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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모리타니아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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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MS 모리타니아 (1906년)는 1906년 진수된 큐나드 라인의 대서양 횡단 여객선이다. 독일의 경쟁 선박 등장과 미국의 해운사 인수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조되었으며, 당시 최신 기술인 증기 터빈을 사용하여 블루 리본 상을 수상하며 속도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수송선과 병원선으로 활약했고, 전후에는 민간 운송 및 크루즈선으로 활동하다가 1934년 퇴역 후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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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모리타니아 (1906년) - [배(Ship)]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07년 타인 강 위의 모리타니아 호
1907년 타인 강 위의 모리타니아 호
이름모리타니아
명명 유래모리타니아
건조1904년
진수1906년 9월 20일, 앤 이네스-커, 록스버그 공작부인에 의해
취득1907년 11월 11일
처분1935년 로시스, 스코틀랜드에서 선박 해체
무선 호출 부호MGA (1934년까지)
별칭Mauretania, Mauritania, Maury
선박 경력
선주1906–1934: 퀴나드 라인
1934–1935: 퀴나드 화이트 스타 라인
국적영국
운영자[[File:House flag of the Cunard Line.svg|border|20px]] 퀴나드 라인
선적항리버풀
항로리버풀퀸스타운–뉴욕 (1907–1919)
사우샘프턴–셰르부르–뉴욕 (1919–1934)
발주1904년
건조 조선소스완 헌터, 노섬벌랜드, 잉글랜드
조선소 번호735
처녀 항해1907년 11월 16일
취역1907–1934년
퇴역1934년 9월
선박 제원
선박 종류해양 여객선
총 톤수,
배수량44,610 톤
갑판 수8
동력직동 파슨스 증기 터빈 (고압 2기, 저압 2기)
(출시 시 공칭), (기록 주행 시), 이후 1928년에 (1929년 7월)로 증가
추진4축 스크류
속력‐ 설계 운항 속도
수용량총 2,165명의 승객:
1등석 563명
2등석 464명
3등석 1,138명
승무원802명
총 인원2967명
무장12 × QF 6인치 해군포 (장착 준비는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장착되지는 않음)
참고 사항1907–1910년 세계 최대 선박. RMS 루시타니아 및 RMS 아퀴타니아의 자매선.
전쟁 발생 시 보조 순양함으로 전환하기 위해 6인치 포를 장착할 수 있도록 갑판에 장착대가 설계됨.

2. 건조 배경 및 경쟁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대서양 항로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은 매우 치열했다. 특히 독일의 해운 회사들은 빠른 속도의 신형 여객선들을 잇달아 선보이며 기존의 강자였던 영국의 해운 회사들을 위협했다. 1897년, 독일 노르트도이처 로이드(North German Lloyd) 소속의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호는 빠른 속도로 대서양을 횡단하여, 당시 큐나드 라인(Cunard Line)의 캄파니아호와 루카니아호가 보유하고 있던 블루 리본을 빼앗아 왔다. 이는 영국 해운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독일은 이후에도 빠르고 큰 4연돌 슈퍼라이너들을 건조하며 대서양 항로에서의 우위를 굳혀갔다.

이러한 독일의 기술적 공세와 더불어, 미국의 거대 자본 역시 영국 해운업계를 압박해왔다. 미국의 금융가 J. P. 모건(J. P. Morgan)은 여러 해운 회사들을 인수하여 국제 상선 회사(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 IMMC)라는 거대 해운 기업 연합을 만들려 했다. 이 과정에서 큐나드 라인의 오랜 경쟁자였던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마저 IMMC에 인수되면서, 큐나드 라인은 회사의 생존은 물론 영국의 해상 자존심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3] 당시 큐나드 라인과 화이트 스타 라인은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화이트 스타 라인이 올림픽급 세 자매선(올림픽, 타이타닉, 브리타닉)의 건조를 계획하자, 큐나드 라인 역시 이에 대응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큐나드 라인은 단순한 기업 차원을 넘어 영국의 해상 패권을 되찾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3][4] 큐나드 라인은 J.P. 모건의 인수 제안을 거절하고 독자 경영을 유지하기로 했으며, 독일의 속도 경쟁에 맞서기 위해 영국 정부와 손을 잡았다. 1902년에서 1903년에 걸쳐 큐나드 라인과 영국 정부는 최소 24노트의 운항 속도를 낼 수 있는 두 척의 거대하고 빠른 신형 여객선, 즉 루시타니아와 모리타니아를 건조하기로 합의했다.[3] 영국 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으며, 유사시 이 선박들을 무장 상선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5] 이러한 배경 속에서 모리타니아가 탄생하게 되었다.

2. 1. 독일 제국의 부상과 영국의 대응

건조 중인 ''모리타니아''의 3엽 프로펠러가 드라이 도크에 있는 모습


1897년, 독일의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는 22노트(41km/h)의 속도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배가 되었고, 큐나드 라인의 캄파니아와 루카니아가 보유하고 있던 블루 리본을 빼앗았다. 이로써 독일은 대서양 항로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으며, 1906년까지 5척의 4연돌 슈퍼라이너를 운항하게 되었는데, 그중 4척은 노르트도이처 로이드 소속이었다.

같은 시기, 미국의 금융가 J. P. 모건이 설립한 국제 상선 회사(IMMC)는 대서양 해운 무역을 독점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으며, 이미 영국의 주요 경쟁사 중 하나인 화이트 스타 라인을 인수한 상태였다.[3]

이러한 독일의 기술적 우위와 미국 자본의 공세라는 이중의 위협에 직면하여, 큐나드 라인은 단순히 회사의 생존을 넘어 영국의 해상 패권을 되찾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3][4] 1902년과 1903년에 걸쳐 큐나드 라인과 영국 정부는 최소 24노트의 운항 속도를 보장하는 두 척의 새로운 슈퍼라이너, 즉 RMS 루시타니아모리타니아를 건조하기로 합의했다.[3]

이 계획을 위해 영국 정부는 선박 건조 자금으로 260만파운드을 연 2.75%의 이자율로 20년 동안 상환하는 조건으로 대출해주었다. 여기에는 국가 비상사태 시 이 선박들을 무장 상선으로 전환하여 징발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5] 또한, 영국 해군성은 이 두 선박을 왕립 해군 예비선으로 지정하고 연간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는데, 이는 우편물 운송 계약에 따른 지원과는 별개였다. 이 보조금 덕분에 두 선박은 영국의 블루 엔사인을 게양할 수 있는 특권도 얻게 되었다.[5][6][7]

2. 2. J.P. 모건의 해운 독점 시도

1897년, 독일의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가 22노트(시속 41km)를 기록하며 블루 리본 상을 수상했다. 이로 인해 기존에 캄파니아와 루카니아로 블루 리본 상을 보유하고 있던 큐나드 라인은 세계 최고 속력 여객선이라는 타이틀을 독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자산가 존 모건(J. P. Morgan)은 대서양 정기선을 운항하는 여러 해운 기업을 인수하여 국제 상선 해운 회사(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Co.)라는 거대 기업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인수 대상에는 큐나드 라인의 주요 경쟁사였던 화이트 스타 라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독점 시도와 독일과의 경쟁에 직면하여 큐나드 라인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모건의 인수 제안을 거절하고 독립 경영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1903년, 큐나드 라인은 영국 정부와 새로운 대형 고속 여객선 2척을 건조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것이 바로 루시타니아모리타니아였다. 이 선박들은 최고 속력 24노트 이상을 목표로 했으며, 영국 정부는 건조 비용으로 260만파운드를 지원했다. 대신, 국가 비상사태 시 이 배들을 무장 상선으로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지원금에 대해서는 연 2.75%의 이자를 붙여 20년 안에 상환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후 정부 지원금은 더욱 증액되었다.

