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카미 데쓰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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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일본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며 5번의 수위 타자, 2번의 홈런왕, 3번의 MVP를 수상했다. 1950년에는 1경기 3홈런 2회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감독으로서는 1961년부터 1974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이끌며 9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포함, 11번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여 'V9' 시대를 열었다. 감독 퇴임 후에는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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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카미 데쓰하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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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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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와카미 데쓰하루 |
원어 이름 | 川上 哲治 |
로마자 표기 | Tetsuharu Kawakami |
별명 | 타격의 신 |
출생일 | 1920년 3월 23일 |
출생지 | 구마모토현 구마군 오무라 (현 히토요시시) |
사망일 | 2013년 10월 28일 |
사망 장소 | 이나기시, 도쿄도, 일본 |
신장 | 174 |
체중 | 75 |
포지션 | 1루수, 투수 |
타석 | 좌 |
투구 | 좌 |
데뷔 리그 | 일본 야구 리그 (JBL) |
데뷔 연도 | 1938년 |
데뷔 팀 | 도쿄 교진 |
최종 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일본 프로 야구 통산 타율 | .313 |
일본 프로 야구 통산 홈런 | 181 |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안타 | 2,351 |
일본 프로 야구 통산 타점 | 1,319 |
일본 프로 야구 통산 득점 | 1,028 |
일본 프로 야구 통산 도루 | 220 |
선수 경력 | 도쿄 교진/요미우리 자이언츠 (1938년–1958년) |
감독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1년–1974년) |
은퇴 번호 | 16번 |
명예의 전당 헌액 | 196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일본 프로 야구 MVP | 1941년, 1951년, 1955년 |
선수 시절 기록 | |
일본 야구 리그 타격왕 | 5회 |
센트럴 리그 홈런왕 | 2회 |
센트럴 리그 타점왕 | 3회 |
사이클링 히트 달성일 | 1954년 7월 25일 |
감독 시절 기록 | |
일본 시리즈 우승 | 1961년 1963년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
기타 정보 | |
최종 출장일 | 1958년 10월 21일 (일본 시리즈 7차전) |
은퇴 경기일 | 1975년 3월 23일 |
관련 정보 | 요미우리 V9 "타격의 신" 가와카미 데쓰하루 씨 사망 |
2. 선수 시절
현역 시절, “공이 멈춰 보인다”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9] 탁월한 타격 기술을 선보여 “'''타격의 신'''”(打撃の神様|다게키노 카미사마일본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8] 일본 프로야구(NPB) 역사상 최초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10] 전쟁 중부터 전후에 걸쳐 프로야구계의 최고 스타로 활약했다. 특히 종전 직후 사용한 ‘'''빨간 배트'''’는 가와카미의 상징이 되었고, ‘파란 배트’를 사용한 오시타 히로시와 함께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또한, 아오타 노보루, 치바 시게루와 함께 제1차 요미우리 자이언츠 황금 시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으며, NPB 최초의 베스트 나인(1루수 부문) 수상자이기도 하다.
2. 1. 프로 입문 전

원래 오른손잡이였으나, 5세 때 자갈길에서 넘어져 오른팔을 다쳤다. 수술 후 회복이 더뎌 완치까지 반년이나 걸렸고, 그동안 왼팔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 왼손잡이가 되었다. 이후 한동안은 왼손으로 던지고 오른손으로 치는 투타 양손잡이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도박으로 파산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의 오무라 심상고등소학교(현 히토요시시립 히토요시니시 소학교) 시절 규슈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졸업 후에는 자선가의 도움으로 구마모토현립 공업학교(현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중퇴 후 주고쿠 중학교(현 구마모토현립 주고쿠 고등학교)로 편입했고, 다시 히토요시 중학교(현 구마모토현립 히토요시 고등학교)를 거쳐 구마모토현립 공업학교로 복학했다. 2학년 4월부터는 왼손 타격으로 완전히 전향했다.
구마모토 공업학교의 투수로서 요시하라 마사키(포수)와 배터리를 이루어 명성을 얻었다. 전국 중등 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고시엔 대회)에 두 차례(1934년, 1937년) 출전하여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선발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도 1936년 봄에 한 차례 출전했다.
특히 1937년 여름 고시엔 대회 결승전에서는 주쿄 상업학교의 노구치 지로와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가와카미는 뛰어난 제구력을 선보이며 사사구 없이 던졌으나, 팀은 1-3으로 패배했다.[13] 경기 종료 후, 가와카미는 고시엔 구장의 흙을 유니폼 주머니에 담아와 모교 운동장에 뿌렸는데, 이것이 고시엔의 흙을 가져온 첫 사례로 알려져 있다.[74][14][15] 비록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가와카미는 이 대회의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
2. 2. 1930년대 ~ 1940년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과 활약
원래 오른손잡이였으나 5세 때 자갈길에서 넘어져 오른팔을 다친 후 왼손잡이가 되었다. 구마모토 현립 공업학교(현재의 구마모토 공업고등학교) 2학년 때 좌타자로 전향했다. 학교 야구부의 투수로서 요시하라 마사키(포수)와 배터리를 이루어, 1934년과 1937년 여름 전국 중등 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고시엔)에 출전하여 두 번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다. 1937년 대회 결승전 패배 후, 고시엔 구장의 흙을 유니폼 주머니에 담아와 모교 운동장에 뿌렸는데, 이는 '고시엔의 흙'(甲子園の土|고시엔노 쓰치일본어)을 가져온 첫 사례로 알려져 있다.[74] 이 대회에서 팀은 준우승했지만 가와카미는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구마모토 공업학교 졸업 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8년 도쿄 교진군에 투수로 입단했다. 당시 한신, 한큐, 신생 구단 난카이 등 여러 구단과의 경쟁 끝에 요미우리가 영입에 성공했다. 계약금은 300JPY, 월급은 110JPY였다. 입단 동기인 요시하라 마사키, 치바 시게루, 우쓰미 이소오, 노무라 다카요시, 이와모토 아키라, 산타 마사오 등과 함께 '꽃의 쇼와 13년조'(花の昭和13年組|하나노 쇼와 주산넨구미일본어)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가와카미는 요미우리와 계약한 지 일주일 후, 난카이가 계약금 500JPY, 월급 150JPY라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던 것을 알고 후회했다고 한다.
입단 당시 투수로 등록되었으나, 구위가 강하지 않은 기교파 투수(원문: 연투파(軟投派))로 평가받았다.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은 그의 타격 능력에 주목하여 간판 타자로 키우려 했지만, 팀의 투수 부족으로 투수도 겸임시켰다. 1938년 춘계 시즌에는 투수와 타자 양쪽으로 기용되었으나 성적은 좋지 않았다.
1938년 여름 시범 경기에서 1루수 나가사와 후지오의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대신 1루수로 출전하여 3안타를 치는 등 활약했다. 이를 계기로 후지모토 감독의 지시에 따라 그해 추계 시즌부터 주전 1루수로 뛰게 되었다. 1939년부터 내야수로 등록되었지만, 1941년까지는 투수도 겸임했다.
