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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쓰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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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다 쓰네미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투수로 활약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투수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81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에 1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1982년 신인왕을 수상하며 성공적인 프로 데뷔를 했지만,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86년 마무리 투수로 부활하여 컴백상과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을 수상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1989년에는 최우수 구원 투수와 파이어맨상을 수상했다. 1991년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이 명명되었으며,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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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쓰네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쓰다 쓰네미
로마자 표기Tsunemi Tsuda
별칭(불꽃 마무리)
출생일1960년 8월 1일
출생지야마구치현 쓰노 군 난요 정 (현 슈난시)
사망일1993년 7월 20일 (향년 32세)
신장181cm
체중79kg
투구우투
타석우타
수비 위치투수
프로 입단 연도1981년
드래프트 순위1순위
첫 출장1982년 4월 10일
마지막 경기1991년 4월 14일
등번호15(1982-1984), 14(1985-1991)
선수 경력
고등학교야마구치현립 난요 공업 고등학교
실업팀교와 발효
프로 구단히로시마 도요 카프(1982 - 1991)
수상
신인왕센트럴 리그 신인왕
컴백상NPB 컴백 선수상 (1986년)
최고 구원 투수상NPB 구원 투수상 (1989년)
올스타 선정5회 (1983, 1986 - 1989)
기록
평균 자책점3.31
승리49
세이브90
완투19
완봉승2
탈삼진542
명예의 전당
헌액 연도2012년
유형일본
선정 방법경기자 표창
득표율75.1%

2. 선수 경력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 교와 발효에서 활동했다. 1981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우완 투수로 활약했다.

1982년 4월 10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전에 등판하여 프로 데뷔 첫 승리 투수가 되었고, 그해 11승(모두 선발) 6패, 평균자책점 3.88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수상했다.

1986년에는 중간 계투로 전향하여 성공적으로 복귀했으며, 팀의 5번째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컴백상을 받았다. 그러나 1988년에는 어깨 통증 등 부상으로 인한 슬럼프를 겪으며 시즌 9패를 기록, 'サヨナラの津田|사요나라노 쓰다일본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9년에는 12승(모두 구원) 5패 28세이브를 기록하며 최우수 구원 투수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날카로운 커브와 최고 153km/h의 강속구를 무기로 상대 타자와 정면 승부하는 스타일 덕분에 '불꽃의 스토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90년 시즌 종료 후 갑작스러운 두통을 호소했고, 1991년 4월 14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 등판이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이후 정밀 검사 결과 악성 뇌종양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에 들어갔으며, 1991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한때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1992년 가을부터 다시 악화되어, 1993년 7월 20일 향년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주요 경력 및 기록
항목내용
소속팀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2년 ~ 1991년)
첫 등판1982년 4월 10일 (vs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첫 승리1982년 4월 29일
수상 내역
신인왕1982년
컴백상1986년
일본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1986년
최우수 구원 투수1989년
올스타전 출장1983년,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통산 성적
49
세이브90
완투19
완봉2
탈삼진542


2. 1. 프로 입단 전

야마구치현 스노군 난요정(현: 슈난시)의 산간부인 와다 지구(구 와다촌) 출신이다.[2] 난요 공고에서는 1학년 때부터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1978년 제50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하여 준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후쿠이 상고에 패배했다.[3] 같은 해 제60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2회전까지 진출했지만, 텐리 고교에 0-1로 아쉽게 패했다.[4]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호후시에 본거지를 둔 사회인 야구 팀 교와 발효(현: 교와 기린)에 입사했다.

1981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는 전전 중국의 보강 선수로 출전했다. 1회전에서 우승 후보로 꼽히던 후지 중공업을 꺾으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2회전에서는 리커의 나카니시 기요키와 투수전을 벌인 끝에 패배했다.[5] 같은 해 일본 선수권 대회에서는 교와 발효의 에이스 투수로서 2승을 거두며 팀을 준준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준준결승에서 이 대회 우승팀인 후지 중공업의 무카이다 요시모토와의 투수전 끝에 아깝게 패배하며, 도시 대항에서의 승리를 설욕당했다.

