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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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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대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사회 변동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시작된 주권 국가 체제, 시민 혁명에 따른 시민 사회의 성립, 산업 혁명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국민 국가의 형성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19세기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발전하고, 산업 혁명이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사회가 급격히 변화했다. 유럽에서는 빈 체제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했지만, 혁명과 독립 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산업 혁명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확립하고 노동 운동을 일으켰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도 이루어졌다. 유럽 외 지역에서는 제국주의가 확대되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에서 식민 지배가 이루어졌다.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남북 전쟁을 겪었으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다. 이러한 변화는 20세기의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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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지도
시대 구분
이전 시대근세
다음 시대현대
개요
기간1800년경 ~ 현재
특징산업화
과학기술 발전
정치적 변화
사회적 변화
주요 사건산업 혁명
식민주의
세계 대전
냉전
탈식민주의
정보화 시대
사회 문화
사회 변화도시화
대량 생산
소비 문화
대중 문화
기술 발전증기 기관
전기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인터넷
사상계몽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페미니즘
세계사적 맥락
특징세계적인 교류 증가
서구 문명의 확산
다양한 문화의 공존 및 충돌
국제 사회의 형성
한국사의 맥락
시대 구분개항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변화서구 문물 수용
근대적 국가 체제 형성
산업화와 도시화
민주화 운동

2. 17세기

17세기 유럽에서는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이 중앙집권적인 근대 국민 국가를 건설하며 중세 봉건 체제에서 벗어났다. 영국에서는 왕권신수설이 등장하며 절대왕정을 뒷받침했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시대에 콜베르가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식민지 개척을 위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는 등 초기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찰스 1세 시대에 두 차례의 혁명이 일어났고, 로크의 삼권분립설, 프랑스의 백과전서학파,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은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쇠퇴하였고, 이란의 사파비 왕조도 17세기 후반부터 쇠망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무굴 제국아우랑제브 왕 시대에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융합이 파괴되고, 영국의 진출이 강화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명이 멸망하고 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강희제 시대에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다. 청은 외국 무역을 발전시켰고,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통해 근대 유럽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1699년 영국과 광둥 무역을 시작했고, 러시아와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14]

2. 1. 유럽

근대 초기, 동로마 제국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1453년)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이탈리아 반도로 망명해 왔고, 이는 서유럽의 고전 고대 연구를 자극하여 르네상스의 인문주의가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문 헌법, 국민 국가, 자본주의와 같은 근대를 상징하는 사회·경제·국가의 모습이 나타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을 근대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본다. 동로마 제국 멸망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산업 혁명까지의 시대는 "근세(초기 근대)"로 구분하며, 이 경우 프랑스 혁명(1789년)을 전환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후기 근대는 여러 시대로 나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2. 1. 1. 절대주의

절대주의 시대에는 봉건 영주의 세력이 약화되고, 소(小)부르주아적 생산자가 대두하였다. 국왕은 관료 기구상비군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시민 계급의 경제력에 의존하며 국민적 통일 국가를 추구했다. 왕권은 봉건 세력과 시민 계급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권력을 행사했다.[14]

2. 1. 2. 영국의 시민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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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3. 30년 전쟁

독일에서는 종교 전쟁 이후에도 신구교 간의 대립이 계속되었고, 1618년 보헤미아 신교도의 반란을 계기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국제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독일 제후와 황제, 합스부르크 가와 부르봉 가, 스웨덴 등 여러 세력 간의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으나, 독일은 국토 황폐화와 인구 감소, 국가 통일 붕괴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강국으로 발전했고, 프랑스가 강대해졌으며, 스웨덴도 강국으로 부상했다.[1]

2. 1. 4. 에스파냐의 몰락

에스파냐는 신대륙에서 얻은 은을 낭비하고, 공업 제품 생산에 소홀하여 네덜란드영국에 밀려 쇠퇴하였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 포르투갈 분리, 베스트팔렌 조약, 피레네 조약, 나이메헨 조약 등으로 영토를 상실하였다.

2. 1. 5. 네덜란드의 성쇠

17세기 전반,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고 경제적, 문화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동양 무역을 지배하고, 북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세계 해상권과 무역권을 장악했다. 암스테르담은 유럽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중계 무역에 치중하여 국내 산업 발전에 소홀했던 탓에 쇠퇴하였다.

2. 1. 6. 오스만 투르크의 후퇴

오스만 제국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하였고, 하렘의 권력 증대, 과중한 세금, 반란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의 압력과 이란 사파비 왕조의 위협을 받았다. 17세기 후반, 재상 카라 므스타파의 대외 원정이 실패하면서 동유럽에서 세력이 후퇴했다.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유럽 열강에 대해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2. 2. 서아시아

사파비 왕조아바스 1세 시대에 번영했으나, 그의 사후 급격히 쇠퇴했다.

2. 3. 인도

무굴 제국악바르 대제부터 아우랑제브 황제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나, 농촌 황폐화와 농민 저항, 힌두교 탄압 정책 등으로 통일이 무너졌다. 이 시기에 영국프랑스의 진출이 강화되었다.

2. 4. 동남아시아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포르투갈을 몰아내고 향료 무역을 독점했으며, 인도네시아 내부 지배를 강화했다. 암보이나 사건 이후 영국 세력도 이 지역에서 축출되었다.

2. 5. 북아시아

은 17세기 초 만주 남부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하고 넓은 동아시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북아시아에 대해서는 이미 태조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 아무르강(흑룡강) 유역까지 지배하였다. 청 태종 때까지 내몽골 방면에 있던 차카르 부와 내(內) 카루카부를 남김없이 복속시켰다. 강희제 시대에는 외몽골 일대의 외칼카부도 복속시켜, 동진하고 있던 러시아와 흑룡강 방면에서 상대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당시 유럽 여러 나라가 바닷길을 통하여 아시아 진출을 시도하고 있던 중에 홀로 육로를 통하여 북아시아에 동진하여, 17세기 중엽에는 태평양 연안에 도달하고, 다시 흑룡강 유역에 육박했다. 1689년 청은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흑룡강 유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북아시아 지배는 외몽골 방면으로 향하게 되었고 캄차카 방면으로도 뻗어갔다.[14]

2. 6. 중국

명나라를 교체한 청나라만주족 왕조로, 누르하치가 1616년 건주 여진족을 통일하여 후금을 세웠다. 청 태종은 내몽골 등 주변 지역을 복속시키고 국호를 대청으로 고쳐 명 정복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명은 당쟁과 증세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져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멸망했다. 이 틈을 타 만주족은 순치제를 옹립하여 베이징에 입성, 청의 중국 지배가 시작되었다(1644년).[14] 이후 화중, 화남의 명 잔존 세력을 제거하고 1661년 명 유족을 완전히 몰아내며 청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강희제 시대가 열렸다. 청의 중국 정복 과정에서 오삼계 등 투항한 한족들이 활용되었는데, 이들은 공로로 화남 각지에 봉해져 세력이 강해졌고, 결국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청은 팔기병과 녹기병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고, 대만 정성공 세력의 저항까지 평정하여 중국 지배를 확립했다.[14] 이후 내정을 정비하고 대외적으로도 발전하여 청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3. 18세기

18세기에는 계몽주의 사상이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기독교적 이념은 쇠퇴하고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강화되었다. 프랑스에서 볼테르, 디드로, 몽테스키외, 루소 등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 등은 계몽 전제 군주로 불리며 개혁을 추진했다.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러시아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쇠퇴하고, 발칸반도의 불안이 증대했다. 이란에서는 카자르 왕조가 성립되었으나, 유럽 세력의 압박에 직면했다. 인도에서는 영국프랑스의 식민지 항쟁이 격화되었고, 플라시 전투 결과 영국의 인도 지배가 결정되었다.[14]

청나라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쳐 황금시대를 맞이하며 영토가 확장되었다. 지정은제와 한인 등용 정책으로 중앙집권 체제가 발전하고, 농업 생산력 향상과 상업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건륭제 치세 후반부터 사회 불안이 증대하고, 백련교도의 난 등으로 청조가 쇠약해지자 유럽 열강이 진출했다.

