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 히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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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이 히데키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74년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야구 실력을 보였으며, 세이료 고등학교 시절에는 4번의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92년에는 고의사구 논란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0년간 활약하며 일본 프로 야구(NPB)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다. 2003년에는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7년간 활약하며, 2009년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2012년 은퇴 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20년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참여했다. 그는 NPB와 MLB 통산 507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이며, 2000년에는 일본 시리즈 MVP, 2009년에는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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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히데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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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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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쓰이 히데키 (松井秀喜) |
출생 | 1974년 6월 12일 |
출생지 | 일본 이시카와현 노미시 (舊 노미군 네아가리정) |
신장 | 188cm |
체중 | 95.3kg |
포지션 | 외야수, 지명타자 |
투구 | 우투 |
타석 | 좌타 |
프로 입단 | 1992년 (드래프트 1위) |
첫 출장 (NPB) | 1993년 5월 1일 |
첫 출장 (MLB) | 2003년 3월 31일 |
최종 출장 (NPB) | 2002년 10월 30일 |
최종 출장 (MLB) | 2012년 7월 22일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 2018년 |
헌액 방법 | 경기자 헌액 (플레이어 부문) |
득표율 | 91.3% (368표 중 336표) |
선수 경력 | |
NPB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3–2002) |
MLB | 뉴욕 양키스 (2003–2009)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2010)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11) 탬파베이 레이스 (2012) |
수상 내역 | |
NPB 올스타 선정 | 9회 (1994–2002) |
일본 시리즈 우승 | 3회 (1994년, 2000년, 2002년) |
센트럴 리그 MVP | 3회 (1996, 2000, 2002) |
일본 시리즈 MVP | 2000 |
베스트 나인 | 8회 (1995–2002) |
쇼리키 마쓰타로 상 | 2000 |
MLB 올스타 선정 | 2회 (2003년, 2004년) |
월드 시리즈 우승 | 2009 |
월드 시리즈 MVP | 2009 |
NPB 통산 기록 | |
타율 | 0.304 |
홈런 | 332 |
타점 | 889 |
MLB 통산 기록 | |
타율 | 0.282 |
홈런 | 175 |
타점 | 760 |
2. 어린 시절
마쓰이 히데키는 1974년 6월 12일 이시카와현 노미시에서 루리 교회 2대 주교인 아버지 마사오[53]와 어머니 사에코의 차남으로 태어났다.[54] 3세에 자택 근처의 보육원에 입원했는데, "보육원 사상 최대의 원아"라고 불렸으며, 당시 보육원 선생님은 "8살 정도로 보였습니다"라고 말했다.[55]
어린 시절 오른손 타자였지만, 형과 형의 친구들과 야구를 시작했을 때, 마쓰이가 너무 뛰어난 타격을 보여 형이 부끄러워하며 왼손 타자로 치거나 같이 야구하지 말라고 했다. 마쓰이는 곧 압도적인 왼손 타자가 되었고, 그 이후로 왼손 타자로 활동했다.[1]
네아게 정립 하마 초등학교를 거쳐 네아가리 중학교에 진학한 마쓰이는 유도부가 없었기 때문에 야구에 전념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감독 아래에서 포수로 활약했고 2학년 때에는 투수로 전향했다. 타자로 활약할 당시 통산 타율은 6할대를 넘을 정도였고, 3경기 연속 홈런을 날린 적도 있었다. 3학년 때는 비거리가 130m에 달하기도 했다. 연습 경기에서 고의사구 기미가 보이는 볼넷을 받았을 때 배트를 내동댕이치며 상대 투수를 째려보는 등 불만이 가득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를 본 코치가 경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마쓰이를 불러내 얼굴을 몇 번이나 때리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마쓰이의 체중은 90kg을 가볍게 넘는 비만 체형이었다. 세이료 고등학교의 야마시타 도모시게 감독은 세이료 고교 입학 시험을 앞둔 마쓰이에게 “우리 야구부에 들어온다면 체중을 80kg까지 줄여서 오라”라고 말했고, 마쓰이는 입학 당시 10kg 이상 감량했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 있는 세이료 고등학교에 스카우트되어, 고등학교 시절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4번의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봄 1회, 여름 3회)에 참가했다. 1992년 고시엔에서 열린 경기에서 5회 연속 고의사구를 기록하며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다. 고의사구는 과도하고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마쓰이의 팀이 패하면서 이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마쓰이의 고의사구에 대한 반응은 언론에서 널리 보도되었다. 로버트 와이팅은 "그 타석에서 마쓰이의 침착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행동은 대회 관계자와 기자들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라고 썼다. 대회가 끝난 후, 고등학교 연맹 대표는 "모든 학생들은 마쓰이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라고 선언했다.[1]
