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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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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는 16세기 프랑스의 군인이자 종교 개혁가로, 콜리니 백작 가문 출신이다. 그는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군인으로 활약했고, 이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여 위그노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스페인과의 전쟁을 주장하며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갈등을 겪었다. 그는 위그노 전쟁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때 암살당했으며, 그의 딸 루이즈 드 콜리니는 오라녜 공 빌럼 1세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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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565년과 1570년 사이 프랑수아 클루에가 그린 초상화
작위샤티용 영주
기타 작위프랑스 해군 원수
출생일1519년 2월 16일
출생지프랑스 왕국, 샤티용쉬를루앙
사망일1572년 8월 24일 (53세)
사망지프랑스 왕국, 파리
가문콜리니 가문
아버지가스파르 1세 드 콜리니
어머니루이즈 드 몽모랑시
배우자샤를로트 드 라발
자클린 드 몽벨 당트르몽
자녀루이즈 드 콜리니
베아트리스 드 콜리니
프랑수아 드 콜리니
샤를 드 콜리니
신념
종교개혁교회 (칼뱅주의)
프랑스어 발음

2. 생애

가스파르 1세 드 콜리니와 안 드 몽모랑시의 누나인 루이즈 드 몽모랑시 사이에서 태어난 콜리니 가문은 개신교 집안이었다.[1] 콜리니 가문은 부르고뉴의 명문가로, 11세기부터 루이 11세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왕을 섬겼다.[1] 아버지 가스파르 1세 드 콜리니는 '샤티용의 원수'로 알려졌으며,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했고, 1516년에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1]

1519년 샤티용쉬르루앵에서 태어난 가스파르는 1522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루이즈 드 몽모랑시와 그의 삼촌 앙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는 니콜라 베로에게 교육받았으며, 베로의 지도 아래 키케로와 프톨레마이오스를 포함한 고전을 공부했다.[1] 베로와 루이즈는 모두 인문주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개신교 인물인 루이 드 베르캥과 미셸 드 소본과 같은 인물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콜리니는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군 복무

가스파르 1세 드 콜리니와 안 드 몽모랑시의 누나인 루이즈 드 몽모랑시 사이에서 태어난 콜리니는 22세에 궁정에 들어와 기즈 공작 프랑수아와 친분을 맺었다.[1] 1544년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보병 대장으로 임명되었고,1522년에는 프랑스의 제독이 되었다.[1] 스페인 군대와 싸우다 포로로 잡혀 2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1]

1543년 몽메디와 뱅 포위전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2] 1544년에는 앙기앵 백작 휘하에서 이탈리아 원정에 참전하여 연대를 지휘했고, 체레솔레 전투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2] 1545년 스트로치의 잉글랜드 원정을 포함한 다양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2]

앙리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몽모렌시가 총애를 받게 되면서, 콜리니는 즉위 1개월 만에 보병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는 혜택을 입었다.[3] 그는 군사 개혁가로서 뛰어난 능력과 지성을 보여주었으며, 1551년에는 그가 보병 기강 유지를 위해 작성한 규정이 국왕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3] 같은 해, 샬롯 드 라발과 결혼했다.[3]

1552년 전쟁이 재개되자 콜리니는 보병 대장으로서 렌티 전투에서 기즈 공작의 지휘 아래 프랑스군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2. 개신교로의 개종과 보호 활동

1555년 브라질에 위그노들을 보내 안전하게 식민지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1560년까지 종교 개혁을 위한 그의 후원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 그 당시 그의 삼촌의 보호를 받아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자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대법관 미셸 드 로스피탈(Michel de l'Hospital)의 후원과 함께 종교적 자유령을 요구하였다. 콜리니의 대화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고 그는 칼뱅주의 철학에 관심을 끌어들였어도, 개신교를 질서, 학문, 정의의 유지를 위한 제도로 보았다.

생캉탱 전투에서 스페인의 승리. 이 직후 콜리니는 포로로 잡혀 2년 동안 억류되었다.


