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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 빌헬름 구스틀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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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V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나치 독일의 독일 노동 전선 산하 기쁨을 통한 힘(KdF)에서 사용하기 위해 건조된 여객선이다. 1937년 진수되어 지중해와 노르웨이 피오르드 크루즈를 운항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병원선으로, 이후에는 잠수함 훈련 부대의 병영으로 사용되었다. 1945년 1월 소련군의 공세에 따른 한니발 작전 중 피난민을 수송하다가 소련 잠수함 S-13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여, 역사상 최악의 해난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은 귄터 그라스의 소설 《암게걸음으로》 등 여러 문학 작품과 영화,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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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 빌헬름 구스틀로프 - [배(Ship)]에 관한 문서
개요
폴란드 침공 시 병원선으로 단치히에 파견된 빌헬름 구스틀로프
폴란드 침공 시 병원선으로 단치히에 파견된 빌헬름 구스틀로프
선박 이름빌헬름 구스틀로프
명명 유래빌헬름 구스틀로프
선박 경력
건조블롬 운트 포스
기공1936년 8월 1일
진수1937년 5월 5일
완공1938년 3월 15일
소유주[[File:Deutsche Arbeitsfront.svg|25px]] 독일 노동 전선(Deutsche Arbeitsfront)
운영자함부르크 주트
등록지함부르크, 독일
식별 부호라디오 식별 부호 (DJVZ)
운항 기간1938년–1939년
퇴역1939년 9월 1일
운명크릭스마린에 1939년 9월 1일 징발됨.
비고1939년 9월 1일 크릭스마린에 징발됨
병원선 "D"로 전환됨
1940년 11월 20일부터 부유식 막사로 사용됨
병원선 경력
선박 이름라자레트쉬프 "D" (병원선 "D")
운영자[[File:War Ensign of Germany (1935–1938).svg|25px]] 크릭스마린 (독일 해군)
취득일1939년 9월 1일
운항 기간1939년–1940년
퇴역1940년 11월 20일
비고1940년 11월 20일부터 병원선 색상에서 표준 해군 회색으로 재도장하는 것을 포함하여 떠다니는 막사로 전환됨.
군사 수송선 경력
선박 이름빌헬름 구스틀로프
운영자[[File:War Ensign of Germany (1938–1945).svg|25px]] 크릭스마린
취득일1940년 11월 20일
운항 기간1940년–1945년
퇴역1945년 1월 30일
운명소련 잠수함 S-13에 의해 1945년 1월 30일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함
비고제2 잠수함 훈련 부대의 부유 막사로 사용되다가 한니발 작전의 일환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수송하는 활성 임무로 복귀함.
선박 제원
선박 종류유람선
총 톤수25,484 GRT
길이208.5 미터
23.59 미터
높이56 미터
흘수선6.5 미터
갑판5
동력9,500 마력 (7,084 킬로와트)
추진4 × 8기통 MAN 디젤 엔진
2 × 4날 프로펠러
속도15.5 노트
항속 거리15노트에서 12,000 해리
승객 정원설계상 1,465명의 승객 (489개의 선실)
승무원417명 (유람선)
20명의 장교, 145명의 사병 (해군)
무장3 × 105 mm 대공포
8 × 20 mm 대공 기관포
침몰 위치

2. 건조와 초기 활동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나치당의 로베르트 라이가 이끌던 독일 노동 전선 산하 기쁨을 통한 힘(KdF) 조직의 여객선으로, 독일 함부르크의 블롬 운트 포스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건조 비용은 였으며, 배수량은 25,484톤이었다. 1937년 5월 5일에 진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병원선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1940년에는 U보트 훈련 학교 요원을 위한 호텔선으로 운행되었다. 1945년 1월 30일, 슈체친과 킬을 향해 출항했지만, 소련 잠수함 S13호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32]

2. 1. 선박 제원

블롬 운트 포스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길이는 208.5m, 폭은 23.59m, 총 톤수는 25,484톤이었다. 1937년 5월 5일에 진수되었고,[4] 1938년 3월 15일부터 16일까지 북해에서 해상 시험을 마친 후 소유주에게 인도되었다.[5]

선내에는 2인용 객실 224실, 4인용 객실 233실, 대가족용 객실 3개가 있었지만, 기쁨을 통한 힘이 계급의 격차를 부정했기 때문에 객실은 모두 같은 설계였다. 1등·2등과 같은 등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돌프 히틀러 전용 및 로베르트 라이 전용 스위트룸도 있었지만, 히틀러는 이 배를 이용하지 않았다.