2. 1. 초등학교 시절
이시카와현 노미군에서 종교 법인 교회의 주교인 아버지 마쓰이 마사오와 어머니 마쓰이 사에코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출생 당시 체중은 3960g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 된 마쓰이 히데키는 6살 때 처음으로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전했고 가케후 마사유키의 사인볼을 받으면서 그를 동경하게 되었다. 체격이 컸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 때 3학년 이상으로 구성된 연식 야구팀에 특별히 입단했지만, 너무 어려서 감독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둔 경험이 있다. 4학년 때 아버지로부터 재입단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했고,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 때 다시 연식 야구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초등학교 시절에는 마을의 소년 유도 교실에서 활동했고, 스모 선수로도 활동하며 스모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유도 대회 이시카와현 대회에서 3위에 올랐다. 당시 마쓰이는 주위 아이들보다 몸이 훨씬 컸고, 튀고 싶어하는 성격이었다.
3살과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초등학교 4학년인 형과 ‘마이 웨이’를 연주할 정도의 솜씨를 가졌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은 적도 있어 ‘네아가리의 모차르트’(根上のモーツァルト일본어)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재도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지만, 요미우리 입단 후에는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없어졌고, 지금은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544][545]
2. 2. 중학교 시절
이시카와현 노미군에서 종교 법인 교회의 주교인 아버지 마쓰이 마사오와 어머니 마쓰이 사에코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출생 당시 체중은 3960g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 된 히데키는 6살 때 처음으로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전해 가케후 마사유키의 사인볼을 손에 넣었고, 가케후를 동경하는 선수가 되었다. 체격이 컸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 때 3학년 이상으로 구성되는 연식 야구 팀에 아버지가 특별히 입단시켰지만, 너무 어려서 감독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둔 경험이 있다. 4학년 때 아버지로부터 재입단을 권유받았지만, 유년기의 충격으로 거절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에 다시 연식 야구 팀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초등학교 시절에는 마을의 소년 유도 교실에서 활동했고, 스모 선수로도 활동하며 스모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도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유도 대회 이시카와현 대회에서 3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당시의 마쓰이는 주위 아이들보다 몸이 크고, 튀고 싶어하는 성격이었다.
3살과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초등학교 4학년인 형과 ‘마이 웨이’를 연주할 정도의 솜씨를 갖고 있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네아가리의 모차르트’(根上のモーツァルト일본어)라고 불렸다. 현재도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지만, 요미우리 입단 후에는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없어지면서 지금은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544][545]
네아게 정립 하마 초등학교 1학년 때, 3학년 이상으로 구성된 소프트볼팀 '네아게 소년 야구 클럽'에, 당시 5학년이던 형이 소속되어 있던 인연으로 특별히 입단했지만, 너무 어려 감독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해 1주일 만에 야구를 그만두었다.[56] 4학년 때 아버지로부터 재입단을 권유받았지만, 어린 시절의 충격이 커 거절했다.[57] 그러나 야구에 몰두하는 세 살 위 형에게 자극받아,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에 다시 소프트볼 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자신을 그만두게 한 지도자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 후임 지도자의 권유에 응했다. 그 무렵부터 이미 프로 야구 선수를 꿈꿨다.
3. 고등학교 시절
세이료 고등학교에 입학한 마쓰이는 원래 집에서 가까운 공립 고등학교인 고마쓰메이호 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쓰이의 실력을 높게 평가한 세이료 고등학교 야마시타 도모시게 감독의 열렬한 권유와 중학교 야구부 감독 및 코치의 추천으로 세이료 고교 진학을 결정했다. 당시 마쓰이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다.
투수로 입단했지만, 본인은 투수를 좋아하지 않아 곧바로 야수(1루수)로 전향했다. 이후 3루수로 다시 전향하여 세이료 고등학교 입학식 전부터 야구부 연습에 참가, 타 학교와의 연습 경기에서 '4번·3루수'로 출전했다.