2.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고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 교와 발효(協和発酵硬式野球部일본어)에서 활동하다가, 1981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하여 우완 투수로 활약했다.[6]

1982년에는 선발 투수로 데뷔하여 4월 10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전에서 프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시즌 동안 11승(모두 선발) 6패, 평균자책점 3.88을 기록하며 히로시마 구단 최초로 신인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2년차 후반부터 어깨 부상(루스 숄더)[6]과 중지 혈행 장애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등판 기회가 크게 줄었다. 혈행 장애 치료를 위해 세계 최초로 중지 인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 수술의 여파로 1984년 일본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6]

1985년에는 이름을 '츠네미'(恒美)에서 '츠네미'(恒実)로 개명했다.[6]

1986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여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시즌 전반기에는 평균자책점 0점대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팀의 5번째 센트럴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시즌 종료 후 컴백상을 수상했다.[6] 1987년에도 평균자책점 1점대를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이어갔다.[6]

하지만 1988년에는 어깨 통증 등으로 인해 구위가 떨어지면서 구원에 실패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시즌 9패를 기록하며 '사요나라의 쓰다'(サヨナラの津田|사요나라노 쓰다일본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6]

1989년에는 다시 한번 부활에 성공했다. 12승(모두 구원) 5패 28세이브, 평균자책점 1.63을 기록하며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과 파이어맨상을 동시에 수상했다.[6] 최고 구속 153km/h (6월 28일 기록)의 강속구와 날카로운 커브를 주무기로 타자에게 정면 승부하는 모습으로 '불꽃의 스토퍼'라는 별명을 얻었다.[6]

1990년 시즌 종료 후부터 갑작스러운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1991년 시즌 초,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4월 14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 등판했으나 제구 난조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가 그의 현역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다음 날인 4월 15일,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결국 1991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한때 병세가 호전되어 현역 복귀를 목표로 재활 훈련을 하기도 했으나, 1992년 가을부터 다시 상태가 악화되었다. 결국 1993년 7월 20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3. 투병과 사망

1990년 시즌 종료 직후부터 갑작스런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는 전년부터 이어진 컨디션 난조 속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4월 14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 선발 투수 키타벳푸 마나부에 이어 1점 리드 상황인 8회 초에 등판했으나, 무사 2, 3루 위기에서 하라 타츠노리에게 동점 적시타를 맞는 등 제구력 난조를 보이며 9구 만에 강판되었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가 쓰다의 선수 생활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7][8]

쓰다는 단순한 두통으로 생각하고 넘겼지만 증상이 오래 지속되자, 경기 다음 날인 4월 15일 히로시마 대학 병원에 검사를 위해 입원했다. 정밀 검사 결과, 수술이 불가능한 위치에 악성 뇌종양이 발견되었다. 자택과 친가에서 요양한 후 제생회 후쿠오카 종합 병원(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주오구)으로 옮겨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로서는 5월 20일에 준 지배하 등록 선수로 전환되었고, 이후 제출한 퇴단서는 11월 6일자로 수리되었다.[9] 쓰다 본인에게는 병명이 알려졌으나, 구단 측은 주변의 충격을 우려하여 실제 병명을 숨기고 '수두증으로 인한 은퇴'라고 발표했다.

한때 병세가 기적적으로 호전되어 퇴원 후 후쿠오카시 내에 거주하며 현역 복귀를 목표로 훈련을 재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2년 6월경부터 다시 상태가 악화되었고, 구마모토현 야츠시로시의 아내 친가에서 잠시 머물다 8월 20일 제생회 후쿠오카 종합 병원에 재입원했다. 결국 1993년 7월 20일 14시 45분, 입원 중이던 병원에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9]

3. 수상 및 기록

쓰다 쓰네미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활약하며 여러 상을 수상하고 기록을 남긴 투수이다. 1982년 신인왕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1983년에는 최고 승률을 기록했다. 부상 복귀 후인 1986년에는 컴백상과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1989년에는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과 파이어맨상을 차지하며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인정받았다.