2. 2. 명칭 유래

배 이름은 1936년 2월 4일 유대인 의대생 다비드 프랑크푸르터에게 살해된 스위스 나치당 지도자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4] 원래는 아돌프 히틀러로 명명될 예정이었으나, 히틀러의 희망에 따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로 변경되었다.[4] 이는 유대인에게 살해된 최초의 나치당원의 이름을 이용한 선전이었다.

2. 3. '기쁨을 통한 힘' 유람선

나치당의 로베르트 라이가 이끌던 독일 노동 전선(DAF) 산하 기쁨을 통한 힘(KdF) 조직의 여객선으로 건조되었다. 함부르크에서 를 들여 건조되었으며, 건조 당시 배수량은 25,484톤이었다. '기쁨을 통한 힘'은 독일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휴양 및 여가 활동을 제공했으며, MV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이 조직이 소유한 13척의 배 중 하나였다.[6] 이 배는 지중해 크루즈나 노르웨이 피오르 크루즈 등에 사용되었다.

여객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모형 (1938년 DAF 전시회에서)


배의 이름은 1936년 2월 4일 유태인 의대생 다비드 프랑크푸르터에게 살해된 스위스 나치 지도자 빌헬름 구스틀로프에서 유래한다. 원래는 아돌프 히틀러로 명명될 예정이었으나, 히틀러의 희망에 따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로 변경되었다.

1938년부터 1939년 여름까지 대서양, 지중해, 노르웨이 등지에서 운항했다.[6] 1939년 봄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군단을 귀환시키는 목적으로 스페인에 파견되기도 했다.

선내에는 2인용 객실 224실, 4인용 객실 233실, 대가족용 객실 3개가 있었지만, '기쁨을 통한 힘'이 계급의 격차를 부정했기 때문에 객실 등급은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같은 설계였다. 아돌프 히틀러로베르트 라이 전용의 스위트룸도 있었지만, 히틀러는 이 배를 이용하지 않았다.

2. 4. 초기 주요 활동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독일 노동 전선(Deutsche Arbeitsfront, DAF) 산하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KdF)에서 운용한 유람선이다. 독일 공무원과 노동자들에게 휴양을 제공하고, 제3제국의 이미지를 선전하는 데 사용되었다.[6]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 찬반 투표를 위한 부유 투표소로 사용되었다.[7] 영국 거주 독일 및 오스트리아 시민들을 위해 틸버리에서 3nmi 떨어진 해상에 정박하여 투표가 진행되었고, 1,968표 찬성, 10표 반대로 합병이 가결되었다.[8]

1939년 봄,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 휘하 국가주의자(Nationalist) 세력 승리 후 콘도르 군단을 독일로 수송했다.

1938년 3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총 60회 항해로 80,000명 이상을 수송했다.[5]

3. 군사적 이용

1940년 7월, 나르비크에서 부상당한 독일군 병사들이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를 타고 독일로 이송되고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다양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1940년 11월 20일부터 의료 장비가 제거되고 표준 해군 회색으로 재도색되었다.[10]

이후 연합국의 독일 해안 봉쇄로 인해 독일이 점령하여 '고텐하펜'으로 개명된 그디니아 항구(그단스크 근처)에 주둔한 제2 잠수함 훈련 사단의 유보트 훈련생을 위한 병영선으로 사용되었다. 1942년, 는 독일 타이타닉 재난 영화에서 을 대신하여 사용되었고, 고텐하펜에서 촬영되었으며, 제2 잠수함 훈련 사단은 영화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결국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하니발 작전의 일환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수송하는 데 다시 투입되었다.