1학년 때는 4번 타자를 맡았고,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하며 팀은 첫 경기에서 패배했다. 가을 대회에서는 마쓰쇼가쿠엔 고등학교에게 패하며 선발 출전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2학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는 강한 타격과 빠른 주루 플레이로 주목받았다. 첫 경기(2차전)에서 누마즈 시립 고등학교를 상대로 결정적인 주루 플레이를 선보이며 승리했고, 3차전에서는 고시엔 대회 첫 홈런을 기록했다. 준준결승에서 마쓰쇼가쿠엔에 승리했다. 여름 방학 체력 측정에서는 배근력 250kg, 바벨 인상 150kg를 기록, 관계자들은 "기요하라 가즈히로 이래의 수치"라며 놀라워했다. 야구부 내에서는 압도적인 기록이었다. 새로운 팀에서는 야마시타 감독에게 주장으로 지명되었는데, 이는 마쓰이의 통솔력과 영향력을 높게 평가한 특례였다. 가을 메이지 진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3학년 봄 대회에서는 한신 고시엔 구장의 럭키 존이 철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막 경기에서 2타석 연속 홈런, 1경기 7타점, 2경기 연속 홈런 등 대회 기록을 세웠다. 2차전 호리코시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는 어려운 커브를 홈런으로 연결했는데, 이를 나가시마 시게오가 지켜본 것을 계기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그러나 준준결승 덴리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는 홈런이 나오지 않고 실책성 플레이로 팀은 패배했다.
여름 고시엔 대회 2차전 메이토쿠기주쿠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5타석 연속 고의 사구'를 기록하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메이토쿠기주쿠의 마부치 시로 감독은 경기 후 "고교생 중에 한 명만 프로 선수가 섞여 있었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 통산 타율은 4할 5푼, 홈런은 60개였다. 고교 통산 60호 홈런은 야마가타 현 국민 체육 대회 진세이가쿠엔 고등학교와의 경기 네 번째 타석, 즉 고교 시절 마지막 타석에서 나왔다. 9월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친선 고교 야구 대회 일본 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했다.[546]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세간의 주목을 받은 마쓰이에게는 기자들의 취재 요청이 쇄도했다. 11월에는 세이료 고등학교 정문 앞에 수많은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매일 대기하고 있었다.[547] 11월 21일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주니치 드래건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4개 구단으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아 추첨 결과 교섭권을 획득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계약금은 1.2억엔, 연봉은 720만엔였다.
마쓰이의 교섭권을 적용한 것은 13년 만에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복귀한 나가시마 시게오였다. 당시 마쓰이는 한신 타이거스 입단을 희망하고 있어서 라디오를 통해 교섭권이 요미우리로 정해진 것을 알게 되자 기자 회견에서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신에 가고 싶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아직 정리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기분도 점차 희미해져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548] 그 후, 나가시마 감독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고 순조롭게 요미우리의 입단을 결정했다.
세이료 고교 시절, 마쓰이의 수업 태도는 매우 좋았고, 성적도 양호했으며, 야구부 활동 외 결석은 한 번도 없었다. 졸업식에서는 야구부 주전 선수로 맹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총장상'을 받았다.[549]
원래 우타자였으나, 타구를 너무 멀리 보내 형과 그 친구들이 마쓰이를 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존경하던 가케후 마사유키 선수처럼 좌타로 치도록 강요하여 좌타로 변경했다.[58]
3. 1. 1학년 (1990년)
마쓰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마을의 소년 유도 교실에 다녔다. 노미군 대회에서 우승하고, 이시카와현 대회에서는 3위에 입상하여 국체 강화 선수로도 선발되었다. 마쓰이는 "야구보다 더 주목받았어요. 서서도 좋고, 누워서도 좋고. 이시카와현에서는 꽤 강했어요."라고 자랑했다.[60]유도 외에도, 말썽꾸러기 스모 대회에서도 활약했다.[61]
이러한 스포츠에서의 활약 외에도, 친가의 피아노도 연주한다.
