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우라 마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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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게우라 마사루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15년 에히메현에서 태어나 1945년 필리핀 루손 섬에서 전사했다. 마쓰야마 상업학교와 릿쿄 대학을 거쳐 1936년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4번 타자 겸 3루수로 활약했으며, 투수로도 등판하여 최우수 평균 자책점과 최고 승률을 기록했다. 1937년 수위 타자, 1937년과 1938년 타점왕을 차지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2연패를 이끌었다. 1940년과 1944년 징집으로 인해 선수 생활에 공백이 있었으며, 어깨 부상으로 1루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1965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동쪽의 사와무라, 서쪽의 가게우라"로 불리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선수 시절 불성실한 플레이를 보였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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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우라 마사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915년 7월 20일 |
출생지 | 일본,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
사망일 | 1945년 5월 20일 |
사망 장소 | 필리핀, 루손섬 |
신장 | 173cm |
체중 | 75kg |
타석 | 우 |
투구 | 우 |
포지션 | 외야수, 투수, 3루수, 1루수 |
프로 입단 연도 | 1936년 |
첫 출장 | 1936년 4월 29일 |
마지막 출장 | 1943년 11월 7일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1965년 (특별 표창)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애媛현립 마쓰야마 상업 학교 |
대학교 | 구제 릿쿄 대학 (중퇴) |
프로 구단 | 오사카 타이거스/한신군 (1936년 ~ 1939년, 1943년) |
타격 기록 | |
리그 | JBL |
타율 | 0.271 |
안타 | 307 |
홈런 | 25 |
타점 | 222 |
투구 기록 | |
리그 | JBL |
승-패 | 27승 9패 |
평균 자책점 | 1.57 |
탈삼진 | 134 |
수상 | |
평균 자책점 타이틀 | 1936년 |
2. 경력
2. 1. 프로 입단 전
1915년 7월 20일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서 목재상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5] 소년 시절에는 몸집이 작고 말랐기 때문에 야구가 아닌 검도에 몰두했다. 훗날 그의 장타력은 검도 연습으로 단련된 강인한 손목과 다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5]마쓰야마 상업학교(현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검도부에 속해 있었으며, 3학년 때 야구부원이 부족해 당시 지도자였던 고토 지로의 권유로 야구부에 입부했다. 가게우라는 입부하자마자 타구의 날카로움과 던진 공의 속도로 인해 바로 두각을 나타냈다.[5] 미쓰모리 히데오, 다카스 기요세이 등과 함께 고시엔 대회에 출전, 1931년 봄 8강, 여름 베스트4, 1932년 봄 우승, 여름 준우승을 기록했다. 특히 1932년 여름 고시엔 대회 결승전에서는 9회초 본인의 3루타로 동점을 만들었으나, 9회말 상대 타자의 타구에 왼발을 맞아 강판당했고, 이후 상대의 번트 공격에 연장 11회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