3. 1. 유럽

유럽에서는 후기 근대 시기를 여러 개의 더 작은 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시기로 나눌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1902년 뉴욕의 초기 고층 건물들


도금 시대는 미국에서 남북 전쟁과 재건 시대 이후, 19세기 후반에 미국의 상류층이 막대한 부를 과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산업과 인구 증가로 인해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제2차 산업 혁명으로 북동부에 새로운 공장이 건설되고, 엄청난 부를 가진 산업가와 금융가들, 소위 "강도 귀족들"이 등장했다. 존 D. 록펠러의 회사는 새로운 석유 산업을 주도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경쟁사들을 흡수하거나 파괴하는 공격적인 전략을 사용했다.

현대 산업 경제가 만들어졌다. 교통 및 통신 기반 시설이 확충되고, 기업이 주요 사업 조직 형태로 자리 잡았다. 경영 혁명은 사업 운영 방식을 변화시켰다. 1890년, 미국 의회셔먼 반독점법을 통과시켜 거래를 제한하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거래 제한"의 의미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았다. 20세기 초, 미국의 1인당 소득과 산업 생산량은 영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국가를 넘어섰다. 긴 노동 시간과 위험한 작업 환경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했지만, 산업가와 법원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법원은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1911년 셔먼 반독점법에 따라 스탠더드 오일 그룹을 "불합리한" 독점으로 판결하고, 스탠더드 오일을 34개의 독립적인 회사로 분할하도록 명령했다.[26]

3. 1. 1. 계몽적 전제 정치

18세기 동유럽의 절대주의는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개혁을 추진하는 계몽적 전제 정치로 나타났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요제프 2세,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 등이 대표적인 계몽 전제 군주였다.[14] 이들은 서유럽 선진국에 대항하기 위해 봉건 귀족 세력을 유지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을 증대시키는 개혁을 추진했다.

프로이센은 군국주의 국가로 발전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강국으로 부상했다. 오스트리아는 국내의 이민족 문제로 개혁에 어려움을 겪고, 독일 통일 주도권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3. 1. 2. 유럽의 국제 전쟁

18세기 유럽 외교정책의 기본은 여전히 제국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는 동시에 제국의 세력 범위가 재조직된 세기이기도 했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을 경계로 유럽 최강국이었던 프랑스가 쇠퇴기에 들어섰고, 에스파냐는 예전의 국력을 잃었다. 반면 독일 제국 내 일개 영방 국가였던 프로이센은 에스파니아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급부상했으며, 러시아의 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세력 균형 유지는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각국의 사정에 따라 수많은 동맹이 체결되고 해소되는 등 복잡한 관계가 나타났다. 오랫동안 격렬하게 반목하던 합스부르크 가의 오스트리아와 부르봉 가의 프랑스가 동맹하는 외교혁명이라 불리는 사태도 발생했다. 전쟁은 대부분 두 나라 간의 전쟁이 아니라 전 유럽 국가들을 전란 속에 휘말리게 하는 성격으로 발생했다.

유럽 본국 간의 전쟁은 동시에 식민지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18세기의 전쟁이 왕가 간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벗고, 각국의 중상주의적 식민정책 충돌이 때때로 전쟁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7세기 말 이래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 정력적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해 온 영국은 항상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최대 강국이 되었다. 비록 미국 식민지가 독립하여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타격이 있었지만, 영국은 18세기 말 정치적, 경제적으로 유럽을 선도하는 위치를 구축했다.[14]

3. 1. 3. 러시아의 근대화

17세기 말까지 러시아서유럽 여러 나라와 별로 깊은 관계를 갖지 않은 채 여전히 동방적 존재였으며, 농노제를 기초로 하는 특이한 절대주의 국가였다. 표트르 1세는 이와 같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고 서유럽화하는 곤란한 사업에 착수하여 러시아를 열강의 일각을 점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내정을 개혁하고 군비 확장을 실시하여 황제의 독재권을 강화하였으며, 서유럽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했다. 그러나 그의 여러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기 때문에 사회의 진정한 근대화에는 미치지 못했고, 서유럽화도 일반인에게는 관계가 없었으며, 농노제가 유지, 강화되었다. 대외적으로는 투르크로부터 아조프해 주변을 빼앗고,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하여 발트해로 나아가는 출구를 확보하고, 이곳에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

표트르 1세의 사업, 특히 서유럽화 정책은 보수파의 반발을 야기했다. 황제 사후 이러한 갈등은 궁정을 중심으로 한 정권 쟁탈전과 결부되어 예카테리나 2세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반복되며 러시아를 혼란에 빠뜨렸다. 18세기 후반, 이 혼란기 후에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1세의 사업을 계승하여 계몽 전제정치를 펴고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농노제는 오히려 강화되어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인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났다. 예카테리나 2세는 대외 정책에도 주력하여 두 차례에 걸친 터키와의 전쟁을 통해 드네프르강 하구(河口) 지방과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흑해 진출의 기반을 다졌다. 또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동쪽으로는 시베리아 전역이 이미 러시아 영토였으나, 다시 극동 해상으로 진출하여 락크스맨을 일본에 파견해 통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18세기 말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이후 유럽 국제 관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3. 1. 4. 북유럽 왕국 쇠퇴

북유럽의 시장은 옛날부터 유럽 제국 경제 활동의 중요한 무대였는데,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양 등의 원격지 무역이 발전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그 지위가 저하되었다. 더욱이 러시아, 프로이센 등의 새로운 강국이 대두하여 발트 해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북유럽 제국의 입장은 차차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라들은 제1차 산업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시민 계급의 성장이 충분하지 못했고, 따라서 근대적인 통일 국가의 출현이 지연되었다는 것이 한층 곤란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3. 1. 5.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근대의 물결 위에 선 이탈리아는 경제활동의 중심지가 이동함에 따라 여러 도시의 상공업이 쇠퇴하고, 봉건적 반동은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탈리아의 분열은 제후들의 항쟁에 의해서 한층 격화되었고, 주변 여러 강대국의 이탈리아 지배를 노린 침략은 극히 노골적이어서, 대국의 싸움은 때때로 이탈리아를 무대로 하였다. 에스파냐 계승전쟁 때,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 에스파냐군의 결전장이 되어 대단한 전화를 입었다. 국내는 소왕국·소공국·공화국으로 분열되어, 국가적 통일의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18세기에 이르러서도 국내에 별다른 산업이 일어나지 않았고, 수공업적인 사치품 생산이 일반적이었다. 북이탈리아의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지방은 예외였다. 이 지방에서는 집약적 농업이 실시되었고, 밀라노는 상인이 지배하여 활기를 보이고 있었다.

3. 1. 6. 산업 혁명

산업혁명은 단순한 생산 기술 혁신이 아니라, 공장제 수공업(매뉴팩처)에서 기계제 대공장(팩토리)으로의 전환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확립한 변혁이다. 영국에서 최초로 산업 혁명이 시작된 배경에는 봉건적 관계 해체, 상공업 발전, 시민 혁명, 중상주의식민지 정책 등이 있었다.[14] 와트 증기 기관은 영국과 세계의 산업 혁명을 촉진하였다.

