트 엔사인이 프로펠러 샤프트에 묶인 부표의 줄에 매달려 주기적으로 교체된다. 잔해 현장은 침몰 60주년을 앞둔 2001년 군사 유물 보호법 1986에 따라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선종(ship's bell)은 2002년 영국 국방부의 허가와 Force Z 생존자 협회의 축복을 받아 영국 기술 잠수부에 의해 수동으로 인양되었다. 복원된 선종은 제1 해군 경이자 해군 참모총장인 앨런 웨스트 제독에 의해 리버풀의 머지사이드 해양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이후 선종은 [포츠머스 역사적 조선소]의 로열 해군 국립 박물관으로 옮겨져 Hear My Story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2007년 5월,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의 외부 선체를 전담 조사하는 원정대 'Job 74'가 실시되었다.[32] 이 원정대의 발견은 전 세계 해군 건축가와 해양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피해 성격과 어뢰 공격으로 인한 정확한 위치와 구멍의 수를 상세히 밝혔기 때문이다. 초기 원정대 보고서[32]와 이후 보충 보고서[36][37]에 포함된 내용은 SNAME(선박 건축 및 해양 공학 협회)[38] 해양 법의학 위원회에 의해 분석되었고, 그 결과 "전함의 죽음: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비극적인 손실 재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작성되어 RINA(왕립 해군 건축 협회)[39] 및 IMarEST(해양 공학, 과학 및 기술 연구소)[40] 회원 회의에서 2009년 런던에서 William Garzke 씨가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2011년 뉴욕에서 열린 IMarEST에도 제출되었다. 그러나 2012년에는 잠수부가 고화질 카메라로 포트 외부 프로펠러 샤프트 터널 깊숙이 침투하여 프로펠러 샤프트 전체 길이를 따라 'B' 엔진룸의 후방 벌크헤드까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서, 기존 논문이 업데이트되고 확장되었다(그리고 "전함의 죽음: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손실. 침몰에 대한 해양 법의학 분석"[30]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14년 10월,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스크랩 금속 상인들이 폭발물을 사용하여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보도했다.[41] 지나가는 영국 해군 함선이 잔해 현장에서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이 전통이다.[42] 2023년 5월, 중국 선박인 ''추안 홍 68''이 잔해에서 불법적으로 저방사능강을 긁어모으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43][44] 2024년 7월, Force Z[45]의 잔해뿐만 아니라 아시아 해역의 다른 제2차 세계 대전 난파선도 약탈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선박인 ''추안 홍 68''이 해당 지역에서 다시 '작업'을 했으며, 이후 '서류 위반'으로 말레이시아 당국에 의해 구금되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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