1939년 단일 시즌제가 시행되면서 첫 수위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41년에도 다시 수위타자에 올랐다. 투수로서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한 경기도 세 차례 있었다. 1944년 징병되어 육군 소위로 복무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 고향 히토요시시에서 농사를 짓던 가와카미에게 요미우리는 선수 복귀를 요청했다. 가와카미는 가족 부양을 이유로 계약금 3만엔를 요구했는데, 이는 프로야구 선수가 구단에 계약금을 요구한 첫 사례로 '3만엔 홀드 아웃 사건'이라 불린다. 결국 1946년 6월 팀에 복귀하여 그해 3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1946년 8월 26일 주부니혼군과의 경기에서 선물 받은 빨간 배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빨간 배트'는 가와카미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프로야구 선수의 광고 출연(CM) 1호 사례로도 알려져 있다. 빨간 배트와 오시타 히로시의 '파란 배트'는 그해까지만 사용이 허용되었지만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47년 팀명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변경되었고, 시즌 도중 미하라 오사무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가와카미는 미하라 감독을 따랐으나, 일부 선수들 사이에서는 감독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결국 1949년 시즌 종료 후, 일부 선수들이 미하라 감독을 몰아내고 미즈하라 시게루를 새 감독으로 옹립하려는 '미하라 감독 배척 소동'이 일어났다. 가와카미는 이 움직임에 반대했지만, 구단은 선수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하라를 경질하고 미즈하라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이 일로 가와카미와 미즈하라 감독 사이에는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2]
2. 3. 1950년대: 전성기와 은퇴
1950년 시즌 도중, 다마가와 구장에서 개인적으로 타격 투수를 고용해 연습하던 중 공이 멈춰 보이는 듯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이것이 “볼이 멈춰 보였다”라고 하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그의 타격 감각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준다.[74] 그의 낮고 날카로운 타격 스타일은 ‘탄환 라이너’(弾丸ライナー일본어)라는 별명을 낳았다. 같은 해 3월 14일과 4월 16일에는 한 경기 3홈런을 두 차례나 기록했는데, 이는 1989년에 랄프 브라이언트가 시즌 네 차례나 기록할 때까지 최다 기록이었다.‘중전차’라는 별명이 붙여진 만큼 주루가 늦었지만, 1947년부터는 투수의 버릇을 간파하거나 배터리의 틈을 찌르는 등 주루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예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빈틈을 노린 도루를 하게 된 것이다. 1950년에는 개인 최다인 34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홈런 1개 차이로 아쉽게 트리플 쓰리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눈앞의 성적을 남겼다.[75] 그의 통산 220도루는 지금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3위 기록이다. 또한 주루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가속이 늦었다”는 것일 뿐, 주력이 필요한 3루타는 현역 초기부터 많아 통산 99개의 3루타는 일본 프로야구 역대 4위 기록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실스의 프랭크 오둘 감독으로부터 일본 야구계 인사를 스프링 캠프에 초대하고 싶다는 요청이 왔다.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은 가와카미를 추천했고, 가와카미는 자신이 선택될 줄 몰랐기에 놀랐다. 미국으로 건너가 캠프에 참가한 그는 감독이 연습 메뉴를 코치에게 맡기고 자신은 현지 명사들과 교류하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여기서 가와카미는 미국 야구에서는 감독이 절대적인 권력자이며 선수가 감독에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배웠다. 당시 일본 야구계에서는 ‘미하라 감독 배척 소동’처럼 선수가 감독을 밀어내는 등 “선수는 감독과 대등하다”는 풍조가 일반적이었지만, 가와카미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실감했다. 캠프를 마치고 귀국한 가와카미는 미즈하라 감독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매우 협조적이 되었다.
같은 해인 1951년, 가와카미는 시즌 타율 .377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1986년 한신의 랜디 바스가 .389를 기록하며 경신하기 전까지 센트럴 리그 최고 기록이었으며, 1989년 워렌 크로마티가 .378로 경신하기 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기록이었다. 또한, 이 시즌 규정 타석 도달자로서 연간 삼진은 단 6개(424타석)에 불과하여 최소 삼진 타이 기록도 달성했다.[2] 1954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사상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2]
1956년 5월 31일, 주니치전에서 상대 투수 나카야마 도시타케로부터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1646경기 만의 달성으로, 이는 일본 프로야구 최고 속도 기록이었다. 1500안타 도달(1241경기) 역시 알렉스 라미레스(1236경기), 레론 리(1237경기)에 이어 빠른 기록이며, 일본인으로서는 최고 속도 기록이다(미일 통산 기록에서는 모두 이치로가 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나 1957년에는 1949년 이후 처음으로 타율이 3할 미만으로 떨어져, 오 사다하루와 타이를 이루는 역대 2위 기록인 8년 연속 3할 타율 행진을 마감했다. 다음 해인 1958년 시즌 전, “그 해에 타율 3할을 기록할 수 없으면 은퇴하겠다”고 결심했지만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결국 4번 타자 자리를 신인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빼앗기고 시즌 후반부터는 6번으로 강등되었다. 현역 시절 말기에는 허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텍사스의 데쓰'''’(テキサスの哲일본어)라고도 불렸다. 일본 시리즈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게 3승 4패로 패배한 후, 7차전 종료 직후 현역 은퇴를 공식 표명했다.
은퇴 후 1959년부터 친정팀의 코치로 부임했고, 1960년 10월에는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방송국 카메라맨을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켜 구단으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자 가와카미는 대리 감독을 맡았다.
3. 감독 시절
1960년 시즌 막판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징계로 감독 대행을 맡았고, 시즌 종료 후인 11월 19일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요미우리는 5년간 일본 시리즈 우승이 없었고 전력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가와카미는 감독 취임 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전술을 연구하고 이를 팀에 도입했으며[11], 코치진 개편과 마키노 시게루 영입을 통해 사인 플레이와 조직적인 수비 시스템을 구축했다. 선수들에게는 강도 높은 훈련과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엄격한 지도 방식을 적용했다.
이러한 노력은 1961년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제패로 빠르게 결실을 보았다. 이후 요미우리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 이른바 'V9'를 달성하며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강의 황금기를 구축했다.[12] 이 기간 동안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를 중심으로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고 외부에서 유력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며 팀 전력을 극대화했다. 가와카미의 리그 우승 11회는 츠루오카 카즈토와 함께 역대 감독 최다 타이기록이며, 일본 시리즈 우승 11회는 역대 단독 최다 기록이다.
감독 시절 가와카미는 그라운드뿐만 아니라 스카우트 부장까지 겸임하며 팀 편성에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영양학 도입, 전담 홍보 담당자 배치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론의 취재를 엄격히 통제하는 이른바 "哲のカーテン|데쓰의 커튼일본어"을 시행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선수들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히로오카 다쓰로 등 일부 선수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77]
V9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구는 승리만을 추구하여 "재미없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또한 "몸집이 작은 선수는 프로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편견으로 후쿠모토 유타카와 같은 유망주 영입을 반대하거나, 부상 경력이 있는 히라마쓰 마사지, 호시노 센이치 등의 영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선수 선발 기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아시아 국가들로 구성된 리그 창설을 주장하기도 했다.[5]
1974년, 팀이 10년 연속 리그 우승에 실패하고 나가시마 시게오가 현역 은퇴를 결정하자 가와카미 역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4년간의 감독 재임 기간 동안 통산 1066승 739패 61무를 기록했으며, 포스트시즌에서는 62경기 44승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3][4] V9 시대에 사용된 유니폼은 가와카미의 감독 취임과 함께 등장하여 그가 물러나는 1974년까지 14년간 사용되었다.[76]
3. 1. 1960년대: V9의 시작
1960년 시즌 막판,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카메라맨 폭행 사건으로 징계를 받자 남은 시즌 동안 감독 대행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19일, 미즈하라 감독의 사임에 따라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요미우리는 1955년 이후 일본 시리즈 우승이 없었고, 1960년에는 리그 우승마저 놓친 상태였다. 타선은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크게 의존했고, 투수진에서는 에이스 후지타 모토시가 어깨 부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등 전력에 불안 요소가 많았다.감독 취임 직후, 가와카미는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매년 우승 경쟁을 벌이는 점에 주목했다. 다저스 코치 앨 캠퍼니스가 쓴 《다저스의 전법》(ドジャースの戦法)을 교재 삼아 스프링캠프부터 팀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코치 겸임이 된 벳쇼 다케히코가 선수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고, 새로 영입된 마키노 시게루 코치를 중심으로 사인 플레이와 수비 커버링[29] 등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생소했던 전술을 도입했다. 또한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평가하는 독자적인 "관리 야구"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노력은 1961년에 결실을 보았다. 팀 타율은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고 20승 투수도 배출하지 못했지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진 일본 시리즈에서는 난카이 호크스를 꺾고 6년 만에 일본 정상에 복귀했다. 하지만 당시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부임한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만원 관중 앞에서 가와카미의 야구를 비난하기도 했고, 요시다 요시오 등 한신 선수들은 경기 중 "테쓰(哲), 제대로 해!"라며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가와카미는 1961년 스프링캠프부터 그라운드에서 취재진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1962년부터는 이를 더욱 강화했다.[30] 언론은 이를 철의 장막에 빗대어 "哲のカーテン|데쓰의 커튼일본어"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본 야구계 최초로 전속 홍보 담당자(사카모토 유키오)를 두었으며, 스카우트 부장을 겸임하며 팀 편성에도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또한 영양학, 러닝 코치 제도 등 새로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선수 시절 샌프란시스코 실스 캠프 참가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들에게 감독과 코치에 대한 절대 복종을 요구했다. 그러나 코치 겸임이었던 히로오카 다쓰로는 직설적인 성격으로 가와카미의 "몸으로 익혀라" 식 지도 방식에 반발했다. 타고난 말솜씨 부족과 고집 세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 탓에 요나미네 가나메, 히로오카, 모리 마사히코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1964년, 히로오카가 주간 베이스볼에 연재하던 수기가 '감독 비판'으로 여겨져 중단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는 7회 초 3루 주자 나가시마가 홈스틸을 시도하다 실패했는데, 이를 벤치의 지시로 오해한 히로오카가 자신의 타격을 신뢰하지 않는다며 격분하여 다음 공에 삼진을 당한 뒤 배트를 내던지고 경기장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했다.[31]
가와카미는 히로오카의 행동을 문제 삼아 트레이드를 추진했으나, 히로오카가 구단주 쇼리키 도루에게 직접 호소하고, 쇼리키 도루의 아버지인 쇼리키 마쓰타로가 "타격을 강화해서 팀에 남아라"고 격려하면서 트레이드는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히로오카를 지지하며 가와카미를 비판했고, 가와카미는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으며 자녀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부인이 스트레스로 병을 앓는 등 개인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쇼리키 마쓰타로와의 면담을 통해 신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히로오카와의 갈등은 계속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화해하여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가와카미는 훗날 저서에서 히로오카를 "한마디로 말하면 직관적인 사람. 어떤 입장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람. 저성장으로 방법이 없어 보이는 팀의 감독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며 히로오카의 지도자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히로오카도 "장기적인 강호 팀을 만들었다는 의미에서는 가와카미 씨는 자이언츠 최고의 감독이었다"고 가와카미의 능력을 인정했다.