와트 증기 기관


면직물 공업 발전을 중심으로 철, 기계, 석탄, 수송 등 산업 전반에 걸쳐 기술 혁신이 이루어졌다.[14] 면제품 생산고는 비약적으로 증대하여 19세기 초 영국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제1위가 되었다. 이 면직물 공업의 발전은 그에 관련된 산업 부문에 계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철·기계·석탄의 수요 증대, 저렴한 수송수단의 필요성 등 산업 전체가 자극을 받았다. 영국은 19세기 초에 선철의 생산량과 출탄량에 있어서 세계 제1위를 차지하여, 증기기관이나 직기(織機)에서 볼 수 있는 기계공업의 눈부신 기술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확립은 영국 사회 자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독립된 생산자는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는 임금노동자로 전환되었다. 자본의 격렬한 경쟁은 노임 절하 및 저임금으로 부녀자와 아동을 고용하는 현상을 초래했고, 신흥 공업도시는 난잡한 노동자의 슬럼가를 형성했다. 또한 장시간의 노동은 노동자의 심신에 심한 해독을 끼쳤다. 여기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곤란한 사회문제가 발생한 것이다.[14]

3. 1. 7. 식민지 전쟁

북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은 유럽에서의 대립이 반영된 것이었다. 프랑스는 캐나다, 미시시피 유역에 식민지를 넓혀 영국 식민지를 북쪽과 서쪽에서 포위하는 형태를 취했다. 최초의 영국·프랑스 식민지 간의 싸움은 윌리엄 왕 전쟁이었고, 유럽에서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식민지에서 앤 여왕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조지 왕 전쟁으로, 7년 전쟁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 나타나 이른바 제2차 백년 전쟁이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인디언과의 모피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고, 영국은 농업 식민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결국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40]

3. 1. 8. 미국의 성립

7년 전쟁 이후, 영국 본국은 식민지에 대한 중상주의 정책을 강화했다. 이는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영국은 7년 전쟁에 들어간 막대한 비용을 식민지에 부담시키려 했고, 이는 식민지 주민들에게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했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사상이 퍼져나갔다.[1]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계기로 본국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보스턴 시민에 대한 징벌적 조치와 퀘벡법 제정은 식민지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1774년 대륙회의는 본국 정부에 완화를 요청했지만, 렉싱턴 전투에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1]

독립운동은 온건파와 급진파의 대립 속에서 진행되었고, 점차 급진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독립선언과 연합 규약을 거쳐 국가 연합이 이루어졌다. 혁명은 최종 단계에서 보수파가 다시 지도권을 잡았고, 헌법 제정을 통해 연방 정부가 수립되었다.[1]

3. 1. 9. 프랑스 혁명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수채화, 1789년 작


프랑스는 18세기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 참여했지만, 이로 인해 국가 재정 위기가 심화되었다. 또한, 루이 14세위그노를 국외로 추방하면서 산업 발전이 크게 저해되었다. 18세기 후반, 중농주의자들은 곡물 거래와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며 봉건적 제약 철폐를 주장했다. 길드적 규제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매뉴팩처가 각지에 등장하고 있었다.

1774년 재무총감에 임명된 튀르고는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제거하려 했다. 1776년 '여섯 가지 칙령'을 통해 농민을 농노적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서 길드제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의 자유를 보장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봉건 귀족과 특권 상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리옹에서는 견직물 직포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빈번하게 발생했다.

귀족 계급은 사제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렸으나,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대검귀족과 법복귀족으로 나뉘었지만, 대부분의 상류 귀족은 궁정에 기생하며 영지 경영에 무관심하고 나태한 생활을 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정과 귀족 대부분도 재정적 곤경에 빠져 농민 착취를 강화했고, 이는 농촌을 황폐화시켰다. 계몽 사상가들은 이러한 모순된 사회 제도에 대한 비판을 통해 합리적인 사회 제도 출현을 선동했다.

처형되는 루이 16세


루이 16세는 튀르고를 등용하여 재정 위기를 타개하려 했으나, 궁정과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후 네케르를 기용했으나, 아메리카 독립 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해 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칼론, 브리엔을 기용했으나, 개혁은 특권 신분의 반항으로 실패했고, 1788년 삼부회 소집이 결정되었다. 1789년 6월 삼부회는 국민의회로 발전하여 입헌 왕정을 추구했으나, 군대의 의회 탄압 시도는 바스티유 습격을 초래했고, 시민 봉기에 굴복했다. 1791년 6월 20일 왕가가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다 실패한 바렌느 사건이 발생했고, 루이 16세는 1791년 헌법을 승인해야 했다.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14]

3. 1. 10. 나폴레옹의 등장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총재 정부가 성립되었으나, 프랑스 국내는 불안정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하고,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통해 제1통령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황제로 즉위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대륙 봉쇄령을 내렸으나, 러시아 원정 실패로 몰락했다.

3. 1. 11. 오스만 투르크의 쇠운

18세기 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러시아의 압력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초 아흐메트 3세는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치렀다.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의 나머지와 소(小)왈라키아, 북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에 빼앗겼다. 이후 '튤립 시대'라 불리는 평화 시기가 있었으나, 1730년 예니 체리의 반란으로 아흐메트 3세는 퇴위당하고 술탄의 폐립이 반복되었다. 1736년부터 1739년까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침입했으나 프랑스의 지원으로 격퇴했다.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2세 즉위 후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강화되었다. 1768년부터 1774년까지의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패배하고, 1774년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의 길을 열었고, 오스만 제국의 국제적 지위는 낮아졌다. 러시아는 크림 한국을 병합하고, 1787년부터 1791년까지의 전쟁으로 도니에스트르 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42]

3. 2. 서아시아

사파비 왕조의 번영기가 지나고, 이란은 20세기까지 긴 쇠퇴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18세기는 페르시아 문학과 문화에 있어 가장 발전이 더딘 시기였다. 사파비 왕조 제9대 왕 후세인(재위 1694~1722)은 재정난으로 농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불만을 샀다. 1722년, 이러한 혼란을 틈타 아프간족이 침입하여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1729년까지 이란을 지배했다.[14]

사파비 왕조를 도와 아프간족을 물리친 나디르 쿨리는 1736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나디르 샤라 칭하고 아프샤르 왕조를 세웠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복속시키고 북인도를 침략했으며, 중앙아시아의 보하라 한국과 히바 한국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1747년 그가 암살당하면서 이란은 다시 분열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독립하여 아프간족의 민족적 독립을 이루었다. 이란에서는 카림칸이 호라산을 제외한 전국을 통일하여 젠드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젠드 왕조는 반세기도 지속되지 못했고, 1779년에 자립한 카자르 왕조가 18세기 말에 젠드 왕조와 아프샤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18세기 초 우즈베크족에 의해 코칸트 한국이 건국되었다.[14]

3. 3. 인도

무굴 제국의 통일이 무너지고 있을 무렵, 영국프랑스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에서의 세력 다툼을 벌였다. 초기에는 조제프 프랑수아 뒤플렉스가 이끄는 프랑스가 우세했지만, 클라이브의 활약으로 영국 세력이 회복되었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확립했다.[14]

동인도 회사는 마드라스, 벵골 등에서 인도 토후(土侯)로부터 지세 징수권을 획득하며 지배권을 강화했다. 이에 인도인들은 마이소르 전쟁, 마라타 전쟁, 시크 전쟁 등 반영(反英)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하이데라바드나 마라타가 마이소르 저항 진압에 협력하고, 마라타 제후(諸侯)들이 영국 세력을 이용해 세력 다툼을 벌이는 등, 통일된 지도력과 조직이 부족하여 반영 투쟁은 각기 격파되었다. 19세기 중반 시크 교국(敎國)의 반항을 마지막으로 영국 세력이 인도 전역을 장악했다.[14]

동인도 회사는 무굴 황제와 제후로부터 징세권(徵稅權)을 획득하고, 황제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지배 지역을 확대했다. 1774년 레귤레이팅법(法)으로 영국 본국의 회사 감독권이 강화되었고, 벵골 지사(知事)는 총독(總督)이 되었다(초대 총독은 헤이스팅스). 1793년의 영구지조(永久地租) 설정(자민다르)과 1813년 동인도 회사의 인도 무역 독점권 폐지는 농촌 파괴와 영국 상품 유입을 가속화했다.[14]

3. 4. 동남아시아

청나라는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동남아시아에 진출했다. 베트남에서는 서산당의 난 때 남정군(南征軍)을 보냈고, 이후 성립된 완(阮) 왕조를 베트남 국왕에 봉했다. 시암의 차크리 왕조와 미얀마의 알라웅파야 왕조 역시 청나라에 의해 각각 시암 국왕과 미얀마 국왕에 봉해져 속국이 되었다. 이러한 청나라의 종주권은 훗날 복잡한 국제 문제를 야기했지만, 18세기 당시에는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다.