3. 2. 2학년 (1991년)
주어진 문서에는 '마쓰이 히데키'의 2학년(1991년) 시절에 대한 내용이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3. 3. 3학년 (1992년)
마쓰이는 요미우리 입단 후 기자 회견에서 "축구나 스모에 아이들의 관심이 크게 기울이고 있다. 그 중에 나는 그 아이들에게 꿈을 주면서 야구장에 직접 보러와 줄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신인이면서도 야구계 전체를 고려한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다. 프로 입단 후 처음 참가한 캠프에서는 150m급의 장외탄을 연발하며 팬들을 놀라게 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아오타 노보루 등의 야구평론가는 "오 사다하루보다 한수 위"라고 극찬했다.4.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마쓰이 히데키는 고등학교 졸업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라운드로 지명되었으며, 오 사다하루가 보유하고 있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등번호 55번을 부여받았다.[1] 일본에서 "고질라"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선수 초기에 겪었던 피부 트러블을 조롱하는 의미였지만, 이후 그의 강력한 타격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2][1]
프로 입단 첫해 시범 경기에서는 7번 타자로 출전하여 53타수 5안타, 타율 9푼 4리로 부진했고, 20개의 삼진을 기록했다.[550] 4월 7일 2군으로 내려갔지만, 이스턴 리그 개막전에서 야쿠르트 신인 이토 도모히토에게 홈런을 기록하는 등 12경기에서 3할 7푼 5리, 4홈런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5월 1일 야쿠르트전(도쿄 돔)에 7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여 1군 데뷔전을 치렀고, 니시무라 다쓰지에게서 오른쪽 펜스 직격 2루타를 날리며 첫 안타와 타점을 기록했다. 다음날 경기에서는 9회말 다카쓰 신고에게서 프로 첫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6월에 다시 2군으로 강등되었다가 8월 하순에 1군으로 복귀하여 센트럴 리그 고졸 신인 최다 기록인 11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후 계약 갱신에서는 1900만엔으로 서명했다.[551]
이후 마쓰이는 요미우리의 중심 타자로 성장했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9년 동안 요미우리에서 뛰면서 팀을 4번의 일본 시리즈로 이끌었고, 세 번의 우승(1994, 2000, 2002)을 차지했다. 센트럴 리그 MVP 3회(1996, 2000, 2002), 9년 연속 올스타전 출전, 3번의 리그 홈런왕(1998, 2000, 2002)과 타점왕(1998, 2000, 2002)을 차지했다. 특히 2002년에는 개인 한 시즌 최다 홈런인 50개를 기록하며 일본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일본에서 10시즌 통산 1268경기, 4572타수, 1390안타, 901득점, 332홈런, 889타점, 타율 0.304, 장타율 0.582를 기록했다. 그의 125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은 일본에서 두 번째로 긴 기록이다.[1]
마쓰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대에 매년 12월 24일에 계약을 갱신하여 '크리스마스 개정'이라고 불렸다. 마쓰이는 금액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 순조롭게 계약이 진행되었고, 양키스 이적 후에도 계약을 보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마쓰이는 오랜 기간 요미우리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많은 후배 선수들의 목표였다. '자이언츠의 4번은 일본의 4번'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마쓰이가 떠난 후 요미우리는 침체기를 겪으며 그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느끼게 했다.