릿쿄 대학에 입학하여 1학년 때부터 투타 양면에서 활약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마쓰야마 상업과 릿쿄 시절의 선배인 쓰보우치 미치노리가 있어 이후까지 그 친분이 계속되었다.[5]
2. 2. 프로 입단 후
1936년 2월 28일 릿쿄 대학을 중퇴하고 오사카 타이거스에 입단했다.[5] 큰 사과를 한 손으로 부술 정도의 악력으로 타이거스의 초대 4번 타자 겸 3루수로 활약하며 팀의 중심 타자로 자리 잡았다.[5]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사와무라 에이지와 명승부를 펼쳤다. 인원 부족으로 투수로도 등판하여 1936년 추계 리그에서 방어율 0.79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 6승 무패 승률 10할로 최고 승률을 기록했다.[7]1937년 3루수로 전향, 1937년 추계 리그 수위 타자, 1937년 춘계 및 1938년 춘계 리그 타점왕을 차지했다.[6] 1938년 팀의 일본 시리즈 2연패를 이끌었다. 1937년 춘계 리그에서 투수로 규정 이닝을 충족시키며 방어율 0.93로 사와무라에 이어 2위, 추계 리그에서는 타율 .333으로 수위 타자를 차지했는데 최우수 방어율과 수위 타자를 모두 기록한 것은 현재까지 가게우라가 유일하다. 또한 같은 시즌에 기록한 출루율 .515는 1974년의 오 사다하루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1938년 수비에서는 강견으로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1940년 첫 번째 징집, 1943년 복귀했으나, 병역 중 수류탄 투척으로 인한 어깨 부상으로 주로 1루수로 출전했다.[8] 1944년 두 번째 징집 전, 친정의 가업을 잇기 위해 은퇴했다.[5]
2. 3. 전사
1944년 두 번째 징집 후 1945년 5월 20일 필리핀 루손 섬 카란그란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9] 같은 부대에서 귀환한 인물의 증언에 따르면, 가게우라 마사루는 기아 상태에서 식료품 조달을 하러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9] 전사 공보에는 "1945년 5월 20일, 필리핀 루손 섬 카랑란에서 전사"라고 쓰여 있었으나,[9] 이는 가게우라 마사루가 소속되었던 부대의 소재지 기록과는 달라 정확한 전사 상황은 밝혀지지 않았다.[9]고향인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건립된 묘비와 전사 공보에 따르면 최종 계급은 조장이었으며, 집에 있던 어머니의 주선으로 전장에 가기 전에 결혼했다. 전사 후 집에 배달된 유골함에는 현지 돌멩이 3개만이 들어 있었다.[10] 가게우라 마사루의 동생 겐이치와 조카 다카오는 인터뷰에서 유골함에 대해 "이런 것이 한 사람의 생명인가…"라고 말했다.[11]
1965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도쿄 돔 부지 내에 있는 진혼의 비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3. 선수로서의 특징
3. 1. 타격
가게우라는 상체가 찢어질 듯한 풀 스윙이 특징적이었으며, 탄환 같은 라이너성 타구를 날렸다.[13] 당시 홈런이 나오기 어려웠던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럭키존 설치 이전까지 가장 많은 4개의 오버 펜스 홈런을 야마시타 미노루와 함께 기록했다.[14]가게우라는 무거운 배트를 최대한 길게 잡고, 왼손은 그립 엔드를 감싸듯이 쥐고, 허리를 비트는 듯한 큰 폼으로 타격을 했다.[5] 하지만 상체에 비해 다리가 가늘어 풀 스윙 시 발목을 삐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타구는 릿쿄 대학 선배인 쓰보우치 미치노리에 따르면 "외야 펜스 바로 앞에서 잡았을 때도, 포구하면 포환던지기의 공처럼 무거웠다"라고 말했다.[13]
쓰보우치는 가게우라와 함께 매일 밤 댄스홀에 다니며 소지금을 다 썼을 때, 고시엔에서 홈런을 치면 20엔의 상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게우라에게 부탁했더니 실제로 해냈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가게우라의 파워는 특별했다고 말했다.[15][16] 프로 야구에 관한 전전(戰前)의 영상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상체가 찢어질 듯한 기세로 풀 스윙하는 가게우라의 영상이 남아 있다.