이 기간 동안, 프로테스탄티즘은 프랑스 귀족 계층에서 개종자를 찾기 시작했다. 콜리니의 형제 앙들로(Andelot)는 초기 개종자였으며, 1556년 밀라노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 신앙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는 1558년 예배에 참석하기 전까지 자신의 새로운 신앙을 공개하지 않았다.[1] 1558년, 플랑드르에서 투옥된 앙들로는 포로 생활 중인 그의 형제를 위로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경건 서적을 보냈다.[2] 콜리니가 칼뱅주의로 개종한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558년 9월까지 그는 칼뱅으로부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3] 사제 비레(Viret)는 콜리니를 기독교적 덕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높이 평가했다. 콜리니의 종교적 충성은 1559년 궁정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고, 영국 대사는 그가 미사에 불참한 것을 언급했다. 그러나 당시 콜리니는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3. 위그노 전쟁

1562년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자 콜리니는 망설이다가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뛰어난 장군은 아니었고, 전쟁을 싫어하였다.[1] 1569년 콩데 왕자가 사망하면서 위그노의 단독 지도자가 되었다.[1] 몽콩투르에서 여러 번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프랑스에서 군대를 다시 모아 센강 유역 상류까지 진격하여 생제르맹 조약을 맺게 하였다.[1]

1556년 말 전쟁이 재개되자, 콜리니는 두에 기습에 실패하고 랑스를 약탈했다.[1] 1557년 생캉탱 방어를 맡았으나 생캉탱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1]

앙리 2세 사후, 콜리니는 방돔에서 열린 회담에 참여하여 부르봉 가문과 몽모렌시 가문 사이의 새로운 질서에서 위치를 협상했다.[1] 앙부아즈 음모 가담 제안을 거절했고, 유력자 회의를 소집하도록 압력을 가했다.[1] 퐁텐블로 회의에서 콜리니는 종교적 공존을 제안했고, 삼부회 소집을 옹호했다.[1]

세 형제가 나란히 서 있는 초상화, 가운데에 가스파르가 있다
세 명의 샤티용 형제: 오데 드 콜리니, 가스파르 2세, 프랑수아 드 콜리니 당들로


바시 학살 이후, 콩데가 반란을 일으키자 콜리니는 에서 그와 합류했다.[2] 그는 자신의 무장이 '그에 대한 기즈 가문의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 내전 발발 후 루앙, 투르, 블로아, 리옹 등 여러 도시가 콩데를 지지하며 봉기했다.[3] 콜리니는 왕실과 몽모랑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 기즈 가문과의 동맹을 비난했다.

햄프턴 코트 조약 (1562년)을 통해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수비즈를 리요네 지사로, 생-제르멘을 푸아티에 지사로 임명하는 등 그림자 정부를 구성했다. 루앙 포위전에서 왕실군 총사령관 나바라의 앙투안이 사망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왕실군이 승리하였다.

콩데는 파리 공격을 희망했지만, 콜리니는 노르망디 탈환과 잉글랜드로부터의 자금 확보를 제안했다. 드뢰 전투에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보았고, 콜리니는 오를레앙으로 후퇴했다. 1563년 1월, 콜리니는 잉글랜드에 자금을 요청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오를레앙 포위전 중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암살당하면서, 콜리니는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나 부인했다.

자크 토르토렐과 장 페레신의 그림
1563년 2월 18일 기즈 공작 프랑수아의 암살


롱주모 조약 협상에서 콜리니는 반군 측 주요 협상가였다.[1] 생모 칙령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불법화되자, 콜리니는 라 로셸로 피신하여 다시 무기를 들었다.[1]

3. 1. 위그노 전쟁 참여

1562년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자 콜리니는 망설이며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뛰어난 장군은 아니었고, 전쟁을 혐오하였다.[1] 1569년 콩데 왕자가 사망하면서 위그노의 단독 지도자가 되었다.[1] 앙주가 이끄는 왕실 군대에 맞서 몽콩투르에서 여러 차례 패배했지만, 남프랑스에서 군대를 다시 소집하여 센강 유역 상류까지 진격하여 생제르맹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다.[1]

콜리니는 바시 학살 이후 콩데가 반란을 일으키자 1562년 3월 27일 에서 합류했다. 그는 자신의 무장이 기즈 가문에 대한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 내전 발발 후 루앙, 투르, 블로아, 리옹 등 여러 도시가 콩데를 지지하며 봉기했다.[3] 콜리니는 왕실과 몽모렌시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고, 기즈 가문과의 동맹을 비난했다.

햄프턴 코트 조약 (1562년)을 통해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수비즈를 리요네 지사로, 생-제르멘을 푸아티에 지사로 임명하는 등 그림자 정부를 구성했다. 루앙 포위전에서 왕실군 총사령관 나바라의 앙투안이 사망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왕실군이 승리하였다.

콩데는 파리 공격을 희망했지만, 콜리니는 노르망디 탈환과 잉글랜드로부터의 자금 확보를 제안했다. 드뢰 전투에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콜리니는 오를레앙으로 후퇴했다. 1563년 1월, 콜리니는 잉글랜드에 자금을 요청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오를레앙 포위전 중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암살당하면서, 콜리니는 암살 배후로 지목되었으나 부인했다.

