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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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네다성은 667년 일본 덴지 천황 시대에 축조된 쓰시마섬의 산성이다.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7세기 중기에 축성되어 8세기 초에 폐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야마토 조정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속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성벽은 석루로 구축되었고, 성문, 수문, 빙구시 산 등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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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성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금전성 |
원어 이름 | 金田城 |
위치 | 쓰시마, 나가사키현 |
종류 | 한국식 산성 |
상태 | 폐허 |
좌표 | 34.3007, 129.2736 |
축조 연도 | 667년 |
축조 주체 | 야마토 조정 |
사용 시기 | 알 수 없음 |
파괴 시기 | 알 수 없음 |
문화재 지정 | 국가 특별사적 "금전성 유적" |
역사 | |
축조 | 덴지 천황 6년 (667년) |
관련 사건 |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지 천황 4년 8월에 축성이 시작됨 일본서기에 따르면 덴지 천황 6년 11월에 축성이 완료됨 |
시설 정보 | |
남아있는 것 | 성문, 수문, 석루, 토루, 건물 터 |
통제 | 야마토 조정 |
일반 공개 여부 | 알 수 없음 |
지리 정보 | |
위치 | 쓰시마 섬의 북쪽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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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가네다성은 7세기 중반 야마토 조정에 의해 축조되었다.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왜국이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덴지 천황은 이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일본 지역의 방어 시설 강화를 명령했다.[2][3] 이러한 배경 속에서 가네다성은 667년 쓰시마섬 중앙부 아소만 서쪽의 조야마(城山, 해발 276m) 정상부에 조선식 산성 형태로 축조되었다. 이 성은 한반도를 향한 최전선 방어 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축성 이후 약 2.8km에 달하는 석루(石壘)가 성 전체를 둘렀으며, 성문, 수문, 건물 터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7세기 말경 수축을 거쳐 8세기 초 이후에는 점차 사용되지 않고 폐성(廢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중세와 근세를 거치며 성의 정확한 위치는 잊혔으나, 에도 시대 후기 외국 선박의 출현으로 방어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일부 수축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근대에 들어 1901년 메이지 정부에 의해 성터 위에 포대가 건설되면서 일부 유구가 파괴되기도 했으나, 1922년과 1948년의 조사를 통해 현재의 위치가 가네다성 터로 확정되었다. 1985년 이후 본격적인 발굴 조사와 정비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고대 동아시아 정세와 일본의 방어 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2년 국가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4] 또한 2017년에는 속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4]
2. 1. 고대

문헌상 가네다성은 『일본서기』 덴지 천황 6년(667년) 조[5]에 처음 등장한다. 해당 기록에는 "왜국에 다카야스 성을 쌓고, 사누키국 야마다 군에 야시마 성을 쌓고, 쓰시마국에 가네다 성을 쌓았다(築 倭國高安城。讃吉國山田郡屋島城。對馬國金田城)"고 되어 있어, 같은 해 다카야스 성, 야시마 성과 함께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가네다성의 축성은 663년 백강구 전투의 패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했던 왜국 군대가 당과 신라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자, 덴지 천황은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 체계 구축을 명령했다.[2][3] 이듬해인 664년[6], 다자이후 방어를 위해 쓰시마, 이키, 지쿠시 등지에 사키모리(防人, 변경 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 지쿠시에 미즈키(水城)를 축조했다. 665년[7]에는 백제 유민들의 지도를 받아 성곽을 추가로 건설했는데, 답본춘초의 지도로 나가토국에 성을, 억례 복류와 사비 복부의 지도로 지쿠시 국에 오노 성과 기이 성을 쌓았다. 이러한 일련의 방어 시설 강화 조치의 일환으로 667년에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쓰시마에 가네다 성이 축조된 것이다. 즉, 가네다 성은 백강구 전투 패배 이후 왜국이 한반도 방면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추진한 서부 지역 군비 확충의 최전선 기지였다.