유럽 국가 중에서는 네덜란드가 자바 섬 정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8세기 말에는 자바 섬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고, 이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성립으로 이어졌다. 반면, 인도에서 영국에 패배한 프랑스는 완 왕조의 통일을 지원하며 인도차이나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그쳤다.

3. 5. 북아시아

청은 준가르 부를 정복하고 외몽골, 신장(新疆), 티베트, 칭하이(靑海) 등지로 영토를 확장했다. 이 지역들은 회유책을 통해 자치가 허용되었지만, 중앙의 이번원(理藩院)이 통괄하였다. 러시아캬흐타 조약을 통해 외몽골 방면으로 진출했고, 17세기 말부터 캄차카를 영유하며 알래스카 방면으로도 진출했다. 이로써 청은 국경을 확보하고 북아시아 진출을 과시하였으며, 러시아 또한 시베리아를 확보하고 동북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3. 6. 중국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걸쳐 전성기를 맞이하며,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옹정제 시기에 시행된 지정은제는 세역 제도를 안정시켰고, 지방 재정 개혁은 국력을 강화하여 건륭 시대에 청의 최전성기를 이루게 했다.

명 말부터 이어진 소농 경영의 안정화와 향신이라 불리는 사회 지배 신분의 확립은 청 지배의 기반이 되었다. 청은 한인 지식층을 회유하기 위해 학예를 장려하고 대규모 편찬 사업을 추진했으나, 동시에 문자의 옥을 일으켜 반청 사상을 탄압했다. 유학에서는 고증학이 발달했으나, 경세학으로서의 유교 사상은 소멸되었다.

청의 지배 아래 중국 사회는 봉건 사회로서 가장 성숙한 시기를 맞이하였고, 대외 무역을 광둥(廣東) 한 항구에 한정하는 자족 폐쇄적인 체제 아래 동아시아에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4. 19세기

19세기는 미국 독립 전쟁프랑스 혁명으로 시작되어 1848년 2월 혁명까지, 절대주의가 무너지고 시민 사회가 발전한 시기이다. 시민 혁명은 자유주의와 국민주의를 실현했으며, 이는 근대 국민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빈 체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했으나, 혁명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산업 혁명자본주의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고 노동자 계급을 형성했으며,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야기했다. 19세기 중엽에는 과학이 생산 기술과 직접 결합되지 않았고, 과학 사상은 18세기적인 법칙적 과학 사상에 머물러 있었다. 유럽 이외의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는 전통적인 사회 질서가 유지되었으나, 유럽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건륭제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고, 관료 부패와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백련교도의 난 등 반청 폭동이 발생하고,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문호를 개방했다. 1856년 애로호 사건에서도 영국·프랑스에게 패배하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은 1802년 완조(阮朝)가 성립되어 중앙집권과 공전제(公田制)를 시행하며 최대 제국을 이룩했으나, 프랑스가 남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1900)을 형성했다. 미얀마는 알라웅파야 왕조가 영국-미얀마 전쟁에서 패배하여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타이는 라마 4세, 라마 5세의 근대화 노력으로 독립을 유지했다. 말레이에서는 영국이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협 식민지를 건설했다.

서아시아에서 19세기의 이란은 카자르 왕조가 통치했으나, 영국과 러시아의 침략으로 쇠퇴했다. 두 차례의 러시아-페르시아 전쟁에서 패배하여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했다.[1] 러시아의 지지로 아프가니스탄 진출을 시도했으나 영국의 반대로 실패했다.[1] 영국과 러시아 상품 수입 증가로 수공업자와 농민이 몰락하고, 바브 교도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후 이란의 중산 계층은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카자르 왕조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1]

오세아니아에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유형식민지로 시작되었으나,[1] 자유이민과 목양업이 시작되면서 갈등이 발생했다.[1] 1827년 영국은 오스트레일리아 전체를 차지한다고 선언하고, 스완강 연안에 서(西)오스트레일리아, 세인트빈센트만 연안에 남(南)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를 건설했다.[1] 1851년 금광이 발견되기 전까지 목양업 중심으로 성장했다.[1]

미국은 19세기 전반 서부 지역을 병합하여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루이지애나 매입(1803), 플로리다 획득(1819)으로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났다. 1830년대부터 서진(西進) 운동이 본격화되었고,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 Destiny)' 사상을 내세웠다. 멕시코 전쟁(1848)으로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획득하고, 골드 러시로 인구가 급증했다. 영토 확대는 남부와 북부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노예제 면화 농장은 서부에 노예제를 확대하려 했고, 북부는 서부에 시장을 확대하고 새로운 자유주(自由州)를 만들어 정치적, 경제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4. 1. 유럽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회의를 통해 빈 체제가 성립되었으나, 이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2월 혁명으로 붕괴되었다.[1]

발칸반도에서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슬라브계 민족들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러시아는 크림 전쟁러시아-튀르크 전쟁을 통해 발칸반도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베를린 회의를 통해 러시아의 발칸 진출은 좌절되었고, 발칸 지역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1]

이탈리아에서는 카부르가 이끄는 사르데냐 왕국가리발디의 활약에 힘입어 통일을 주도했다.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고, 1870년 교황령을 점령함으로써 통일이 완성되었다.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며 통일을 주도했다. 1871년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하는 독일 제국이 수립되었다.

4. 1. 1. 빈 체제

나폴레옹 전쟁 이후 1814년의 파리 조약을 바탕으로 빈 회의가 개최되어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빈 체제는 2월 혁명으로 완전히 분쇄되기까지 약 30여 년간 유럽을 지배하면서 각국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억압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의 후계자인 샤를 10세의 보수 정치에 반발하여 7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벨기에, 이탈리아, 폴란드 등지에 영향을 미쳤다. 혁명으로 7월 왕정이 세워졌으나 부르주아 상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권이었기 때문에 민주적 개혁은 일부에 국한되었다. 산업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는 7월 왕정에 불만이 컸으며, 특히 온갖 탄압을 받은 노동자는 부르주아 정권에 실망하여 민주주의적 요구와 함께 사회주의적 요구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4. 1. 2. 1848년의 유럽 혁명

7월 왕정 시대 프랑스에서는 산업 혁명이 급속도로 진전되어 신흥 부르주아지가 대두했으나, 이들은 정치적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이에 신흥 부르주아지는 선거법 개혁을 요구하며 민주적 입헌정과 공화정을 갈망했다. 1847년 성립된 기조 내각이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하자, 개혁파는 '개혁연회(改革宴會)'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에서 열린 전국 개혁연회에 대한 금지령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격렬한 시가전으로 확대되었고, 이는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2월 24일 왕이 퇴위하고 부르주아 공화파와 사회주의자에 의해 임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다.[1]

4. 1. 3. 발칸 문제

발칸반도는 15세기 이래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으나, 19세기 후반 슬라브계 여러 민족의 독립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유럽 열강의 대립까지 얽혀 복잡한 국제 분쟁 문제가 발생하였다. 18세기부터 남진 정책을 추진해 온 러시아는 크림 전쟁을 일으켜 발칸반도로 진출하려 했으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후 발칸의 슬라브계 민족들은 단결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범슬라브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러시아는 이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며 발칸 진출을 시도했다.

1870년대에 발칸 각지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열강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1877년 러시아는 단독으로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여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출을 우려한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반대하였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중재로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어 러시아의 발칸 진출은 다시 좌절되었다. 이후 발칸 지역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았으나, 열강의 대립은 계속되었고 독립한 여러 나라들도 강대국의 영향력에 좌우되어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발화점이 되었다.[1]

4. 1. 4. 이탈리아 통일

중세 이래 분열을 계속하던 이탈리아에서도 19세기에는 민족 통일 움직임이 강해졌다. 1848년 혁명에서 청년 이탈리아당은 자유로운 이탈리아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활약하였으며, 사르데냐의 왕인 카를 6세가 통일전쟁을 일으켰으나 오스트리아군에게 제압돼 실패했다. 이로부터 통일의 주도권은 사르데냐의 신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밑에서 재상이 된 카부르에게 옮겨졌다. 카부르는 산업을 육성하여 국력 강화를 꾀하였고, 크림 전쟁에 출병하여 프랑스의 지지를 얻었다. 사르데냐는 1859년에 나폴레옹 3세의 후원을 얻어 오스트리아와 싸워 롬바르디아를 획득하고 나아가 중부 이탈리아를 병합하였다. 한편 청년 이탈리아당의 가리발디나폴리 왕국을 정복하여 사르데냐의 왕에게 헌상하였다. 이렇게 하여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초대 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어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의 전쟁을 계기로 베네치아를 병합하고,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에 편승해서 교황령(敎皇領)을 점령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을 완성하였다.