2002년 시즌 종료 후, 마쓰이는 FA를 선언하며 메이저 리그 진출을 표명했다.[572] 뉴욕 양키스와 3년 총액 2100만달러에 계약하며[576]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4. 1. 1993년 (1년 차)
정규 경기 개막전에서 2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4월에는 자신의 첫 월간 MVP를 수상했다. 같은 해 센트럴 리그 사상 최연소인 4번 타자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시즌 최종전인 일명 ‘10월 8일 결전’에서도 홈런을 날리는 등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4. 2. 1994년 (2년 차)
시즌 22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데뷔 후 처음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8월 24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에서 정규 시즌으로는 처음으로 4번 타자로 출전했다. 야쿠르트가 정규 시즌 최고 승률인 매직 넘버 ‘1’로 남긴 9월 30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는 9회말 투 아웃 상황에 타석에 서서 그 해의 최우수 배터리상을 수상하는 상대 투수 테리 브로스와 포수인 후루타 아쓰야에 의해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되었다(우승 결정 당시의 중견수는 이이다 데쓰야).[552] 그 해 시즌 종료 후, 마쓰이는 서툰 몸쪽 공을 극복하기 위해 신체에 해당될 것 같은 극단적인 몸쪽 공을 치는 연습을 실시했고, 이에 보람을 느끼면서 다음 연도부터 성적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훗날 마쓰이는 “시즌 오프가 야구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라고 회상했다.[552]4. 3. 1995년 (3년 차)
자신의 첫 개막전 4번 타자로 출전하는 등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지만, 5월부터는 팀내의 간판 타자인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4번 타자로 복귀하여 마쓰이는 3번으로 돌아왔다. 그 후 팀의 성적도 급상승하면서 여름에는 7월과 8월에 2개월 연속으로 월간 MVP를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대역전 우승에 크게 공헌한 공로로 프로 데뷔 첫 센트럴 리그 MVP를 차지했다.[553] 리그 최종전까지 야마사키 다케시, 다이호 야스아키와의 홈런왕 타이틀 경쟁을 펼쳤지만, 야마사키보다 홈런 1개 차이로 뒤진 상황에서 시즌 최종전인 주니치전에서 모든 타석에서 고의사구를 얻어내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22세에 38개의 홈런은 오 사다하루와 대등한 연령별 최다 홈런 기록이다. 또, 사이토 다카시를 상대로 시즌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인 7개 홈런을 기록했는데, 그 해 사이토 다카시와의 대결에서 25타수 7안타를 기록했고 안타는 모두 홈런이었다. 최종적으로 130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314, 38홈런, 99타점을 기록하며 ‘슈퍼 스타’로 등극했다.[553]시즌 종료 후 각종 시상식과 파티 참석, 언론사 취재 요청이 쇄도했고,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이 증가된 1.6억엔으로 서명했다. 이는 고졸 선수로서 이치로와 대등한 최단 기간(당시)이자 입단 4년째에 1억 엔대 연봉 선수 대열에 합류한 것이었다.[553]
4. 4. 1996년 (4년 차)
4월 2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개인 통산 100홈런을 달성했고, 4월에만 1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타율은 3할에 조금 못 미쳤지만 38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드웨인 호지와의 홈런왕 경쟁에서 단 1개 차이로 밀려나, 2년 연속 1개 차이로 홈런왕 타이틀을 놓치는 아쉬움을 겪었다. 타점은 처음으로 103타점을 기록했지만 루이스 로페즈에게 미치지 못해 무관에 그쳤다.[1] 이 해 마쓰이는 타율 0.314, 38홈런, 99타점을 기록했다.[1]4. 5. 1997년 (5년 차)
전지 훈련 중 왼쪽 무릎에 통증을 느꼈지만[554],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시즌을 치르면서 프로 데뷔 후 최악의 슬럼프를 겪었다. 개막전에는 4번 타자로 출전했으나 부상과 슬럼프의 여파로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4번 타자 자리를 내주는 굴욕을 겪었다. 4월에는 타율 0.19, 2홈런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5월에 월간 MVP를 수상하며 부활, 이후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7월 28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개인 통산 150홈런을 달성했다. 최종적으로 시즌 34홈런, 100타점을 기록하며, 첫 타이틀인 홈런왕, 타점왕,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했다. 올스타전에서도 4경기 연속 홈런(당시 올스타전 신기록)을 기록했다.당시 팀 주치의는 왼쪽 무릎에 대해 '선반 장애', '연골 파손'이라는 진단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지만, 마쓰이는 환부 주변 근육을 단련하여 수술 없이 장기간 이탈을 피할 수 있었다.[555] 그러나 10년 후인 2008년, 결국 증상이 악화되어 9월에 수술을 받았다.