2. 3. 영국 정부의 지원과 큐나드 라인의 대응



1897년, 독일의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는 22kn의 속도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배가 되었다. 이 배는 기존에 큐나드 라인 소속의 캄파니아와 루카니아가 보유하고 있던 대서양 횡단 최고 속도 기록인 블루 리본을 빼앗았다. 이후 독일은 대서양 항로를 주도하게 되었고, 1906년까지 총 5척의 4연돌 슈퍼라이너를 운항했으며, 이 중 4척은 노르트도이처 로이드 소속이었다.

같은 시기, 미국의 금융가 J. P. 모건이 설립한 국제 상선 회사는 대서양 해운 무역을 독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미 큐나드 라인의 주요 경쟁사였던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을 인수한 상태였다.[3]

이러한 독일의 기술적 우위와 미국의 자본력에 의한 위협에 직면하여, 큐나드 라인은 회사의 생존을 넘어 영국의 해상 운송 우위를 되찾기 위해 대응에 나섰다.[3][4] 1902년, 큐나드 라인은 영국 정부와 협력하여 최소 24kn의 운항 속도를 보장하는 두 척의 새로운 대형 여객선, 즉 루시타니아와 모리타니아를 건조하기로 합의했다.[3]

영국 정부는 이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선박 건조 자금으로 260만파운드를 연 2.75%의 이자율로 20년 동안 상환하는 조건으로 대출해주었다. 이 계약에는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두 선박을 무장 상선으로 전환하여 군에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5] 또한, 영국 해군성은 이 선박들을 로열 네이비 예비 상선으로 지정하고, 기존의 우편 운송 계약에 더해 연간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지원 덕분에 루시타니아와 모리타니아는 블루 엔사인을 게양할 수 있는 특권도 부여받았다.[5][6][7]

3. 설계 및 건조

'''모리타니아'''호 단면도


'''모리타니아'''호는 20세기 초반 치열했던 대서양 항로 여객선 경쟁 속에서 큐나드 라인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건조한 두 척의 대형 고속 여객선 중 하나이다. 자매선은 루시타니아호이다. 당시 독일 선박들이 블루 리본 상을 차지하며 속도 경쟁에서 앞서나가자, 영국 해운업의 자존심 회복과 경쟁력 확보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건조가 추진되었다.

설계는 큐나드 라인의 수석 해군 건축가였던 레너드 페스켓이 담당했다. 페스켓은 당초 왕복 엔진을 사용하는 3개의 굴뚝을 가진 선박을 구상했으나, 큐나드 라인이 찰스 앨저넌 파슨스가 개발한 혁신적인 증기 터빈 기술을 채택하기로 결정하면서 설계가 변경되었다. 이로 인해 '''모리타니아'''호는 4개의 굴뚝을 가진 상징적인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8]

건조는 잉글랜드 타인사이드에 위치한 스완 헌터 조선소에서 이루어졌다. 1904년 8월 기공식을 시작으로 건조에 들어가, 1906년 9월 20일 록스버그 공작 부인에 의해 성공적으로 진수되었다.[10] 진수 당시 '''모리타니아'''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움직이는 구조물로 기록되었다.[11] 전통에 따라 진수식 때는 선체를 밝은 회색으로 칠했으나, 처녀 항해 이후에는 검은색으로 다시 칠해졌다.[9]

'''모리타니아'''호는 자매선 '''루시타니아'''호와 기본적인 설계는 공유했지만, 몇 가지 차이점을 가졌다. '''모리타니아'''호가 '''루시타니아'''호보다 전체 길이가 약 1.52m 더 길었고 총 톤수도 약간 더 컸다.[11][12] 또한, 갑판 위의 통풍구 모양이 달랐으며, 터빈 구조의 차이로 인해 '''모리타니아'''호가 약간 더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었다.[12] 두 선박 모두 직접 구동 방식의 증기 터빈을 사용하여 블루 리본 상을 획득한 유일한 선박들이었다.[13]

선박의 내부는 건축가 해럴드 페토가 설계를 맡아 에드워드 시대의 호화로운 양식을 반영하여 꾸며졌다. 1등석 공용 공간에는 28가지 종류의 고급 목재와 대리석, 태피스트리 등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프랑수아 1세 양식으로 장식된 다층 구조의 식당과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중앙 계단 옆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설이었다.[16][17][18]

3. 1. 레너드 페스켓의 설계와 터빈 엔진 채택

1897년, 독일의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가 22노트(41km/h)를 기록하며 블루 리본 상을 수상하자, 기존에 「캄파니아」와 「루카니아」로 블루 리본 상을 보유하고 있던 큐나드 라인은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자산가 존 모건이 대서양 항로 해운 기업 인수를 추진하며 큐나드 라인의 경쟁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까지 인수 대상으로 거론되자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이에 큐나드 라인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 기업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1903년, 큐나드 라인은 영국 정부와 계약을 맺고 24노트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는 두 척의 새로운 대형 여객선 건조에 합의했으며, 이것이 '''모리타니아'''호와 자매선 루시타니아호 건조 계획의 시작이었다.[8] 영국 정부는 건조 비용으로 260만파운드를 지원하는 대신, 국가 비상사태 시 이 선박들을 무장 상선으로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1906년 진수 전 타인사이드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모리타니아'''호


'''모리타니아'''호와 '''루시타니아'''호는 모두 큐나드 해운 소속의 해군 건축가 레너드 페스켓이 설계했다. 페스켓은 정부 계약 조건인 온화한 날씨에서 24노트의 운항 속도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를 진행했다. 1902년 페스켓이 처음 구상한 설계는 왕복 엔진을 동력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굴뚝이 3개인 형태였다.

그러나 큐나드 해운은 당시 찰스 알저논 파슨스가 개발한 혁신적인 신기술인 증기 터빈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페스켓은 설계를 수정하여 네 번째 굴뚝을 추가했고, 이는 '''모리타니아'''호의 상징적인 외관을 완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수정된 설계를 바탕으로 1904년 8월 스완 헌터 조선소에서 선체 건조(기공식)가 시작되었다.[8]

속력 테스트를 하는 '''모리타니아'''호


'''모리타니아'''호에 증기 터빈을 장착한 것은 당시 파슨스 터빈 기술이 적용된 가장 큰 사례였다.[14] '''모리타니아'''호와 '''루시타니아'''호는 감속 기어 없이 터빈이 직접 프로펠러 축을 구동하는 직접 구동 방식을 사용한 유일한 블루 리본 수상 선박들이었다 (이후 대형 여객선들은 대부분 감속 기어 터빈을 사용했다).[13] 기술적으로 '''모리타니아'''호는 '''루시타니아'''호보다 앞쪽 터빈에 2개의 추가 터빈 블레이드 단계를 가지고 있어 약간 더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었다.[12]

하지만 속도 시험(시운전) 중에 터빈 엔진은 고속에서 심각한 선체 진동을 유발했다.[15] 이는 '''루시타니아'''호에서도 발생했으나 비교적 간단한 선체 보강으로 해결된 반면, 출력이 더 높았던 '''모리타니아'''호의 경우 동일한 조치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재검증 결과 선미 구조의 강도 부족이 원인으로 밝혀져, 여러 차례에 걸친 보강 작업과 프로펠러 재설계를 통해 운항 시작 전에 문제를 해결했다.[15]