성은 쓰시마섬 중앙부 아소만 서쪽, 조야마(城山, 해발 276m) 산 정상부의 험준한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조선식 산성의 특징을 보이며, 서일본 각지에 축조된 고대 산성 중에서는 한반도를 향한 최전선에 위치한다. 성의 전체 둘레 약 2.8km에 걸쳐 석루(石壘)가 구축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인데, 이는 흙으로 쌓은 토루(土壘)를 주로 사용한 다른 고대 산성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발굴 조사를 통해 성벽 외에도 성문 터, 수문 터, 호릿타테기둥 건물(掘立柱建物, 땅에 기둥을 직접 박아 세운 건물) 터 등이 확인되었다. 건물 터 유구를 통해 사키모리가 주둔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네다성은 7세기 중반 무렵 처음 축성되었고 7세기 말경에 수리 및 보강이 이루어졌으며, 8세기 초 이후에는 점차 사용되지 않아 폐성(廢城) 상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으로는 나라 시대에도 이키국・쓰시마국에 사키모리(방인)가 배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위의 사실로부터 동시대 가네다 성에는 사키모리가 주둔하지 않았음이 시사된다. 그 후의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성의 정확한 위치는 잊혀졌으나, 1922년(다이쇼 11년)과 1948년(쇼와 23년)의 조사를 통해 현재의 조야마 위치로 비정(比定, 위치를 추정하여 확정함)되었다. 1985년도(쇼와 60년도) 이후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가네다 성터는 고대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일본의 대 한반도 방어 체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며, 유구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문헌 기록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당시 사키모리 배치 실태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2년(쇼와 57년)에 국가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14], 2017년 속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4]
년월 | 사건 | |
---|---|---|
덴지 천황 2년 (663년) | 8월 | 백강구 전투 패배 |
덴지 천황 3년 (664년) | 쓰시마・이키・지쿠시 등에 사키모리・봉화 설치 미즈키 축조 | |
덴지 천황 4년 (665년) | 8월 | 나가토 성・오노 성・기이 성 축조 |
덴지 천황 6년 (667년) | 3월 | 오미오쓰 궁 천도 |
11월 | 다카야스 성・야시마 성・가네다 성 축조 |
2. 2. 중세
중세 시대에는 가키쓰 원년(1441년)과 고토쿠 2년(1453년)에 성이 위치한 조 산(城山, 성산)에서의 나무 벌채를 금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1441년의 기록에는 구로세(黒瀬)의 헤이사에몬노조(平左衛門尉)에게 벌채 금지를 명령한 내용이 있는데, 이 헤이사에몬노조는 히라야마 씨(平山氏) 가문 사람으로 당시 조 산의 번인(番人), 즉 파수꾼으로 불렸다고 한다.2. 3. 근세
가네다 성은 축성 이후 오랫동안 잊혀져 에도 시대까지 그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쓰시마 현지에서는 이즈하라 정(厳原町) 사쓰(佐須)의 가네다하라(金田原)를 가네다 성터로 보는 설이 유력했다.[1] 하지만 쓰시마 번의 유학자였던 스야마 도쓰안(陶山訥庵)은 그의 저서 《쓰시마 기략》(津島紀略)에서 현재의 위치인 조 산(城山)이 덴지 천황 시대에 축조된 가네다 성이라고 주장했다.[1] 사쓰 설의 경우, 현재까지 관련 유구가 발견되지 않아 그 근거가 부족하다.[2][3]《쓰시마 기략》에는 덴지 천황 시대의 산성이라는 설 외에도, 진구 황후가 이른바 '신라 정벌' 당시에 쌓았다는 전설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4] 이와 유사하게 에도 시대의 국학자였던 도 나오노부(藤斎延)의 《본주무비담》(本州武備談), 그의 아들 도 사네후사(藤定房)의 《본주편년략》(本州編年略), 손자 나카사토(仲郷)의 《무본담》(武本談) 및 《쓰시마 기사》(津島紀事) 등에서는 주아이 천황(仲哀天皇) 시대에 조 산의 성이 축조되었다는 설을 제시하기도 했다.[4] 당시 조 산의 성 모습에 대해 《낙교기문》(楽郊紀聞)에서는 구로세 촌(黒瀬村)의 조 산에 문(木戸)이 세 곳 있었고, 특히 세 번째 문(三ノ木戸) 주변의 돌담이 거대한 돌로 지어졌으며, 히라야마 덴키치(平山伝吉)라는 인물이 성의 관리를 맡았다고 전한다.[4]

에도 시대 후기에 들어 쓰시마 근해에 서양 선박(이양선)이 자주 나타나자, 쓰시마 번은 방비를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간세이 4년(1792년)에는 연안 지역의 지도를 제작하고 섬 곳곳의 중요 지점에 원견번소(遠見番所, 망루)를 설치했으며, 간세이 10년(1798년)에는 《해변어비각》(海辺御備覚)이라는 방비 지침서를 작성했다.[4][1] 이 《해변어비각》에는 조 산과 가이후나(貝鮒) 지역의 진지(陣地) 구조가 명시되어 있어, 이 시기에 가네다 성이 다시 정비되고 수축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4][1]
2. 4. 근대 이후
연도 | 내용 |
---|---|
1901년 (메이지 34년) | 메이지 정부에 의해 성산 위에 성산 포대 및 부속 보루가 구축되면서 가네다성 유구 일부가 파괴됨. |
1922년 (다이쇼 11년) | 고토 모리이치(後藤守一)에 의한 조사가 이루어짐 (1922년 『쓰시마 괄견록』(対馬瞥見録)에서 보고). |
1948년 (쇼와 23년) | 동아고고학회에 의한 조사를 통해 가네다성으로 비정하는 설이 확정됨 (1953년 『쓰시마』(対馬)에서 보고). |
1962년 (쇼와 37년) 11월 8일 | 쓰시마 성산(対馬城山)이라는 명칭으로 나가사키현 지정 사적으로 지정됨. |
1982년 (쇼와 57년) 3월 23일 | 일본의 국가 특별사적으로 지정됨.[14][20] |
1985년 (쇼와 60년) 이후 | 발굴 조사 및 사적 정비가 시작됨 (구 미쓰시마정 교육위원회 주관). |
1993년 ~ 2018년 (헤이세이 5년 ~ 30년) | 제1기 정비 사업이 진행됨 (구 미쓰시마정 교육위원회, 이후 쓰시마시 교육위원회 주관).[8] |
2012년 (헤이세이 24년) |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서 제3회 고대 산성 서미트가 개최됨. |
2017년 (헤이세이 29년) 4월 6일 | 속일본 100명성 (186번)으로 선정됨.[4] |
쓰시마 중부 아소 만 서쪽, 해발 276m의 조야마(城山) 산 위에 축조된 고대 산성이다. 아스카 시대인 덴지 천황 6년(667년)에 축조된 조선식 산성으로, 당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서일본 각지에 세워진 방어 시설 중 한반도를 향한 최전선에 해당한다. 성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혔으나, 1922년과 1948년의 조사를 통해 위치가 확인되었고, 1985년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3. 구조
성은 조야마의 험준한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어졌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육지와 이어진 남서쪽도 지형이 험하며, 산 정상에서는 북서쪽으로 한반도를 조망할 수 있어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입지다. 성은 산의 동쪽 사면에 주로 구축되었으며, 계곡을 감싸 안는 형태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북쪽에서 서쪽으로는 가파른 절벽을 자연 성벽으로 삼았다. 성의 전체 면적은 약 22헥타르(0.22km2)이며, 특별 사적으로 지정된 범위는 반도 전체에 걸쳐 약 240헥타르(2.4km2)에 달한다.