3. 1. 병원선 활동



1939년 9월부터 1940년 11월까지 ''빌헬름 구스틀로프''는 공식적으로 '''''라자레트시프 D'''''로 지정되어 병원선으로 사용되었다. 1940년 11월 20일부터 의료 장비가 제거되었고, 흰색 바탕에 녹색 줄무늬가 있는 병원선 색상에서 표준 해군 회색으로 다시 칠해졌다.[10]

3. 2. 해군 훈련선 및 병영

1940년 11월 20일부터 의료 장비가 제거되었고, 흰색 바탕에 녹색 줄무늬가 있는 병원선 색상에서 표준 해군 회색으로 다시 칠해졌다.[10] 연합국의 독일 해안 봉쇄로 인해, 독일이 점령하고 '고텐하펜'(Gotenhafen)으로 개명된 그디니아 항구(그단스크 근처)에 주둔한 제2 잠수함 훈련 사단(2. ''Unterseeboot-Lehrdivision'')의 약 1,000명의 유보트 훈련생을 위한 병영선으로 사용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그곳에서 4년 이상 정박해 있었다.

4. 한니발 작전과 침몰

1945년 1월 21일, 붉은 군대가 동프로이센 공세를 시작하자, 독일은 카를 되니의 주도로 부상병과 민간인 200만 명을 독일 서부로 해상 탈출시키는 "한니발 작전"을 발동했다. 이 작전에는 여객선, 화물선, 군함 등 모든 종류의 배가 동원되었으며,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도 이 작전에 투입되어 1월 30일 피난민을 수용하여 출항했다.

공식 기록에는 6,050명이 승선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10,582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배는 2,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호화 크루즈선이었기 때문에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구명 장비는 1만 명이 넘는 승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구스틀로프호는 어뢰정 1척의 호위를 받으며 항해하던 중, 소련 해군의 S-13에게 발견되어 공격을 받았다. 어뢰 공격으로 배는 침몰했고, 많은 사람들이 차가운 발트해에 빠져 사망했다. 독일 해군이 구조에 나섰지만, 1,216명(독일어판에서는 1,252명)만이 생존했다. 9,343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대다수가 어린이였다. 이는 희생자 수에서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침몰 외에도, 한니발 작전 과정에서 슈토이벤호 (약 4,500명 사망)와 고야호 (약 6,000명 사망)가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등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4. 1. 마지막 항해

1945년 1월 30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소련군의 맹공에 노출된 부상병과 민간인을 독일 서부 바다로 이주시키는 카를 되니의 해상 피난 작전 (한니발 작전)의 일환으로 고텐하펜(그디니아)을 출항하여 독일 본토()를 향해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다.[11][12]

공식 기록상으로는 제2 잠수함 훈련 부대의 해군 군인 918명, 승무원 173명, 해군 여성 보조 부대 373명, 부상병 162명, 난민 4424명 등 총 6,050명이 승선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12] 그러나 실제로는 출항 후 승선을 간청하는 난민들을 태운 소형 선박들로부터 최소 2,000명 이상의 난민을 추가로 승선시켜, 총 10,000명이 넘는 인원이 탑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생존한 전 승무원 하인츠 쇤(Heinz Schön)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승객은 10,582명이었고, 이 중 8,956명이 난민이었으며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였다.[12] 원래 2000명 정도를 수용하도록 설계된 호화 크루즈선이었기에 많은 승객을 태울 수 있었지만, 구명 용구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위한 충분한 양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구스틀로프호는 고텐하펜을 출항하여 난민을 가득 실은 객선 ''한자''와 2척의 어뢰정과 함께 출발했다. 그러나 ''한자''와 어뢰정 1척은 중간에 문제가 발생하여 항해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구스틀로프호는 어뢰정 1척(뢰베)만의 호위를 받으며 항해를 계속했다.[17]

구스틀로프호에는 민간인 3명, 군인 1명으로 총 4명의 선장 자격자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최적의 항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해군 승선자 대표였던 빌헬름 잔(Wilhelm Zahn) 소령은 잠수함이 활동하기 어려운 연안의 얕은 바다를 등화 관제 하에 항해할 것을 제안했으나, 최고령(67세) 선장인 프리드리히 페터젠(Friedrich Petersen)은 승객 과다 적재로 배의 흘수가 깊어진 것을 우려했다. 결국 악천후로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점을 고려하여 수심이 깊은 항로를 선택했다.

