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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다다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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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모 다다사토는 아이즈번의 영주로, 1602년에 태어나 1627년에 사망했다. 1612년 아버지 가모 히데유키의 사망으로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이즈 60만 석을 상속받았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원복을 하고 마쓰다이라 성과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편휘를 받아 마쓰다이라 다다사토로 불렸다. 어린 나이로 인해 어머니 쇼세이인이 후견을 맡았으나, 가신 간의 갈등과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619년 도도 다카토라의 딸과 결혼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했고, 1627년 두창으로 사망하면서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놓였으나, 동생 가모 다다토모가 가문을 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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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모 다다사토
기본 정보
씨명가모 씨
이름가모 다다사토
이명가메치요 (유명)
묘호계명: 가이묘
생몰
출생게이초 7년 (1602년)
사망간에이 4년 1월 4일 (1627년 2월 19일)
묘소후쿠시마현아이즈와카마쓰시의 고간지
관직
관위종3위참의, 시모쓰케노카미
가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미쓰
무쓰아이즈번
씨족가모 씨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가모 히데요키, 어머니: 후리히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
형제자매다다사토, 다다토모, 숭고우인(가토 다다히로 실)
이부 형제자매아사노 미쓰아키라
배우자정실: 도도 다카토라의 딸, 측실: 니시노토인 도키나오의 딸
자녀없음
가모 다다사토 초상 ([[고간지]] 소장)
가모 다다사토 초상 (고간지 소장)

2. 생애

게이초 17년(1612년) 5월, 아버지 히데유키가 사망하여 10세에 아이즈번 60만 석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후리히메(振姫)의 후견을 받았다.

가모 가문은 후리히메의 섭정과 가로(家老) 오카 시게마사(岡重政)의 처형, 조부 우지사토 시대부터 동생 다다토모 시대까지 이어진 중신 간의 항쟁 등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겐나 2년(1616년)에는 마치노 유키카즈(町野幸和)와 가모 사토요시・가모 사토야 형제가 대립하여 가모 형제가 다시 가문을 떠났고, 겐나 6년(1620년)에는 가신 와타나베 지로에몬이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마치노 유키카즈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마치노 유키카즈는 가로 직에서 물러났고, 간에이 원년(1624년)에 가모 형제가 복귀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다다사토의 유모 형제인 후쿠니시 무네나가(福西宗長)를 포함한 여러 가신들이 정무를 담당했지만, 가신 간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 유수(江戸留守居)를 명받았다. 이후 히로시마번후쿠시마 마사노리야마가타번모가미 요시토시의 개역(改易) 때 성을 접수하기 위해 출병하기도 했다.

겐나 5년(1619년), 도도 다카토라의 딸과 혼인했다. 겐나 9년(1623년) 시종에 임관되었으며, 간에이 원년(1624년)에는 에도 번저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방문했다. 간에이 3년(1626년), 고미즈노오 천황니조성 행차 때 상경하여 정4위 참의로 승진했으나, 이때 두창(천연두)에 걸려 간에이 4년(1627년) 1월 4일, 26세로 사망했다.

정실 도도씨와의 사이에 적자가 없었지만,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이었으므로 동생 다다토모를 후사로 하여 가문은 존속했다.

2. 1. 어린 시절과 가독 상속

게이초 7년(1602년), 아이즈번주 가모 히데유키의 적자로 태어났다. 게이초 17년(1612년) 5월, 아버지 히데유키가 사망하면서 10세에 아이즈 60만 석을 상속받았다. 같은 해 9월, 동생 쓰루치요(鶴千代, 후의 다다토모)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원복 의식을 받고, 마쓰다이라성과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 '''마쓰다이라 다다사토(가모 다다사토)'''라 칭하였다. 조부 가모 우지사토의 이름에서도 한 글자를 따왔다.[2]

그러나 다다사토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후리히메(振姫)의 후견을 받았다.[4] 겐나 원년(1615년)에는 어머니 후리히메가 아사노 나가아키라와 재혼하면서 가모 가문과 격리되었다.[7]

