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 가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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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쓰 가이슈는 1823년 에도에서 태어난 도쿠가와 막부의 하급 가신 출신으로, 네덜란드어와 서구 군사 과학을 공부했다. 그는 1860년 일본 최초의 사절단을 호위하여 미국을 방문했고, 귀국 후 도쿠가와 해군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며 일본 해군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막부 말기에는 사카모토 료마를 제자로 삼아 개혁을 설득했고, 도쿠가와 막부의 수석 협상가로서 메이지 유신을 비교적 평화롭게 이끌었다. 보신 전쟁 중에는 에도 성의 무혈 개성을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와 협상하여 대량 살상을 막았다. 메이지 시대에는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말년에는 저술 활동과 함께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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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 가이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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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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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가쓰 요시쿠니 (勝 義邦) |
다른 이름 | 가쓰 린타로 (勝 麟太郎) 가쓰 가이슈 (勝 海舟) 아와 가쓰 (安房 勝) |
별칭 | 가쓰 가이슈 (勝 海舟) |
출생일 | 1823년 3월 12일 |
출생지 | 에도, 도쿠가와 막부 |
사망일 | 1899년 1월 21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묘소 | 센조쿠 연못 공원, 도쿄, 일본 |
신분 | |
작위 | 백작 |
직책 | 군함 봉행 (軍艦奉行) 해군 차관 해군경 (海軍卿) |
소속 | |
소속 국가 | 도쿠가와 막부 |
복무 기간 | 1855년–1868년 (도쿠가와 막부) 1872년–1899년 (일본 제국) |
지휘 및 역할 | |
지휘 | 간린마루 (軍艦, Kanrin Maru) 고베 해군 훈련소 |
주요 전투 | |
참전 전투 | 보신 전쟁 |
훈장 | |
훈장 | 훈장 참고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가쓰 다미코(勝 民子) 마스다 이토 (増田 糸) 4명의 첩 |
자녀 | 9명 |
부모 | 가쓰 고키치 (父) 가쓰 노부코 (母) |
형제자매 | 가쓰 준코 (後に瑞枝と改名, 사쿠마 쇼잔의 아내) |
기타 정보 | |
후대 활동 | 군사 이론가 |
로마자 표기 | |
로마자 표기 | Katsu Kaishū |
2. 생애
1823년 3월 12일, 에도(江戸)에서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하급 가신단(家臣団) 출신으로 가쓰 요시쿠니(勝義邦)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가쓰 고키치(勝小吉)는 자서전 「무수이 이야기(武水記)」의 주인공으로, 행실이 좋지 않은 소규모 사무라이(侍) 가문의 수장이었다. 어린 시절 가쓰 린타로(勝麟太郎)(가이슈는 필명)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그는 네덜란드어와 유럽 군사 과학을 공부했고, 유럽 열강이 일본과의 접촉을 시도했을 때 정부의 통역관으로 임명되었다. 가쓰는 서구 군사 기술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네덜란드 해군 장교들의 조언에 따라 가쓰는 1855년부터 1859년까지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長崎海軍伝習所)의 해군 사관학교장을 역임했다.
1860년, 가쓰는 미 해군 장교 존 M. 브룩 중위의 지원을 받아 군함 관린마루(Kanrin-maru)의 함장으로서, 해리슨 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 (United States–Japan))|하리스 조약]]의 정식 비준을 위해 워싱턴 D.C.(Washington, DC)으로 가는 길에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California)까지 일본 최초의 사절단을 호위했다. 네덜란드(Netherlands)에서 건조된 관린마루는 서구 세계로 항해한 최초의 일본 선박이었다. 가쓰는 거의 두 달 동안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면서 미국 사회, 문화 및 기술을 관찰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가쓰는 도쿠가와 해군에서 일련의 고위직을 역임하며, 세습 지위에 따른 승진 및 임무 배정을 무시하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장교가 이끄는 통합된 일본 해군에 찬성하는 정부 의회에서 주장했다. 그가 고베 해군 교육 센터(Kobe Naval Training Center)|고베 해군학교]]의 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이 학교는 1863년에서 1864년 사이에 진보적 사고와 개혁가들의 주요 활동 근원이 되었다.
1862년, 당시 浪人(rōnin)인 사카모토 료마(Sakamoto Ryōma)는 근대화와 서구화(westernization)를 모두 지지했던 가쓰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가쓰는 가나가와 조약으로 이어진 서구의 영향에 맞서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장기 계획의 필요성을 료마에게 설득했다. 료마는 가쓰를 죽이는 대신 그의 조수이자 제자(protégé)로 일하기 시작했다.
1866년, 가쓰는 바쿠후 세력과 반막부 세력인 나가토 현(Nagato Province)|장주(Chōshū)]] 사이의 협상가로 임명되었고, 이후 도쿠가와 막부(Tokugawa bakufu)의 수석 협상가로서 평화로운 권력 이양(Peaceful transition of power)을 보장하는 비교적 평화로운 메이지 유신(Meiji Restoration)을 이끌었다.
반도쿠가와 운동에 동정적이었지만, 가쓰는 보신 전쟁(Boshin War) 동안 도쿠가와 바쿠후에 충성을 지켰다. 1867년 말 도쿠가와 세력이 붕괴된 후, 가쓰는 1868년 4월 11일 에도 성의 사이고 다카모리(Saigō Takamori)에게 항복 협상을 했다.
카쓰는 새로운 천황 정부가 쇼군의 옛 수도를 접수하여 도쿄(東京)로 개칭한 후 시즈오카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1872년 해군성 차관으로 잠시 정부에 복귀했고, 이후 1873년부터 1878년까지 해군성 대신을 역임했다. 가쓰 가쓰요시(勝 勝)는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일자리를 찾은 전 도쿠가와 측근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1869년부터 1885년까지 참의(参議)를 지냈다. 해군이 사쓰마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군 내 그의 영향력은 미미했지만, 그는 국가 정책에 대한 고위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 후 20년 동안 가쓰는 추밀원에서 활동하고 해군 문제에 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다.
