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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타 다네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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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가타 다네타로는 일본 제국의 재정관료, 법조인, 교육자이며, 대한제국 재정 고문으로 활동했다. 1853년 태어나, 하버드 법률학교에서 유학 후 문부성에서 근무하며 유학생을 감독했다. 이후 대장성에서 세제 및 재정 제도를 정비했으며, 1904년 귀족원 칙선의원이 되었다.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대한제국 재정 고문으로 임명되어 화폐정리사업을 주도했다. 또한, 전문학교(현 전수대학) 설립, 도쿄 음악학교 설립의 기초를 다지는 등 교육 분야에도 기여했다. 1920년 국제연맹 대사를 역임했으며, 192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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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타 다네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메가타 다네타로
원어 이름目賀田 種太郎
로마자 표기Megata Tanetaro
한자 표기목하전 종태랑
출생일1853년 8월 25일
출생지에도 혼쇼 다이헤이정
사망일1926년 9월 10일
국적일본
배우자메가타 이쓰코 (가쓰 가이슈의 딸)
자녀쓰나요시
학력
출신 학교하버드 로스쿨

2. 생애

메가타 다네타로는 1853년 에도(현 도쿄)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였고, 시즈오카 학문소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대학남교(현 도쿄대학교 전신)를 거쳐 1870년(메이지 3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하버드 법률학교에서 수학했다.[1]

1874년(메이지 7년) 귀국 후 문부성에서 근무하며 유학생 감독으로 활동했고, 1879년(메이지 12년) 귀국 후에는 사법성 소속 변호사 및 판사로 일하며 도쿄 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880년(메이지 13년) 센슈 학교(현 센슈 대학)와 도쿄 음악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설립에 기여했다.

이후 대장성으로 옮겨 주세국장, 요코하마 세관장 등을 역임하며 세제 및 재정 제도 정비에 관여했다. 1904년(메이지 37년) 8월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임명되었으며,[2] 같은 해 10월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대한제국의 재정 고문으로 파견되어 한국의 재정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한국통감부 재정감사 장관에 임명되었고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20년에는 국제연맹 제1회 총회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3년(다이쇼 12년) 추밀원 고문관에 임명된 후 귀족원 의원직을 사임했다.[3] 1926년(다이쇼 15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메가타 다네타로는 1853년(가에이 6년) 7월 21일, 에도(현재의 도쿄) 본소 타이헤이초에서 하급 무사(후에 시즈오카번 번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창평삭학문소에서 한학을, 개성소에서 수학과 한학을 배우며 재능을 보여 신동으로 불렸다. 16세에는 시즈오카 학문소 영학교(英学校)에서 영어 5등 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번(藩)의 명으로 도쿄로 상경하여 대학남교(현 도쿄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에 입학했다. 재학 중 영국 유학 명령을 받았으나, 본인의 희망에 따라 미국 유학을 청원하여 대학남교 제1회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메가타가 미국으로 건너간 1870년 당시, 미국에 있던 일본인 유학생은 37명에 불과했다.[1] 그는 하버드 법률학교(Harvard Law School)에 입학했는데, '기독교도인 것'이라는 입학 조건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여 입학 허가를 얻었다.

1874년(메이지 7년) 법률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귀국했다. 1875년(메이지 8년)에는 문부성 소속 유학생 감독으로 가이세이 학교(현 도쿄 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 학생 9명을 인솔하여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메가타가 인솔한 학생들은 하토야마 카즈오, 고무라 주타로, 키쿠치 타케오, 사이토 슈이치로(斎藤修一郎), 하세가와 요스케(長谷川芳之助), 마츠이 나오키치(松井直吉), 하라구치 카나메(原口要), 히라이 세이지로(平井晴二郎), 난부 큐고(南部球吾)였다. 이들은 훗날 정계, 재계, 교육계 등에서 활약하는 인재들이었다. 메가타는 1879년(메이지 12년) 유학생 감독 임무를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2. 2. 관료 및 법조 경력

1874년(메이지 7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문부성에서 근무했다. 1875년(메이지 8년)에는 유학생 감독으로 개성학교(현: 도쿄 대학교) 학생 9명을 인솔하여 다시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인솔한 학생 중에는 하토야마 카즈오, 고무라 주타로, 키쿠치 타케오, 사이토 슈이치로, 하세가와 요스케, 마츠이 나오키치, 하라구치 요, 히라이 세이지로, 난부 큐고 등 훗날 일본의 정계, 재계, 교육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879년(메이지 12년) 미국에서 귀국한 후, 1880년(메이지 13년)에는 사법성 부속 변호사(대언인)가 되었으며, 도쿄 대언인 조합(현: 도쿄 변호사회) 회장을 맡았다. 1881년(메이지 14년) 3월에는 판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후 대장성으로 자리를 옮겨 관료로서 경력을 쌓았다. 1883년(메이지 16년) 대장성 서기관, 1886년(메이지 19년) 주세국 감사과장, 1887년(메이지 20년) 주세국 조사과장 겸 감사과장을 지냈다. 1891년(메이지 24년)에는 요코하마 세관장으로 임명되었고, 1894년(메이지 27년)에는 대장성 주세국장으로 승진하여 세제 및 재정 제도의 정비에 기여했다.