4. 1. 5. 독일의 통일

1848년 자유와 통일을 목표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민 의회가 내부 대립과 반혁명파의 세력 회복으로 실패한 후, 통일 주도권은 프로이센으로 넘어가 위로부터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프로이센에서는 1861년 빌헬름 1세가 즉위하고 융커 출신의 비스마르크가 수상으로 기용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며 노동운동을 통제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철혈정책(鐵血政策)을 강행하였으며, 의회를 무시하고 군비를 확장했다. 우선 1864년 오스트리아와 협력하여 덴마크와 싸워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탈취하였다. 이어서 1866년에는 이 두 주의 처분을 둘러싸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일으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다음 해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북독일 연맹을 성립시켰다. 통일 실현을 위한 마지막 장애는 프랑스의 방해였으나,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프랑스를 격파하여 남부 독일을 병합하고 1871년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하는 독일 제국을 수립하였다.

4. 2. 미국

19세기 전반, 미국은 서부 지역을 병합하여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구입하고 1819년 에스파냐로부터 플로리다를 획득하여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났다. 1830년대부터 1840년대에 걸쳐 서쪽으로 진출이 계속되었다. 면화 재배 중심지가 멕시코만 연안 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남부 면화 농장주들은 텍사스에서 새로운 토지를 찾았고, 노예를 투입했다. 멕시코가 제한을 가하자, 1836년 텍사스 주민들은 텍사스 공화국을 세웠고, 1845년 포크 대통령 시대에 미국에 병합되었다.

1830년대는 서진(西進) 운동의 발판이 마련된 시기였다. 유럽으로부터 이민 증가, 애팔래치아산맥 서쪽 교통 발달, 미시시피강을 항해하는 기선 출현 등으로 서부 개척이 촉진되었다. 영토 확장론자들은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당연한 숙명이라는 '매니페스트 데스티니(Manifest Destiny)' 사상을 내세웠다. 1848년 멕시코 전쟁으로 미국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획득했다. 이 전쟁 중에 오리건도 북위 49도선을 경계로 미국 영토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골드 러시로 인구가 급증했다. 금의 대량 산출은 미국 자본주의 경제에 번영을 가져왔다.

한편, 미국의 영토 확대는 남부와 북부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노예제 면화 농장은 새로운 토지를 필요로 했고, 서부 지역에 노예제를 확대하려 했다. 북부의 공업 발전은 서부에 시장을 확대하고 새로운 자유주(自由州)를 만들어 정치적, 경제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려 했다. 서부의 발전은 19세기 미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3.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는 18세기 후반 산업혁명으로 인해 늘어난 범죄자들을 가두는 유형식민지로 시작되었다.[1] 1793년부터 자유이민이 시작되면서 형기가 끝난 범죄자들과 복잡한 대립이 발생했다.[1]

경제적으로는 19세기 초 군인 출신자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양을 기르는 목양업을 시작했다.[1] 1808년 영국 본국에서 보낸 총독과 식민지 기업가 사이에 갈등이 생겨 반란이 일어났다.[1] 이후 라클란 머쿼리 총독 시대에 부루 산맥을 넘어가는 도로가 만들어져 서부로 가는 길이 쉬워졌다.[1] 형기가 끝난 사람들과 자유이민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문제로 자유이민 반대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1]

1827년 영국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전체를 차지한다고 선언하고, 동남부의 스완강 연안에 새로운 식민지인 서(西)오스트레일리아를 세웠다.[1] 1835년과 1837년에는 세인트빈센트만 연안에 남(南)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를 건설했다.[1] 1851년 금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목양업을 중심으로 식민지가 빠르게 성장했다.[1]

4. 4. 서아시아

19세기의 이란은 카자르 왕조가 통치하였으나, 유럽 열강의 아시아 진출을 둘러싼 다툼 속에 쇠퇴하였다. 영국은 인도를 경영하기 위해 이란에 접근했으나, 프랑스가 1807년 이란과 외교 관계를 맺고 군사 사절단을 파견하자, 영국은 1814년 이란과 조약을 체결했다.

이란은 그루지야를 두고 러시아와 대립하여 1804년부터 1812년, 1826년부터 1827년까지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두 번 모두 패배하여 1828년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 조약으로 양국 국경이 확정되고 통상 규정이 정해졌으며, 러시아에 치외법권을 인정했다. 치외법권은 이후 1세기 동안 이란을 괴롭혔다.[1]

러시아에 패배한 이란은 러시아의 지지를 받아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 세력이 커져 인도가 위협받을 것을 우려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완충 지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란과 싸워 1857년 아프가니스탄의 독립을 승인하게 했다.[1]

투르크만차이 조약과 1830년 영국과의 직접 무역 재개로 영국과 러시아 상품 수입이 늘면서, 수공업자와 농민 중 몰락하는 이들이 많았다. 카자르 왕조 정치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커져 1849년부터 1852년까지 바브 교도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이 진압된 후, 이란의 중산 계층, 특히 상인들은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카자르 왕조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했다.[1]

4. 5. 중국

건륭제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고, 관료 부패와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 백련교도의 난 등 반청 폭동이 발생하고,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문호를 개방했다. 이어 1856년 애로호 사건에서도 영국·프랑스에게 패배하여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4. 6. 동남아시아

베트남에서는 1802년 완조(阮朝)가 성립되었다. 초대 가륭제(자롱)는 중앙집권을 확립하고 공전제(公田制)를 시행하였으며,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하였다. 초기부터 프랑스 세력이 강하게 들어와 그리스도교 포교가 왕성하였다. 프랑스는 남(南)베트남을 직할식민지로 하고(1858), 이를 발판으로 라오스·캄보디아로 진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1900)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미얀마에서는 18세기 중반에 성립된 알라웅파야 왕조가 북부의 아바를 중심으로 타이 등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고 있었으나, 19세기 초에는 인도 지배를 확립한 영국이 이에 눈을 돌려, 1824, 1852년의 영·미얀마 전쟁을 통해 해안부(海岸部)를 병합하였다. 1885년의 세 번째 전쟁에 의해 미얀마 전토가 병합되어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타이는 1782년 현(現) 방콕 왕조가 성립되었다. 19세기 중엽 라마 4세 몽꿋왕, 라마 5세 쭐라롱꼰왕이 왕위에 올라 적극적으로 근대화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밀려드는 서구 열강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소극적 독립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말레이에서는 1786년 이래 영국이 페낭 섬을 근거로 말레이 반도에 진출하였으나 1824년 런던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와 조정하여 본격적 지배에 나섰고, 또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해협(海峽)식민지를 건설하였다.