1906년 9월 20일, 진수 후의 '''모리타니아'''호


'''모리타니아'''호와 '''루시타니아'''호의 주요 외관상 차이점은 통풍구 모양 ('''모리타니아'''는 카울형, '''루시타니아'''는 드럼형)과 선체 길이 ('''모리타니아'''가 약 1.52m 더 길었음) 등이었다.[12] '''모리타니아'''호는 1906년 9월 20일, 록스버그 공작 부인에 의해 진수되었다.[10] 진수 당시 '''모리타니아'''호는 그때까지 건조된 가장 큰 움직이는 구조물이었다.[11]

3. 2. 스완 헌터와 존 브라운 조선소의 건조



1897년, 독일의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가 22kn를 기록하며 블루 리본 상을 수상하자, 기존 보유 선박인 캄파니아와 루카니아를 통해 대서양 최고 속력 기록을 가지고 있던 큐나드 라인은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자산가 J. P. 모건이 대서양 항로의 해운 기업들을 인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여기에는 큐나드 라인의 경쟁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큐나드 라인은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적인 기업으로 남기로 결정했다. 1903년, 큐나드 라인은 영국 정부와 계약을 맺고 최소 24kn의 속력을 낼 수 있는 두 척의 새로운 대형 여객선 건조에 합의했으며, 이것이 '''모리타니아'''호와 자매선 루시타니아호의 건조 계획으로 이어졌다. 영국 정부는 건조 비용으로 260만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했으며, 국가 비상사태 시 이 선박들을 무장 상선으로 징발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20년 내 원금과 2.75%의 이자를 상환하는 조건을 달았다.[8]

'''모리타니아'''호와 '''루시타니아'''호는 모두 큐나드 라인의 해군 건축가 레너드 페스켓이 설계했다. 조선소인 스완 헌터와 존 브라운은 페스켓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선박 건조를 진행했다. 페스켓의 초기 설계(1902년)는 당시 일반적이던 왕복 엔진을 동력으로 상정하여 3개의 굴뚝을 가진 모습이었으나, 큐나드 라인이 찰스 앨저넌 파슨스가 개발한 혁신적인 증기 터빈 기술을 채택하기로 결정하면서 설계가 변경되었다. 이로 인해 페스켓은 선박의 동력 효율을 높이고 상징적인 외관을 갖추기 위해 네 번째 굴뚝을 추가했다. 선박 건조는 1904년 8월 기공식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8] 전통에 따라 선체는 진수식 사진 촬영을 위해 밝은 회색으로 칠해졌는데, 이는 흑백 사진에서 선박의 윤곽을 뚜렷하게 보여주기 위한 조치였다. 처녀 항해 이후에는 선체를 검은색으로 다시 칠했다.[9]

1906년 9월 20일, '''모리타니아'''호의 공식 진수 기념 행사


1906년 9월 20일, '''모리타니아'''호는 록스버그 공작 부인에 의해 진수되었다.[10] 진수 당시 '''모리타니아'''호는 그때까지 만들어진 가장 큰 움직이는 구조물이었으며,[11] 총 톤수 면에서도 자매선 '''루시타니아'''호보다 약간 더 컸다. 두 선박의 주요 외관상 차이점은 '''모리타니아'''호가 '''루시타니아'''호보다 약 1.52m 더 길었고, 갑판 위의 통풍구 모양이 달랐다는 점이다 ('''모리타니아'''는 카울형, '''루시타니아'''는 드럼형).[12] 또한 '''모리타니아'''호는 전방 터빈에 2개의 추가 터빈 블레이드 단계를 장착하여 '''루시타니아'''호보다 약간 더 빠른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모리타니아'''호와 '''루시타니아'''호는 블루 리본 상을 수상한 유일한 직접 구동 증기 터빈 추진 선박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건조된 터빈 선박들은 대부분 감속 기어를 사용했다.[13] '''모리타니아'''호의 증기 터빈 채택은 당시로서는 찰스 앨저넌 파슨스의 신기술을 가장 대규모로 적용한 사례였다.[14]

건조 과정 중 속도 시험에서 '''모리타니아'''호의 터빈 엔진은 고속 운항 시 상당한 선체 진동을 유발했다. '''루시타니아'''호는 비교적 간단한 보강 공사로 이 문제를 해결했지만, '''모리타니아'''호는 더 강력한 엔진 출력 때문에 동일한 조치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정밀 검사 결과 선미 구조의 강도 부족이 원인으로 밝혀졌고, 여러 차례의 보강 설계와 공사를 거친 후에야 진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15]

'''모리타니아'''호의 내부는 에드워드 시대의 호화로운 취향을 반영하여 설계되었다. 실내 장식은 건축가 해럴드 페토가 담당했으며, 런던의 유명 디자인 회사인 Ch. Mellier & Sons와 Turner and Lord가 참여했다.[16][17] 공용 공간은 28가지 종류의 고급 목재, 대리석, 태피스트리 등으로 꾸며졌으며, 흡연실에는 팔각형 테이블과 같은 맞춤 가구가 배치되었다.[16][18] 1등석 공용 공간의 정교한 목재 패널은 300명의 팔레스타인 장인이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으며 실제로는 조선소나 하청업체에서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9] 1등석 식당은 프랑수아 1세 양식으로 장식되었고, 여러 층 높이의 공간을 스트로 오크 패널로 마감했으며, 거대한 돔형 채광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었다.[18]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설이었던 엘리베이터 여러 대가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중앙 계단 옆에 설치되었는데, 가벼운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격자판을 사용한 점이 특징이었다.[18] 보트 갑판에는 베란다 카페가 마련되어 승객들이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음료를 즐길 수 있도록 했으나, 실용성이 떨어져 운영 1년 만에 폐쇄되었다.[16]

3. 3. 모리타니아와 루시타니아의 차이점

'''모리타니아'''호와 자매선 '''루시타니아'''호는 모두 큐나드 라인의 해군 건축가 레너드 페스켓이 설계했다.[8] 두 선박은 외관상 유사했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크기 면에서 '''모리타니아'''호가 '''루시타니아'''호보다 총 톤수가 약간 더 컸으며,[11] 길이도 약 1.52m 더 길었다.[12] 눈에 띄는 외관상의 차이점으로는 통풍구의 형태가 달랐는데, '''모리타니아'''호는 카울(cowl) 형태의 통풍구를 가졌고, '''루시타니아'''호는 드럼통 모양의 통풍구를 사용했다. 또한 프로머네이드 데크의 형태도 서로 달랐다.

성능 면에서는 '''모리타니아'''호가 앞쪽 증기 터빈에 2개의 추가 터빈 블레이드 단계를 가지고 있어 '''루시타니아'''호보다 약간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12] 또한, '''모리타니아'''호의 전방 터빈 자체가 '''루시타니아'''의 것보다 컸다. 두 선박은 블루 리본 상을 수상한 선박 중 유일하게 직접 구동 증기 터빈을 사용했다.[13]

시운전 과정에서 두 선박 모두 고속 운항 시 선체 진동 문제가 발생했다. '''루시타니아'''호는 비교적 간단한 선체 보강 공사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모리타니아'''호는 더 강력한 엔진 출력 때문에 동일한 조치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선미 부분의 구조 강도 부족이 확인되어, 선미 구조 보강 설계와 공사를 여러 차례 거친 후에야 진동 문제가 해결되었다.[15]

4. 초기 경력 (1907-1914)

1897년, 독일의 여객선 카이저 빌헬름 데어 그로세가 블루 리본을 획득하자, 큐나드 라인은 속도 경쟁에서의 우위를 되찾기 위해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루시타니아와 함께 ''모리타니아''를 건조했다. 증기 터빈을 동력원으로 채택한 ''모리타니아''는 1906년 진수되었다.