그는 또한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2]
1887년 그는 귀족 제도인 ''가조쿠''(華族)에서 백작(伯爵) 작위를 받았다. 가쓰는 그의 회고록을 ''히카와 세이와''(氷川清話)라는 책에 기록했다.
(메이지 5년 12월 2일까지는 음력)
- 덴포 9년(1838년) 7월 27일, 가독을 상속하고, 소부정조에 들어가, 40석의 봉록을 받다.
- 안세이 2년(1855년)
- * 1월 18일, 이국응접걸부란서번역어용이 되다.
- * 7월 29일, 해군전습중립취급이 되다.
- * 8월 7일, 소부정조에서 소십인조로 변경되다.
- 안세이 3년(1856년)
- * 3월 11일, 강무소포술사범역이 되다.
- * 6월 30일, 소십인조에서 대번으로 변경되다.
- 안세이 6년(1859년)
- * 5월, 이요 마쓰야마번이 무사국 가나가와(현재의 요코하마시가나가와구)에 축조한 포대를 설계하다.
- * 11월 24일, 미국 파견을 명받다.
- 안세이 7년(1860년)
- * 1월 13일, 시나가와에서 간린마루 출항.
- * 2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 입항.
- * 윤3월 8일, 샌프란시스코를 출항.
- * 개원하여 만엔 원년 5월 6일, 시나가와 앞바다에 입항.
- * 5월 7일, 에도에 귀부하다.
- * 6월 24일, 천수번두과인·번서조소두취조가 되다. 석고 400석을 받다.
- 분큐 원년(1861년) 9월 5일, 천수번두격·강무소포술사범역으로 이동하다.
- 분큐 2년(1862년)
- * 7월 4일, 이노마루류수거격군함조련소두취로 이동하다.
- * 윤8월 17일, 군함봉행병으로 이동하다. 역고 1,000석.
- 분큐 3년(1864년)
- * 2월 5일, 섭해경위 및 고베조련소 운영을 위임받다.
- * 개원하여 겐지 원년 5월 14일, 작사봉행차석군함봉행으로 이동하고, 역고 2,000석. 대신이 되고, 무가관위로서 종오위하에 서임되어 아와노카미에 임관하다.
- * 11월 10일, 군함봉행을 파면당하고, 기합석이 되다.
- 게이오 2년(1866년) 5월 28일, 마치봉행차석군함봉행으로 복직하다.
- 게이오 3년(1867년) 3월 5일, 해군전습걸을 겸임하다.
- 게이오 4년(1868년)
- * 1월 17일, 해군봉행병으로 이동하다. 역고 5,000석. 열좌는 육군봉행병의 위.
- * 1월 23일, 육군총재로 이동하다. 열좌는 와카네기요시의 차좌.
- * 2월 25일, 육군총재를 면하고, 군사취급으로 이동하다.
- * 3월 13일·14일, 사쓰마번 에도번저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견하다. 동일, 에도성 무혈개성.
- 메이지 2년(1869년)
- * 7월 13일, 휘를 야스요시로 개명하다.[78]
- * 7월 18일, 위신정부의 외무대승에 임관하다.
- * 8월 13일, 외무대승을 사임하다.
- * 11월 23일, 병부대승에 임관하다.
- 메이지 3년(1870년) 6월 12일, 병부대승을 사임하다.
- 메이지 5년(1872년)
- * 5월 10일, 해군대부에 임관하다.
- * 6월 15일, 종사위에 승서하다.
- 메이지 6년(1873년) 10월 25일, 산의로 전임하고, 해군경을 겸임하다.
- 메이지 7년(1874년) 2월 18일, 정사위에 승서하다.
- 메이지 8년(1875년)
- * 4월 25일, 원로원의관으로 이동하다.
- * 4월 27일, 원로원의관 사표를 제출하다.
- * 11월 28일, 원로원의관을 사임하다.
- 메이지 20년(1887년)
- * 5월 9일, 백작을 수작하다.
- * 12월, 종삼위에 승서하다.
- 메이지 21년(1888년)
- * 4월 30일, 추밀고문관에 임관하다.
- * 10월, 정삼위에 승서하다.
- 메이지 22년(1889년)
- * 5월 8일, 추밀고문관의 사표를 제출하지만, 다음 날 각하되다.
- * 12월, 훈일등 즐보장을 수장하다.
- 메이지 23년(1890년) 7월 10일, 귀족원의원에 당선되지만 사퇴하다.
- 메이지 27년(1894년) 6월 30일, 종이위에 승서하다.
- 메이지 29년(1896년) 10월 27일, 추밀고문관 사표를 제출하지만, 11월 4일, 각하되다. 야마다 호탄 유적비의 제자를 담당하다.
- 메이지 31년(1898년) 2월 26일, 훈일등 욱일대수장을 수장하다.
- 메이지 32년(1899년)
- * 1월 19일, 사망.
- * 1월 20일, 증정이위. 법명: 대관원전해주일안대거사.