18시경 독일 해군으로부터 구스틀로프호와 반대 방향으로 항해하는 소해정 부대의 존재에 대한 통신 연락을 받은 페터젠 선장은 소해정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잔 소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색과 녹색의 항해등을 점등했다. 이 때문에 구스틀로프호는 어둠 속에서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당시 해당 해역에 소해정 함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신 내용은 모종의 원인에 의한 오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구스틀로프호는 21시경 포메라니아 지방 연안에서 30km 떨어진 해상에서 소련 해군 잠수함 S-13에게 발견되었다. 뢰베에 장비된 탐침기는 혹한으로 인해 동결되어 작동하지 않았고, 독일 측은 S-13을 탐지할 수 없었다. 약 15분 후, 약 700m 떨어진 S-13에서 발사된 4발의 어뢰 중 3발이 구스틀로프호의 좌현에 명중했다.

선내에는 공황 상태가 발생하여 많은 난민들이 구명 보트와 구명 조끼를 구하려고 몰려들었고, 구명 장비 일부는 혼란 속에서 사라졌다. 무전기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잔은 발광 신호로 뢰베에 구조를 요청했다.

어뢰 공격을 받은 지 약 1시간 후인 22시 15분경, 구스틀로프호는 침몰했고, 많은 사람들이 얼어붙은 바다에 빠졌다. 한겨울 발트해의 수온은 보통 4°C 정도였지만, 이날은 특히 추위가 심한 날로 기온이 -10°C에서 -16°C까지 떨어졌고, 해상에는 얼음이 떠다녔다.

뢰베가 472명을 구조했고, 침몰 직후 달려온 어뢰정 T-36이 564명을 구조했다. 소해정 M-341이 37명, 어뢰 연습정 TS-II가 98명, 화물선 괴팅겐이 28명을 구조했다. 다음 날 31일 아침, 난민 수송 중이던 화물선 고텐란트가 9명을 바다에서 구조했고, 훈련 어뢰 회수정 TF-19가 7명, 감시정 VP-1703이 유아 1명을 구조했다.

침몰에서의 생존자는 1,216명(독일어판에서는 1,252명)으로 추정되지만, 이는 하인츠 쇤의 조사 결과에 따른 것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희생자는 9,343명(대부분이 일반 시민이었고, 절반 이상이 어린이)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승선 인원이 불분명하여 실제 사망자 수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사건 직후에는 사망자 5,000명, 생존자 964명으로 알려졌다.

첫 번째 어뢰 공격 1분 후, 배의 통로는 승객들의 비명과 흥분으로 가득 찼다. 선내 수영장이었던 곳에 있던 한 생존자는 양 손목을 잃은 여성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갑판과 계단에서 짓눌렸고, 많은 사람들이 어둡고 얼어붙은 발트해로 뛰어들었다. 또 다른 목격담에 따르면, 아이들은 어른에게 매달렸고, 여성은 유아를 지키려 했지만, 잇따라 밀려오는 파도가 그들을 갈라놓아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사라졌다. 또한, 어른용 구명 조끼를 착용한 어린아이들은 다리가 떠올라 머리가 수면 아래로 잠겨 익사했다고 한다. 게다가, 가족과 함께 승선했던 군인이 절망한 나머지 가족을 사살하는 장면도 목격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은 희생자 수에서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되었다.

4. 2. 항해 중 논란과 결정

1945년 1월 30일, MV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어뢰정 두 척과 함께 단치히(오늘날 폴란드 그단스크)를 출발했다. 그러나 다른 여객선과 어뢰정 한 척은 중간에 문제가 생겨 항해를 계속하지 못했고, 구스틀로프호는 어뢰정 한 척의 호위만 받으며 항해를 계속했다.

구스틀로프호에는 민간인 선장 3명과 군인 선장 1명, 총 4명의 선장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안전한 항로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해군 소좌 빌헬름 잔은 해안에 가까운 얕은 바다에서 배의 불을 끄고 항해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67세의 선장 프리드리히 페테르센은 승선자가 많아 배가 깊은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결국 깊은 바다를 항해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후, 독일 해군으로부터 기뢰 부설함이 호위를 위해 오고 있다는 무전을 받았다. 호위함이 어둠 속에서 아군 선박을 인식할 수 있도록 배의 빨강과 초록의 항해등을 켜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구스틀로프호는 소련 해군 잠수함에 쉽게 노출되었다.