1965년 1월 18일, 가와카미는 등번호를 선수 시절의 16번에서 77번으로 변경했다. 이는 행운의 숫자 7이 겹친다는 의미와 당시 인기 있던 미국 TV 드라마 선셋 77의 영향이었다.[32]
전력이 안정된 1965년부터 요미우리는 압도적인 시대를 열었다. 1973년까지 9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는 전무후무한 기록, 이른바 'V9'을 달성했다. 이 시기 가와카미의 관리 야구는 더욱 심화되어 "인간 교육"의 영역까지 확장되었다. 호리우치 쓰네오, 도이 쇼조, 다카하시 가즈미, 다카다 시게루 등 젊은 선수들이 주축으로 성장했고, 가네다 마사카즈를 시작으로 세키네 준조, 모리나가 가쓰야, 도미타 마사루 등 다른 구단의 유력 선수들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내부 경쟁을 끊임없이 유도했다. 특히 주전 포수 모리 마사히코에게는 아마추어 유력 선수들을 계속 영입하며 안주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요미우리의 독주가 계속되고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가 각종 타이틀을 휩쓸자, 팬들과 언론 사이에서는 "가와카미의 야구는 재미없다"는 비판과 함께 염증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와카미 역시 이러한 비판을 의식했으며, V6를 달성한 1970년에는 감독직 사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팬과 언론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를 차기 감독으로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와카미도 나가시마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1972년부터 코치 겸임으로 임명하고 감독 회의에도 참석시키는 등 준비를 시작했다. 1973년 시즌 종료 후, 가와카미는 나가시마에게 현역 은퇴 후 감독직을 맡으라고 권유하며 자신도 물러날 뜻을 밝혔으나, 나가시마가 현역 연장을 강력히 원해 결국 가와카미의 유임과 나가시마의 현역 생활 지속으로 결정되었다.[33]
1974년 7월 9일,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히라마쓰 마사지가 던진 슈트가 타자에게 맞았다는 판정에 항의하다 심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감독 생활 처음이자 마지막 퇴장 처분을 받았다.[34] 그해 나가시마는 극심한 타격 부진 끝에 현역 은퇴를 결심했고, 팀은 리그 10연패 달성에 실패했다. 가와카미는 메이저 리그 뉴욕 메츠를 초청해 열린 일미 야구 최종전(11월 20일)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을 공식 발표했다. 우승 여부와 관계없이 10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목표로 했던 시점에서 사퇴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다음 날인 21일, 홈구장인 고라쿠엔 구장에서 신임 감독으로 임명된 나가시마, 구단주 쇼리키 도루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다.
감독 재임 14년 동안 가와카미는 1066승 739패 61무를 기록했으며, 11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V9 포함)을 이끌었다.[3][4] 그의 엄격하고 통제적인 리더십은 "관리 야구", "통제된 야구"로 불리며[5] V9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지만, 선수 평가 방식에서는 외형을 중시하여 "몸집이 작은 선수는 프로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후쿠모토 유타카의 영입을 반대하거나, 부상 경력이 있는 히라마쓰 마사지, 호시노 센이치 등의 영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아시아 국가들로만 구성된 야구 리그 창설을 주장하기도 했다.[5]
3. 2. 1970년대: V9 달성과 은퇴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9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이른바 'V9' 시대를 열었다. 이 기간 동안 호리우치 쓰네오, 도이 쇼조, 다카다 시게루, 다카하시 가즈미 등 젊은 선수들이 주축으로 성장했고, 세키네 준조, 모리나가 가쓰야, 도미타 마사루 등 타 구단 유력 선수들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기존 주전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었다. 특히 포수 모리 마사히코에게는 아마추어 유력 선수들을 계속 영입하며 경쟁을 유도했다. V9 시대의 유니폼은 1961년 가와카미의 감독 취임과 함께 등장하여 가와카미가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1974년까지 14년간 사용되었다.[76]그러나 V9 후반기인 1970년대에 들어서자, 요미우리의 계속되는 우승과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중심의 야구에 팬과 언론은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와카미의 야구는 시시하다"는 비판이 잇따르자, 가와카미는 "왜 팀이 이기는 것만으로 나쁘게 말하는가"라며 심적인 고통을 토로했고, V6를 달성한 1970년에는 감독직 사퇴까지 고려했다.[77]
팬과 언론 사이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를 차기 감독으로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와카미 역시 나가시마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1972년부터 코치 겸임으로 발탁했으며, 고라쿠엔 구장의 라커룸을 구단 수뇌부실로 옮겨 감독 회의에도 참석시켰다. 1973년 시즌 종료 후, 가와카미는 나가시마에게 현역 은퇴 후 감독직을 맡아달라고 권유하며 자신도 물러날 뜻을 비쳤지만, 나가시마는 현역 생활 연장을 원했다.
결국 나가시마는 1974년에도 선수로 뛰었으나 시즌 내내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현역 은퇴를 결심했다. 팀 또한 10년 연속 리그 우승 달성에 실패하면서 가와카미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7월 9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히라마쓰 마사지가 던진 슈트에 대한 판정에 항의하다 감독 생활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퇴장 처분을 받기도 했다.
가와카미는 1961년부터 1974년까지 14년간 요미우리 감독으로 재임하며 통산 1066승 739패 61무를 기록했고, 포스트시즌에서는 62경기 44승을 거두었다. 이는 여전히 자이언츠 구단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3][4] 그는 무자비하고 엄격한 리더십으로 유명했으며[77], 선수들에게 "통제된 야구" 전략을 구사했다.[5] 하지만 "몸집이 작은 선수는 프로로서 대성하지 못한다"는 신념 때문에 1968년 드래프트에서 후쿠모토 유타카 영입을 반대하거나, 부상 경력이 있는 히라마쓰 마사지, 호시노 센이치 영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선수 선발에 있어 편견을 드러내기도 했다.
1975년 3월 23일, 만 55세 생일에 한신과의 오픈 경기를 은퇴 경기로 치렀다. 대타로 나와 에나쓰 유타카를 상대로 라이트 플라이로 아웃되었다.[35] 감독 은퇴 후 잠시 구단 전무를 맡았으나, 당시 구단주 쇼리키 도루의 의향에 따라 소년 야구 담당으로 옮겨졌고 1년 만인 1975년 12월 25일 퇴단했다. 1976년부터는 NHK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다. 1985년부터는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도 겸임했다.[37]
한편, 가와카미의 뒤를 이은 나가시마 감독은 1975년 팀을 구단 사상 첫 최하위로 이끌었다. 이후 하리모토 이사오, 가토 하지메 등을 영입하여 전력을 보강해 1976년과 1977년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큐 브레이브스에 연달아 패배했다. V9 시대와 비교해 팀 전력이 약화된 것이 분명해지면서, 전임 감독이었던 가와카미에게 "승리에만 집착해 차세대 전력 정비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1978년 10월, 세이부 라이온스가 창단되자 구단주 쓰쓰미 요시아키는 가와카미에게 사장직을 제안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36]
1980년, 요미우리가 3년 연속 우승에 실패하자 가와카미는 아오타 노보루, 마키노 시게루, 구니마쓰 아키라, 후지타 모토시 등 여러 OB들과 함께한 좌담회에서 나가시마 감독 체제를 비판하며 후지타 모토시를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10월 나가시마 감독이 사임(사실상 해임)하고 후지타가 후임 감독으로 발표되자, 가와카미가 나가시마 해임의 배후 인물이라는 설이 퍼졌다. 가와카미 본인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지만, 이 일로 나가시마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1년에는 야구와 경영술을 접목한 비즈니스 서적 '악의 관리학'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NHK 해설자 시절부터 "NHK 소년 야구 교실"의 주임 강사로 20년 이상 활동하며 유소년 야구 지도에도 열정을 쏟았다.