2. 1. 유년기 및 청년기
가쓰 가이슈는 1823년 3월 12일(문정 6년) 에도 혼조 가메자와초에서[8] 하타모토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린타로(麟太郎)였다.[9] 아버지 가쓰 고키치는 자서전 「무수이 이야기(武水記)」의 주인공으로, 행실이 좋지 않은 소규모 사무라이 가문의 수장이었다. 증조부 은이치는 에치고 국 미시마 군 나가토리 촌의 빈농 출신 시각장애인이었으나, 에도에서 고리대금업으로 성공하여 거대한 부를 얻었고, 조정으로부터 맹관 최고위인 검교를 매관하여 "미야마 검교"라고 칭하였다.[10] 은이치는 셋째 아들 헤이조에게 고케닌 오다니 가문의 지분을 사주었다.[11] 오다니 헤이조의 막내아들이 가쓰 고키치이며, 고키치는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오다니 가에서 가쓰 가로 양자로 들어갔다. 가쓰 가는 소부쇼구미라는 무직의 하급 기호였다.유년 시절인 1829년(문정 12년), 오다니의 친척 아차노츠보의 소개로 에도 막부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손자 하츠노죠의 놀이 상대로 에도성에 불려갔다. 일쿄 도쿠가와 가의 가신으로 출세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하츠노죠가 1838년(덴포 9년)에 요절하여 그 희망은 사라지게 된다. 같은 해, 아버지의 은퇴로 가독을 상속받았다.[12]
생가인 오다니 가에서 7세까지 지낸 후, 아카사카(현재의 도쿄도 미나토구)로 이사하기 전까지 혼조 이리에초(현재의 스미다구 미도리 4-24)에서 살았다. 1831년(9세) 무렵, 학습교습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노라이누에게 공격당해 음낭을 물어뜯겨 고환이 드러날 정도의 열상을 입었다.[13] 하나마치의 시고토시인 하치고로가 가쓰를 구조하여 집으로 데려가 의사를 불렀다. 외과의 시노다가 상처를 봉합했으나, 상태는 위중했고, 고키치는 금비라에 기원하며 알몸 순례와 수고리를 하며 기도했다.[13] 다행히 회복되어 70일 만에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13] 이 사건을 계기로 개를 싫어하게 되었다.
검술은 아버지 고키치의 집에서 사촌 형인 남곡신우의 도장, 후에 신우의 수제자인 시마다 코라노스케의 도장에서 배워,[14] 직심영류검술의 면허개전을 받았다. 스승의 권유로 선(禪)도 배웠다. 병학은 와카야마 붓도로부터 산카류를 익혔다.[15] 난학은 에도의 난학자 기사쿠 겐포에게 사사를 청했으나 거절당했고, 후쿠오카 번 저택에 사는 나가이 세이가이에게 사사하여 난학을 배웠다. 난학 수행 중, 사전 『두프・할마』를 1년에 걸쳐 2부 필사한 일화가 있다. 1부는 자신을 위해, 1부는 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사쿠마 조잔의 총애도 받았고,[16] 조잔의 권유로 서양 병학을 수련하고, 다마치에 사숙(난학과 병법학)을 열었다. 1850년 아카사카에 사설학교를 세워 서양 병학을 가르쳤다. 1854년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전습생 감독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인 교관들과 접촉하면서 세계 정세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얻게 된다.
2. 2.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 시절
1853년 페리 함대가 개항을 요구하면서 막부에서는 해양방위에 대한 중요성을 다이묘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호소하였다. 이때 가쓰 가이슈가 쓴 해양방위 의견서가 막부의 눈에 띄게 되었고 가쓰는 관직에 오르는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106] 가쓰는 해군 전습소에 입소하였다. 전습소에서는 네덜란드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교감도 겸임했고, 전습생과 네덜란드인 교관의 연락 역할도 맡았다.[19] 가이슈는 해군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가사키로 부임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결국 나가사키에서 3년 반 동안 공부하게 된다.[106]가에이 6년(1853년), 페리 함대가 내항(소위 흑선 내항)하여 개국을 요구하자, 막부 로쥬 수좌인 아베 마사히로는 막부의 결정만으로 쇄국을 깨는 데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해방에 관한 의견서를 막신은 물론 제후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모집했다. 이에 해주도 해방 의견서를 제출(가에이 6년 7월. 서양식 병학교 설립과 정확한 관판 번역서 간행의 필요성을 설파), 의견서는 아베의 눈에 띄게 되고, 메츠케 겸 해방걸이었던 오오쿠보 타다히로(일옹)의 인연을 얻게 되면서 안세이 2년(1855년) 1월 18일(구력), 이국 응접걸부 란서 번역용으로 임명되어 염원하던 직책을 얻게 되었고, 해주는 스스로 인생의 운을 잡을 수 있었다.[19]
같은 달부터 양학소 창설의 준비, 1월 23일(구력)부터 4월 3일(구력)에 걸쳐 간정봉행 이시카와 마사히라와 일옹이 명령받은 오사카만 검분 조사 참가를 거쳐 7월 29일(구력)에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입문했다. 이때의 전습생에는 야다보리 코우(게이조우), 나가모치 쿄우지로우 등이 있다. 그러나, 해군에 관한 지식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본심으로는 분야가 다른 나가사키 부임을 싫어했지만(8월 20일(구력)의 죠잔에게 보낸 편지에서), 막부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을 수도 없어, 10월 20일(구력)에 배로 나가사키에 내항, 이후 3년 반에 걸쳐 공부에 임하게 된다. 나가사키에 부임한 후 수주일 만에 청취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본인이 말하고 있기 때문인지, 인계의 역할에서 제1기부터 제3기까지 걸쳐 5년간을 나가사키에서 보낸다.[19]
해주의 학문 성과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는데, 후지이 테츠히로는 해주의 성적이 나빴고 안세이 4년(1857년) 3월에 1기생이 에도로 돌아갔는데 해주가 나가사키에 남은 점을 들어 불합격했다고 썼지만, 마츠우라 레이는 후지이의 기록에 반론을 제기, 안세이 3년(1856년) 6월에 해주가 전습소의 성과에 실망하여 에도로 귀부의 뜻을 제출하고, 이듬해 4년 1월에 에도에 군함 교수소(후의 군함 조련소)를 창설하는 것을 막부가 구상하고 귀부가 결정된 곳, 일변하여 잔류로 변경된 것을 상세히 기록하고, 불합격 류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20] 그러나, 해주가 빈번하게 배멀미에 시달렸던 것과, 원하는 만큼 공부가 진척되지 않았던 것(특히 수학을 싫어했다)은 사실이며, 해주가 선원에 매우 부적합한 체질 때문에 귀부 이야기가 떠오른 이유가 있었다.[21] 어찌되었든 해주는 안세이 4년 시점에서는 아직 에도로 돌아갈 수 없었고, 2년 더 나가사키에서 보내게 된다.