4. 3. 소련 잠수함의 공격

1945년 1월 30일 낮 12시 30분,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난민을 가득 태운 채 어뢰정 1척의 호위를 받으며 단치히(오늘날 폴란드 그단스크)를 출항했다. 그러나 기뢰가 제거된 것으로 알려진 깊은 바다를 항해하던 중, 의문의 무선 메시지를 받고 항해등을 켜게 되면서 소련 잠수함에 노출되기 쉬워졌다.[17]

S-13의 함장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를 발견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오후 9시경, 마리네스코는 4발의 어뢰를 발사했고, 그 중 3발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좌현에 명중했다.[19] 첫 번째 어뢰는 선수에, 두 번째 어뢰는 해군 여성 보조 병력이 있던 배수된 수영장에, 세 번째 어뢰는 기관실에 명중하여 배의 동력과 통신을 파괴했다.[19]

어뢰 공격으로 인해 배 안은 혼란에 빠졌고, 많은 사람들이 구명 보트와 구명 조끼를 찾으려 했으나, 정원의 반도 준비되지 않은 구명 장비는 금방 동이 났다.[15] 당시 발트해의 수온은 -10°C에서 -16°C까지 내려가는 매우 추운 날씨였고, 해상에는 얼음이 떠다니고 있었다.[20]

어뢰 공격을 받은 지 1시간 10분 후인 오후 10시 10분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침몰했다. 많은 사람들이 차가운 물에서 허우적거렸고, 독일 해군은 군함을 투입하여 구조 작업을 벌였다. 생존자는 1216명(독일어판에서는 1252명)이었으며,[15] 9343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대다수가 어린이였다. 이는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되었다.

4. 4. 침몰과 구조

1945년 1월 30일, 카를 되니가 소련군의 맹공에 노출된 부상병과 민간인 200만 명을 독일 서부 바다로 이주시키는 해상 피난 작전(한니발 작전)을 시작하면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도 피난민을 수용하여 출항했다.[11] 공식 기록에는 6,050명이 승선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10,582명이 탑승하고 있었다.[12] 승객 중에는 게슈타포 요원, 토트 기관 구성원, 나치 관리와 그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13][14]

1945년 1월 30일 낮 12시 30분, 구스틀로프호는 어뢰정 1척의 호위를 받으며 고텐하펜을 출발했다. 그러나 기뢰 제거함 호송대와 마주칠 것을 우려하여 항해등을 켜면서 소련 잠수함 S-13에 노출되기 쉬워졌다.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에 S-13이 쏜 어뢰 3발이 구스틀로프호에 명중했다. 많은 난민들이 구명보트나 구명조끼를 구하려고 했지만, 정원의 반도 준비하지 못한 구명 장비는 금방 동이 났다. 이 시기 발트해의 수온은 보통 4°C 정도였지만, 이날은 특히 추워서 수온이 -10°C에서 -16°C까지 내려가 해상에는 얼음이 떠다녔다.

어뢰 공격을 받은 지 1시간 10분 후인 오후 10시 10분쯤, 구스틀로프호는 침몰했다. 많은 사람들이 차가운 물에서 허우적거렸고, 독일 해군은 구조에 나섰지만 1,216명(독일어판에서는 1,252명)만이 생존했다.[15]

어뢰 공격으로 직접 사망하거나, 바다에 빠져 사망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총 9,343명이 사망했는데, 이 중 대다수가 어린이였다. 이는 희생자 수에서 최악의 해난사고로 기록되었다.[22]

침몰 이후, 1945년 2월 10일에는 여객선 슈토이벤이, 1945년 4월 16일에는 여객선 고야가 각각 소련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슈토이벤호에서는 약 4,500명, 고야호에서는 약 6,000명이 희생되었다. 1945년 4월 초까지 독일 해군은 동부에서 독일 서부로 250만 명의 사람들을 피난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33,000명이 사망했다.