1904년(메이지 37년) 8월 22일에는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임명되었다.[2] 같은 해 10월, 제1차 한일협약 체결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대한제국의 재정 고문으로 파견되어 한국의 재정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한국통감부 재정감사 장관에 임명되어 한국의 재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같은 해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23년(다이쇼 12년)에는 추밀원 고문관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0월 27일 귀족원 의원직을 사임했다.[3]

2. 3. 대한제국 재정 고문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일본 제국고문정치가 실시되자, 메가타 다네타로는 같은 해 10월 대한제국 탁지부의 재정 고문으로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재정과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2] 그는 1905년 화폐정리사업을 단행하였고, 금융조합을 설치하는 등 통감부의 침략 정책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07년에는 한국 통감부 재정감사장관에 임명되었다.

2. 3. 1. 화폐정리사업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른 일본 제국고문정치가 실시되면서, 메가타 다네타로는 대한제국 탁지부의 재정 고문으로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고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는 1905년 화폐정리사업을 단행하여 대한제국의 기존 화폐인 백동화를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교환하도록 했다.

메가타는 백동화의 품질을 자의적으로 갑(甲), 을(乙), 병(丙) 세 등급으로 나누어 교환 비율을 불평등하게 적용했다. 품질이 가장 좋은 갑종 백동화는 제일은행권과 동일한 가치로 교환해주었으나, 중간 품질인 을종은 액면가의 절반 이하 가치로 교환해주었고, 품질이 나쁜 병종은 화폐로 인정하지 않아 교환 자체를 거부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한국 상인과 민족 자본가들이 보유하고 있던 백동화는 을종과 병종이었기 때문에 이 조치로 인한 재산상의 피해는 막대했다.

더욱이 화폐 교환 기간은 단 3일로 매우 짧았고, 그마저도 새 화폐 발행이 지연되어 많은 상인들이 제때 교환하지 못하는 혼란이 발생했다. 이러한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화폐정리사업의 결과로 수많은 한국 상인, 민족 자본가, 그리고 민족 은행들이 파산하고 몰락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대한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일본 경제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2. 4. 교육 활동

1880년 9월, 소마 나가타네, 타지리 이나지로, 코마이 시게카쿠 등과 함께 센슈 학교(専修学校)를 설립했다. 이는 사실상 일본 최초의 사립 경제·법률 학교였다. 센슈 학교는 이후 1913년에 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23년부터는 대학령에 따른 정식 대학이 되었다.

당시 도쿄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곳은 관립인 도쿄 대학 법학부와 사법성 법학교뿐이었다. 도쿄 대학에서는 영어로 영미법을, 사법성 법학교에서는 프랑스어로 프랑스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센슈 학교 법률과는 일본어로 법학 과목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시도를 한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또한 당시 일본에는 근대경제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센슈 학교는 일본 최초의 근대 경제학 교육 기관이 되었다. 이는 당시 일본 교육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메가타는 음악 교육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도쿄 음악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미국 유학 중 도쿄 음악학교 초대 교장이 되는 이자와 슈지를 만나 일본 음악과 서양 음악의 조화를 모색하는 연구를 함께 했다. 당시 일본 학교 교육에는 음악 과목이 없었는데, 1878년 이자와 슈지와 함께 음악 교육 도입에 관한 의견서를 문부대신에게 제출했다. 또한 미국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루서 호이팅 메이슨(보스턴 음악학교 설립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메이슨은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 음악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2. 5. 국제 연맹 활동

1920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제1회 총회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당시 이시이 기쿠지로,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대사 직책을 맡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상임이사국이었던 일본을 대표하여 활동했다.

2. 6. 사망

1926년(다이쇼 15년) 사망했으며, 묘소는 도쿄의 이케가미혼몬지에 있다. 법명은 本覚院殿仁譲日種大居士|본각원전인양일종대거사일본어이다.

3. 평가

메가타 다네타로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두각을 나타내 창평삭학문소와 개성소에서 수학했으며, 16세에 이미 시즈오카 학문소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대학남교(현 도쿄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하버드 법률학교에서 유학했다.[1] 귀국 후에는 문부성, 사법성 등에서 근무하며 법조인으로 활동했고, 요코하마 세관장, 대장성 주세국장, 귀족원 의원, 추밀원 고문관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일본의 근대적인 세제 및 재정 제도 정비에 관여했다.[2][3] 또한 교육 분야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국제적으로는 1920년 국제연맹 총회에 일본 대표단 대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 이후 대한제국의 재정 고문으로 부임하여 한국의 재정을 장악하고 경제 침탈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활동은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측면과 제국주의적 침략에 동조하고 실행한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3. 1. 긍정적 평가

메가타 다네타로는 일본의 근대 법률, 경제, 교육 시스템 구축에 기여한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1] 하버드 법률학교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대장성, 귀족원 의원, 枢密院 고문관 등 정부 요직을 거치며 세제 및 재정 제도 정비에 참여했다.[2][3]