이 시기에 당시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인연도 얻고 있었고, 안세이 5년(1858년) 3월과 5월에 해주는 사쓰마를 방문하여 나리아키라를 만난다. 두 사람은 초면이 아니고 번주가 되기 전의 나리아키라가 에도에서 해주와 교류했지만, 후의 해주의 행동에 강한 영향을 주게 된다.[22]
같은 해부터 시작된 안세이 대옥에서 추천자인 일옹이 좌천되었지만, 나가사키에 있는 해주에게 영향은 없었고, 대옥을 주도한 타이로 이이 나오스케의 정치 수법과 대옥의 한 원인인 난키파와 잇치바시파의 정쟁을 비판하는 여유를 보이고 있다. 8월에 가이코쿠 봉행 나가이 타카시와 미즈노 타다토키가 켄메이 사절을 건의하자, 10월과 11월에 각각 나가이와 미즈노에게 보내 미국행을 희망하고, 두 사람으로부터 승낙의 답변을 얻어, 안세이 6년 1월 5일(구력)에 조양환을 타고 1월 15일(구력)에 귀부, 막부로부터 군함 조련소 교수 방두취에 임명되어, 새롭게 만들어진 군함 조련소에서 해군 기술을 가르치게 된다.[23]
2. 3. 미국 방문 (1860년)
1860년 2월 2일, 가쓰 가이슈는 관린마루(Kanrin-maru)의 함장이 되어 우라가 항구에서 출발하여 태평양을 횡단, 3월 17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107] 함린마루는 미국과의 수호 통상 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遣米使節 파견의 호위 임무를 맡았다.[24] 가이슈를 비롯한 일본 승무원들은 배멀미를 심하게 겪었지만, 미 해군 장교 존 M. 브룩 중위의 지원을 받아 항해를 계속했다.[107]가쓰는 샌프란시스코에 প্রায় 두 달 동안 머물면서 미국의 사회, 문화, 기술을 관찰했다.[107] 귀국 후, 가쓰는 도쿠가와 해군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며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장교가 이끄는 통합된 일본 해군을 주장했다.
관린마루에는 군함봉행 키무라 키타케가 최고위로, 가이슈는 교수 방두취로서 승선했다.[24] 존 만지로가 통역을, 후쿠자와 유키치가 키무라의 종자로 승선했다.[26] 유키치는 관린마루의 항해를 일본인의 위대한 업적이라 자찬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 승무원들이 배멀미로 거의 쓸모가 없었고, 브룩 등이 없었다면 미국에 갈 수 없었다는 설이 있다.[26]
미국 체류 중 가쓰는 다른 승무원들과 다툼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샌프란시스코 입항 시 키무라가 자신의 가문 문장을 관린마루 깃발에 꽂으려 하자, 가이슈는 도쿠가와 쇼군가의 붓꽃 깃발을 꽂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논의 끝에 키무라의 안이 통과되었다.[28] 귀국 후 6월 24일에 번서조사 두취조로 이동하였다.[29]
2. 4. 막부 말기의 정치 활동
1862년 해군 요직인 군함봉행(軍艦奉行)이 되었다.[106] 고베를 '일본의 해외 무역 거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오사카 만으로 안내하여 해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를 설득하였고, 고베에 해군조련소를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106] 고베 해군 조련소는 4월 27일에 설립 허가를 받았다[33].가이슈는 해군조련소에서 사상가들을 모아 교육하였는데, 해군조련소를 막부의 독점물로 삼지 않고 세이난 지역 번의 자제들이나 막말의 낭인들에게도 개방하였다.[106] 1862년, 당시 浪人(rōnin)인 사카모토 료마(Sakamoto Ryōma)는 근대화와 서구화(westernization)를 모두 지지했던 가쓰를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가쓰는 가나가와 조약으로 이어진 서구의 영향에 맞서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장기 계획의 필요성을 료마에게 설득했다. 료마는 가쓰를 죽이는 대신 그의 조수이자 제자(protégé)로 일하기 시작했다.
1866년에 군함봉행에 복직하였고[106] 곧 왕정복고 쿠데타가 일어나며서 막부는 그에게는 협상의 실권을 넘겼다. 그가 맡은 자리는 육군 총재였는데 그는 주전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피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106] 1869년 신정부군이 막부 타도를 내걸고 에도를 총공격하기로 한 3월 15일에 앞서 3월 13일, 14일 이틀동안 가쓰 가이슈는 신정부 측의 총대장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협상으로 총공격이 중지되었다.[106] 당시 에도의 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고 막부의 저항군 병력도 만만치 않았던 점을 고려할 때, 만약 전투가 일어났다면 대량의 인명 피해와 시설 파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쓰 가이슈의 정치적 판단과 결단은 막부의 몰락을 가져왔지만 일본에게 큰 다행으로 평가된다.[106]
2. 5. 에도 무혈 개성 (1868년)
1862년 해군 요직인 군함봉행(軍艦奉行)이 된 가쓰 가이슈는 고베를 '일본의 해외 무역 거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설득, 고베에 해군조련소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가이슈는 이곳에서 사상가들을 모아 교육했지만, 1864년 관직에서 해임되고 칩거하였다.1866년 군함봉행에 복직한 가이슈는 곧 왕정복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막부로부터 협상의 실권을 넘겨받았다. 육군 총재였던 그는 주전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869년 신정부군이 에도 총공격을 하기로 한 3월 15일에 앞서 3월 13일, 14일 이틀 동안 가쓰 가이슈는 신정부 측 총대장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협상으로 총공격을 중지시켰다. 당시 에도 인구가 100만 명 정도였고 막부 저항군 병력도 상당했기에 전투가 벌어졌다면 대량의 인명 피해와 시설 파괴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다. 가쓰 가이슈의 정치적 판단과 결단은 막부의 몰락을 가져왔지만, 일본에게는 큰 다행으로 평가된다.[106]