통산 49승 41패 90세이브, 평균자책점 3.31, 542탈삼진을 기록했으며, 올스타 게임에는 5차례(1983년, 1986년~1989년) 출전했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2012년 일본 야구 전당에 헌액되었다.

3. 1. 수상

3. 2. 기록



'''첫 기록'''

'''기타'''

  • 올스타 게임 출장: 5회 (1983년, 1986년 ~ 1989년)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소속등판선발완투완봉무사사구세이브홀드승률상대 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 사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82히로시마 도요 카프31278201160--.647703166.21662845371142076723.881.27
19831917901930--.750555132.0120155124821050453.071.30
19841410200341--.42924354.15982711301033284.641.58
1985224000231--.40019242.04782300362032316.641.67
19864900004622--.40027769.144729112811021162.081.05
19874700003418--.42927265.262522113602013121.641.28
19884700005920--.35730072.16462461561032313.861.22
198951000012528--.70631183.05041571752015151.630.78
199040000000------316.2120000700222.701.80
199120000010--.00081.0410011103327.004.00
통산 : 10년286581921494190--.5442892693.06288223641205421302772553.311.25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4. 사후

(통칭 "쓰다 플레이트")]]

쓰다의 사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여러 활동이 이루어졌다.

1994년부터 7주기인 1999년까지 쓰다 기금 운영을 통해 "쓰다 메모리얼 데이"가 개최되었다. 첫 해인 1994년 7월 14일에는 초대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 그의 공적과 인품을 기리는 메모리얼 플레이트(통칭 쓰다 플레이트)가 설치되었다. 플레이트에는 "정면 승부 웃음과 투지를 잊지 않기 위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같은 구장에 설치된 개인 기념비로는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기누가사 사치오에 이어 두 번째였다. 훗날 오노 유타카 등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선수들이 경기에 나설 때마다 이 플레이트를 만지고 간다는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이 플레이트는 2009년 개장한 히로시마의 새 홈구장 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로 옮겨졌다.

2007년 6월 1일에는 소행성 79254 쓰다가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1]

2012년 1월 12일, 야구 전당 박물관은 쓰다가 히로시마 시절 동료인 기타베후와 함께 일본 야구 전당에 입성(경기자 표창·플레이어 표창)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피투표 자격 마지막 해에 당선 필요 수를 단 1표 넘긴 237표를 얻어 선정되었다.[10] 전당 입성 표창식은 그의 기일인 7월 20일에 열린 올스타전 제1차전(교세라 돔 오사카) 경기 전에 거행되었다.[11]

같은 해 가을, 그의 고향인 슈난시는 쓰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시영 야구장의 애칭을 공모했고, 12월 14일 "쓰다 쓰네미 메모리얼 스타디움"으로 최종 결정되었다.[12] 또한, 그의 출신 중학교인 슈난 시립 와다 중학교에서는 매년 기일인 7월 20일에 인근 초·중학교 팀들이 참가하는 교류 야구 대회가 열리고 있다.

2019년 5월 30일에는 히로시마시 내에 "쓰다 쓰네미 기념관"이 개관했다.