4. 감독 퇴임 이후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요미우리 구단의 전무로 취임했으나, 현장과 거리를 두기를 원했던 구단주 쇼리키 도루의 의향에 따라 소년 야구 담당으로 직책이 변경되었고, 1년 만에 그만두었다. 1976년부터는 NHK의 야구 해설위원과 닛칸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가와카미의 후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1975년 시즌에 구단 역사상 최초로 최하위(6위, 47승 7무 76패)를 기록했다. 이후 하리모토 이사오, 가토 하지메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하여 1976년과 1977년에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연달아 패배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다. 팀은 여전히 V9 시대의 베테랑 선수들이 주축이었으나, 이전과 비교해 전력 저하가 뚜렷했다. 이에 가와카미는 “이기는 것에 너무 집착하면서 차세대 전력을 정비하지 않았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980년, 요미우리는 시즌 초반부터 우승 경쟁에서 멀어지며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3년 연속 우승 실패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같은 해 8월, 주간 문춘에 실린 아오타 노보루, 마키노 시게루, 구니마쓰 아키라, 후지타 모토시 등과의 좌담회에서 가와카미는 요미우리의 현 상황을 비판하며 “차기 감독은 후지타가 될 수 있다”는 발언을 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1980년 시즌 3위로 마감한 뒤, 10월 21일 요미우리는 나가시마 감독의 사임과 후지타 모토시의 차기 감독 취임을 발표했다. 그러나 당일 스포츠 닛폰이 ‘나가시마 해임’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팬들은 이를 구단에 의한 해임으로 받아들였고, 주간 문춘 좌담회 발언과 맞물려 ‘가와카미가 나가시마 해임의 흑막’이라는 시각이 퍼졌다. 가와카미 본인은 1980년 말 ‘선데이 마이니치’와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흑막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감독 재임 중이던 1965년에 이미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1년에는 고향인 히토요시시로부터 명예시민 표창을 받았고, 1992년에는 야구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 공로자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훈4등 욱일소수장을 수상했다.[38] 1999년 3월 17일에는 그의 출생지인 구마모토현 히토요시시에 '''가와카미 데쓰하루 기념 구장'''이 완공되었다. 후년에는 쓰루오카 가즈토와 함께 야구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ドン川上|돈 가와카미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령으로 인해 NHK 야구 해설위원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종종 J SPORTS STADIUM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다. 2004년 4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도쿄 돔에서 열린 한신과의 개막전에서 시구를 맡았고,[39] 2007년 6월 8일에는 요미우리 통산 5,000승 기념 이벤트 "영광의 V9 시리즈" 첫날 라쿠텐과의 경기에 참석하여 도쿄 돔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9년 9월 25일에 사망한 토이 마사조의 장례식에서는 조사를 낭독했는데,[40] 이것이 가와카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공식 석상이 되었다.[41] 전쟁 전 프로 야구에서 활약했던 선수들 중에서는 극소수 생존자 중 한 명이었으며, 장수하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기회가 주로 저명인(야구계 관계자)의 장례식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야구계의 모리시게 히사야’라고 불리기도 했다.
2013년 10월 28일, 도쿄도 이나기시에 위치한 요미우리랜드 게이유 병원에서 노쇠로 인해 향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2][8] 그해 봄 자택에서 넘어져 갈비뼈 골절상을 입은 것을 계기로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노쇠 증상이 급격히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42] 법명은 대철원적심철산거사(大徹院釋心鐵山居士)이다.[42] 묘소는 도쿄도 세타가야구 노자와의 류운지에 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10월 30일 열린 2013년 일본 시리즈 4차전(요미우리 대 라쿠텐)에서는 경기 시작 전 추모 VTR 상영과 묵념이 진행되었고, 양 팀 선수단 전원이 조기를 달고 경기에 임했다.[43]
5. 평가 및 영향
현역 시절, “공이 멈춰 보인다”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9] 탁월한 타격 기술을 선보여 “타격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8] 전쟁 중부터 전후에 걸쳐 프로야구계의 스타로 활약했으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2000안타를 달성했다.[10] 종전 직후인 1946년 8월, 긴자의 운동용품점에서 선물 받은 빨간 배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가와카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파란 배트’의 다이게 히로시와 함께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운동용품점과의 계약은 프로야구 선수의 광고 모델 제1호로 여겨진다. 아오타 노보루, 치바 시게루와 함께 제1차 거인 황금 시대의 중심 타자였으며, NPB 최초의 베스트 나인(1루수 부문) 수상자이기도 하다.
1950년 시즌 중반, 개인 타격 연습 도중 “'''공이 멈춰 보였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는데, 이는 그의 뛰어난 타격 감각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전해진다.[21][22] 1956년 5월 31일에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2000안타를 달성했으며, 1646경기 만의 달성은 역대 최단 기간 기록이다. 다만, 다이쇼 시대 출생이기에 1978년 발족한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가입 자격은 없다(야수 중 유일한 사례).
감독으로서는 알 캠파니스의 『다저스의 전법』을[11] 팀 운영의 기초로 삼아 왕정치·나가시마 시게오 등을 이끌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황금기를 구축했다.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V9'''”(9년 연속 센트럴 리그 우승·일본 시리즈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프로야구계의 살아있는 신”으로 불릴 정도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12] 감독으로서 기록한 리그 우승 11회는 츠루오카 카즈토와 함께 역대 최다 타이기록이며, 일본 시리즈 우승 11회는 단독 최다 기록이다. 노무라 카츠야, 하리모토 이사오, 호시노 센이치 등 후대의 많은 야구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은퇴 후에는 소년 야구 교실을 여는 등 야구 보급에도 힘썼다.
애칭은 “타격의 신”, “철”, “가와상”, “돈 가와카미”, “빨간 배트의 가와카미” 등 다양했으며, 오랫동안 세타가야구 노자와에 거주했기 때문에 “노자와의 아저씨”라고도 불렸다.
골프 애호가로도 유명하여 일본 레프티 골프 협회(왼손잡이 골퍼 모임) 명예회장을 역임했고, 말년까지 골프 관련 칼럼 "매일, 골프에 미쳐(日々、ゴルフ惚け)"를 연재했다. 2007년 일본 프로 골프 협회로부터 명예 회원으로 인정받았다. 대식가로도 알려졌으나, 왕정치의 식성 앞에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돌 연마'를 즐겼는데, 원정지 숙소에서 전동 그라인더와 사포 등으로 돌을 가는 데 몰두했다고 전해진다.[50] 야구 용어인 "구제(球際)"와 "팀 플레이(チームプレー)"는 가와카미가 만든 신조어이다.[51]
1955년에는 자동차 운전 면허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해 4월, 고라쿠엔 구장 근처 교차로에서 운전 중 안전지대 연석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고, 동승했던 히라야마 기쿠지 선수가 오른쪽 눈 아래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호리타 치카라와 함께 사와야카 국민 회의의 발기인이었으며, 1994년 설립된 일본 프로 야구 OB클럽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자이언츠 킬러"라는 말을 싫어하여, 그런 투수에 대해 "자이언츠는 그 이상으로 그 투수를 공략했으니 자이언츠 킬러는 없다"고 반박하곤 했다. 투수들에게는 120~130구를 던져도 완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 노력했다.[52]
뛰어난 타자로서 자부심이 강해 타격 지도에 있어서는 자신의 이론을 따르는 사람들을 선호했다는 평가가 있다. 왕정치에게도 자신의 타격론을 강요하려 했으나, 홈런 타자로 성공한 왕정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관계가 불편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53] 팀 동료였던 아오타 노보루는 가와카미에 대해 "사람을 가리지만, 친해지면 속마음을 다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배우 탄바 테츠로는 군 복무 시절 가와카미로부터 가혹 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종전 후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처세술과 본성을 알았다고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54][55] 왕정치는 가와카미의 엄청난 승부욕과 집념을 높이 평가하며, "야구든 골프든 마작이든 이길 때까지 하는 사람이었다. 그 집념이 V9 달성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56]
6. 수상 및 기록
선수 시절에는 탁월한 타격 기술로 '''“타격의 신”'''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8]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10] 수위 타자 5회, 홈런왕 2회, 타점왕 3회, MVP 3회, 베스트 나인 10회 등 수많은 타격 타이틀을 석권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제1차 황금기를 이끌었다.