5. 침몰 이후

소련 잠수함 S-13의 함장 알렉산드르 마린에스코는 를 발견하고 어뢰 4발을 발사하여 침몰시켰다. 이 공격으로 배에 타고 있던 10,600명 이상의 사람들 중 9,6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2] 이 사건은 역사상 단일 선박 침몰 사고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24]

독일군은 어뢰정 등을 통해 1,252명을 구조했으나, 생존자 중 13명은 나중에 사망했다.[15] 침몰 원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1945년 나치 독일의 붕괴로 책임 소재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1] 하인츠 쇤의 연구에 따르면,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로 인한 사망자는 9,343명으로 추산된다.[22]

귄터 그라스는 2003년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이 사건이 전쟁 범죄는 아니지만, 전쟁의 끔찍한 결과라고 언급했다.[28]

선명침몰 년도국가희생자 수(명)
고야1945년독일|도이칠란트de~6,000
빌헬름 구스틀로프1945년독일|도이칠란트de~9,343
카프 아르코나1945년독일|도이칠란트de~4,500
슈토이벤1945년독일|도이칠란트de~4,500
틸베크1945년독일|도이칠란트de~2,800
장아1948년중화민국~2,750
도냐 파스1987년필리핀~2,000
타이타닉1912년영국~1,503
루시타니아1915년영국~1,198
류덴마루1943년일본~1,481
쓰시마마루1944년일본~1,476
도야마루1954년일본~1,430


5. 1. 논란과 전쟁범죄 여부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침몰은 단일 선박 침몰로 인한 해상 역사상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낳았지만, 이것이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25] 약 1,000명의 독일 해군 장교와 사병이 탑승해 있었고,[26] 대공포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정당한 군사 목표였다는 주장이 있다. 독일의 킬 해사법 연구소는 이 배가 군사 시설로 이용되었고, 해군 잠수함 요원도 탑승하고 있었으며, 무장한 상태로 항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당한 군사 목표가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면, 피난민을 태운 난민선이었으므로 침몰시킨 것은 명백한 범죄라는 주장도 있다. 작가 귄터 그라스는 2003년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비극을 전쟁 범죄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끔찍했지만 전쟁의 결과였고, 전쟁의 끔찍한 결과였습니다."라고 언급하며, 이 사건이 전쟁 범죄는 아니지만 끔찍한 비극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28]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격침시킨 잠수함 S-13의 함장이었던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Маринеско,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ru 소령은, 당시에는 평소 술버릇이 나쁘다는 이유로 꺼려졌고, 여러 논란 때문에 "영웅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며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는 받지 못하고 적기 훈장만 수여되었다.[27] 1960년에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지만, 1963년에 암으로 사망했다.[27]

5. 2.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에 대한 평가

알렉산드르 마리네스코는 소련 잠수함 S-13의 함장으로, 를 격침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이 작전 직전 음주 문제와 사창가 출입 문제로 군사 재판에 직면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27] 소련 정부는 그를 "영웅이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여, 적기 훈장을 수여하는 데 그쳤다. 1945년 10월, 마리네스코는 중위로 강등되어 불명예 제대했다.[27]

1960년, 마리네스코는 3급 함장으로 복귀하여 연금을 받게 되었고, 1963년에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함장에게 주어지는 의식을 치렀으나, 3주 후 암으로 사망했다.[27]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의해 사후 소련 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27]

대한민국 내 진보 진영에서는 마리네스코의 격침을 나치 독일에 대한 정당한 응징으로 평가하며, 그의 업적을 기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5. 3. 잔해

에 위치하며, 우에바 동쪽 약 19nmi 해상, 브와디스와보보 서쪽에 있다(구 Leba와 Großendorf). 폴란드 항해 지도에는 "장애물 73번"으로 표기되었고,[29] 전쟁 묘지로 분류되었다. 발트해 해저에 있는 가장 큰 난파선 중 하나이며, 잃어버린 호박 방을 찾는 보물 사냥꾼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전쟁 묘지 내 재산, 난파선 자체 및 주변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그디니아에 있는 폴란드 해양 사무소는 난파선 반경 500m 이내의 잠수를 금지하고 있다.[30]

2006년, 난파선에서 인양되어 폴란드 해산물 식당 장식으로 사용되었던 종이 베를린에서 열린 개인 자금 지원 "강제 경로" 전시회에 대여되었다.[31]

1988년에 인양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현창, 2000년 독일 Damp에 있는 박물관선 에 전시되어 있다.


라보 해군 기념관에 전시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모형

6. 문화적 묘사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침몰은 여러 문학 작품과 영화, 다큐멘터리에서 다뤄졌다.