특히 교육 분야에서의 업적이 두드러진다. 1880년 9월, 相馬永胤, 田尻稲次郎, 駒井重格 등과 함께 센슈 학교(현 센슈 대학)를 설립했다. 이는 사실상 일본 최초의 사립 경제·법률학교였다. 당시 도쿄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학교는 소수의 관립학교뿐이었고, 이들 학교가 각각 영어 또는 프랑스어로 외국법을 가르쳤던 것과 달리, 센슈 학교는 일본어로 법학 과목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또한, 근대경제학의 전문 교육 과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본 최초의 학교로서 교육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음악 교육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도쿄 음악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자와 슈지와 함께 일본 음악과 서양 음악의 조화를 연구했다. 1878년에는 이자와와 공동으로 음악 교육 도입에 관한 의견서를 문부대신에게 제출했으며, 미국 유학 시절 스승이었던 루서 호이팅 메이슨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가 일본 음악 교육 발전에 기여하도록 이끌었다.

국제 무대에서도 활동하여 1920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제1회 총회에 이시이 기쿠지로,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일본 대표단의 대사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3. 2. 부정적 평가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에 따라 일본고문정치가 시작되면서, 메가타 다네타로는 대한제국 탁지부의 재정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고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작업을 주도했다.

메가타는 특히 1905년 화폐정리사업을 단행하여 한국 경제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일본의 경제적 침탈을 가속화했다. 이 사업은 대한제국의 화폐인 백동화를 일본제일은행권으로 강제 교환하는 것을 골자로 했는데, 교환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교환 기간은 단 3일로 매우 짧았고, 새 화폐 발행마저 지연되어 시중의 자금 유통을 마비시켰다.

또한, 백동화의 교환 비율을 일방적으로 정하여 한국인들의 자산을 약탈했다. 품질이 가장 좋은 갑종 백동화만 일본 화폐와 1:1 비율로 교환해주고, 중간 품질인 을종은 액면가의 절반 이하로, 품질이 나쁜 병종은 아예 화폐로 인정하지 않고 교환을 거부했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상인과 민족 자본가들이 보유하고 있던 백동화는 을종과 병종이었기 때문에, 이 조치로 인해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고 몰락하는 경우가 속출했다.[1] 금융조합 설치 등 후속 조치 역시 통감부의 식민지배 강화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메가타가 주도한 화폐정리사업은 한국의 경제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민족 자본의 성장을 억눌러 한국 경제를 일본에 종속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 수탈 정책 중 하나로 평가된다.

4. 가족 관계

아내는 가쓰 가이슈의 셋째 딸인 이쓰코(逸子)이다.

자녀는 다음과 같다.


  • 메가다 쓰나미(目賀田綱美)
  • 문노 리요(門野りよ): 문노 주쿠로(門野重九郎)에게 시집갔다. (리요 남편의 형은 문노 이쿠노신(門野幾之進)이다. 문노가의 친척으로는 시미즈 건설 창업가인 시미즈 미치아키(清水満昭)와 호넨 세유 오너 일가인 스기야마가(스기야마 킨타로(杉山金太郎) 등) 등이 있다).
  • 다카야마 마사요(高山正代)
  • 나가이 타케요(長井多計代, 1891-1973): 외교관인 나가이 아렉산(長井亜歴山)에게 시집갔다. 나가이 아렉산은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의 장남이다.[26]

5. 저서


  • 『사소범법』 私訴犯法일본어
  • 로마법전』 羅馬法典일본어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需斯知尼安帝法典일본어

참조

[1] 논문 19世紀後半のニューヘイブンにおける日米中異文化接触 2016
[2] 간행물 官報 1894-08-23
[3] 서적 貴族院要覧(丙) 貴族院事務局 1947
[4] 아시아역사자료센터
[5] 간행물 官報 1883-07-17
[6] 간행물 官報 1886-07-10
[7] 간행물 官報 1891-12-14
[8] 간행물 官報 1894-10-11
[9] 간행물 官報 1899-11-21
[10] 간행물 官報 1904-12-28
[11] 간행물 官報 1916-10-02
[12] 간행물 官報 1926-09-11
[13] 간행물 官報 1889-12-09
[14] 간행물 官報 1892-07-02
[15] 간행물 官報 1895-06-22
[16] 간행물 官報 1895-11-01
[17] 간행물 官報 1899-12-28
[18] 간행물 官報 1902-12-29
[19] 간행물 官報 1907-03-31
[20] 간행물 官報 1907-09-25
[21] 간행물 官報 1909-05-24
[22] 간행물 官報 1918-05-24
[23] 간행물 官報 1931-12-28
[24] 간행물 官報 1900-04-23
[25] 간행물 官報 1924-10-10
[26] 웹사이트 タケヨ メガタ https://www.myherita[...]
[27] 웹인용 Tanetaro Megata at Harvard, 1872-1874 http://isites.harvar[...] 2014-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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