5. 세계 대전

20세기는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그 모순이 심화되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발발한 시기이다. 러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적 모순이 심화되고, 러시아에서는 제1차 혁명이 일어났다. 식민지 민족 운동이 전개되고, 터키, 인도, 중국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삼국 협상과 삼국 동맹의 대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은 4년 반 동안 30여 개국이 참가한 총력전이었으며, 러시아 혁명을 초래하고 미국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했다. 전후 국제 연맹이 창설되었으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파시즘이 등장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었으며, 1946년 국제 연합이 성립되고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민족이 독립하면서 제3세계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5. 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6월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 암살 사건을 계기로, 1914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유럽 강대국들은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과 협상국(영국, 프랑스, 러시아)으로 나뉘어 전쟁에 돌입했다.[40] 이는 독일과 영국의 대립, 알자스-로렌 문제를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대립, 발칸반도에서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민족주의적 대립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서부 전선에서 먼저 승리한 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를 격파하려 했으나, 1914년 9월 마른 전투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동부 전선에서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의 진격을 막았지만 결정적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 1914년 12월 이후 서부 전선은 스위스 국경에서 북프랑스를 거쳐 벨기에 해안까지, 동부 전선은 발트해 리가만에서 흑해까지 이어지는 참호전 양상으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서부 전선에서는 참호와 모래 주머니가 기관총과 대포를 방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1914–1918)


연합군이 독일의 방어선을 향해 폭격하는 모습


1917년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은 전황의 전환점이 되었다. 서부 전선에서는 베르됭 전투솜 전투 등 대규모 공세가 있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1915년 이탈리아가 협상국에 가담하는 등 30여 개국이 참전하며 전쟁은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전쟁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으로 종결되었다. 4년 반 동안 6천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3천3백만 명의 사상자(사망자 9백만 명)가 발생했으며, 3천3백억 달러의 전비가 소요되었다. 독가스, 전차, 비행기 등 신무기가 등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여러 시기; 1914년 7월 28일(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부분 동원령을 내림), 1914년 8월 1일(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 1914년 8월 3일(독일이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에 선전포고), 1914년 8월 4일(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1914년 12월(영국과 독일의 크리스마스 휴전), 1915년 12월(프랑스와 독일의 크리스마스 휴전), 1916년 12월(마그다바 전투), 1917년 12월(영국군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예루살렘 점령), 1918년 11월 11일(제1차 세계 대전 종전: 독일이 연합국과 휴전 협정 체결).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과 중앙 연합국
연합국 및 지역
중앙 연합국 및 식민지 또는 점령 지역
중립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화학전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독면을 착용한 이탈리아 ''아르디티'' 부대.

5. 2. 러시아 혁명

러시아에서는 1861년 농노 해방 이후 자본주의가 발전했지만, 엄격한 전제정치 아래 국민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회 혁명 운동이 격화되었고, 나로드니키 운동이 실패한 후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가 자주 발생하여 사회 불안이 커졌다. 19세기 말에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다.[43]

제1차 세계 대전이 장기화되면서 국민 생활은 혼란에 빠졌고, 니콜라이 2세의 우유부단한 정치와 궁정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1917년 3월, 민중 봉기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달성되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민중의 평화 요구를 외면하고 전쟁을 계속했다. 한편, 혁명을 이끈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이 만든 소비에트는 각지로 확산되었고, 농민 소비에트도 만들어졌다. 소비에트 내에서는 농민 기반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주도권을 잡았고, 볼셰비키의 세력은 약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4월 테제'를 통해 소비에트가 혁명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이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며 7월에 무장 시위를 벌였으나 진압되었다. 9월에는 케렌스키 정권 아래에서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조직한 적위군이 이를 진압했다. 이후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가 진행되었고, 농민들은 토지 문제 해결을 볼셰비키에게 기대하게 되었다. 11월, 볼셰비키는 무장 봉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43]

레닌


러시아 혁명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으로, 차르 전제정치를 무너뜨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건설로 이어졌다. 니콜라이 2세 퇴위 후 러시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1917년 10월에는 ''붉은'' 세력의 혁명이 발생하여 붉은 근위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구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무력 장악을 시작했다.

1917년,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중앙 세력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43] 이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의 광대한 영토가 독일 제국과 오스만 제국에 할양되었고, 이는 민족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결정은 빌헬름 2세의 독일 외교부 후원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독일 외무부가 레닌의 페트로그라드 귀환을 후원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했다. 서방 연합국은 러시아의 전쟁 철수, 러시아-독일 동맹 가능성, 볼셰비키의 외채 채무 불이행 위협 등을 이유로 볼셰비키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러시아 내전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시각. 왼쪽은 백군의 선전물이고, 오른쪽은 볼셰비키의 선전물이다.


러시아 내전에서 11개국 이상이 백군 운동을 지지하여 개입했다. 여기서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고 있다.


러시아 내전러시아 임시정부 붕괴 후 소비에트가 볼셰비키 당의 지배 하에 권력을 장악하면서 발생한 다자간 전쟁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구 러시아 제국군은 해산되었고, 자원 기반의 붉은 근위대가 볼셰비키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으며, 체카의 무장 부대가 증강되었다. 농촌 농민에 대한 징병이 시행되었고,[45] 붉은 군대 징병 부대에 대한 반대는 인질을 잡고 사살하는 방식으로 강제되었다.[46] 전 차르주의 장교들은 "군사 전문가"(''voenspetsy'')로 활용되었고,[47] 충성을 보장하기 위해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48] 전쟁 초기 붉은 군대 장교단의 4분의 3은 전 차르주의 장교였으며,[48] 전쟁 말기에는 83%가 전 차르주의 군인이었다.[49]

주요 전투는 볼셰비키붉은 군대와 백군 사이에서 벌어졌다. 연합군을 비롯한 많은 외국군이 붉은 군대와 싸웠고, 많은 외국 자원봉사자들이 양측에서 싸웠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녹색 군대, 우크라이나 무정부주의 반란군과 흑위대, 그리고 웅게른 폰 슈테른베르크와 같은 군벌을 포함한 다른 민족주의 및 지역 정치 집단도 전쟁에 참여했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진행되었다. 주요 군사 작전은 1922년 10월 25일 붉은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면서 종식되었다. 백군의 마지막 거점은 태평양 연안의 아야노-마이스키 지역이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1920년 크림 반도에서 표트르 블랑겔 장군이 패배하면서 끝났지만, 특정 지역에서는 1923년까지 저항이 계속되었다.

1920년대 초는 혁명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있어 변혁의 시기였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1922년 몰락한 러시아 제국의 후계 국가로 선포되었다.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연사했고, 요셉 스탈린이 계승했다.

5. 3. 베르사유 체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과 독일 간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로 성립된 전후의 국제 질서를 말한다. 국제 연맹의 설치, 각종 평화 회의나 군축 회의 개최 등 국제 협력의 정신도 많이 보였지만 조약 성립 당초부터 이미 얼마간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함이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을 유발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즉 윌슨의 14개 조약에서는 ‘무병합(無倂合)·무배상(無賠償)’을 주장했으나 실제로는 영국·프랑스 등 전승국의 이익이 우선하여 패전국 독일 등에 전쟁 책임을 총체적으로 지워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유럽 파급을 두려워하여 대소련 방위 체제 성격도 띠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 대소간섭 전쟁의 실패 후, 소비에트 연방의 승인, 도즈안, 영안에 기초를 둔 독일 경제 부흥의 전조(前兆)가 보인 것 등으로 일시적 안정을 맞이한 시기도 있었다. 1929년에 시작한 대공황에 의하여 블록 경제가 성립했고, 나치스가 대두할 무렵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에도 영향을 입어 이 체제는 붕괴됐다.

5. 4. 대공황

1929년 가을, 미국 뉴욕의 주식 시세가 대폭락하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50][51] 이는 미국에 의존하던 여러 나라에 파급되었고, 농업 공황을 동반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각국에서 물가 폭락, 공장 폐쇄, 임금 인하, 해고, 금융 악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생산은 45% 가까이 감소하고 실업자는 2천5백만에서 5천만 명에 달했다.

이 공황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녔다.

  • 공업, 농업, 은행, 신용 등 모든 형태의 경제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강대한 독점기업도 파산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은 뉴딜 정책을 추진했고, 영국 등은 폐쇄적인 블록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반면, 일본, 독일, 이탈리아는 전쟁과 파시즘으로 해결책을 모색했다.