1907년 11월 16일, John Pritchard|존 프리처드eng 선장의 지휘 아래 리버풀에서 처녀 항해를 시작했다. 초기에는 악천후와 사고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곧 대서양 동쪽 횡단 기록을 세웠고 1909년 9월에는 서쪽 횡단 블루 리본을 획득하여 이후 20년간 이 기록을 보유했다.[1] 이 시기 ''모리타니아''는 뉴욕항에서의 충돌 사고(1907년), 머지 강에서의 표류 사고(1910년 또는 1911년) 등 여러 사건을 겪기도 했다.[20][21][22]

1912년 타이타닉 참사 당시에는 아일랜드 퀸스타운에 정박 중이었으며, 타이타닉의 화물 목록 일부를 운송하고 있었다.[23] 1913년에는 조지 5세 국왕 부부의 방문을 받으며 명성을 더했고, 1914년 1월에는 리버풀에서 정비 중 가스 폭발 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으나[24] 수리 후 운항을 재개했다.[25] 이러한 초기 경력을 통해 ''모리타니아''는 당대 최고의 대서양 횡단 여객선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4. 1. 처녀 항해와 블루 리본 획득



1907년 말 스켈모를리의 항해 측량 마일에서 캐슬 웨미스와 스테이션 시계탑을 지나가는 ''모리타니아''


''모리타니아''는 John Pritchard|존 프리처드eng 선장의 지휘 아래 1907년 11월 16일 리버풀을 출발하여 처녀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거친 폭풍으로 예비 닻이 풀리는 사고를 겪으며 블루 리본 획득에는 실패했고, 상부 구조물에도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귀항 항해(1907년 11월 30일 ~ 12월 5일)에서는 평균 속도 23.69kn를 기록하며 대서양 동쪽 횡단 최고 기록을 세웠다.[1]

1907년 12월 23일, ''모리타니아''는 뉴욕 노스 리버의 피어 54에 정박 중, 강풍을 동반한 스콜로 인해 계류 기둥이 무너지면서 부분적으로 표류했다. 이 과정에서 선수가 돌면서 석탄 운반 및 재 제거 작업을 하던 여러 바지선과 충돌했다. 이 사고로 바지선 ''론''과 ''톰히켄'', 보트 ''유레카 32''와 ''유레카 36''이 손상되었고, 바지선 ''엘리스 P. 로저스''는 침몰했다. 이후 소송에서 큐나드 라인은 손해 배상 책임을 졌다.[20][21]

1909년 9월, ''모리타니아''는 마침내 서쪽 횡단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기록하며 블루 리본을 획득했고, 이 기록은 20년 이상 유지되었다.[1]

1913년 ''모리타니아'' 3등석 티켓


이후에도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다. 1910년 12월, 머지 강에 정박해 있던 ''모리타니아''는 계류 로프가 풀리면서 표류하여 손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예정되었던 뉴욕크리스마스 특별 항해가 취소되었다. 큐나드 라인은 급히 뉴욕에서 막 돌아온 James Charles|제임스 찰스eng 선장이 지휘하는 자매선 루시타니아로 해당 항해를 대체했다. ''루시타니아''는 성공적으로 크리스마스 횡단을 마쳐 승객들을 뉴욕으로 수송했다.[22]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모리타니아''는 리버풀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서쪽 항해 중 퀸스타운(아일랜드)에 정박해 있었다. 당시 ''모리타니아''는 등기 우편으로 보내진 ''타이타닉''호의 화물 목록을 운송하고 있었으며, 배에는 큐나드 라인의 회장 A. A. 부스가 탑승하고 있어 ''타이타닉''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을 조직하기도 했다.[23] 1913년 봄, ''모리타니아''를 이용한 서쪽 횡단 대서양 여정의 3등석 요금은 약 17USD였다.

1913년 7월에는 조지 5세 국왕과 메리 여왕이 당시 영국에서 가장 빠른 상선이었던 ''모리타니아''를 특별히 관람하며 배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1914년 1월 26일, 리버풀에서 연례 개조 작업을 받던 중 증기 터빈 작업 구역에서 가스통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4명이 사망하고[24] 6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선체 손상은 경미했으며, 새로운 글래드스톤 건선거에서 수리를 마친 후 2개월 만에 운항을 재개했다.[25]

4. 2. 사고와 사건



모리타니아는 존 프리처드 선장의 지휘 아래 1907년 11월 16일 리버풀을 출항하여 처녀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항해 중 거친 폭풍으로 예비 닻이 풀리는 바람에 대서양 횡단 속도 기록인 블루 리본 획득에는 실패했고, 상부 구조물에도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귀항 항해(1907년 11월 30일 ~ 12월 5일)에서는 평균 속도 23.69 노트(시속 43.87km)를 기록하며 대서양을 동쪽으로 가장 빠르게 횡단한 기록을 세웠다.[1]

1907년 12월 23일, 모리타니아는 뉴욕 노스 리버의 피어 54에 정박해 있었는데, 강한 바람을 동반한 스콜이 덮치면서 부두의 계류 기둥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모리타니아는 부분적으로 표류하게 되었고, 선수가 돌면서 석탄을 싣거나 재를 치우고 있던 여러 바지선과 충돌했다. 이 사고로 바지선 '론'과 '톰히켄', 보트 '유레카 32'와 '유레카 36'이 손상을 입었으며, 바지선 '엘리스 P. 로저스'는 침몰하여 분실되었다. 이후 진행된 소송에서 커나드사는 이 사고로 인한 손해 배상 책임을 지게 되었다.[20][21]

1909년 9월, 모리타니아는 서쪽 방향 대서양 횡단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세우며 블루 리본을 획득했고, 이 기록은 20년 이상 깨지지 않았다.[1]

1911년 12월(일부 기록에는 1910년 12월로 언급됨), 모리타니아는 머지 강에 정박해 있다가 계류용 밧줄이 풀리면서 표류하는 사고를 겪었다. 이 사고로 선체가 손상되어 예정되어 있던 크리스마스 특별 뉴욕 항해가 취소되었다. 커나드사는 급히 루시타니아호를 대체 투입하기로 결정했고, 당시 뉴욕에서 막 돌아온 제임스 찰스 경 선장이 루시타니아호의 지휘를 맡아 크리스마스 횡단을 완료했다. 이로써 모리타니아호에 예약했던 승객들은 루시타니아호를 타고 뉴욕으로 갈 수 있었다.[22]

1912년 4월 10일,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모리타니아호는 리버풀에서 뉴욕으로 향하는 서쪽 항해 중 아일랜드퀸스타운에 정박해 있었다. 모리타니아호는 등기 우편으로 보내진 타이타닉호의 화물 목록을 운송하고 있었다. 당시 배에는 커나드 라인의 회장 A. A. 부스가 탑승하고 있었으며, 그는 타이타닉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을 조직하기도 했다.[23]

1914년 1월 26일, 모리타니아호가 리버풀에서 연례 개조 작업을 받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 증기 터빈 중 하나를 정비하던 과정에서 가스통이 폭발하여 작업자 4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을 입었다.[24] 다행히 배 자체의 손상은 경미했으며, 새로운 글래드스톤 건선거에서 수리를 마친 후 2개월 만에 다시 운항을 시작할 수 있었다.[25]

5.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9)

1914년 8월 4일, 영국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모리타니아'''는 잠시 안전을 위해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로 이동했다. 초기에 무장 상선으로의 징발이 검토되었으나 크기와 연료 문제로 취소되었고[27], 민간 서비스로 복귀했으나 승객 부족으로 1915년 5월까지 리버풀에 정박했다. 이는 루시타니아가 독일 제국 해군의 잠수함에 격침된 시점이었다.