5. 투구 스타일

쓰다는 혈행 장애에서 복귀하여 구원 투수로 전향한 이후 강속구(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던졌다. 특히 1986년에는 던진 구종의 90% 이상이 스트레이트였으며, 변화구는 거의 던지지 않았다. 쓰다가 현역 시절 동료이자 감독이었던 야마모토 코지는 쓰다의 스트레이트를 "홉하는 직구"라고 칭했다[10]

위기에 몰릴수록 구속이 빨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1986년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9회말 1사 만루 동점(4 대 4) 상황에서 2번 타자 히로타 스미오에게 143km/h, 148km/h, 151km/h의 스트레이트를 던져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다음 타자인 당시 절정기에 있던 랜디 버스에게도 모두 150km/h를 넘는 스트레이트로 승부하여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위기를 넘겼다. 이 경기를 중계하던 마이니치 방송의 조노 아키라 아나운서는 "쓰다, 스피드 위반!"이라고 외쳤고, 버스는 경기 후에 "쓰다는 미친 놈[13]이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14]

1986년9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25차전에서 쓰다와 대결한 하라 다쓰노리는 스트레이트를 파울볼로 치는 과정에서 왼손의 유구골이 골절되어 남은 시즌을 모두 결장했으며, 다음 시즌 이후에도 손목 통증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후년에 하라는 "부러진 것에 후회는 없었습니다. 쓰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투수였죠"라고 말했고[15], 직구가 빠른 투수를 묻는 질문에 항상 "쓰다, 고마쓰, 스즈키 다카마사 씨, 대학 시절 에가와 씨"라고 쓰다의 이름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16]。 또한 1991년4월 14일 쓰다에게서 적시타를 치며 생애 마지막 상대 타자가 된 선수도 하라였다. 하라에게 던진 마지막 공은 144km/h의 스트레이트였다.

1986년 일본 시리즈에서 히로시마는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첫 경기 무승부 후 3연승을 거두며 일본 시리즈 우승을 눈앞에 뒀지만, 5차전 연장 12회에 구도 기미야스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했고, 이후 기세를 탄 세이부에게 4연패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쳤다. 이 연장 12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한 투수가 구원 등판한 쓰다였다. 게다가 전날 4차전 히어로 인터뷰에서 세이부 타선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쓰다는 "별로 박력이 없는 것 같은데요"라고 발언했고, 아나운서가 "세이부를 화나게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묻자 "괜찮을 겁니다"라고 답했었다[17]

6. 인간 관계

1985년 오프 시즌, 다카하시 요시히코의 도루왕 획득 축하회에서 콤퍼니언으로 참가했던 부인을 만나 약 2년간 교제 후 1987년 말 결혼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부인은 야구에 관심이 없어 쓰다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유명 선수인 줄 몰랐다고 한다. 슬하에 아들 다이키를 두었다.

다이키는 규슈가쿠인 고등학교와 규슈 국제 대학을 거쳐, 고바 다케시가 감독으로 있는 도쿄 국제 대학으로 편입하여 아버지에 이어 고바의 지도를 받았다. 하지만 잦은 부상으로 대학 4년간 공식전 등판은 4구 1개에 그쳤다.[25] 대학 졸업 후 회사원이 되었으나, 2016년 8월 퇴직하고 같은 해 12월부터 아버지의 기념관 설립 활동을 시작했다.[18][19]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2019년 5월 30일 히로시마 시내에 '쓰다 쓰네미 기념관'을 개관했으나,[20][21] 코로나19 사태와 건물 폐쇄로 2020년 문을 닫았다. 2021년 3월 6일, MAZDA Zoom-Zoom 스타디움 히로시마 근처로 이전하여 '쓰다 쓰네미 메모리얼 카페'로 재개관했다.[22][23]

아마추어 시절부터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정신적으로 약한 면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 감독이 정신 안정제라고 속여 밀가루를 건넸을 정도였다고 한다. "약한 마음은 최대의 적", "일구입혼"과 같은 좌우명은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되새긴 것이었다.[24] 이 좌우명을 적은 공을 항상 지니고 다니며 등판 전에는 반드시 그 공을 향해 기합을 넣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전력 투구하는 모습과 밝고 익살스러운 성격으로 팀 동료와 카프 팬, 타 구단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릴리프 투수로서 책임감이 매우 강했다. 기요카와 에이지의 프로 첫 승리가 걸린 경기에서 부진하여 승리를 날려버리자, 경기 후 30분마다 기요카와의 방을 찾아가 사과를 반복하다 동료들이 말려서야 멈췄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패전 투수가 된 다음 날에는 누구보다 먼저 구장에 나와 외야 스탠드 계단을 묵묵히 오르내렸다고 한다.[25] 다츠카와 미츠오는 이를 두고 "경기를 보러 와준 팬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8]