1868년 보신 전쟁이 시작되고 토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패배하자, 가쓰 가이슈는 에도 막부의 마지막 육군 총재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순 자세를 취하는 케이키의 의향에 따라 조정과의 협상에 나섰다.[41] 관군이 순부성에 다가오자, 가쓰는 조기 휴전과 에도성의 무혈 개성을 주장하며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3월 9일, 야마오카 테쓰슈가 순부로 협상을 가기 전 가쓰와 기본 방침을 조율했다. 가쓰는 테쓰슈의 인품을 알아보고 정토대총독부참모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보낼 편지를 건넸다.[42] 가쓰는 체포되어 처형 직전이었던 사쓰마 무사 마스미쓰 야스노스케를 설득하여 안내역으로 삼았다.[43] 3월 13일과 14일에는 가쓰가 사이고와 회담하여 에도성 개성 수순과 도쿠가와 종가의 향후 등에 대한 협상을 진행, 에도성하에서의 시가전을 피하게 되었다.[44]
가쓰는 협상에서 막부 측을 지원하던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신정부 측을 지원했던 영국을 이용, 영국 공사 파크스를 포섭하여 신정부 측에 압력을 가하게 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마쓰우라는 파크스의 압력에 대해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부정하고 있다.[45] 미즈노 야스오는 가쓰가 사이고와의 회담 이전에 어니스트 사토를 만나지 않았으므로, 사이고와의 회담에서 「파크스의 압력」을 이용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46][47]
협상이 결렬되었을 경우, 가쓰는 에도 민중을 지바로 피난시킨 후 신정부군을 유인하여 불을 지르고, 무기·병량을 불태운 곳에 게릴라식 소탕전을 펼치는 초토 작전을 준비했다. 이 작전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을 저지했던 1812년 러시아 전쟁의 전술을 참고한 것이라고 한다.[48] 에도 소방대 「을」의 우두머리였던 신몬 다쓰고로에게 시가지 방화를 의뢰하고, 에도 시민의 피난 준비를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막부 군함은 도쿄만 내에 배치하여 도카이도로의 함포 사격 준비를 시키고, 케이키의 신변은 요코하마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에 의해 망명하게 하는 수순이 되어 있었다.(이상의 전략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으며, 초토 작전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었다고 부정하는 설도 있다[49].)
회담 후, 협상은 보류되고 다시 동정대총독부와 가쓰 등의 이야기가 진행되었지만, 산죠 사네토미가 에도로 하향하여 29일에 타야스 가메노스케(후의 도쿠가와 이에토시)의 상속이 발표되었다. 5월 15일에 오무라 마스지로가 신정부군을 지휘하여 쇼기대를 섬멸(우에노 전투)한 후, 24일에 도쿠가와가의 영토가 순부번 70만 석으로 결정되었다. 가쓰는 한때 강경한 자세를 취했지만, 결국 대감봉인 처분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50]
보신 전쟁은 우에노 전투 후에도 계속되었지만, 가쓰는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 구 막부 측이 신정부에 저항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내전이 장기화되면 영국이 지원하는 신정부 측과 프랑스가 지원하는 구 막부 측으로 국내가 이분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2. 6. 메이지 시대
가쓰 가이슈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구 막부 세력의 대표격으로, 메이지 정부에서 외무대승, 병부대승, 참의 겸 해군경, 원로원 의관, 추밀고문관 등을 역임했다.[54] 그러나 메이지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아, 여러 직책을 사퇴하거나 단기간 재직 후 사직했다.[54] 원로원 의관을 끝으로 중앙 정부에서 물러났으며, 추밀고문관과 백작 작위도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여러 차례 사퇴 의사를 밝혔다.[54]1872년 해군성 차관으로 잠시 정부에 복귀했고, 1873년부터 1878년까지 해군성 대신을 역임했다.[54] 해군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국가 정책에 대한 고위 고문으로 활동했다.[54] 그 후 20년 동안 추밀원에서 활동하며 해군 문제에 관해 저술했다.[54] 1887년에는 ''가조쿠''(華族) 제도의 백작(伯爵) 작위를 받았다.[54]
가쓰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2] 막말의 혼란기에 요시노부와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유신 직후부터 30년간 요시노부의 사면을 위해 힘썼다.[60] 그 결과 요시노부는 1898년 메이지 천황에게 배알하고 공작 작위를 받았다.[60] 가쓰는 또한 구 막부 신하들의 취업 알선, 사업 자금 지원, 생활 보호 등 막부 붕괴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61]

메이지 10년(1877년) 세이난 전쟁 전후 사이고 다카모리의 명예 회복에 힘썼으며, 우에노에 동상 건립을 지원했다.[62][63] 일청 전쟁에는 반대 입장을 취했으며, 패전 후 자결한 청나라 장수 정여창을 추도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64] 그는 구미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추종하는 것을 경계하고, 중국과 협력하여 구미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4]
만년에는 정부의 의뢰를 받아 『수진록』, 『해군 역사』, 『육군 역사』, 『개국 기원』, 『히카와 청화』 등을 집필, 구술, 편찬했다.[65] 아시오 광독 사건에 대해서는 백성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고 비판했다.[67] 1899년 1월 19일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도쿄 오타구의 세족이케 공원에 있다.
3. 가계
사쿠마 쇼잔은 그의 누이와 결혼하여 처남매부간이 되었다. 사위는 메가타 다네타로이다.
정실은 가쓰미코(勝民子)이다. 장녀 우치다 유메(内田夢)는 우치다 마코토(内田誠)와, 차녀 히키다 타카코(疋田孝子)는 히키다 마사요시(疋田正善)와 결혼했다.[97] 장남은 가쓰 코지카(勝小鹿)이며, 손녀는 치요, 이요(이데)이다. 차남 시로(四郎)는 1866년에 사망했다.[98]
첩 카지 쿠마(梶玖磨)는 나가사키 전습소 시절 14세의 나이로 34세의 카이슈의 첩이 되었으나, 25세에 사망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은 사망했다. 삼남 가지 우메타로(梶梅太郎)는 클라라 휘트니와 결혼했다.
첩 마스다 이토(増田糸)는 가쓰가의 사용인으로, 안세이 7년 칸린마루 미국 방문 전에 관계를 맺었다. 삼녀 잇코(逸子)는 메가타 타네타로와 결혼했고, 사녀는 야에(八重)이다.