이후 '''모리타니아'''는 본격적으로 전쟁에 동원되어, 처음에는 갈리폴리 전역을 위한 수송선으로 활동했다.[27] 빠른 속력 덕분에 독일 U보트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연합군 사상자가 증가하자 1916년 초까지 아키타니아, 브리타닉과 함께 병원선으로 임무를 변경하여 부상병을 수송하고 치료했다.[28]

1916년 말부터는 다시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캐나다 군대를 수송했으며[27], 1917년 미국의 참전 이후에는 미군 병력 수송에도 투입되어 종전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해군성에서는 비공식적으로 HMS '''튜버로즈'''(Tuberose)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29], 큐나드 라인은 공식 명칭을 변경하지 않았다.[27] 1918년에는 적 잠수함의 조준을 교란하기 위해 노먼 윌킨슨이 고안한 현혹 위장을 적용받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리타니아'''는 1919년 중반에 다시 평시의 큐나드 라인 도색으로 복원되었다.

5. 1. 무장 상선 검토와 민간 서비스 재개

1914년 8월 4일, 영국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자, '''모리타니아'''는 안전을 위해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로 항해하여 8월 6일 도착했다. 곧이어 영국 정부는 '''모리타니아'''와 자매선 아키타니아를 무장 상선으로 징발하는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두 선박 모두 거대한 크기와 막대한 연료 소비량 때문에 군사적 임무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어[27], 8월 11일 민간 서비스로 복귀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대서양 횡단 승객이 급감하면서 '''모리타니아'''는 1915년 5월까지 리버풀에 정박해 있어야 했다. 이는 5월 7일 루시타니아가 독일 제국 해군의 잠수함에 격침된 시점이었다.

병원선으로 활동하던 HMHS ''모리타니아'', 1915년경


'''모리타니아'''는 침몰한 루시타니아를 대신하여 대서양 항로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영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제1차 세계 대전갈리폴리 전역에 투입될 영국 군인들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27] '''모리타니아'''는 빠른 속력과 숙련된 승무원 덕분에 독일 U보트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수송선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당시 다른 선박들처럼 어두운 회색으로 도색되었고 굴뚝은 검은색이었다.

연합군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모리타니아'''는 아키타니아, 화이트 스타 라인의 브리타닉과 함께 병원선으로 전환되어 부상병을 수송하고 치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는 1916년 1월 25일까지 이어졌다. 병원선으로 활동할 당시 선체는 흰색으로 칠해졌고, 굴뚝은 황갈색이었으며, 선체에는 녹십자 표식이 그려졌다. 또한 양 현에는 조명이 설치된 표지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8]

현혹 위장을 한 ''모리타니아''


병원선 임무를 마친 지 7개월 후인 1916년 말, '''모리타니아'''는 캐나다 정부의 요청으로 다시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핼리팩스에서 리버풀까지 캐나다 군대를 수송했다.[27]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에 참전하자, '''모리타니아'''는 수천 명의 미군 병력을 유럽으로 수송하는 임무도 맡았으며, 이 역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쟁 중 해군성에서는 이 배를 HMS '''튜버로즈'''(Tuberose)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29], 큐나드 라인은 공식적으로 선박의 이름을 변경하지는 않았다.[27] 1918년 3월부터 '''모리타니아'''는 노먼 윌킨슨이 고안한 현혹 위장(Dazzle camouflage)을 적용받았다. 이는 적 잠수함의 조준을 교란하기 위한 위장 도색 기법이었다. 첫 번째 위장은 3월 초에 적용되었으며, 올리브색, 검은색, 회색, 파란색을 이용한 곡선 무늬가 특징이었다. 두 번째 위장은 7월에 적용되었는데, 여러 짙은 파란색과 회색, 일부 검은색을 사용한 더 기하학적인 무늬였다. 전쟁이 끝난 후, '''모리타니아'''는 다시 칙칙한 회색으로 칠해졌다가 1919년 중반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큐나드 라인의 평시 도색으로 복원되었다.

5. 2. 군대 수송선과 병원선으로의 징발

1914년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자, '''모리타니아'''는 안전을 위해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로 이동하여 8월 6일에 도착했다. 영국 정부는 '''모리타니아'''와 자매선 아퀴타니아를 무장 상선으로 징발하려 했으나, 두 선박 모두 거대한 크기와 막대한 연료 소모량 때문에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어[27] 8월 11일 민간 서비스로 복귀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는 승객 수가 급감하면서 '''모리타니아'''는 1915년 5월 7일까지 리버풀에 정박해 있었는데, 이날은 루시타니아가 독일 제국 해군의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날이었다.

'''모리타니아'''는 루시타니아 침몰 후 대서양 횡단 노선에서 루시타니아를 대체할 예정이었지만, 영국 정부의 명령으로 갈리폴리 전역에 투입될 영국 군인을 수송하는 수송선으로 징발되었다.[27] 빠른 속도와 숙련된 승무원 덕분에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수송선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당시 다른 선박들처럼 검은색 굴뚝과 함께 어두운 회색으로 도색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 사상자가 급증하자, '''모리타니아'''는 '''아퀴타니아''' 및 화이트 스타 라인의 '''브리타닉'''과 함께 병원선으로 전환되어 1916년 1월 25일까지 부상병을 치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병원선으로 활동할 때는 선체를 흰색으로 칠하고, 굴뚝은 황갈색으로 칠했으며, 선체에는 커다란 붉은 십자 문양과 함께 양 현에 조명 표지판을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8] 7개월 후, '''모리타니아'''는 다시 수송선 임무로 돌아갔다. 1916년캐나다 정부에 의해 징발되어 핼리팩스에서 리버풀로 캐나다 군대를 수송했다.[27]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모리타니아'''의 전쟁 임무는 계속되었고, 수천 명의 미군 병력을 수송했다. 해군성에서는 이 배를 HMS '''튜버로즈'''(HMS Tuberose)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29], 큐나드 라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선박의 공식 명칭을 변경하지 않았다.[27] 1918년 3월부터 '''모리타니아'''는 노먼 윌킨슨이 1917년에 적함의 조준을 교란하기 위해 고안한 현혹 위장을 두 차례 적용받았다. 1918년 3월 초에 적용된 첫 번째 위장은 곡선 형태로, 올리브색, 검은색, 회색, 파란색의 넓은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두 번째 위장은 더 기하학적인 디자인으로, 일반적으로 '현혹(dazzle)'이라 불리는 형태였으며 1918년 7월까지 적용되었다. 이 위장은 주로 여러 가지 짙은 파란색과 회색, 일부 검은색을 사용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리타니아'''는 다시 칙칙한 회색으로 칠해졌다가 1919년 중반에 완전한 큐나드 라인의 도색으로 복원되었다.