쓰다의 투병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선수 회장 야마자키 류조는 선수들을 모아 "쓰다를 위해 우승하자. 쓰다를 우승 여행에 데려가자"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이에 히로시마 선수단은 분발하여 그해 여름까지 선두를 달리던 주니치 드래곤스를 역전하고 5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쓰다와 더블 스토퍼를 이루었던 오노 유타카를 비롯한 투수진은 리그 투수 부문 주요 타이틀을 휩쓰는 대활약을 펼쳤다(최우수 구원 투수: 오노, 최다 승·최우수 평균 자책점·사와무라상: 사사오카 신지, 최고 승률: 기타벳푸 마나부, 최다 탈삼진: 가와구치 가즈히사).

팀 동료였던 모리와키 고지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1987년 시즌 중 모리와키가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되었을 때, 쓰다는 부인에게 "너와 고지 중 한 명을 택하라면 고지를 택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쓰다가 후쿠오카에서 투병 생활을 할 때 모리와키는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다. 쓰다가 일시적으로 회복세를 보이자 모리와키는 "내 연봉을 절반으로 줄여서라도 너의 현역 복귀를 구단(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과 협상하겠다"고 말했으며,[26] 퇴원 후 거주할 집까지 마련해주었다.[27] 1993년 모리와키의 결혼 피로연에서는 고인이 된 쓰다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잔에 맥주를 따르며 추모하여 동석한 가네이시 아키히토, 기요카와 에이지 등 친구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쓰다의 아들 다이키는 모리와키 등의 배려로 후쿠오카 돔 마운드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쓰다가 세상을 떠난 당일, 도쿄 돔에서는 올스타전 제1차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서거 소식은 개막식 직전 양 팀 관계자에게 전해졌으며,[9] 경기 중계 도중 부고가 알려졌다. 히로시마 지역 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은 눈물을 흘리며 소식을 전했다. 야마모토 고지 감독을 비롯한 히로시마 선수단은 상복 대신 유니폼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통야 다음 날 열린 올스타전 제2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는 9회말 오노 유타카가 등판하여 두 타자 연속 삼진을 포함한 완벽한 투구로 올스타전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7] 당시 유격수였던 노무라 겐지로는 "쓰다 씨의 혼이 담긴 듯한 투구였다. 그런 오노 씨는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쓰다의 야구 인생은 많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00년에는 부인 아키요 씨의 저서 『마지막 스트라이크』가 기시타니 고로 주연으로 드라마화되었다. 또한 가고시마 시의 한 선술집 벽에 쓰인 쓰다를 기리는 시가 FM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지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20년 기준으로 히로시마에서 등번호 14번을 달고 있는 오세라 다이치[28]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노리모토 다카히로[29] 등 후배 투수들이 목표로 하는 선수로 쓰다를 꼽고 있다.