감독으로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이끌고 1965년부터 1973년까지 9년 연속 리그 우승 및 일본 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 이른바 '''V9'''를 달성했다. 감독으로서 기록한 통산 리그 우승 11회는 츠루오카 카즈토와 함께 역대 최다 타이기록이며, 일본 시리즈 우승 11회는 역대 단독 최다 기록이다.[12]
이러한 선수와 감독으로서의 빛나는 업적을 인정받아 196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92년에는 야구계 인사로는 최초로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또한 도쿄도 문화상(1987년), 훈4등 욱일소수장(1992년), 구마모토현민 영예상(2013년) 등을 수상했다.[60][61] 상세한 수상 내역 및 기록은 하위 문단을 참고할 수 있다.
6. 1. 선수 시절
원래 오른손잡이였으나, 5세 때 자갈길에서 넘어져 오른팔을 다쳐 수술 후 왼손잡이가 되었다.구마모토 현립 공업학교 2학년 때 좌타자로 전향했다. 투수로서 요시하라 마사키와 배터리를 이루어 1934년과 1937년 여름 전국 중등 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고시엔)에 두 차례 출전하여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다. 1936년 봄에는 선발 중등 학교 야구 대회에도 한 차례 출전했다. 특히 1937년 고시엔 결승전에서 노구치 지로가 소속된 주쿄 상업학교에 패배한 후, 고시엔 구장의 흙을 유니폼 주머니에 넣어와 모교 운동장에 뿌렸는데, 이는 '고시엔의 흙'(甲子園の土|고시엔노 쓰치일본어)을 가져온 첫 사례로 알려져 있다.[74] 이 대회에서 팀은 준우승했지만 가와카미는 최우수 투수로 선정되었다.
구마모토 공업학교 졸업 후, 철도원이 되기를 권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1938년 3월 9일 도쿄 교진군에 투수로 입단했다. 한신 타이거스, 한큐, 신생 구단 난카이와의 영입 경쟁 끝에 교진군에 입단했는데, 당시 구단들의 주된 목표는 포수이자 강타자였던 요시하라 마사키였고, 투수 가와카미는 부수적인 영입 대상이었다고 전해진다. 계약금은 300엔, 월급은 110엔이었다. 가와카미는 교진군과 계약한 지 일주일 후, 난카이가 계약금 500엔, 월급 150엔이라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을 알고 후회했다고 한다.[16] 입단 동기로는 요시하라, 치바 시게루, 우쓰미 이소오, 노무라 다카요시, 이와모토 아키라, 산타 마사오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꽃의 쇼와 13년조'(花の昭和13年組|하나노 쇼와 주산넨구미일본어)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입단 초기에는 투수로 등록되었으나, 학창 시절 왼팔을 혹사한 후유증으로 구위와 제구력이 부족하여 스스로도 '연투파'(軟投派) 투수임을 인정했다. 당시 감독 후지모토 사다요시는 가와카미의 타격 재능을 높이 사 타자로 키우려 했지만, 팀의 투수 부족 문제로 투수를 겸임시켰다. 춘계 시즌(당시 일본 프로야구는 춘계, 추계의 양대 시즌제로 운영) 동안 투수와 타자로 기용되었으나 양쪽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가와카미가 본격적으로 야수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춘계 시즌 종료 후 여름 시범 경기였다. 당시 주전 1루수였던 나가사와 후지오가 부상으로 빠지자 급히 1루수로 출전하여 3안타를 치는 등 활약했고, 이에 후지모토 감독으로부터 "1루수 미트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18] 그해 추계 시즌부터 주전 1루수로 자리 잡았고, 이듬해인 1939년부터는 내야수로 등록되었으나 1941년까지는 투수도 겸했다.
1939년 단일 시즌제가 시행되자 19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수위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8] 이 해 116안타, 169루타, 12개의 3루타는 당시 신기록이었고, 75타점 역시 전쟁 전 최다 기록이었다. 타율 .338은 고졸 입단 3년차 이내 선수 기록으로는 역대 2위였다. 1940년에는 41장타, 190루타로 또다시 전쟁 전 최다 기록을 세웠고, 1941년에도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이 기간 동안 투수로서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한 경기가 세 차례 있었으며, 4월 10일 난카이전에서는 투수로 등판하여 5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1942년 시즌 종료 후 징병되어 팀을 잠시 떠났다.
1944년 입대하여 다치카와 육군 항공 정비학교 교관(일본 육군 소위)으로 복무 중 종전을 맞이했다. 고향인 히토요시시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가족을 부양하던 중, 1946년 4월 프로야구가 재개되자 요미우리는 가와카미에게 복귀를 요청했다. 가와카미는 가족 부양을 이유로 "3만 엔을 준다면 복귀하겠다"고 조건을 제시했고, 이는 프로야구 선수가 구단에 계약금을 요구한 첫 사례로 '3만 엔 홀드아웃 사건'이라 불린다. 구단이 조건을 수용하면서 1946년 6월 팀에 복귀했고, 그해 3할 타율을 기록했다.
1946년 8월 26일 주부니혼과의 경기에서 긴자의 스포츠 용품점으로부터 선물 받은 빨간색 배트를 사용했는데, 이 '''빨간 배트'''는 가와카미의 상징이 되었다. 이는 오시타 히로시의 '파란 배트'와 함께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프로야구 선수의 첫 CM 출연 사례로도 꼽힌다. 이듬해부터 색깔 배트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이 일화는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1947년 팀명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변경되었고, 시즌 도중 미하라 오사무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미하라 감독은 스타 선수를 중용하여 가와카미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젊은 선수나 타 구단 이적 선수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였다. 결국 1949년 시즌 종료 후 일부 선수들이 미하라 감독 퇴진을 요구하며 미즈하라 시게루를 새 감독으로 추대하려는 '미하라 감독 배척 소동'이 일어났다. 가와카미는 이 움직임에 반대했지만, 구단은 선수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하라를 경질하고 미즈하라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이 일로 가와카미와 미즈하라 감독 사이에는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가와카미는 밤늦게까지 숙소에 남아 타격 연습에 매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50년 시즌 중 다마가와 구장에서 개인적으로 타격 투수를 고용해 연습하던 중 "공이 멈춰 보이는" 듯한 특별한 감각을 경험했다고 하며, 이는 "볼이 멈춰 보였다"는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그의 낮고 날카로운 타격 스타일 때문에 야구 평론가 야마토 규시는 그의 타구를 '탄환 라이너'(弾丸ライナー|단간 라이나일본어)라고 불렀고, 이 표현은 이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44]
1950년 시즌에는 한 경기 3홈런을 두 차례(3월 14일, 4월 16일) 기록했는데, 이는 1989년 랄프 브라이언트가 시즌 4회를 기록하기 전까지 최다 기록이었다.
'중전차'라는 별명처럼 주력이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1947년부터는 투수 시절의 경험을 살려 상대 투수의 투구 버릇을 간파하거나 배터리의 허점을 노리는 방식으로 도루 능력을 향상시켰다. 통산 220도루는 요미우리 구단 역대 3위 기록이며, 1950년에는 개인 최다인 34도루를 기록하며 홈런 1개 차이로 트리플 쓰리 달성에 근접하기도 했다.[75] 또한, 통산 99개의 3루타는 일본 프로야구 역대 4위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단순히 발이 느리기만 한 선수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실스의 프랭크 오둘 감독의 초청으로 미즈하라 감독의 추천을 받아 미국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다. 그곳에서 감독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팀을 운영하며 선수들이 감독의 지시에 따르는 미국 야구 시스템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일본 야구계는 '미하라 감독 배척 소동'에서 보듯 선수와 감독이 대등하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가와카미는 이를 잘못된 것이라 느끼고 귀국 후 미즈하라 감독에게 협력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1951년 시즌 타율 .377을 기록했는데, 이는 1986년 랜디 바스가 경신하기 전까지 센트럴 리그 최고 기록이었고, 1989년 워렌 크로마티가 경신하기 전까지 구단 최고 기록이었다. 같은 해 규정 타석을 채우면서도 시즌 삼진을 단 6개만 당해, 역대 한 시즌 최소 삼진 타이 기록을 세웠다. 1954년 7월 25일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상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역사상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다.