5. 5. 나치의 등장

세계 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파괴되고 실업자가 500만 명을 넘어서는 등 사회 불안이 심화되면서 민중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절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가 대두했다. 나치스는 베르사유 조약 반대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선전으로 모든 계층의 편을 드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뮌헨 쿠데타의 실패를 딛고 재기하였다. 그들은 정책의 모순을 볼셰비즘유대인 탓으로 돌리고, 대자본가와 공산주의 모두에 반감을 가진 중산 계급의 불만을 이용하여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나치스는 1928년 의회 의석이 12석에 불과했지만, 1932년에는 230석을 얻어 제1당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선거에서 의석이 줄고 공산당 세력이 증대하자, 혁명을 두려워하는 자본가와 군부는 나치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933년 히틀러 내각을 성립시켰다. 나치스는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1933년 총선거를 앞두고 국회 방화 사건을 일으켜 공산당을 탄압하고, 자유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해산시켰다. 1934년 히틀러는 총통(總統)으로 불리며 나치스의 독재를 확립하였다. 정권을 잡은 나치스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였고, 이로써 베르사유 체제가 무너졌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혼란 속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이 1922년부터 정권을 잡고 있었다. 파시스트당은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고, 노동조합과 다른 정당을 해산시켰다. 반(反)파시스트 측에서는 마테오티와 같은 용감한 저항도 있었으나, 내부 분열과 대립으로 효과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1927년 파시스트 지배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세계 공황으로 이탈리아가 어려움에 빠지자 파시스트 정권은 군비를 확장하고 침략을 통해 활로를 찾으려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양 파시즘 국가는 급속히 가까워져 1936년 ‘베를린-로마 추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5. 6.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인 시작이다.


일반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틀 뒤, 영국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전투는 폴란드에 한정되었다. 당시 비밀 조항이었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따라, 소련은 1939년 9월 17일 독일에 합류하여 폴란드를 정복하고 동유럽을 분할했다.[58][59][60] 연합국은 초기에는 폴란드,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및 영국 연방 국가들(예: 영국령 인도)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영국이 직접 통제했다. 이들 국가는 모두 1939년 9월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추축국(검정)의 확장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파랑)과 코민테른(빨강)과 싸우고 있다. 일본 제국삼국 동맹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는 전쟁 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가짜 전쟁"으로 알려진 전투의 소강 상태 이후, 독일은 1940년 5월 서유럽을 침공했다. 6주 후, 이탈리아의 공격을 받은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고, 독일은 그 후 영국을 정복하려는 시도가 실패했다.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상호 방위 협정인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했고, 추축국으로 알려졌다. 9개월 후인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을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소련이 연합국에 합류하게 했다. 독일은 이제 두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이는 실수로 판명되었다. 독일은 영국 침공에 성공하지 못했고 전쟁은 추축국에 불리하게 돌아섰다.

점령된 폴란드에 위치한 악명 높은 독일 강제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에서 미국을 공격하여 미국을 연합국 편에 끌어들였다. 중국도 연합국에 합류했고, 세계의 대부분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중국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게릴라전을 통해 일본군을 공격했다. 1942년 초 주요 교전국의 정렬은 다음과 같았다. 영국 연방, 소련, 미국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싸웠고, 중국, 영국 연방, 미국은 일본과 싸웠다. 영국, 미국, 소련, 중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강대국의 수탁자"로 불렸으며, 연합국 선언에서 연합국의 "빅4"로 인정받았다. 이 네 나라는 연합국 세력의 "4대 경찰" 또는 "4대 보안관"으로 간주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승전국이었다. 전투는 유럽 전역, 북대서양, 북아프리카 전역, 동남아시아 전역, 중국 전역, 태평양 전역, 일본 상공에서 벌어졌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는 모습.


히로시마에 대한 핵 공격에 관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연설 발췌문.


이탈리아는 1943년 9월 항복했고, 북부는 독일이 점령한 괴뢰 국가로, 남부는 연합국 친화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 독일은 1945년 5월 항복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 이후, 일본이 항복하면서 1945년 9월 2일 전쟁이 종식되었다.

약 6,200만 명이 전쟁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추정치는 매우 다양하다. 모든 사상자의 약 60%는 질병, 기아, 대량 학살(특히 홀로코스트) , 공습으로 사망한 민간인이었다. 소련중국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소련의 사망자 수는 약 2,3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중국은 약 1,000만 명이 사망했다. 폴란드보다 인구 비율이 더 많이 손실된 국가는 없었다. 전쟁 전 인구 3,480만 명 중 약 560만 명(16%)이 사망했다.

홀로코스트(대략 "전소"를 의미함)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나치 정권이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기타 "원치 않는" 사람들을 고의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살한 것이다. 전쟁 초부터 발생할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 계획이 나중에 생겨났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어쨌든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수정의 밤''(유리의 밤)과 같이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 왔다. 나치는 선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일반 독일인들 사이에서 반유대주의적 감정을 부추겼다.

6. 정의

시대 구분으로서의 근대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시작되는 주권 국가 체제, 시민 혁명에 의한 시민 사회, 산업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 나폴레옹 전쟁에 의한 국민 국가 형성 등 18세기 후기 이후 유럽에서 성립되어 현대 세계를 특징짓는 사회의 모습이다.

19세기 이후, 유럽에서 완성된 이러한 사회 시스템은 일본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 이외의 여러 국가에도 전파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는 지구상 거의 모든 사람이 배타적인 주권 국가의 국민이 되고, 국민들이 모여 만든 국가가 구성원으로 참가하는 국제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세계사에서의 근대라고 하며, 근세 이전 단계에 있는 사회를 근대적인 사회로 바꾸는 것을 ‘근대화(modernization)’라고 한다.[1]

6. 1. 후기 근대 시대의 종결 가능성

후기 근대 시대의 종결 여부와 그 시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후기 근대 시대가 실제로 종결되었다면, 현재의 현대 시대를 설명하는 다양한 개념이 제시되고 있다.

  • 정보화 시대: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역사 시대로, 산업 혁명으로 확립된 전통적인 산업에서 정보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로의 급속한 시대적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1]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근대성 이후의 사회, 경제, 문화적 상태 또는 조건을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은 근대성이 20세기 후반(1980년대 또는 1990년대 초)에 끝나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서사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며, 계몽주의 합리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한다.[9][10]
  • 탈산업사회: 경제의 서비스 부문이 제조 부문보다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사회 발전 단계이다. 알랭 투렌이 처음 사용했으며, 포드주의 이후, 정보 사회, 지식 경제, 탈산업 경제, 액체 근대성, 네트워크 사회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11]

6. 2. 가능한 하위 구분

후기 근대 시대의 종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실제로 종결되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후기 근대 시대가 종결되었다고 가정할 때, 현재 시대를 지칭하는 다양한 용어들이 있다.

  • 정보화 시대는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역사 시대로, 산업 혁명으로 확립된 전통 산업에서 정보 기술 기반 경제로의 급격한 변화를 특징으로 한다.[1][2][3][4]
  • 일부 연구자들은 1950년부터 시작된 환경 문제에 대한 우려를 후기 근대 시대의 종말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신했던 근대적 자신감의 종말을 의미한다.[5]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근대성에 존재하는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상태 또는 조건을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은 근대성이 20세기 후반(1980년대 또는 1990년대 초)에 끝나고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며, 다른 일부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포함하여 근대성이 연장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 다른 일부는 근대성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끝났다고 믿는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조건은 모더니즘의 진보적 정신 상태와 대조적으로, 퇴행적 고립주의와 같이 선형적이거나 자율적인 상태로 기능할 수 없는 문화로 특징지어지기도 한다.[6]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적 입장 또는 담론 방식으로,[7][8] 거대서사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를 특징으로 한다.[9] 17세기 계몽주의 합리성과 관련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한다.[10]

  • 탈산업사회는 경제의 서비스 부문이 제조 부문보다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사회 발전 단계이다. 알랭 투렌이 처음 사용했으며, 포드주의 이후, 정보 사회, 지식 경제, 탈산업 경제, 액체 근대성, 네트워크 사회 등과 같은 유사한 사회학적 개념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경제학 또는 사회 과학 분야에서 연구 설계의 일반적인 이론적 배경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 용어가 사용되면서 경제는 상품 생산에서 서비스 제공으로, 아이디어 생산이 경제 성장의 주요 방법이 된다는 공통적인 주제가 나타났다.[11][12][13]


일반적으로 "근대"는 유럽 열강의 진출로 기존 사회 체제가 변화하거나, 유럽 열강형 신국가가 성립된 이후의 시대로 정의된다. 반면 "근세"는 유럽 열강 진출 이전 또는 유럽 열강형 신국가 성립 이전의 시대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지역의 역사 시대 구분에도 "근세", "근대", "현대" 구분이 사용되지만, 진보사관의 일종인 유물사관 적용 등이 얽혀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며, 시대 구분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유물사관을 적용할 경우 "근세"는 봉건주의 시대, "근대"는 자본주의 시대로 정의되기도 한다.