첩 코니시 카네(小西かね)는 아카사카 히카와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으로, 사남 오카다 요시쵸(岡田義徴)를 낳았다.[99] 첩 시미즈 토요(清水とよ)는 이웃의 옛 막번의 딸로, 이후 해고되어 카가와가에 시집가 "카가와 토요"(香川とよ)가 되었다. 오녀 묘코(妙子)를 낳았다. 첩 모리타 요네코(森田米子)는 아카사카 히카와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이다.
적장자 코지카는 카이슈의 말년에 40세로 급사하여, 코지카의 장녀 이데에게 구조 도쿠가와 요시히토의 십남 세이(勝精)를 양자로 맞이하여 가독을 잇게 하였다. 카이슈는 이를 지켜보듯이 세상을 떠났다. 세이는 재계에 들어가, 아사노 시멘트와 이스시키마 비행기 등의 중역을 역임하였다.[100]
의제는 사쿠마 쇼잔으로, 여동생 준코(順子)의 남편이다.
손녀인 차녀 타카코의 아이 히키다 테루코(疋田輝子)는 난코인(南湖院) 창설자 타카다 케이안(高田畊安)에게 시집갔다. 손녀인 삼녀 잇코의 아이 메가타 타케요(目賀田多計代)는 나가이 나가요시의 장남 나가이 알렉산더에게 시집갔다.
일본 재무성 사무차관 가쓰 에이지로와 세계은행 부총재 가쓰 시게오(勝茂夫) 형제가 현손에 해당한다는 설이 있었으나, 에이지로는 잡지 취재에서 카이슈와의 관계를 부정했다.[101]
4. 평가 및 논란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외교 수완과 예리한 안목을 갖춘 정치가이자 전략가, 실무가로 칭송하며 존경하는 팬이 있는 반면, 이과 계통의 교양이 부족했던 점[88]을 비롯해 허풍을 떠는 출세주의자로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막말 시대부터 있었다.
- 사이고 다카모리 "가쓰 씨를 처음 만났는데, 정말 놀라운 인물이었습니다. 얼마나 지략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였습니다. 영웅적인 기질을 지녔고, 사쿠마 조잔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나서 매우 흠모했습니다."
- 사카모토 료마 "일본 제일의 인물"
- 쿠리모토 스쿠운 "수치심을 모르는 자"[89]
- 오구리 다다마사 "가쓰는 해로운 인간이다. 나는 그를 제거하고 싶다."[90]
- 오무라 마스지로 "가쓰 안방이라는 사람은 대가입니다. 막부 사람들 중에는 드문 사람이죠. 어쨌든 그 사람은 다릅니다."[91]
- 후쿠자와 유키치 "체면을 차리지 않는 자"[92]
- 미우라 고로 "가쓰 가이슈는 기지 있는 사람이었겠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93]
- 이토 치유
- *"선생님을 만나보니, 그 태도는 너무나 무심했고, 10년 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꾸중도 하고,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독설과 풍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음껏 이야기했습니다. 그 태도에는 상당히 놀랐습니다. 여러 번 찾아가 보았는데,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화술은 정말 절묘하다고 할 수 있으며,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때로는 그 경력을 들려주며, 막말 시대의 인물이나 큰 사건에 대해, 재치 있는 비유를 섞어서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여러 가지 교훈이 담겨 있었습니다."[94]
- *"『(내 조상은) 내 생각에는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에 얼마 안 되는 돈을 가지고 나라를 떠났고, 게다가 선천적인 맹인이었으니까, 음, 거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원래 고센야라는 곳이 맹인 여자 가수의 본고장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데, 겨울을 지내고 눈이 녹을 무렵이 되면, 낡은 삼현금을 지고, 길을 가면서 돈을 벌면서 에도로 나온다는 말을 들었으니, 요컨대 그 무리였을 것이다. 하하하…』 성공한 사람은 조상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하고, 또 말할 만한 조상이 없으면 굳이 조상을 만들어서 떠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이슈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조상은 맹인 여자 가수와 함께 나온 거지 같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태연히 웃었으니, 나도 의외의 생각이 들었다."[94]
- 란학(蘭学일본어)에 대한 소양을 살려 서양 책 번역을 통해 얻은 지식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양식 포술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위에서처럼 수리 계통의 소양이 부족했던 탓에 해군 실무에는 어둡고, 또한 알고 지내던 거상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 해군론은 해군과 해운의 구별이 불분명한 등 서양 해군의 실태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나가사키 해군 연습을 통해 빈번하게 훈련 항해를 경험했기 때문에, 내해·연안 항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고, 간린마루에 탑승했던 브룩 대위는 외양 항해 중의 지휘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하면서도 우라가 입항 당시의 조선에 대해서는 "매우 능숙하게 배를 조종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 이러한 이유로 해군에서도 미움을 받았고, 분큐 3년 8월 16일에 군함조의 두취 이하 전원이 사직을 무기로 파업을 감행하여, 가이슈가 설득에 나서는 소동으로 발전했다.[95] 또한 분큐 3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4년 1월 8일까지 이에모토를 준도마루에 태우고 바닷길로 두 번째 상락을 감행했을 때, 중간에 체류한 시모다에서 승무원과 대립하여 출발 연기를 강행했거나, 함께 간 다른 배가 시모다로 돌아간 것, 일기에서 이에모토를 칭찬하면서 다른 사람이나 다른 배는 쓰지 않는 등 해군 지휘관으로서 문제점이 많이 보였다.[96]
- 사후 3일 후, 히카와 저택에 칙사가 와서 칙어를 받았다.