1956년 5월 31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나카야마 도시타케를 상대로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1646경기 만의 달성으로 역대 최단 경기 기록이며, 1500안타 역시 1241경기 만에 달성하여 일본인 선수 중에서는 최단 경기 기록이다.[66]
1957년에는 8년 만에 시즌 타율이 3할 아래로 떨어졌고(8년 연속 3할 타율은 오 사다하루와 함께 역대 2위 타이), 1958년 시즌 전 "타율 3할을 넘지 못하면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해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4번 타자 자리를 신인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내주고 시즌 후반에는 6번 타순으로 내려갔다. 현역 말년에는 허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텍사스 안타가 많아지면서 '텍사스의 데쓰'(テキサスの哲|테키사스노 테츠일본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45]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게 패배한 후 현역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타격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지만, 1루수 수비에 대해서는 동료 선수들로부터 비판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2루수였던 치바 시게루는 "1루 옆 땅볼까지 내가 잡아야 했다", "송구가 조금만 높아도 잡으려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고 말했으며, 유격수였던 히로오카 타츠로 역시 가와카미의 수비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남겼다.[47]
기록 | 달성일 | 상대팀 | 상대 투수 | 구장 | 비고 |
---|---|---|---|---|---|
1000안타 | 1949년 11월 10일 | 난카이 호크스 | 유즈키 스스무 | 고라쿠엔 구장 | NPB 역대 2번째[62] |
100홈런 | 1950년 4월 29일 | 주니치 드래건스 | 가토 카즈아키 | 미토 스이운 구장 | NPB 역대 최초[63] |
1000타점 | 1954년 5월 22일 | 주니치 드래건스 | 이시카와 카츠히코 | 나고야 구장 | [64] |
150홈런 | 1954년 9월 22일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다카하시 치토미 | 후쿠야마 시민 구장 | NPB 역대 6번째[65] |
2000안타 | 1956년 5월 31일 | 주니치 드래건스 | 나카야마 토시타케 | 나고야 구장 | NPB 역대 최초, 1646경기 (역대 최단)[66] |
기록 내용 | 횟수/내용 | 달성 연도/기간 | 비고 |
---|---|---|---|
시즌 타율 .377 | .377 | 1951년 | NPB 역대 8위 |
시즌 타율 3할 이상 | 12회 | 1939년 ~ 1941년, 1947년, 1949년 ~ 1956년 | NPB 역대 3위 타이 |
시즌 최소 삼진 | 6개 | 1951년 | NPB 최소 타이 기록 |
타율 베스트 텐 진입 | 15회 | 1938년 추계 ~ 1941년, 1947년 ~ 1957년 | NPB 역대 3위 |
연속 시즌 타율 3할 이상 | 8년 | 1949년 ~ 1956년 | NPB 역대 2위 타이 |
연속 타수 안타 | 9타수 | 1939년 4월 9일 ~ 4월 11일 | [67] |
연속 경기 타점 | 10경기 | 1949년 4월 3일 ~ 4월 14일 | |
1경기 3루타 | 3개 | 1939년 6월 21일 | NPB 타이 기록 |
1이닝 2홈런 | - | 1948년 5월 16일 (긴세이 스타즈전) | NPB 역대 최초 (1회, 2점 홈런 & 3점 홈런)[68] |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 | - | 1949년 4월 12일 (난카이 호크스전) | NPB 역대 최초[69] |
사이클링 히트 | 1회 | 1954년 7월 25일 (히로시마 카프전) | NPB 역대 11번째 |
통산 맹타상 | 194회 | - | NPB 역대 2위 |
일본 시리즈 통산 타율 | .365 | - | 80타수 이상 역대 1위 (159타수 58안타) |
올스타 게임 출전 | 7회 | 1951년 ~ 1954년, 1956년 ~ 1958년 |
6. 2. 감독 시절
1960년 11월 19일,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사임에 따라 감독으로 승격되었다.[3][4]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1955년 이후 일본 시리즈 우승 경험이 없었고, 1960년에는 리그 우승마저 놓친 상태였다. 타선은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투수진에서는 에이스 후지타 모토시가 어깨 부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등 전력 공백이 있었다.취임 직후 가와카미는 전력이 강하지 않음에도 매년 우승 경쟁을 벌이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주목했다. 다저스 코치였던 앨 캠파니스가 쓴 《다저스의 전법》(ドジャースの戦法일본어)을 교본 삼아 춘계 캠프부터 이를 실천에 옮겼다.[11] 코치 겸임이 된 벳쇼 다케히코는 선수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고, 새로 영입된 코치 마키노 시게루를 중심으로 사인 플레이와 수비 커버링[29] 등 당시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생소했던 전술을 도입했다. 또한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평가하는 독자적인 "관리 야구"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러한 노력은 1961년 시즌에 결실을 보았다. 팀 타율은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고, 20승 투수도 배출하지 못했지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일본 시리즈에서는 난카이 호크스를 꺾고 감독 부임 첫해에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 한신 타이거스 감독이었던 후지모토 사다요시에게 공개적으로 경기 운영을 비판받기도 했다.
가와카미는 엄격한 팀 관리로도 유명했다. 1961년 춘계 캠프부터 그라운드에서 취재진을 내보내고 취재를 제한했으며, 1962년부터는 이를 더욱 강화했다.[30] 언론은 이를 철의 장막에 빗대어 "데쓰의 커텐"(哲のカーテン일본어)이라고 불렀다. 일본 야구계 최초로 전속 홍보 담당(사카모토 유키오)을 두기도 했다. 그는 경기 운영뿐만 아니라 스카우트 부장을 겸임하며 팀 편성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고, 영양학 도입, 러닝 코치 제도 신설 등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V9 시대에 사용된 유니폼은 가와카미가 감독으로 취임한 1961년부터 그가 물러나는 1974년까지 14년간 사용되었다.[76]
선수 선발에 있어서는 외형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몸집이 작은 선수는 프로로서 대성하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후쿠모토 유타카의 지명을 반대했고, 부상 경력이 있거나 의심되는 선수의 영입에도 소극적이어서 히라마쓰 마사지, 호시노 센이치 등의 영입에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선수들에게는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했으나, 코치 겸임이었던 히로오카 다쓰로와는 갈등을 겪었다. 히로오카는 직설적인 성격으로, 가와카미의 "몸으로 익혀라" 식의 훈련 방식에 반발했으며,[77] 1964년에는 주간지에 연재하던 수기가 '감독 비판'이라는 이유로 중단되기도 했다. 같은 해 8월 6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는 나가시마의 홈스틸 실패 후 벤치의 대응에 불만을 품고 격분하여 경기 도중 귀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1] 가와카미는 이를 감독에 대한 항명으로 간주하고 히로오카의 트레이드를 추진했으나, 히로오카가 구단주 쇼리키 도루에게 직접 호소하고 쇼리키 마쓰타로가 만류하면서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히로오카를 지지하며 가와카미를 비판했고, 가와카미는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으며 가족까지 고통을 겪었다. 이후에도 둘의 갈등은 계속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화해하여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가와카미는 훗날 저서에서 히로오카의 지도자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히로오카 역시 가와카미를 자이언츠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했다.
1965년 1월 18일, 가와카미는 등번호를 선수 시절의 "16"번에서 "77"번으로 변경했다. 이는 행운의 숫자 7이 겹치는 것과 당시 인기 있던 미국 드라마 《선셋 77》의 영향이었다.[32] 이 해부터 요미우리는 황금기를 맞이하여 1973년까지 9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 이른바 'V9'를 달성했다. 이 기간 동안 가와카미의 관리 야구는 더욱 심화되어 "인간 교육"의 영역까지 확장되었다. 호리우치 쓰네오, 도이 쇼조, 다카다 시게루, 다카하시 가즈미 등 젊은 선수들이 주축으로 성장했고, B급 10년 선수 제도를 통해 가네다 마사이치를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트레이드를 통해 세키네 준조, 모리나가 가쓰야, 도미타 마사루 등 다른 구단의 유력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하여 기존 주전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특히 주전 포수 모리 마사히코에게는 아마추어 유망주들을 계속 영입하며 안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미우리의 독주가 계속되고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가 각종 타이틀을 휩쓸자, 팬들과 언론 사이에서는 "가와카미의 야구는 재미없다"는 비판과 함께 염증을 느끼는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와카미 자신도 이러한 비판에 신경을 쓰며 V6를 달성한 1970년에는 감독직 사퇴를 고려하기도 했다.