3. 2. 투구
가게우라는 넘버원 강견으로 알려져 원투구 대회에서 144m라는 역대 최고 장거리 투척 기록으로 우승했다.[16] 투수로서 묵직한 내추럴 슈트를 낮은 코스로 제구하는 능력을 갖춰, 상대 타자의 타구가 외야로 거의 날아가지 않았다.[16] 마츠키 겐지로는 가게우라가 타자로서도 초일류였지만, 투수 쪽에 더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2] 경기 중 야수에서 투수로 등판할 때에도 워밍업으로 5~6구 정도만 던질 정도로 투구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다.[16]4. 평가 및 영향
사와무라 에이지의 라이벌로서 "동쪽의 사와무라, 서쪽의 가게우라", "직업 야구는 사와무라가 던지고 가게우라가 치며 시작했다"라고 평가받았다.[18] 1984년 일본 프로 야구 50주년 기념 우표[23]의 디자인 중 '타자' 그림은 가게우라의 사진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24]
후지무라 후미오를 '미스터 타이거스' 초대 선수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가게우라를 초대 선수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쓰키 겐지로는 가게우라가 무사히 돌아왔다면 타이거스의 감독이 되어 자이언츠에 지지 않는 팀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2][20]
가게우라는 한신 고시엔 구장의 럭키존 설치 이전에 가장 많은 오버 펜스 홈런(4개)을 날렸으며,[17] 쓰보우치 미치노리는 가게우라의 파워가 정말 특별했다고 회고했다. 마쓰키에 의하면 가게우라가 사용한 배트의 무게는 1.025kg에서 1.05kg 사이, 길이는 88.9mm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최우수 평균 자책점과 수위 타자를 모두 획득한 유일한 선수이다.[17]
가게우라는 상당한 대식가로, 마쓰야마시역에서 판매하던 히기리야키를 20개 먹고 귀가하거나, 와카바야시 타다시와 스키야키 고기를 4kg 먹는 내기에서 승리하고, 마에다야마 에이고로와 야키토리 160개를 먹는 등 많은 일화가 남아있다.[5][19] 술은 전혀 마시지 않았다.[5] 실제로는 섬세하고 동료를 생각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20]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자신의 수비 위치로 날아온 타구를 무시하는 등 태만한 플레이를 여러 번 보였다고 한다.[21] 선수 동료와 밀크 홀의 대금을 걸고 한 시합에서 홈런을 날리고 달리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발군의 운동 신경으로 농구나 사격도 누구보다 잘했다고 한다.[5] 시인 사이조 야소는 "전장을 달리는 탱크"라고 칭했다.[2]
1965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도쿄 돔 구내의 진혼비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5. 논란
선수 시절 불성실한 플레이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자신의 수비 위치로 날아온 타구를 무시하거나, 일부러 헛스윙을 하는 등 태만한 플레이를 여러 번 보였다고 한다. 감독이었던 이시모토 슈이치의 일기에는 "오늘도 가게우라, 플라이볼을 쫓지 않고, 쳐도 달리지 않는다. 원인 불명"이라는 기술이 있다.[5] 원인으로는 급여 인상 문제와 감독 인사에 관련된 것 등 여러 설이 있는데, 전자는 가게우라의 급여 인상분이 본인이 아닌 집에 전액 송금되었지만 가게우라는 그것을 모르고, 후배인 쓰리 쓰네오의 급여가 자신보다 많다고 오해하여 항의하기 위해 보이콧했다는 것이다. 후자는 초대 감독 모리와 친했던 가게우라가 모리의 해임에 납득하지 못하고, 후임 이시모토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5] 이 때문에, 사후에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을 선정할 때 "플레이가 불성실하다"는 반대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21] 선수 동료와 밀크 홀의 대금을 걸고 한 시합에서 홈런을 날리고 달리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6. 개인 기록
7. 상세 정보
7. 1. 출신 학교
구제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학교(현재의 에히메 현립 마쓰야마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릿쿄 대학을 중퇴하였다.7. 2. 선수 경력
오사카 타이거스·한신군에서 1936년부터 1940년, 1943년에 선수로 활동했다.7. 3. 등번호
가게우라 마사루의 등번호는 1936년부터 1939년, 그리고 1943년에 6번이었다.8. 각주
참조
[1]
웹사이트
Masaru Kageura entry
http://english.baseb[...]
2020-08-2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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猛虎人国記(6)~愛媛県 「ミスター」の嚆矢 景浦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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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ニッポ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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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ロ野球70年フォトヒストリー 「闘将」と呼ばれた男 景浦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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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本知憲氏が戦前の強打者・景浦将氏に思いをはせ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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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点王(1リーグ) - プロ野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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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月9日】1936年(昭11) 沢村栄治VS景浦将、初の「王座決定戦3番勝負」(野球) スポニチ Sponichi Annex 野球 日めくりプロ野球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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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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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評論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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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場に散った野球人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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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뉴스
五感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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沢村栄治と景浦将 かく戦いかく散れり
Number 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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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宮清純「唯我独論」:第550回 戦争で散った沢村のライバル・景浦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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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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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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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特攻隊員として戦死した2人の選手や景浦將… 戦後74年、戦火に散ったプロ野球選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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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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タイガースの生い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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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潮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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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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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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