:::막부의 말기에 이르러 국정을 살피고 무예를 연마하여 천운의 중흥에 임하여 옛 주군을 보필하여 해임의 실적을 거두고, 이후 현관에 재직하여 공훈이 점점 빛났습니다. 이제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에 신하를 보내어 부의를 보내어 위로하게 합니다.[94]
4. 1. 긍정적 평가
가쓰 가이슈는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외교 수완과 예리한 안목을 갖춘 정치가이자 전략가, 실무가로 칭송받으며 존경하는 팬이 있다.[88]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쓰 씨를 처음 만났는데, 정말 놀라운 인물이었습니다. 얼마나 지략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였습니다. 영웅적인 기질을 지녔고, 사쿠마 조잔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나서 매우 흠모했습니다."라고 평가했고,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송했다.[94] 오무라 마스지로는 "가쓰 안방이라는 사람은 대가입니다. 막부 사람들 중에는 드문 사람이죠. 어쨌든 그 사람은 다릅니다."라고 평가했다.[91] 이토 치유는 가쓰의 화술과 인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남겼다.[94]하지만, 란학(蘭學)에 대한 소양을 살려 서양 책 번역을 통해 얻은 지식을 국내에 소개함으로써 양식 포술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수학이 필수인 해군 연습에서 낙제한 4명 중 한 명이었을 정도로 이과 계통의 교양이 부족했다.[88] 이러한 이유로 해군 실무에는 어둡고, 해군과 해운의 구별이 불분명한 해군론을 펼치는 등 서양 해군의 실태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부분이 많았다.[95] 그러나 나가사키 해군 연습을 통해 빈번하게 훈련 항해를 경험했기 때문에, 내해·연안 항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고, 칸린마루에 탑승했던 브룩 대위는 외양 항해 중의 지휘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하면서도 우라가 입항 당시의 조선에 대해서는 "매우 능숙하게 배를 조종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가쓰는 사후 3일 후, 히카와 저택에 칙사가 와서 칙어를 받았다. 칙어에는 "막부의 말기에 이르러 국정을 살피고 무예를 연마하여 천운의 중흥에 임하여 옛 주군을 보필하여 해임의 실적을 거두고, 이후 현관에 재직하여 공훈이 점점 빛났습니다. 이제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94]
4. 2. 부정적 평가
가쓰 가이슈는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외교 수완과 예리한 안목을 갖춘 정치가이자 전략가, 실무가로 칭송받기도 하지만, 허풍을 떠는 출세주의자로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막말 시대부터 있었다.[88]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쓰를 "지략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였"고 "사쿠마 조잔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나서 매우 흠모했다"고 평가했다.[88] 반면, 쿠리모토 스쿠운은 "수치심을 모르는 자",[89] 오구리 타다마사는 "가쓰는 해로운 인간이다. 나는 그를 제거하고 싶다"고 평가했다.[90] 후쿠자와 유키치 또한 "체면을 차리지 않는 자"라고 평가했다.[92]가쓰는 란학(蘭學)에 대한 소양을 바탕으로 서양 책 번역을 통해 얻은 지식을 국내에 소개하여 양식 포술가로서 명성을 얻었다.[88] 그러나 수리 계통의 소양이 부족하여 해군 실무에는 어두웠고, 해군과 해운의 구별이 불분명한 해군론을 주장하는 등 서양 해군의 실태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부분이 많았다.[88] 나가사키 해군 연습을 통해 빈번하게 훈련 항해를 경험하여 내해·연안 항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고, 칸린마루에 탑승했던 브룩 대위는 우라가 입항 당시의 조선에 대해 "매우 능숙하게 배를 조종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88]
하지만, 해군 내에서는 가쓰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분큐 3년(1863년) 8월 16일에는 군함조의 두취 이하 전원이 사직을 무기로 파업을 감행하여 가쓰가 설득에 나서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95] 또한, 분큐 3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4년 1월 8일까지 이에모토를 준도마루에 태우고 바닷길로 두 번째 상락을 감행했을 때, 시모다에서 승무원과 대립하여 출발 연기를 강행하는 등 해군 지휘관으로서 문제점이 많이 보였다.[96]
4. 3. 현대적 재평가
가쓰 가이슈는 일본 역사상 보기 드문 외교 수완과 예리한 안목을 갖춘 정치가, 전략가, 실무가로 칭송받으며 존경하는 팬이 있는 반면, 허풍을 떠는 출세주의자로 매우 싫어하는 사람들도 막말 시대부터 있었다.[88]-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쓰를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지략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영웅적인 기질을 지녔고, 사쿠마 조잔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나서 매우 흠모했다"고 평했다.
-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송했다.[89]
- 오무라 마스지로는 "가쓰 안방이라는 사람은 대가입니다. 막부 사람들 중에는 드문 사람이죠. 어쨌든 그 사람은 다릅니다."라고 평가했다.[91]
- 이토 치유는 가쓰의 솔직하고 거리낌 없는 태도와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화술, 막말 시대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재치 있는 비유를 섞은 이야기에 감탄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또한 가쓰가 자신의 조상을 맹인 여자 가수와 함께 나온 거지 같은 것이었을 것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의외라고 생각했다.[94]
반면, 쿠리모토 스쿠운은 "수치심을 모르는 자", 오구리 타다마사는 "가쓰는 해로운 인간이다. 나는 그를 제거하고 싶다"고 비판했다.[90] 후쿠자와 유키치는 "체면을 차리지 않는 자"라고 평했으며,[92] 미우라 고로는 "가쓰 가이슈는 기지 있는 사람이었겠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93]
가쓰는 란학에 대한 소양을 바탕으로 서양 책 번역을 통해 얻은 지식을 국내에 소개하여 양식 포술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수학이 필수인 해군 연습에서 어려움을 겪는 등 이과 계통의 교양이 부족했고,[88] 해군과 해운의 구별이 불분명한 해군론을 주장하는 등 서양 해군의 실태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사키 해군 연습을 통해 빈번한 훈련 항해를 경험하여 내해·연안 항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 칸린마루에 탑승했던 브룩 대위는 외양 항해 중의 지휘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고 하면서도 우라가 입항 당시의 조선에 대해서는 "매우 능숙하게 배를 조종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군에서도 미움을 받았고, 분큐 3년(1863년) 8월 16일에는 군함조의 두취 이하 전원이 사직을 무기로 파업을 감행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95] 또한, 분큐 3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4년 1월 8일까지 이에모치를 준도마루에 태우고 바닷길로 두 번째 상락을 감행했을 때, 시모다에서 승무원과 대립하여 출발 연기를 강행하는 등 해군 지휘관으로서 문제점이 많이 보였다.[96]
가쓰 가이슈가 사망한 지 3일 후, 히카와 저택에 칙사가 와서 칙어를 받았다. 칙어에는 "막부 말기에 국정을 살피고 무예를 연마하여 천운의 중흥에 임하여 옛 주군을 보필하여 해임의 실적을 거두고, 이후 현관에 재직하여 공훈이 점점 빛났습니다. 이제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5. 가쓰 가이슈 어록
- 승리를 바라면 분노하여 처치를 잘못하고, 진퇴를 잃는다. 방어에 힘쓰면 후퇴하는 마음이 생겨 휘둘린다. 그래서 나는 항상 우선 승패의 생각을 잊고 허심탄회하게 사변에 대응했다.