V9 기간 후반부터 팬들과 언론은 나가시마 시게오를 차기 감독으로 기대했다. 가와카미 역시 나가시마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1972년부터 코치 겸임으로 발탁하여 감독 회의에 참석시키는 등 지도자 수업을 시켰다. 1973년 시즌 종료 후, 가와카미는 나가시마에게 현역 은퇴 후 감독직을 승계할 것을 권유하며 자신도 물러날 뜻을 밝혔으나, 나가시마가 현역 생활 연장을 강력히 희망하여 이는 무산되었다.[33]
1974년 시즌, 나가시마는 극심한 타격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시즌 후 은퇴를 결심했다. 팀 또한 리그 10연패 달성에 실패하며 V9 행진을 마감했다. 가와카미는 같은 해 7월 9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히라마쓰 마사지가 던진 슈트의 판정에 항의하다 심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감독 생활 중 유일하게 퇴장 처분을 받기도 했다.[34]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 뉴욕 메츠와의 일미 야구 최종전(11월 20일, 쿠사나기 구장)이 끝난 뒤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을 공식 발표했다. 다음 날인 21일, 홈구장인 고라쿠엔 구장에서 신임 감독으로 임명된 나가시마, 구단주 쇼리키 도루와 함께 기자회견을 가졌다.
가와카미는 1961년부터 1974년까지 14년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으로 재임하며 통산 1066승 739패 61무를 기록했으며, 이는 여전히 자이언츠 감독 최다승 기록이다. 포스트시즌에서는 62경기에 나서 44승을 거두었다.[3][4] 리그 우승 11회는 츠루오카 카즈토와 함께 일본 프로야구 감독 최다 타이기록이며, 일본 시리즈 우승 11회는 단독 최다 기록이다.[12] 그는 "통제된 야구" 전략을 통해 팀을 운영했으며,[5] 아시아 국가들로만 구성된 리그 창설을 주장하기도 했다.[5]
감독 은퇴 후에는 구단 전무로 잠시 일했으나, 당시 구단주였던 쇼리키 도루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소년 야구 담당으로 밀려났고 1년 만인 1975년 12월 25일 구단을 떠났다. 1976년부터는 NHK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으며, 1985년부터는 니칸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도 겸임했다.[37]
그의 후임인 나가시마 감독 시절 팀 성적이 부진하자(1975년 구단 사상 첫 최하위), 일각에서는 가와카미가 V9 달성을 위해 승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차세대 선수 육성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1980년에는 자이언츠 OB들과의 좌담회에서 "차기 감독은 후지타도 가능하다"고 발언한 것이 나가시마 감독 해임의 배후 인물이라는 논란으로 번지기도 했으나, 가와카미 본인은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이 일로 나가시마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훗날 두 사람은 화해했다.
1981년에는 자신의 야구 철학과 경영술을 접목한 저서 《악의 관리학》(悪の管理学)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또한 NHK 해설자 시절부터 20년 이상 "NHK 소년 야구 교실"의 주임 강사로 활동하며 유소년 야구 보급에 힘썼다.
6. 3. 기타
감독 퇴임 후에는 NHK 야구 해설위원과 닛칸 스포츠 등에서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은퇴 후에는 소년 야구 교실을 여는 등 야구 보급에도 힘썼다.애칭은 “타격의 신”, “철”, “가와상”, “빨간 배트의 가와카미” 등이 있으며, 오랫동안 세타가야구 노자와에 거주했기 때문에 “노자와의 아저씨”라고도 불렸다. 또한, 쓰루오카 히토시와 함께 야구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돈 가와카미'''"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1991년, 고향인 인기시(人吉市)로부터 명예시민 표창을 받았다. 감독 재임 중이던 1965년에 이미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99년 3월 17일에는 생가인 구마모토현 인기시에 '''가와카미 테츠하루 기념 구장'''이 완공되었다. 1992년에는 훈4등 욱일소수장을 수상했고,[38] 같은 해 가을에는 야구계 인사로는 최초로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말년에는 고령으로 NHK 해설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종종 J SPORTS STADIUM에 특별 게스트 해설자로 출연했다. 2004년 4월 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창립 70주년 기념으로 도쿄돔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개막전에서 시구를 맡았고,[39] 2007년 6월 8일에는 요미우리 통산 5,000승 기념 이벤트 "영광의 V9 시리즈" 첫날 라쿠텐전에서 도쿄돔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9년 9월 25일에 사망한 토이 마사조의 장례식에서는 조사를 낭독했는데,[40] 이것이 가와카미가 공개 석상에 모습을 보인 마지막이 되었다.[41]
2013년 10월 28일, 도쿄도 이나기시의 요미우리랜드 게이유 병원에서 노쇠로 사망했다.[42][8] 향년 93세였다. 법명은 "대철원적심철산거사"(大徹院積心鐵山居士)[42]이며, 묘소는 도쿄도 세타가야구 노자와의 룡운사에 있다. 그해 봄 자택에서 넘어져 갈비뼈 골절을 당한 것을 계기로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노쇠 증상이 급격히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42] 사망 소식이 알려진 10월 30일, 2013년 일본 시리즈 제4차전 요미우리 대 라쿠텐 경기에서는 감독, 코치, 선수 전원이 조기를 달고 경기 전에 추모 VTR 상영과 묵념이 이루어졌다.[43]
===일화===
- 종전 후, 고베의 친가에 피난 중이던 임신한 아내를 보고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고향 구마모토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후 고향 히토요시에서 무거운 비동(肥桶)을 지고 하루에 2km의 길을 12~13번 왕복했다고 한다.[49]
- 야구계 OB 중에서도 유명한 골프 애호가로, 일본 레프티 골프 협회(왼손잡이 골퍼 동호회)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V9 시절 캠프 중에는 마키노 시게루 헤드 코치에게 지휘를 맡기고 골프에 몰두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말년까지 주간 골프 다이제스트에 칼럼 "매일, 골프에 미쳐(日々、ゴルフ惚け)"를 연재했다. 2007년 2월 23일에는 일본 프로 골프 협회(日本プロゴルフ協会)로부터 고바야시 아키라(小林旭), 하사마 마사오(羽佐間正雄) 등과 함께 명예 회원으로 인정받았다.
- 대식가로도 유명했다. 선수나 감독 시절 이동 중 정차하는 역에서 서서 먹는 소바나 우동을 간식으로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왕정치(王貞治)의 대식에는 "도저히 당할 수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돌 연마'를 했다. 호치 신문 기자였던 세고 마사하루(신궁 마사하루(新宮正春))에 따르면, 감독 시절 가와카미는 여행 가방에 전동 그라인더와 돌(石)을 넣고 다니며 원정지 숙소에서 그라인더나 사포 등으로 돌을 갈았다고 한다.[50]
- "구제(球際)"라는 단어는 스모(相撲)의 "토俵제(土俵際)"에서 착안한 가와카미의 신조어이며, "팀 플레이(チームプレー)"라는 단어도 그가 만든 말이다.[51]
- 당시로서는 드물게 자동차 면허를 소지하고 있었다. 1955년 4월 30일에는 고라쿠엔 구장(後楽園球場) 근처 혼고 3정목 교차로에서 운전 중 연석에 충돌하여 차량 앞부분이 크게 파손되는 사고를 냈다. 가와카미 본인은 가벼운 타박상에 그쳤지만, 동승했던 히라야마 키쿠지(平山菊二)는 오른쪽 눈 아래가 6cm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 호리타 치카라(堀田力)와 함께 사와야카 국민 회의의 발기인이었다. 또한 1994년 설립된 일본 프로 야구 OB 클럽(日本プロ野球OBクラブ)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 "자이언츠 킬러(巨人キラー)"라는 말을 싫어했다. 특정 투수를 자이언츠 킬러라고 칭하는 아나운서에게 "자이언츠는 그 이상으로 그 투수를 공략했으므로 자이언츠 킬러는 없다"고 반박하곤 했다.