종류제목내용
소설암게걸음으로귄터 그라스의 소설로,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과 같은 역사적 요소와 허구적 요소를 결합했다.[28]
소설소금의 바다루타 세페티스의 청소년 역사 소설로, 동프로이센 대피와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 당시 네 명의 가상 인물의 삶을 그렸다. 2017년 카네기 메달 수상작이다.
자서전I'll Be Damned에릭 브래든의 자서전으로, 그의 아버지가 너무 붐빈다는 이유로 마지막 순간에 가족이 배에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사건을 다룬다.
소설침묵의 반대편필립 커의 소설로,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인물을 결합하여 MV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 사건을 플롯에 포함시켰다.
소설Med Ilden I ryggen1999년에 쓰여진 덴마크 책으로, 허구의 등장인물들이 침몰 당시 빌헬름 구스틀로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소설폴라 시프트서문에서 나치 손에서 과학자를 밀반출하려는 레지스탕스 투사가 탑승한 상태에서 배가 침몰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고텐하펜에 어둠이 내렸다프랑크 비스바르 감독의 영화로, 1960년에 개봉되었다.[27]
텔레비전 영화Die Gustloff|디 구스틀로프de요제프 빌스마이어 감독의 2부작 텔레비전 영화로, 2008년에 제작되었다.[27]
다큐멘터리킬러 잠수함히스토리 미스터리의 에피소드(1999년)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을 다루었다.[25]
다큐멘터리Die große Flucht. Der Untergang der Gustloff2001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로, "대탈출.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침몰"을 의미한다.
다큐멘터리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침몰바다 사냥꾼(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에피소드(2002년)로, 해당 사건을 다루었다.
다큐멘터리빌헬름 구스틀로프: 세계 최악의 해상 재난미해결 역사(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에피소드(2003년)로, 해당 사건을 다루었다.
다큐멘터리발트해의 유령들2006년에 제작되었다.
다큐멘터리히틀러의 초호화 여객선 침몰2008년 독일 미니시리즈의 자료를 사용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2008년)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을 다루었다.
다큐멘터리Triumph und Tragödie der Wilhelm Gustloff2012년에 제작되었으며,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침몰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었다.


6. 1. 문학


  • 귄터 그라스의 소설 암게걸음으로(원제: Im Krebsgang, 영어 번역본 제목: ''Crabwalk'')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과 같은 역사적 요소와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 및 사건과 같은 허구적 요소를 결합했다.[28]
  • 루타 세페티스의 소설 소금의 바다(원제: Salt to the Sea)는 동프로이센 대피와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 당시 네 명의 가상 인물의 삶을 그린 청소년 역사 소설로, 카네기 메달 수상작(2017)이다.
  • 에릭 브래든의 자서전 ''I'll Be Damned''(2017년 하퍼콜린스 출판)는 젊은 시절 그의 아버지가 너무 붐빈다는 이유로 마지막 순간에 가족이 배에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사건을 다룬다.
  • 필립 커의 소설 ''침묵의 반대편''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인물을 결합하여 MV ''빌헬름 구스틀로프'' 침몰 사건을 플롯에 포함시키고 있다. (런던: 퀘르쿠스 출판)
  • 1999년에 쓰여진 덴마크 책 "Med Ilden I ryggen"은 허구의 등장인물들이 침몰 당시 빌헬름 구스틀로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 폴라 시프트''의 서문은 나치 손에서 과학자를 밀반출하려는 레지스탕스 투사가 탑승한 상태에서 배가 침몰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6. 2. 영화


  • 프랑크 비스바르 감독의 《고텐하펜에 어둠이 내렸다》(원제: ''Nacht fiel über Gotenhafen'')가 1960년에 개봉되었다.[27]
  • 요제프 빌스마이어 감독의 2부작 텔레비전 영화인 Die Gustloff|디 구스틀로프de가 2008년에 제작되었다.[27]

6. 3. 다큐멘터리


  • 히스토리 미스터리의 에피소드 "킬러 잠수함"(1999년)에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을 다루었다.[25]
  • 2001년에는 ''Die große Flucht. Der Untergang der Gustloff''(대탈출.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침몰)가 제작되었다.
  • 바다 사냥꾼(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에피소드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침몰"(2002년)에서 해당 사건을 다루었다.
  • 미해결 역사(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에피소드 "빌헬름 구스틀로프: 세계 최악의 해상 재난"(2003년)에서 해당 사건을 다루었다.
  • 2006년에는 ''발트해의 유령들''이 제작되었다.
  • 2008년 독일 미니시리즈의 자료를 사용한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초호화 여객선 침몰''(2008년)에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을 다루었다.
  • ''Triumph und Tragödie der Wilhelm Gustloff''(2012년)에서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침몰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었다.