5. 3. 현혹 위장(Dazzle Camouflage)



1차 세계 대전 중 군인 수송 임무를 수행하던 '''모리타니아'''는 미국이 1917년 참전한 이후 미군 수송에도 투입되었다.[27] 1918년 3월부터는 적 함선의 조준을 교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현혹 위장(Dazzle Camouflage)을 적용받았다. 이 위장 방식은 노먼 윌킨슨이 1917년에 고안한 것이었다.[27]

'''모리타니아'''에는 두 가지 형태의 현혹 위장이 적용되었다. 1918년 3월 초에 적용된 첫 번째 위장은 곡선적인 형태로, 올리브색 바탕에 검은색, 회색, 파란색을 넓게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1918년 7월까지는 더 기하학적인 형태의 두 번째 위장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여러 톤의 짙은 파란색과 회색, 일부 검은색을 주로 사용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현혹 위장'의 모습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모리타니아'''는 잠시 칙칙한 회색 도색으로 운항하다가 1919년 중반까지 원래의 큐나드 라인 도색으로 완전히 복원되었다.[27]

6. 전후 경력 (1919-1934)

1919년 9월 21일, ''모리타니아''호는 민간 여객 운송 서비스를 재개하여 사우스햄튼과 뉴욕을 잇는 노선에 투입되었다. 바쁜 운항 일정 속에서 1921년 E 데크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커나드 라인은 선박의 정비를 결정했다.[30] 타인의 조선소에서 보일러를 석탄 대신 중유를 사용하도록 개조하여[31] 1922년 3월 운항을 다시 시작했으나, 이전과 같은 속도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연료 효율은 개선되었지만(24시간당 석탄 약 907185.00kg 대신 중유 약 680388.75kg 소모), 전쟁 전의 최고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1923년에는 사우스햄튼에서 터빈 정비를 포함한 대규모 개조 공사에 들어갔으나, 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중단되어 프랑스 셰르부르에서 작업을 마무리했다.[32] 1924년 5월 대서양 운항에 복귀한[30] ''모리타니아''호는 이후 몇 년간 성공적으로 운항하며 인기를 유지했다.

1928년에는 새로운 실내 디자인으로 개조되었지만, 이듬해인 1929년 독일의 신형 정기선 브레멘호(평균 28노트)에게 22년간 보유했던 블루 리본 상을 내주었다.[33] 커나드 라인은 ''모리타니아''호에게 기록 탈환의 기회를 주었으나, 엔진 출력을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으로 더 진보한 ''브레멘''호의 속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33] 같은 해, ''모리타니아''호는 로빈스 리프 등대 근처에서 기차 페리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고 손상은 신속히 수리되었다.

1930년, 대공황의 여파와 새로운 경쟁 선박들의 등장으로 대서양 횡단 정기선 수요가 감소하자, ''모리타니아''호는 주로 뉴욕캐나다 핼리팩스의 피어 21을 오가는 6일짜리 크루즈선으로 운항하게 되었다.[34][35] 1930년 11월 19일에는 뉴펀들랜드 케이프 레이스 남동쪽 대서양 400nmi 해상에서 침몰한 스웨덴 화물선 ''오비디아''(Ovidia)호의 승무원 28명과 선상 고양이를 구조하기도 했다.[36][37] 1932년에는 크루즈 운항에 맞춰 선체를 흰색으로 칠했다.

1934년, 커나드 라인이 재정난에 빠진 경쟁사 화이트 스타 라인과 합병하면서 큐나드-화이트 스타 라인이 출범했다. 합병 회사는 보유 선박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노후화된 ''모리타니아''호를 올림픽호, 호메릭호 등과 함께 잉여 선박으로 분류했고, 결국 운항을 중단하고 퇴역 절차를 밟게 되었다.

6. 1. 민간 운항 재개와 개조

''모리타니아''호, 1925년경, 퀴라소에서


선박의 보트 데크에 위치한 베란다 카페, 1927년경


''모리타니아''호는 1919년 9월 21일 민간 운송 서비스로 복귀하여 사우스햄튼-뉴욕 노선에서 운행되었다.

1922년, 계측 마일에서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모리타니아''호


바쁜 운항 일정으로 인해 1920년에 예정된 대대적인 정비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1921년, 커나드 라인은 E 데크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선박 운항을 중단하고 정비를 결정했다.[30] 건조되었던 타인 조선소로 돌아가 보일러를 유류(油類) 연료 방식으로 개조하여[31] 1922년 3월에 다시 운항을 시작했다. 커나드 사는 ''모리타니아''호가 정규 대서양 운행 속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발견했다.

1928년, 오토크롬 뤼미에르 공정으로 촬영된 ''모리타니아''호.


보일러 개조 후 운행 속도가 개선되었고, 연료 소모량도 이전의 석탄 약 907185.00kg에서 24시간당 석유 약 680388.75kg으로 줄었지만, 전쟁 전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1922년 한 번의 항해에서는 평균 19노트의 속도만 기록했다.

이 시기에 선박의 산책로가 임시로 폐쇄되었고, 굴뚝이 타원형으로 개조되어 루시타니아호와 거의 동일하게 보이게 되었다. 커나드 사는 선박의 한때 혁신적이었던 터빈에 대한 정비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30] 1923년, 사우스햄튼에서 대규모 개조 공사가 시작되어 ''모리타니아''호의 터빈이 해체되었다. 정비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을 때 조선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여 작업이 중단되었고, 커나드 사는 선박을 프랑스 셰르부르로 예인하여 다른 조선소에서 작업을 완료하도록 했다.[32] 1924년 5월, 선박은 대서양 운항을 재개했다.[30]

1933년, 사우스햄튼에 있는 ''모리타니아''호


1934년경, 푼샬만의 ''모리타니아''호


이후 몇 년 동안 커나드 사는 ''모리타니아''호에 가해진 변화가 성공적이었음을 확인했고, 이 기간 동안 선박은 매우 인기 있었다. 1928년, ''모리타니아''호는 새로운 실내 디자인으로 개조되었으나, 이듬해 독일의 정기선 브레멘호(28노트)에게 속도 기록을 빼앗겼다.[33] 8월 27일, 커나드 사는 '대양의 회색 사냥개(Greyhound of the Ocean)'로 불렸던 노후한 ''모리타니아''호에게 새로운 독일 선박으로부터 기록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허용했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레멘''호의 기록에는 약간 미치지 못했다. 운항이 중단되었고 엔진은 더 높은 운행 속도를 내기 위해 더 많은 출력을 내도록 조정되었지만, 그래도 충분하지 않았다. ''브레멘''호는 노후화된 커나드 선박보다 훨씬 강력하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새로운 세대의 대양 정기선을 대표했다.[33] ''모리타니아''호가 독일의 경쟁자를 이기지는 못했지만, 이는 수십 년간의 설계 발전 격차 때문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도에서 자신의 기존 동/서향 항로 최고 속도 기록은 모두 경신했다. 1929년, ''모리타니아''호는 로빈스 리프 등대 근처에서 기차 페리와 충돌했으나, 사상자는 없었으며 손상은 신속하게 수리되었다.

1930년, 대공황과 대서양 노선의 새로운 경쟁자들 때문에 ''모리타니아''호는 뉴욕에서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의 피어 21까지 6일간 운항하는 전용 크루즈선이 되었다.[34][35] 1930년 11월 19일, ''모리타니아''호는 뉴펀들랜드의 케이프 레이스 남동쪽 대서양 400nmi 해상에서 침몰한 스웨덴 화물선 오비디아호의 승무원 28명과 선상 고양이를 구조했다.[36][37] 1932년에는 크루즈 운항을 위해 선체를 흰색으로 칠했다. 1934년 커나드 라인과 화이트 스타 라인이 합병하면서, ''모리타니아''호는 올림픽호, 매제스틱호 등 다른 노후 대형 여객선들과 함께 잉여 선박으로 분류되어 운항이 중단되었다.