후리히메의 섭정 하에 가로(家老)인 오카 시게마사가 처형되고, 가모 사토나리와 세키 모토요시 등이 소환되는 등 집안은 안정되지 않았다.[4]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다다사토는 아이즈와카마쓰성의 덴슈를 5층으로 개축하고, 에류지(恵隆寺)의 재건을 지원하는 등 치세에 힘썼다. 또한 영내에 기근이 들자 떡, 술, 두부의 제조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2. 2. 가신 간의 갈등

가모 다다사토가 아이즈번주로 있던 시기, 가신 간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다다사토는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후리히메(振姫)가 후견인 역할을 했다.[2] 그러나 후리히메의 총애를 받은 가로(家老) 오카 시게마사(岡重政)가 처형되면서 가문 내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4] 오카 시게마사와 대립했던 가모 사토나리(蒲生郷成)와 세키 가즈토시(関一利) 등이 다시 등용되었지만, 사토나리는 귀국 도중 병사하고 그의 아들들만 복귀했다.[4]

이후에도 가신들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겐나 2년(1616년)에는 마치노 유키카즈(町野幸和)와 가모 사토요시・사토야 형제가 대립하여 가모 형제가 다시 가문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9] 겐나 6년(1620년)에는 가신 와타나베 지로에몬이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마치노 유키카즈를 고소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10] 결국 마치노 유키카즈는 가로 직에서 물러났고, 간에이 원년(1624년)에 가모 형제가 다시 복귀했다.[10]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다다사토의 유모 형제인 후쿠니시 무네나가(福西宗長)를 포함한 여러 가신들이 정무를 담당하게 되었지만,[11] 가신 간의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2. 3. 오사카 전투와 번정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는 에도 유수(江戸留守居)를 명받았다.[8]

치세에는 아이즈와카마쓰성의 덴슈를 5층으로 개축하고, 에류지(恵隆寺)의 재건을 원조했다. 영내의 기근에 즈음하여 떡, 술, 두부의 제조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겐나 5년(1619년), 도도 다카토라의 딸을 정실로 맞이했다. 겐나 9년(1623년)에는 시종으로 임관되었다. 간에이 원년(1624년)에는 에도 번저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쇼군 이에미쓰의 영채를 맞이했다. 이전부터 중신층의 항쟁, 소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규벌 때문에 큰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간에이 3년(1626년), 고미즈노오 천황니조성 행차 때 상락, 행차 후 정4위 산기로 승진했다.[16]

2. 4. 혼인과 후계 문제

겐나 5년(1619년), 도도 다카토라의 딸을 정실로 맞이하였다. 정실 도도씨와의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본래 가모씨는 단절될 뻔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이었기 때문에 데와카미야마번 4만 석을 거느리고 있던 동생 다다토모를 후사로 이요 마쓰야마 24만 석을 주어, 36만 석이 감봉되었으나 존속할 수 있었다.[2] 아이즈에는 가모씨 대신 가토 요시아키가 40만 석으로 들어왔다.

2. 5. 사망과 가문의 존속

1619년, 도도 다카토라의 딸을 정실로 맞이하였다. 1623년 시종으로 임관하였다. 1624년에는 에도 번 저택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방문하였다. 이전에도 중신들의 항쟁과 소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문책으로 인해 큰 일에는 이르지 못했고, 1626년, 고미즈노오 천황의 니조 성 행차 때 상경하여, 행차 후 정4위 참의로 승진했다. 이때 천연두에 걸려, 다음 해 1627년 1월 4일 사망했다. 향년 26세였다.[16]

정실 도도씨와의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본래 가모씨는 단절될 뻔했지만, 어머니가 이에야스의 딸이었기 때문에 데와카미야마 번 4만 석을 다스리고 있던 동생 다다토모를 후사로 이요마쓰야마 번 24만 석을 주어 36만 석이 감봉되었으나 존속할 수 있었다. 아이즈에는 가모씨를 대신해 가토 요시아키가 영지를 받아 40만 석으로 들어왔다.[16]

참조

[1] 서적 寛政重修諸家譜』。『蒲生記
[2]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3] 서적 2021
[4] 서적 2021
[5] 서적 2021
[6] 서적 2021
[7] 서적 2021
[8] 서적 2021
[9] 서적 2021
[10] 서적 2021
[11] 서적 2021
[12] 서적 2021
[13] 서적 2021
[14] 서적 2021
[15] 서적 2021
[16] 서적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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