3. 2. 위그노의 지도자

1562년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자, 콜리니는 망설이다가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뛰어난 장군은 아니었고, 전쟁을 싫어하였다. 1569년 콩데 공 루이 1세가 사망하면서 콜리니는 위그노의 단독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몽콩투르 전투에서 여러 차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프랑스에서 군대를 다시 모아 센강 상류까지 진격하여 생제르맹 평화 조약을 맺게 하였다.

자르나크 전투에서 콩데 공이 사망한 후, 젊은 나바르와 콩데가 명목상 지휘권을 물려받았지만, 어린 나이 때문에 콜리니가 실질적인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라 로슈 라베유 전투에서 승리하고 푸아티에를 포위하는 등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으나, 몽콩투르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몽콩투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콜리니는 남은 병력을 재정비하고 랑그도크의 자작들과 연합하여 파리로 우회 행군을 시작했다. 오툉에서 왕립군을 피하고 상세르에서 추가 증원을 받은 후 파리로 바로 이동하여, 결국 유리한 조건으로 생제르맹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1570년의 강화 조약으로 콜리니는 제독으로서의 직위와 모든 재산을 돌려받았다.

4. 정치 활동

1571년 샤를 9세콜리니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콜리니는 국왕의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콜리니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연합군을 네덜란드에 파병하여 스페인에 대항하여 싸우게 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의 주목적은 스페인군을 플랑드르에서 몰아내는 것이었다. 콜리니는 이 제안을 통해 국왕의 신임을 얻고자 했다.[1]

콜리니는 샤를 9세를 설득하여 종교 혼합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프랑스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연합시키려는 의도였다. 샤를 9세는 이 계획에 매료되었으나, 콜리니의 계획은 왕실 의회의 거의 만장일치 반대에 부딪혔다.[1]

1572년 7월, 4,000명의 보병과 함께 국경을 넘어 스페인군에게 격파된 젠리스 원정의 실패는 콜리니의 계획에 대한 전망을 더욱 악화시켰다. 젠리스 원정에 콜리니가 관여했는지, 그리고 국왕의 비밀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다.[1]

4. 1. 권력 투쟁과 암살 시도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기즈 공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국왕에게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1572년 8월 22일 파리에서 카트린의 선동으로 콜리니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샤를 9세는 콜리니를 방문하여 완전한 조사를 약속했다. 카트린은 자신이 암살 시도의 배후로 밝혀질 것을 우려하여, 콜리니에게 개신교 신자들이 앙갚음을 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말하며, 아들 샤를 9세의 위협과 불안정을 이용했다.

국왕의 격노가 폭발하여 콜리니를 포함한 개신교 지도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이 내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이 시작되었다. 8월 24일 새벽, 앙리 드 기즈(Henri de Guise)의 용병들이 콜리니의 집을 공격하여 그를 찌르고 계속 찌르면서 결국 그를 창문 밖으로 내던졌고, 버티다가 결국 기즈의 부하들 중 한명에 의해 참수당하고 말았다.

폭스의 순교사 2판 삽화 - 콜리니 제독의 죽음


잘려진 그의 목은 로렌의 추기경(Charles de Lorraine, 2e cardinal de Lorraine)에게 보내졌는데 '콜리니의 목을 받은 로렌의 추기경(Porträt: Das Haupt Coligny's wird dem Kardinal von Lothringen in Rom überbracht.)'이란 그림이 존 크라크 리드패쓰 (John Clark Ridpath)가 쓴《리드패쓰의 세계사,(Ridpath's History of the World )》라는 책에 실려있다.

결혼 축제가 끝난 후 콜리니는 거주지로 돌아가는 길에 거리에서 총격을 받았는데, 아마도 건물 최상층에서 쏜 모레베르라는 남자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다.[1] 그러나 그가 신발을 묶기 위해 몸을 숙이는 바람에 총알은 그의 오른손에서 손가락 하나를 찢고 왼쪽 팔꿈치를 부러뜨리는 데 그쳤다.[1] 암살범은 도주했다.[1]

이후 며칠 동안의 사건들로 인해 책임에 대한 현대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 역사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해왔다.[1] 일부는 젊은 국왕에 대한 콜리니의 영향력에 질투심을 느꼈고 스페인과의 전쟁 계획을 두려워한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암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1] 다른 사람들은 이 주장에 대해, 그녀는 이 시기에 내부 평화를 추구했으며 이것이 그녀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대신 기즈 가문이 오랜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격을 계획했다고 주장한다.[1] 이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레베르가 있던 집이 기즈 가문의 소유였다는 점을 강조한다.[1] 또 다른 사람들은 파리 의회, 앙주 공작, 드 레츠,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알바 공작, 그리고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독립적으로 활동한 모레베르를 지지한다.[1]