6. 2. 속도 경쟁과 한계



1919년 9월 21일, "모리타니아"는 다시 여객선으로 운항을 재개했다. 항해 일정이 매우 바빠 1920년에 예정되었던 대대적인 정비를 받지 못했으나, 1921년 E 데크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큐나드 라인은 운항을 중단하고 정비를 결정했다.[30] "모리타니아"는 건조되었던 타인의 조선소로 이동하여 보일러를 석탄 대신 중유를 사용하도록 개조했고,[31] 1922년 3월에 운항을 재개했다. 그러나 큐나드 라인은 "모리타니아"가 이전의 정규 대서양 운항 속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발견했다. 연료 효율은 개선되었으나(이전 석탄 약 907185.00kg 대비 24시간당 약 680388.75kg의 석유 소모), 전쟁 전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1922년 한 항해에서는 평균 19노트의 속도만 기록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선박의 산책로가 임시 폐쇄되었고, 굴뚝 모양이 변경되었다. 큐나드 라인은 선박의 터빈에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30] 1923년, 사우샘프턴에서 대규모 개조 공사가 시작되어 터빈이 해체되었다. 그러나 작업 도중 조선소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여 작업이 중단되자, 큐나드 라인은 선박을 프랑스 셰르부르로 예인하여 다른 조선소에서 작업을 완료했다.[32] 1924년 5월, "모리타니아"는 대서양 운항을 재개했다.[30]

이후 몇 년간 "모리타니아"는 성공적으로 운항하며 인기를 끌었다. 1928년에는 내부 디자인이 새롭게 개조되었으나, 이듬해인 1929년 독일 여객선 브레멘호가 평균 속도 28노트를 기록하며 "모리타니아"가 22년간 보유했던 블루 리본 상을 가져갔다.[33] 8월 27일, 큐나드 라인은 "모리타니아"에게 기록 탈환을 위한 마지막 시도를 허용했지만, 엔진 출력을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브레멘"호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브레멘"호는 기술적으로 더 진보된 차세대 대양 정기선이었기 때문이다.[33] 비록 "모리타니아"가 독일 경쟁자를 이기지는 못했지만, 수십 년의 설계 개선 끝에 약간의 차이로 패배했으며, 동쪽과 서쪽 항로 모두에서 자신의 이전 속도 기록은 경신했다. 1929년, "모리타니아"는 로빈스 리프 등대 근처에서 기차 연락선과 충돌했으나, 사상자 없이 손상만 신속히 수리되었다.

1930년, 대공황의 여파와 새로운 경쟁 선박들의 등장으로 "모리타니아"는 뉴욕에서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의 피어 21까지 운항하는 6일짜리 크루즈선으로 주로 활동하게 되었다.[34][35] 1930년 11월 19일, "모리타니아"는 뉴펀들랜드의 케이프 레이스 남동쪽 대서양에서 침몰한 스웨덴 화물선 ''오비디아''의 승무원 28명과 선상 고양이를 구조했다.[36][37] 1932년에는 크루즈 운항을 위해 선체가 흰색으로 칠해졌다. 1934년 큐나드 라인과 화이트 스타 라인이 합병하면서, "모리타니아"는 올림픽호, 호메릭호 등 다른 노후 선박들과 함께 잉여 선박으로 간주되어 운항이 중단되었다.

6. 3. 크루즈 선박으로의 전환



1930년, 대공황의 영향과 대서양 항로에서의 새로운 경쟁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모리타니아''호는 전용 크루즈선으로 전환되었다. 주로 뉴욕에서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할리팩스의 피어 21까지 운항하는 6일짜리 크루즈를 담당했다.[34][35]

같은 해 11월 19일, ''모리타니아''호는 뉴펀들랜드의 케이프 레이스 남동쪽 400nmi 해상에서 침몰한 스웨덴 화물선 SS 오비디아(Ovidia)의 승무원 28명과 선상 고양이를 구조하는 인도주의적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36][37]

1932년에는 크루즈선으로서의 이미지를 위해 선체를 흰색으로 칠했다. 그러나 1934년 커나드 라인과 화이트 스타 라인이 합병하면서 ''모리타니아''호의 운명은 달라졌다. 합병된 회사는 올림픽호, 호메릭호 등 다른 노후 대형 여객선들과 함께 ''모리타니아''호를 잉여 선박으로 간주했고, 결국 운항을 중단하게 되었다.

6. 4. 큐나드-화이트 스타 라인 합병과 퇴역



1930년, 대공황의 여파와 대서양 항로의 경쟁 심화로 인해 ''모리타니아''호는 크루즈선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주로 뉴욕에서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의 피어 21까지 운항하는 6일 일정의 크루즈를 담당했다.[34][35] 같은 해 11월 19일, ''모리타니아''호는 뉴펀들랜드 케이프 레이스 남동쪽 400nmi 해상에서 침몰한 스웨덴 화물선 ''오비디아''(Ovidia)호의 승무원 28명과 선상 고양이 한 마리를 구조하기도 했다.[36][37] 1932년에는 크루즈 운항에 맞춰 선체를 흰색으로 도색했다.

1934년, 큐나드 라인화이트 스타 라인이 합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합병된 회사에는 올림픽호, 호메릭호 등 여러 대형 선박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노후화된 ''모리타니아''호는 잉여 자원으로 간주되어 운항이 중단되었다. 이는 대공황 이후 해운업계의 불황 속에서 이루어진 합리화 조치의 일환이었다.

7. 퇴역 및 해체 (1935)

큐나드 화이트 스타 라인은 1934년 9월 뉴욕에서 사우샘프턴으로의 마지막 대서양 횡단을 마친 후 '모리타니아'의 운항을 중단시켰다. 이 항해는 평균 24노트의 속도로 이루어졌으며, 이후 배는 28년간의 서비스를 마치고 사우샘프턴에 정박했다.[31]

1935년 5월, 선내 가구와 비품이 경매에 부쳐졌고, 같은 해 7월 1일 '모리타니아'는 스코틀랜드 로스시스에 있는 금속 산업(Metal Industries, Ltd.) 소속 선박 해체업자에게 팔려 마지막 항해를 위해 사우샘프턴을 떠났다.[31] 배의 마지막 여정과 해체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이어진다.

7. 1. 마지막 항해와 대중의 애도

큐나드 화이트 스타 라인은 1934년 9월 뉴욕에서 사우샘프턴으로의 마지막 동쪽 방향 대서양 횡단을 마친 후 '모리타니아'의 운항을 중단했다. 이 마지막 항해는 평균 24노트의 속도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초기 우편 보조금 계약 조건과 동일한 속도였다. 이후 '모리타니아'는 28년간의 운항을 마치고 사우샘프턴에 정박했다.[31]

1935년 사우샘프턴의 웨스턴 독스에 정박한 경쟁자였던 올림픽(왼쪽)과 '모리타니아'(오른쪽). '모리타니아'가 스코틀랜드 로스시스로 마지막 항해를 떠나기 직전 모습이다.