7. 기타


  • 1982년부터 1984년까지는 '津田 恒美', 1985년부터 1991년까지는 '津田 恒実'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두 이름 모두 '쓰다 쓰네미'로 읽는다.
  • 소행성 79254 쓰다는 2007년 6월 1일 그의 업적을 기려 명명되었다.[1]
  • 쓰다 쓰네미를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 * 저서
  • ** 딱 한 번만 더 던지게 해줘 - 맹렬 구원 투수 츠다 쓰네미의 강속구 인생 - NHK Books (1994)
  • ** 라스트 스트라이크 (츠다 쓰네미와 함께 한 2년 3개월) - 케이분샤 (1995)
  • * 영상물
  • ** 저스트 원 모어 피치: 불꽃 투수 츠다 쓰네미의 삶 - NHK (1994)
  • ** 라스트 스트라이크 - 후지 TV (2000)

참조

[1] 웹사이트 79254 Tsuda (1994 YJ) http://www.minorplan[...] 2016-01-03
[2] 뉴스 故津田投手の顕彰碑、看板改修へ http://www.shinshuna[...] 日刊新周南
[3] 서적 選抜高等学校野球大会60年史 毎日新聞社
[4] 서적 全国高等学校野球選手権大会70年史 朝日新聞社
[5] 서적 都市対抗野球大会60年史 일본야구연맹、毎日新聞社
[6] 문서 "肩"
[7] 웹사이트 【4月14日】1991年(平3) 炎のストッパー・津田、悲しい最後のリリーフ http://www.sponichi.[...] 스포츠니폰新聞社 2017-07-27
[8] 뉴스 必死で練習 “津田魂”は生きている/広島連載5 https://www.nikkansp[...] 2016-09-03
[9] 뉴스 【復刻】炎のストッパー津田投手が死去 https://www.nikkansp[...] 1993-07-21
[10] 뉴스 炎のストッパー・津田さん殿堂入り、晃代夫人も涙「一番驚いているのは津田本人」 http://hochi.yomiuri[...] 2012-01-13
[11] 뉴스 津田さん命日に北別府氏と殿堂入り表彰 http://www.daily.co.[...] 2012-07-21
[12] 뉴스 津田恒実さん:山口県周南市に「メモリアルスタジアム」 http://mainichi.jp/s[...] 2012-12-14
[13] 문서 クレイジー
[14] 웹사이트 【プロ野球仰天伝説46】バースを3球三振に仕留めた津田恒実のクレージーな快速球 http://column.sp.bas[...]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18-02-07
[15] 웹사이트 原の左手を破壊した津田のストレート/プロ野球仰天伝説206 http://column.sp.bas[...]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18-07-17
[16] 웹사이트 原氏と津田氏の勝負の絆は今でも生きている/コラム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6-09-19
[17] 문서 DVD「熱闘!日本シリーズ1986」
[18] 뉴스 「津田恒美記念館」広島にできる 賛同者募集開始 https://www.daily.co[...] 2017-06-19
[19] 뉴스 「津田恒美 記念館」できる!一人息子が奔走 炎のストッパー永遠に… https://www.daily.co[...] 2016-12-27
[20] 뉴스 津田恒美記念館オープンへ 息子大毅さんが思い語る https://www.nikkansp[...] 2019-05-28
[21] 뉴스 「津田恒美記念館」が30日にカープロード沿いにオープン https://www.daily.co[...] 2019-05-29
[22] 뉴스 津田恒美記念館が「再登板」 広島、マツスタ近くでカフェに【動画】 https://www.chugoku-[...] 2021-03-06
[23] 뉴스 祝 プロ野球開幕!「カープ愛」あふれるお店特集 ~広島市南区~ https://www.47news.j[...] 2021-03-25
[24] 뉴스 【甲子園百景・春】南陽工に38年間息づく「弱気は最大の敵」 https://www.sponichi[...] 2016-03-28
[25] 뉴스 津田恒実さん: 野球殿堂入り 息子「光栄だけど少し複雑」 http://mainichi.jp/e[...] 2012-01-13
[26] 뉴스 森脇コーチ感無量…「俺の年俸は半額でも」津田さんを励まし続ける https://www.sponichi[...] 2012-01-14
[27] 문서 Harvnb
[28] 웹사이트 広島大瀬良、津田さん墓前に今季報告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0-01-25
[29] 간행물 伝統の背番号を背負う7人のルーキーズ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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