국왕은 콜리니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의사를 보냈고 그를 방문하기까지 했다.[1] 한편 콜리니는 자신을 쏜 사람을 조사해달라고 국왕에게 격렬하게 청원했다.[1] 국왕은 이 문제를 조사하고 모든 범죄자를 법정에 세울 것을 약속했다.[1] 텔리니와 로슈푸코와 같은 고위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어두운 위협을 궁정에 가하기 시작했다.[1] 한편 콜리니는 이러한 이야기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동료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머물기로 결정했다.[1]

4. 2.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기즈 공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국왕에게 개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1572년 8월 22일, 카트린의 선동으로 파리에서 콜리니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샤를 9세는 콜리니를 방문하여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다. 그러나 카트린은 자신이 암살 시도의 배후로 밝혀질 것을 두려워하여, 개신교 신자들이 콜리니에게 앙갚음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아들 샤를 9세의 불안감을 이용하여 그를 설득했다.

샤를 9세는 분노하여 콜리니를 포함한 개신교 지도자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으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8월 24일 새벽, 앙리 드 기즈의 용병들이 콜리니의 집을 공격했다. 그들은 콜리니를 찌르고 계속 찔러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콜리니는 버티다가 결국 기즈의 부하 중 한 명에게 참수당했다.

잘려진 콜리니의 목은 로렌의 추기경에게 보내졌다. 존 크라크 리드패쓰(John Clark Ridpath)의 《리드패쓰의 세계사,(Ridpath's History of the World )》에는 '콜리니의 목을 받은 로렌의 추기경'이라는 그림이 실려 있다.

프란스 호겐베르크의 그림. 왼쪽에는 8월 22일 콜리니 제독에 대한 암살 시도가, 오른쪽에는 8월 24일 그의 살해가 묘사되어 있다.


콜리니는 나바라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의 결혼식을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이 결혼식은 가톨릭과 위그노 파벌 간의 화해를 위한 중요한 행사였다. 결혼식이 끝난 후, 콜리니는 며칠 더 파리에 머물면서 생제르맹 앙 레의 평화 조약 위반과 관련된 문제들을 국왕과 해결하려 했다. 8월 22일,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콜리니는 몽콩투르 전투에서 잃어버린 위그노 깃발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들을 떼어내 명예에 더 적절한 곳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콜리니는 거리에서 총격을 받았다. 총알은 그의 오른손 손가락 하나를 찢고 왼쪽 팔꿈치를 부러뜨렸다. 암살범은 도주했다.

이후 며칠 동안의 사건들로 인해 책임 소재에 대한 현대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일부는 카트린 드 메디치가 콜리니가 젊은 국왕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질투하고 스페인과의 전쟁 계획을 두려워하여 암살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카트린이 당시 내부 평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하며, 기즈 가문이 오랜 복수심을 채우기 위해 공격을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파리 의회, 앙주 공작, 드 레츠,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알바 공작, 그리고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 독립적으로 활동한 모레베르를 지지한다.

국왕은 콜리니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의사를 보냈고 그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콜리니는 국왕에게 암살범을 조사해달라고 청원했고, 국왕은 모든 범죄자를 법정에 세울 것을 약속했다. 텔리니와 로슈푸코와 같은 고위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위협했다. 콜리니는 이러한 이야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많은 동료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가톨릭교도들은 콜리니 암살 시도에 대한 위그노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두려움은 텔리니가 도시 외곽에 주둔시킨 4,000명의 병력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 8월 23일, 세 차례의 회의를 거쳐 가톨릭 지도부를 선제적으로 암살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이어졌다. 이 계획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트린, 국왕, 레츠, 느베르, 기즈, 앙주의 회의에서 이 조치에 대한 동의는 만장일치였다. 기즈, 오말, 앙굴렘, 앙주, 몽팡시에는 암살 목록을 작성하고 책임을 분담했다. 기즈는 콜리니를 공격한 후 좌안으로 건너가 생제르맹 교외의 표적들을 제거할 예정이었다. 몽팡시에는 루브르에서 나바르와 콩데를 포함한 표적들을 처리할 것이고, 그들은 개종을 강요받을 것이다.

24일 이른 아침, 기즈의 병력은 오말 호텔에 집결했다. 해 뜨기 직전 그들은 콜리니의 저택을 공격했다. 콜리니는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지붕을 통해 탈출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침실로 처음 들이닥친 사람은 요한 폰 야노비츠였는데, 그는 콜리니에게 늙은 선장에게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어린 병사라고 말하며 그의 나이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라고 했다. 콜리니가 창문에서 밀려나기 전에 들은 마지막 말은 "당신을 편안하게 해 줄 만큼 늙었습니다."였다.