1935년 5월, 배 안의 가구와 비품들은 햄프턴 앤 선스(Hampton and Sons)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1일, '모리타니아'는 스코틀랜드 로스시스에 있는 금속 산업(Metal Industries, Ltd.) 소속 선박 해체업자에게 팔려 마지막 항해를 위해 사우샘프턴을 떠났다.[31]

'모리타니아'의 전직 선장 중 한 명이자, 타이타닉호 구조 당시 카르파티아호의 선장이었던 은퇴한 사령관 아서 로스트론 경은 사우샘프턴에서 그녀의 마지막 출발을 지켜보았다. 로스트론 경은 자신이 지휘했던 시절의 '모리타니아'를 기억하고 싶다며, 마지막 항해 전에 배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

1935년 7월 2일, 포스 다리 아래를 통과하기 위해 돛대를 잘라낸 '모리타니아'호가 마지막 항해를 위해 사우샘프턴을 출발하여 로스시스로 향하고 있다. 배경에는 올림픽호가 보인다.


로스시스로 가는 길에 '모리타니아'는 자신의 탄생지인 타인 강에 30분간 정차했다. 강둑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환호했으며, 배의 함교에서는 로켓이 발사되었다.[38] 뉴캐슬어폰타인 시장이 배에 올라 시민들을 대표하여 작별 인사를 전했고, 마지막 선장인 A. T. 브라운이 다시 로스시스로 항해를 이어갔다. 뉴캐슬에서 북쪽으로 약 약 48.28km 떨어진 노섬벌랜드의 작은 항구 도시 앰블의 지방 의회는 배에 "여전히 바다에서 가장 훌륭한 배입니다."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에 '모리타니아'는 "잉글랜드의 마지막이자 가장 친절한 항구에, 인사와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답했다.[39] 이 일화로 앰블은 오늘날까지 '앰블, 가장 친절한 항구(Amble, the Friendliest Port)'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도시 입구 표지판에서도 볼 수 있다. 이후 돛대를 잘라낸 '모리타니아'는 포스 다리 아래를 통과하여 해체업자에게 인도되었다.

1935년 스코틀랜드 로스시스에서 해체되는 '모리타니아'


'모리타니아'는 1935년 7월 4일 오전 6시경, 강풍 속에서 포스 다리를 통과하며 로스시스에 도착했다. 오전 6시 30분, 파일럿 캡틴 W. 윈스(W. Whince)의 지휘 아래 금속 산업 부두로 들어섰다. 부두에는 전통 복장을 한 파이퍼 한 명이 서서 이 유명한 배를 위해 장송곡을 연주했다. 작가이자 역사가인 존 맥스톤-그레이엄은 그녀의 거대한 엔진이 마지막으로 멈출 때 배가 어둡고 "마지막 전율..."을 느꼈다고 전했다. '모리타니아'는 7월 8일 일요일, 마지막 공개 관람 행사를 가졌고, 약 2만 명이 참석했다. 여기서 모인 돈은 지역 자선 단체에 기부되었다. 해체 작업은 곧바로 시작되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특이하게도 배는 드라이독이 아닌 물에 뜬 상태에서 해체되었으며,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무 판자와 연필 자국을 이용한 복잡한 시스템이 사용되었다. 한 달 만에 굴뚝이 사라졌고, 1936년에는 잔해만 남게 되었다. 남은 구조물은 1937년까지 완전히 해체되었다.[40]

경쟁 회사가 '모리타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막고, 미래의 큐나드 화이트 스타 선박을 위해 이름을 보존하고자, 1938년 새로운 모리타니아호가 진수되기 전까지 잠시 동안 레드 퍼넬 소속의 외륜선 '퀸(Queen)'호의 이름을 '모리타니아'로 변경하는 조치가 취해졌다.[41]

많은 사랑을 받았던 '모리타니아'의 해체 소식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충성스러운 승객들이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체에 반대하는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4]

8. 유산

''모리타니아''호에서 뜯어낸 "E" 글자, 배가 고철로 해체될 때 회수되어 뉴캐슬의 디스커버리 박물관에 소장됨


''모리타니아''호의 종, 현충일 2012


''모리타니아''호의 유산은 여러 장소에 보존되어 있다. 배의 종은 런던 펜처치 스트리트에 있는 로이즈 레지스터의 접수처에 보관되어 있으며, 로이즈 레지스터는 매년 현충일에 2분간 묵념하고 종 기단에 화환을 바쳐 군인과 여성을 기린다.

선박의 가구와 내부 장식 일부는 다양한 곳에서 재사용되었다. 브리스틀에 있는 '모리타니아 바'(Mauretania Bar, 현재 자바 브리스톨)는 1등석 라운지에서 가져온 아프리카산 마호가니 목재로 장식되었다. 이 바에는 1937년 개장 당시 만들어진 네온사인이 여전히 ''모리타니아''호를 광고하고 있으며, 입구 위에는 배의 선수 글자가 사용되었다.[42] 런던 서쪽의 피너우드 스튜디오 이사회 회의실은 ''모리타니아''호의 1등석 독서실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원래의 샹들리에와 금박 책장 등이 보존되어 있다. 다만 목재 색상은 원래의 은단풍나무에서 시간이 지나며 호박색으로 변했다.[4] 풀 항구를 내려다보는 한 주택 내부에는 배의 2등석 응접실 전체가 사용되었으며, 원래의 난간식 원형 베란다도 포함되어 있다. 스코틀랜드 칼루크에 있던 윈저 시네마(현재 폐쇄)의 로비와 강당 구역에도 일부 패널과 부속품이 사용되었다.[43] 랭커셔 패디햄에 있는 성 요한 세례자 가톨릭 교회의 확장 공사(1937년 완공)에도 일부 목재 패널이 사용되었다.[44]

2010년에는 1등석 라운지의 아프리카산 마호가니 필라스터(벽기둥)가 발견되어 복원되었다. 이 필라스터는 섬세한 금박 아칸투스 잎 장식과 숫양 머리 모양의 기둥머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2012년부터 원래 설치되었던 스완 헌터 조선소 부지에서 수백 야드 떨어진 디스커버리 박물관의 세게두넘 별관에 영구 전시되고 있다. 이 외에도 대형 몰딩, 패널, 천장 일부, 터빈 블레이드 샘플 등 다양한 선박 설비와 부속품을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45] ''모리타니아''호의 원래 선교(항구 고압 터빈) 엔진 텔레그래프는 현재 두바이에서 호텔로 운영 중인 QE2호의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모리타니아''호의 축척 모형, 뉴캐슬의 디스커버리 박물관에 소장됨. 선수에는 찰스 파슨스의 1897년작 ''터비니아''호가 있어, 1907년 10월 22일에 두 선박이 만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모리타니아''호의 모형들도 여러 곳에 전시되어 있다. 원래 모형은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 정박 중인 RMS 퀸 메리호에 오랫동안 보관되다가 현재는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협회에 전시되어 있다. 이 모형은 원래 검은색 선체였으나, 1930년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퀸 메리''호에 기증한 후 흰색 크루징 도색으로 다시 칠해졌다.[46] 뉴캐슬 어폰 타인의 디스커버리 박물관에는 원래 색상을 유지한 또 다른 축척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의 대서양 해양 박물관에는 ''모리타니아''호가 흰색 크루징 도색으로 칠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대형 건조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원래 루시타니아호의 모형이었으나 루시타니아호 침몰 후 ''모리타니아''호를 나타내도록 개조된 것이다.[47] 두바이퀸 엘리자베스 2호에도 비슷한 유래를 가진 대형 건조 모형이 탑재되어 있다.[48] 큐나드 라인이 의뢰했던 선박 모형은 현재 그리니치의 국립 해양 박물관 소장품으로 보관되어 있다.[49]

"모리타니아"를 주제로 한 "Firing the Mauretania"라는 곡도 존재한다. 가사 중에는 1924년에 석탄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미 중유 전용으로 개조되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다. 다만 곡의 다른 부분에서는 중유 전용임을 언급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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