가네다성의 가장 큰 특징은 성벽 대부분이 돌로 쌓은 석루(石壘)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총 길이는 약 2.8km에 달하며, 흙으로 쌓은 토루(土壘)가 중심인 다른 고대 산성들과는 구별된다. 토루는 성내 일부 구간에서만 확인된다. 석루의 높이는 낮은 곳은 2m~3m, 높은 곳은 4m~5m이며, 특히 계곡 부분에서는 6m에 이르기도 한다. 성벽 곳곳에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 일부를 튀어나오게 만든 치(雉) 또는 치성(雉城) 구조가 확인되는데, 이는 한반도 성곽 축조 기술의 영향을 보여주는 요소로 귀노성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발견된다.
성벽에는 성문과 수문(水門) 터가 있으며, 성 안쪽에서는 호릿타테기둥 건물(掘立柱建物, 땅에 기둥을 직접 박아 세운 건물) 터들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건물 터들은 당시 방인(防人, 사키모리)들의 생활 공간 등 성의 중추 시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볼 때 성은 나라 시대까지 사용되다가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가네다성 터는 고대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한반도 방면 최전선 기지로서의 중요성, 양호하게 보존된 유적 상태, 그리고 문헌 기록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던 방인 파견의 실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아 1982년 국가 특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4]. 산꼭대기 부근에는 근대 일본 육군이 사용했던 포대 터가 남아있다.
3. 1. 성문 및 수문
성벽에 열린 성문으로는 3곳(니노키도·산노키도·남문)이, 수문으로는 2곳(이치노키도·산노키도)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 빙시산 안부의 토루에서 빙시문이 확인되었다.
3. 2. 빈구시 산
오른쪽은 원 초석, 왼쪽은 복제 초석.
성산의 동쪽, 이노성문과 산노성문 사이에는 "빙구시산"이라고 불리는 작은 봉우리가 있다. 빙구시산과 성산 사이의 안부('빙구시산 안부')는 가네다성에서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성내에서는 1993년 이후 이곳에서 가장 먼저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빙구시산 안부는 성내에서 가장 넓은 약 20미터 사방의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문(빙구시문), 토루(흙으로 쌓은 방어 시설), 돌기둥 건물 터 3동, 책열(울타리 기둥) 흔적이 확인되었다. 토루(남토루, 북토루)는 안부를 방어하기 위해 아치형으로 만들어졌다. 토루의 단면 조사 결과 이중 구조임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어느 시기에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10] 토루에 난 빙구시문 터에서는 석영 반암으로 된 초석 1개가 확인되었으나, 짝을 이루는 다른 초석은 사라졌다. 현재는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10] 또한, 1칸×3칸 규모의 작은 돌기둥 건물 터에서는 화로 자리가 발견되어, 방인들의 쉼터나 숙소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1]
건물 기둥 8개를 표시.
4. 기타
성산 산정은 "히타테구마"라고도 불리며, 그 명칭으로 보아 봉화 설치가 추측되지만, 관련된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제1 성문 부근에는 오키도 신사(大吉戸神社|오키도진자일본어, 구 촌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신사는 가네다 성의 수호신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다고 추측되며, 성문을 뜻하는 '키도'(城戸)라는 발음과의 관련성도 지적된다. 『일본삼대실록』 조간 12년(870년) 기록[12]에 보이는, 종5위하에서 종5위상으로 신위가 오른 "大吉戸神|오키도신일본어"이 바로 이 신사라는 설이 있다[13]. 중세 이후에는 "성 팔만궁(城八幡宮|조하치만구일본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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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田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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対馬砲台あるき放題 ~対馬要塞まるわかりガイドブッ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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