"근대"는 "현재의 정치 체제나 국제 사회 시대(현대)의 바로 전 시대"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동양사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1945년)을 기준으로 "근대"와 "현대"를 구분한다. 반면 유럽사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1918년)을 기준으로 구분하며, 냉전 종식 후에는 동유럽 혁명(1989년)을 기준으로 나누는 견해도 늘고 있다.

7. 산업 혁명

영국에서 증기 기관 개발은 산업 혁명을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업 혁명은 1780년대에 시작되어 1830년대 또는 1840년대까지 그 영향이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산업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의 성립은 근대를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1]

8. 19세기

시대 구분으로서의 근대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시작되는 주권 국가 체제의 성립, 시민 혁명에 의한 시민 사회의 성립, 산업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의 성립, 나폴레옹 전쟁에 의한 국민 국가의 형성 등, 18세기 후기 이후 유럽에서 성립하여 현대 세계를 특징짓는 사회의 모습으로 상징된다.

19세기 이후, 유럽에서 완성된 이러한 사회 시스템은 일본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 이외의 여러 국가에도 전파되어 전 세계를 덮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배타적인 주권 국가의 국민이 되고, 국민들이 모여 만든 국가가 구성원으로 참가하는 국제 사회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세계사에서의 근대라고 하며, 근세 이전 단계에 있는 사회를 근대적인 사회로 바꾸는 것을 「근대화(modernization)」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근대”는 유럽 열강의 진출에 의해 종래의 사회체제가 전환된 이후의 시대 또는 유럽 열강형의 신국가가 성립된 이후의 시대로 정의된다.

19세기는 미국 남북 전쟁과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노예제가 폐지되고,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도금 시대를 맞이하였다. 셔먼 반독점법과 같은 법률이 제정되어 독점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산업 재벌들의 영향력은 컸다.

찰스 다윈갈라파고스 제도의 핀치새를 진화론의 증거로 사용한 것을 묘사한 그림 (1882).


1921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같이, 양자 역학의 등장과 함께 현대 물리학이 고전 물리학을 대체했다.[27] 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을 창시하여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이러한 발견과 이론은 20세기 과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8. 1. 유럽 제국주의와 제국

19세기와 20세기 초,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 강력한 제국들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영국나폴레옹 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세계 인구의 4분의 1과 지표면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독일은 전기, 강철, 석유를 기반으로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여 자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쟁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중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유럽 식민 지배에 맞선 독립 혁명과 전쟁이 발생했다.

8. 2.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제시된 원문은 미국의 도금 시대에 관한 내용으로, 빅토리아 시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원문을 바탕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8. 3. 프랑스 정부와 갈등

오늘날에는 성문 헌법, 국민 국가와 자본주의라는 근대를 상징하는 사회·경제·국가의 모습이 나타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을 근대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보고, 동로마 제국 멸망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산업혁명까지의 시대를 “근세(초기 근대)”로 하여 “근대”와 구별한다. 그 경우, 큰 전환점이 된 프랑스 혁명의 발발(1789년)이 전환점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부터가 “근대”로 간주된다.

8. 4. 이탈리아 통일

주어진 소스에는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해당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8. 5. 노예제와 폐지

19세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노예 제도가 크게 축소되었다. 아이티 혁명, 영국의 노예제 폐지법, 러시아의 농노 해방, 미국의 노예제 폐지, 브라질의 황금법 등이 노예제 폐지에 기여했다.

8. 6. 아프리카 식민지화

1884년부터 1885년까지 베를린 회의를 통해 아프리카 분할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이는 실질적인 토지 소유권이나 조약 없이도 정당화되었다. 1914년까지 아프리카 대륙 거의 전역이 유럽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라이베리아에티오피아만이 독립을 유지했다.

8. 7. 메이지 일본

일본 역사에서는 메이지 유신(1868년)의 황실에 대한 대정봉환·왕정복고로 "근대"가 시작된다고 보는 설과, 막말의 일미화친조약에 의한 개국(1854년)으로 보는 설 두 가지가 있다.[26]

8. 8. 19세기 미국



도금 시대에는 산업과 인구의 확장으로 인해 미국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남북 전쟁과 재건 시대 이후 미국의 상류층은 엄청난 부를 과시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북동부에 새로운 공장이 건설되어 산업 도시가 만들어졌고, 산업가와 금융가들, 소위 "강도 귀족들"이 소유한 막대한 부가 형성되었다. 존 D. 록펠러의 회사는 새로운 석유 산업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탠더드 오일은 대부분의 경쟁사들을 흡수하거나 파괴하였다.[26]

현대 산업 경제가 만들어지면서 교통 및 통신 기반 시설이 구축되었고, 기업이 주요한 사업 조직 형태가 되었으며, 경영 혁명이 사업 운영 방식을 변화시켰다. 1890년, 미국 의회셔먼 반독점법을 통과시켜 거래를 제한하는 모든 계약, 계획, 거래 또는 음모를 금지했지만, "거래 제한"이라는 문구는 여전히 주관적이었다. 20세기 초가 되자 미국의 1인당 소득과 산업 생산량은 영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국가를 능가하였다. 긴 노동 시간과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 조합을 결성하려고 시도했지만, 법원은 시장을 보호하여 1911년 셔먼 반독점법에 따라 스탠더드 오일 그룹을 "불합리한" 독점으로 선언하고, 스탠더드 오일을 34개의 독립적인 회사로 분할하도록 명령했다.[26]

8. 9. 19세기 과학과 철학



20세기 초, 양자 물리학의 등장과 함께 현대 물리학이 고전 물리학을 대체했다.[27] 수학적 연구가 실험 연구를 대체하고, 방정식을 검토하여 이론적 구조를 구축했다. 구 양자론은 현대 양자 역학 이전의 결과 모음이었지만, 완전하거나 자체적으로 일관되지는 않았다.[28] 고전 역학에 대한 최초의 수정은 양자 역학에 대한 휴리스틱 처방의 모음이었다.[28] 양자 물리학 영역 밖에서는, 마이켈슨-몰리 실험을 통해 고전 물리학의 다양한 에테르 이론들이 무효화되었다. 생물학에서는 다윈주의가 받아들여져 자연 선택 이론에서 적응 개념이 촉진되었다. 지질학, 천문학, 심리학 분야도 발전하여 새로운 통찰력을 얻었으며, 의학에서는 의학 이론과 치료가 발전했다.

1900년대 전후, 계몽주의 철학은 여러 곳에서 도전을 받았다.[29][30][31][32][33] 초기 세속적 전통에서 발전된 현대 휴머니스트 윤리 철학은 합리성을 이용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에 기반,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확인했으며, 종교 경전의 초자연적이거나 신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았다.[34][35] 자유주의적 휴머니스트인 루소와 칸트에게 이성의 보편적 법칙은 모든 폭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휴머니즘은 유신론의 세속적 버전에 불과했으며, 그의 ''도덕의 계보''에서 인권은 약자가 강자를 집단적으로 억제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에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자율적이라는 개념이 무의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욕망에 의해 이끌린다는 개념에 의해 도전받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 삶의 주요 동기 에너지로서 성욕을 재정의하고, 자유 연상, 치료 관계에서의 전이 이론, 무의식적 욕구에 대한 통찰력의 원천으로서의 꿈의 해석을 포함한 치료 기법으로 유명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브라운 운동에 대한 수학적 처리, 아인슈타인 고체의 비열 문제 해결, 요동-소산 정리의 요동과 소산 연결 등 통계 역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주로 광자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통해 양자 역학과 간접적으로 양자장론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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