뜰로 떨어진 후, 다음 일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부 프로테스탄트 동시대인들은 기즈가 그의 발로 적의 머리를 짓밟은 후 머리를 잘라 카트린에게 가져가도록 했고, 카트린은 그것을 방부 처리하여 교황에게 보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벌어진 일을 목격한 프로테스탄트 증인은 기즈가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콜리니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의 일행은 시체를 남겨두고 다음 표적으로 향했다.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과격한 폭도들은 시체의 생식기, 머리, 손을 잘라 며칠 동안 끌고 다녔다. 다음 몇 시간 동안 일반적인 학살이 벌어졌으며, 이는 도시 민병대와 인구 중의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조장되었다. 학살은 먼저 파리를 집어삼키고, 그 후 프랑스 주변의 다양한 다른 도시로 확산되었다.

조르조 바사리의 벽화에 묘사된 콜리니의 살해 (떨어지는 시체, 왼쪽 위)


콜리니의 서류는 왕비에 의해 압수되어 불태워졌다. 브랑트롬에 따르면 그 중에는 "매우 공정하고 잘 쓰여졌으며 출판할 가치가 있는" 내전의 역사도 있었다.

5. 사상과 신념

콜리니는 1560년에 종교 개혁에 대한 후원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1555년 브라질에 위그노들을 보내 안전하게 식민지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선언하기 전까지는 그의 삼촌의 보호를 받아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자들의 보호자로 활동했다.[1] 그는 대법관 미셸 드 로스피탈의 후원과 함께 종교적 자유령을 요구하였다.[1] 콜리니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대화를 이끌었으며, 칼뱅주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지만, 개신교를 질서, 학문, 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로 보았다.[1]

6. 가족 관계

콜리니는 두 번 결혼했다.

부인자녀
샬롯 드 라발(1530–1568)
자클린 드 몽벨 당트르몽(1541–1588), 당트르몽과 라네-젤린 백작 부인



그의 딸 루이즈 드 콜리니는 오라녜-나사우 가의 빌럼 1세와 결혼하여 오라녜 공 프레데릭 헨드릭을 낳았다.[3]

7. 평가와 유산

콜리니의 이름을 딴 장소는 다음과 같다:

장소위치
콜리니남아프리카 공화국
콜리니 요새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샤티용-콜리니프랑스
콜리니 플라자힐턴 헤드 아일랜드
콜리니(Coligni, 오기) 애비뉴뉴로셸 (뉴욕)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는 위그노 전쟁 당시 개신교 지도자로서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1568년 이후 내란에서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이끌었으며, 1570년 강화 조약으로 궁정에 복귀했다. 네덜란드의 개혁파를 지원하여 스페인에 대항하려 했으나,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군인으로서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했고,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기도 했다. 개신교로 개종한 후에는 개혁파의 중심인물이 되었으며, 샤를 9세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당시 앙리 1세 드 기즈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딸 루이즈 드 콜리니는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빌럼 1세와 결혼하여 프레데릭 헨드릭을 낳았다.

7. 1. 긍정적인 평가

콜리니는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고 억압받는 개신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1555년 브라질위그노들을 보내 안전하게 식민지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1] 1560년까지 종교 개혁을 위한 후원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그의 삼촌의 보호를 받아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자들의 보호자가 되었다.[1] 대법관 미셸 드 로스피탈의 후원과 함께 종교적 자유령을 요구하였다.[1] 콜리니의 대화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고 그는 칼뱅주의 철학에 관심을 끌어들였어도, 개신교를 질서, 학문, 정의의 유지를 위한 제도로 보았다.[1]

참조

[1] 간행물 "Francisque et Andre d'Albaigne: cosmographes lucquois au service de la France; Nouveau documents sur les frères d'Albaigne et sur le projet de voyage et de découvertes présenté à la cour de France; and Documents relatifs à un projet d’expéditions lointaines présentés à la cour de France en 1570" Bulletin de Géographie Historique et Descriptive 1894
[2] 간행물 "Francisque et Andre d'Albaigne: cosmographes lucquois au service de la France; Nouveau documents sur les frères d'Albaigne et sur le projet de voyage et de découvertes présenté à la cour de France; and Documents relatifs à un projet d’expéditions lointaines présentés à la cour de France en 1570" Bulletin de Géographie Historique et Descriptive 1894
[3] 문서 Note that the birth date here differs from the one provided by ''Encyclopædia Britannica'' in the lead para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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