참조

[1] 서적 Kriegsmarine Coastal Forces Osprey Publishing 2009
[2] 방송 Wilhelm Gustloff: World's Deadliest Sea Disasters The Discovery Channel 2003-03-26
[3] 간행물 The Forgotten Maritime Tragedy That Was 6 Times Deadlier Than the Titanic https://time.com/419[...] 2018-06-01
[4] 웹사이트 Did You Know? http://www.wilhelmgu[...] 2014-02-15
[5] 웹사이트 Voyages on board the Wilhelm Gustloff & Robert Ley http://www.wilhelmgu[...] Wilhelm Gustloff Museum 2019-03-14
[6] 서적 Wartime Disasters at Sea Patrick Stephens Limited 1997
[7] 간행물 North Sea Rescuer 2018-11
[8] 웹사이트 London Polling Station: Annexation of Austria http://www.wilhelmgu[...] Wilhelm Gustloff Museum 2019-03-14
[9] 웹사이트 The 'Official' Maiden Voyage of the Wilhelm Gustloff April 21st, 1938 – May 6th, 1938 http://www.wilhelmgu[...] Wilhelm Gustloff Museum 2019-03-17
[10] 웹사이트 2nd U-Boat Training Division http://www.wilhelmgu[...] 2019-11-12
[11] 서적 Submarines of the Russian and Soviet navies, 1718–1990 Naval Institute Press 1991
[12] 웹사이트 A Memorial to the Wilhelm Gustloff https://www.feldgrau[...]
[13] 서적 Death in the Baltic: The World War II Sinking of the Wilhelm Gustloff Palgrave Macmillan 2012
[14] 서적 Druga Wojna Światowa na Bałtyku
[15] 웹사이트 Sinking http://www.wilhelmgu[...] 2019-11-12
[16] 간행물 The Forgotten Maritime Tragedy Deadlier Than the Titanic https://time.com/419[...] 2018-11-21
[17] 웹사이트 Löwe Torpedoboot 1940–1959 Sleipner Class http://www.german-na[...]
[18] 웹사이트 The Avalon Project – Laws of War: Adaptation to Maritime War of the Principles of the Geneva Convention (Hague X); 18 October 1907 http://www.yale.edu/[...] 2008-05-12
[19] 웹사이트 The Sinking of the Wilhelm Gustloff https://www.national[...] 2024-12-18
[20] 뉴스 Death in the Baltic http://www.historyto[...] History Today 2013-06-19
[21] 웹사이트 Zahn http://www.wilhelmgu[...] 2019-11-12
[22] 웹사이트 A Memorial to the Wilhelm Gustloff https://www.feldgrau[...]
[23] 웹사이트 maritime EXODUS http://fseg.gre.ac.u[...] Fire Safety Engineering Group, University of Greenwich
[24] 문서 Michael Leja
[25] 웹사이트 Maritime Disasters of World War II http://members.iinet[...] 2008-01-27
[26] 웹사이트 Потопленный миф https://web.archive.[...] 2008-03-12
[27] 웹사이트 Translation of Marinesko page from www.warheroes.ru https://translate.go[...]
[28] 뉴스 Still Intrigued by History's Shadows; Günter Grass Worries About the Effects of War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03-04-08
[29] 문서 Irwin J. Kappes
[30] 웹사이트 ZARZĄDZENIE PORZĄDKOWE NR 9 DYREKTORA URZĘDU MORSKIEGO W GDYNI z dnia 23 maja 2006 r. w sprawie zakazu nurkowania na wrakach statków-mogiłach wojennych https://web.archive.[...] 2020-01-30
[31] 뉴스 Poles riled by Berlin exhibition https://web.archive.[...] The New York Times 2006-08-30
[32] 서적 ナチスの財宝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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