-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힘들고 가난해도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짓만은 해서는 안 된다.
- 나는 (막부) 붕괴 당시, 일본국의 일을 생각하여 도쿠가와 300년의 역사도 돌아보지 않았다.
- 으음, 대부분의 일들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무너집니다.
- 행정개혁이라는 것은, 매우 주의하지 않으면 약자 괴롭히기가 된다. 중요한 것은, 개혁가 자신이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이다.
-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나머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걱정하면 좋은 것이 아닌가. 어차피 될 대로 될 것이다.(일본의 장래 등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 언제 소나무를 심었는지, 삼나무를 심었는지, 눈에 띄지 않도록 백년 대계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 문명, 문명, 한다지만, 너희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서구의 학문을 가르치고, 그래서 그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들을까? 응, 안 들을 것이다. 아버지는 고집이 세서 곤란하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 적이 많을수록 재미있다.(카츠 자신도,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 죽은 후에도 비판자가 많은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지위에 걸맞게 현명합니다.(방미사절에서 귀환하여 쇼군 이에모치에게 알현했을 때, 막각의 로쥬로부터 미국과 일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받았을 때의 답변)
- 도대체, 광독은 도대체. 산을 파는 것은 구막 시대부터 해왔지만, 손끝으로 조금씩 파면 독은 흘러가 버린다. 바다에 소변을 해도 바닷물은 소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은 문명이라고 한다. 근본이 잘못된 것이다.(아시오 광독 사건이 명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채굴을 멈추지 않는 정부에 대해)
- 세상에 무신경만큼 강한 것은 없다.
- 지금까지는 사람들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5척에 못 미치는 4척(子爵)이라니.[77]
- 세간에서는 (청일 전쟁) 백전백승이라고 기뻐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낀다. 거기까지 되면, 그 나라는 상당히 큰 곳이 있다. 중국인은, 폭군이 바뀌든, 적국이 와서 나라를 빼앗든, 거의 무관심하며, 아, 폭군이 바뀌었구나, 아, 일본이 와서 우리나라를 빼앗았구나,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있다. 바람이 분 정도로도 느끼지 못한다. 느끼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나의 황실이 망하고, 다른 황실이 바뀌든, 누가 와서 나라를 빼앗든, 하나의 사회는 여전히 구태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흥망은, 코끼리 몸에 모기가 파리에 물리는 정도로밖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어쨌든, 일본인도 너무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랑하고 있으면, 나중에 엄청난 일을 당할 것이다. 칼이나 총의 전쟁에서는 이기지만, 경제적인 전쟁에서 지면, 국가는 어쩔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경제적인 전쟁에 관해서는, 일본인은 중국인에게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은밀히 걱정한다.
- 청일 전쟁에는, 나는 크게 반대였다. 왜냐하면, 형제싸움이니까 개도 안 물지 않은가. 설령 일본이 이긴다 해도 어떻게 될까. 중국은 역시 스핑크스로서 외국인이 알 수 없는 것이 좋다. 중국의 실력을 알게 되면, 마지막으로 구미로부터 끊임없이 밀려올 것이다. 즉, 구미인이 모르는 사이에, 일본은 중국과 손을 잡고 상업이나 공업이나 철도를 하는 것이 좋다. 중국 5억의 민중은 일본에 대해 최대의 고객이다.
- 세상은 살아있다. 이치는 죽어있다.(히카와세이와)
6. 관련 작품
가쓰 가이슈를 소재로 한 소설, 드라마, 만화, 게임 등이 있다.
7. 기념물
세이족이케(도쿄도 오타구) 호숫가에는 가이슈의 말년 저택인 "센토쿠켄(세이족켄)"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옆의 호오오우각(구・세이메이 문고)은 오타구가 취득하여 "가쓰 가이슈 기념관"으로 정비했다.[87] 센토쿠켄 터 옆에는 가이슈 부부의 묘가 있으며, 그 옆에는 가이슈가 자비로 건설한 "사이고 난슈 류콘비"가, 그 옆에는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에도 성 무혈 개성의 위업을 기린 도쿠토미 소호의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가쓰 가이슈 탄생지비"는 가이슈가 아버지 코키치의 친가인 오토야가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현재 터는 료고쿠 공원이 되어 있으며, 공원 안에 비가 세워져 있다.
"사이고 난슈 가쓰 가이슈 회견지"비(도쿄도 미나토구 시바)는 에도 성 무혈 개성을 결정한 가쓰・사이고 회담이 열렸던 사쓰마 번 저택 터에 서 있다.
"가쓰 가이슈 동상"(도쿄도 스미다구 아즈마바시)은 스미다구청(리버피아 아즈마바시)에 인접한 "우루오이 광장"에 2003년 7월 21일(바다의 날), 오늘날 도쿄 발전의 기초를 만든 가이슈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유지(가쓰 가이슈 동상을 세우는 모임) 일반으로부터의 기부금 등으로 세워졌다.
"가쓰 가이슈 거주지"(와카야마현와카야마시 후나다이쿠초)는 분큐 3년(1863년), 막부로부터 키슈의 해안 방위 공사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살았던 거주지 터를 기리는 비석이다. #REDIR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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