- 1971년 신인왕을 차지한 세키모토 요시지(関本四十四)에 따르면, 가와카미는 "투수는 120~130구를 던져도 완투할 가능성이 있다"며 항상 격려했다고 한다.[52]
- 뛰어난 타자로서 자부심이 강해 타격 지도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왕정치에게도 자신의 타격론을 강요하려 했으나, 홈런 타자로 성공한 왕정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왕정치는 가와카미를 불편하게 여겼다고 한다.[53]
- 팀 동료였던 아오타 노보루(青田昇)는 가와카미가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아오타는 자서전에서 가와카미에 대해 "매우 사람을 가리지만, 친해지면 속마음을 다 터놓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 배우 탄바 테츠로(丹波哲郎)는 "군대 시절 상관이었던 가와카미에게 가혹 행위를 당했다. 종전 후 가와카미가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며 사과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그의 처세술과 본성을 알았다"고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54][55]
- 왕정치는 가와카미에 대해 "야구뿐만 아니라 골프나 마작(麻雀)에서도 이길 때까지 하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며, "대단한 승부욕의 소유자였고, 이길 때까지 했기 때문에 절대 지지 않았다. 그 승리에 대한 집념이 있었기에 V9를 달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56]
===주요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횟수 및 연도 |
---|---|
최고수훈선수(MVP) | 3회 (1941년, 1951년, 1955년) ※ 10년 공백 후 수상은 역대 최장 기록 |
베스트 나인 (1루수 부문) | 10회 (1940년, 1947년 - 1949년, 1951년, 1953년, 1955년 - 1958년) ※ 1루수 부문 역대 2위 |
야구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 헌액 | 1965년 |
일본 시리즈 MVP | 1회 (1953년) |
일본 시리즈 최고 타격상 | 1회 (1953년) |
일본 시리즈 기능상 | 1회 (1958년) |
일본 시리즈 홈런상 | 1회 (1952년) |
올스타 게임 MVP | 1회 (1951년 제1차전) |
도쿄도 문화상 | 1987년[60] |
훈4등 욱일소수장 | 1992년 |
문화공로자 | 1992년 |
구마모토현민 영예상 | 2013년[61] |
7. 등번호
- '''16'''(1938년 ~ 1942년, 1946년 ~ 1964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1965년 1월 18일 지정). 만화・애니메이션 「거인의 별」의 주인공 스타 플라이어가 착용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 '''77'''(1965년 ~ 1974년)
참조
[1]
웹사이트
Ex-Giants skipper Kawakami, 'God of Batting,' dies at 93
http://english.kyodo[...]
Kyodo News
2013-10-30
[2]
웹사이트
Takuro Ishii Hits 2,000th
http://japanesebaseb[...]
2006-05-12
[3]
신문
Kawakami was Japanese baseball's first Zen master
http://www.japantime[...]
2013-11-27
[4]
신문
Kawakami's philosophy as manager never wavered
http://www.japantime[...]
2013-11-28
[5]
웹사이트
The Baseball Guru - JAPan's MOST SUCCESSFUL MANAGERS by Jim Albright
https://baseballguru[...]
[6]
웹사이트
川上哲治
http://www.jmdb.ne.j[...]
2009-01-27
[7]
기타
[8]
웹사이트
巨人V9「打撃の神様」川上哲治氏死去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3-10-30
[9]
웹사이트
“打撃の神様”川上哲治氏の命日 ひらめいた相撲からとった造語「球際」
https://www.nikkansp[...]
[10]
웹사이트
【野球】2000安打ラッシュとなるか。大記録まで残り100本を切った5選手たち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2017-05-09
[11]
뉴스
先駆者だった川上氏 ドジャース戦法、哲のカーテン…新機軸を次々と
https://www.sponichi[...]
2013-10-30
[12]
서적
ジャイアンツ栄光の70年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3]
서적
日本プロ野球記録大鑑
講談社
[14]
웹사이트
Q&A「Q. 甲子園球場の黒土について教えてください。」
https://www.hanshin.[...]
阪神甲子園球場
2021-09-11
[15]
기타
[16]
서적
川上哲治 もっこす人生
[17]
서적
プロ野球三国志 第四巻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8]
서적
巨人軍5000勝の記憶
[19]
서적
日本プロ野球記録大鑑
講談社
[20]
서적
プロ野球を創った名選手・異色選手400人
講談社文庫
1999
[21]
Youtube
川上哲治 豪打列伝
https://www.youtube.[...]
[22]
기타
[23]
웹사이트
トリプルスリー~万能型野球人の証明~ 写真特集
https://www.jiji.com[...]
[24]
서적
巨人軍監督の決断
講談社
1987
[25]
서적
1987
[26]
서적
1987
[27]
웹사이트
川上哲治さんにまつわる美談。プロというのはプライドの塊である/廣岡達朗コラム
https://column.sp.ba[...]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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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プロ野球を殺すのはだれだ
[29]
기타
[30]
신문
キャンプ回りに拾う(上)報道陣泣かせの巨人 東映、大洋はのんびり
1962-02-23
[31]
뉴스
川上哲治氏が徹底排除した広岡達朗氏 涙が出た仕打ち述懐
https://www.news-pos[...]
2014-08-12
[32]
웹사이트
川上哲治——背負い続けた「孤独」
https://web.archive.[...]
2013-11-22
[33]
서적
巨人軍の鬼といわれて わが野球人生50年
読売新聞社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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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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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選手を終えて17年後に引退試合をした「打撃の神様」
http://www.tokyo-spo[...]
201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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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西武「クラウン」を買収 所沢新球場に本拠地
朝日新聞
1978-10-13
[37]
서적
日刊スポーツ五十年史
日刊スポーツ新聞社
[38]
웹사이트
川上哲治に関するトピックス
https://www.asahi.co[...]
2021-09-11
[39]
뉴스
巨人がOB始球式を実施 創立70周年記念
http://www.47news.jp[...]
2004-02-23
[40]
웹사이트
土井正三さんに、川上氏感謝の15分の弔辞
https://www.nikkansp[...]
2009-09-30
[41]
웹사이트
川上哲治氏死す 打撃の神様、巨人V9監督 大往生93歳
https://www.sponichi[...]
2013-10-31
[42]
웹사이트
「打撃の神様」川上哲治さん死去 戒名は「大徹院赤心哲山居士」
https://web.archive.[...]
東京スポーツ
2013-10-30
[43]
웹사이트
「後楽園で見た赤バット」ファンも川上さんとの別れ惜しむ
http://www.sanspo.co[...]
2013-10-31
[44]
서적
川上哲治 弾丸ライナー
恒文社
1975-01
[45]
뉴스
【5月31日】1956年(昭31) 川上哲治 日本初の大記録もやっぱり“テキサス”だった
http://www.sponichi.[...]
2008-05-19
[46]
웹사이트
巨人・坂本“神様”に並ぶ通算408二塁打!歴代11位タイ「光栄です」
https://www.daily.co[...]
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2022-04-22
[47]
웹사이트
チーム凍り付いた川上との確執「あんな球捕ってもらえないと」/広岡氏編4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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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49]
간행물
打撃の神様川上哲治
WiLL
2011-06
[50]
칼럼
筆洗
東京新聞
2013-10-07
[51]
서적
全1192試合 V9巨人のデータ分析
光文社
2009-06
[52]
웹사이트
G菅野はボールゾーン使うひと工夫を
https://www.daily.co[...]
2015-09-21
[53]
뉴스
王貞治氏 「打つのは僕だから好きなように打つ」発言の過去
https://www.news-pos[...]
2015-08-20
[54]
잡지
丹波哲郎が語る「死後の世界の実相」
週刊大衆
2004-11-08
[55]
서적
オーラの運命(さだめ)― この世もあの世もバラ色にする黄金法則
双葉社
2005-10
[56]
간행물
王貞治新春対談
WiLL
2013-02
[57]
서적
敗れざる者たち
1979
[58]
서적
プロ野球裏面史 上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1967-07
[59]
뉴스
日刊スポーツ
2013-10-31
[60]
웹사이트
東京都文化賞・都民文化栄誉章
http://www.seikatubu[...]
東京都生活文化局
2017-12-04
[61]
웹사이트
熊本県民栄誉賞受賞者のご紹介
https://www.pref.kum[...]
2022-07-26
[62]
웹사이트
1000安打
https://npb.jp/histo[...]
2022-09-28
[63]
웹사이트
100本塁打
https://npb.jp/histo[...]
2022-09-28
[64]
웹사이트
1000打点
https://npb.jp/histo[...]
2022-09-28
[65]
웹사이트
150本塁打
https://npb.jp/histo[...]
2022-10-01
[66]
웹사이트
2000安打
https://npb.jp/histo[...]
2022-09-28
[67]
서적
私の履歴書
日経ビジネス人文庫
2007
[68]
서적
日本プロ野球記録大鑑
講談社
[69]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13-06-03
[70]
기타
[71]
서적
발굴! 역사에 묻힌 TV CM : 본 적 없는 쇼와 30년대
광문사
[72]
텍스트
[73]
뉴스
거인 V9 「타격의 신」 가와카미 테쓰지 씨 사망
http://www.nikkanspo[...]
닛칸 스포츠
2013-10-30
[74]
웹사이트
한신 고시엔 구장 홈페이지
http://www.hanshin.c[...]
[75]
텍스트
[76]
텍스트
[77]
텍스트
[78]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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