4. 6. 1998년 (6년 차)
새미 소사에게 조언을 받아 시즌 개막 직전 광각 타격을 의식한 타격 폼으로 개조했고,[556] 5월 하순 도쿄 돔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상대 투수 대럴 메이에게 몸에 맞는 볼을 맞아 극도로 분노하며 배트를 던지려다 구심에게 제지당했다. 마쓰이는 그 자리에서 웅크리고 앉았고, 경기 후 “저것은 분명히 고의로 던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경기에서 끝내기 3루타를 때려냈다. 6월 5일 요코하마전부터 6월 10일 주니치전까지 5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9월 21일 한신전에서 개인 통산 200홈런을 달성했고, 7월 올스타전에서 대타로 출전했다가 옆구리를 다쳐 7월 30일 히로시마전에서 선발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 시점에서 현역 최다 연속 경기 풀 이닝 출장 기록(574경기, 당시 역대 3위)이 중단됐지만,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마쓰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존중하기로 결정했고,[557] 이후 8월 중순까지는 기록 유지를 위해 1이닝만 수비수로 출전했다. 부상으로 로베르토 페타지니에게 2개 차로 홈런왕을 놓쳤지만, 개인 최다인 42홈런을 기록했다. 이는 일본인 선수로는 1989년 오치아이 히로미쓰 이후 10년 만이며, 요미우리 선수로는 1977년 오 사다하루 이후 22년 만의 기록이었다. 시즌 종료 후인 10월 2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처음으로 메이저 리그 경기를 관전했는데, 이는 훗날 그가 메이저 리그 진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558]
4. 7. 1999년 (7년 차)
시즌 개막 직후부터 4번 타자로 출전하여 일본 시리즈, 미·일 야구 등을 포함하여 다른 타자에게 4번 타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그립에 걸치는 타법으로 바꾸면서 배트를 너무 강하게 잡지 않고 릴렉스하여 시즌 중반까지는 타격 3관왕을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559]7월 12일 히로시마전에서는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고, 최종적으로 시즌 135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4번 타자 자리를 지켰다. 개인 최다 기록인 타율 3할 1푼 6리, 42홈런, 108타점을 기록했다. 정규 시즌 전 경기 4번 타자로 출전한 것은 요미우리에서 1950년 가와카미 데쓰하루 이후 50년 만의 기록이었다. 홈런왕, 타점왕, 최고 출루율, 시즌 MVP, 일본 시리즈 MVP, 골든 글러브상을 연거푸 차지하며 요미우리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일본 시리즈 MVP 수상을 통해 가와카미 데쓰하루, 오시타 히로시, 후쿠모토 유타카에 이어 역대 4번째로 ‘정규 시즌, 올스타전, 일본 시리즈 MVP 타이틀 획득자’가 되었고, 일본 프로 야구계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560]
같은 해 미·일 야구에서는 메이저 리그 선발 보비 콕스 감독으로부터 “고질라는 좋네요. 배트 스윙이 빠르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 시점에서는 메이저 리그 도전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야구를 하고 있으면서 메이저 리그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2년 후 FA 이적에 대한 여지를 남겼다.[561]
11월 21일에는 이시카와 현민 영예상을 수상했고,[562] 계약과 관련해서는 구단 측이 8년간 총액 56억 엔이라는 파격적인 장기 계약을 제시했지만, 마쓰이는 “일년 내내 승부를 하는 기분으로 플레이하고 싶다”라고 밝히며 단년 계약을 고집하여 프로 야구계 최고 연봉(당시)인 5억엔으로 계약했다.[563]
4. 8. 2000년 (8년 차)
4월 12일 주니치전에서 통산 1000경기 출장을 앞두고 개인 통산 250홈런을 달성했고, 5월 3일 주니치전에서 당시 역대 5번째의 1000경기 연속 출장을 달성했다.[564] 5월 5일부터 8월 13일까지 센트럴 리그 역대 1위인 65경기 연속 출루 기록을 세웠다. 9월 27일에는 처음으로 자신의 1경기 3개 홈런을 기록하는 등 9월 한 달간 타격이 급상승하여 월간 MVP를 수상했다. 그 해에는 처음으로 수위타자(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했는데, 전 이닝 출장에서의 수위타자는 오 사다하루와 이치로에 이은 역대 3번째였다. 한편 홈런 개수는 좀처럼 오르지 않아 20호 홈런을 날린 것은 8월 7일이었다.8월까지 연간 30개에 미치지 못하는 페이스였지만, 9월에 간신히 양산 체제에 들어가면서 시즌 최종전에서의 3개의 홈런을 포함한 월간 11개 홈런을 기록, 최종 36개를 기록했다. 홈런왕 타이틀은 당시 홈런왕 경쟁을 하고 있던 로베르토 페타지니를 추격하여 다시 차지했다. 마쓰이는 "타구가 오르지 않고 홈런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라고 토로하며 한때 슬럼프를 겪기도 했다. 그 해의 타격에 대해 마쓰이는 후에 "그 해 타격왕을 차지했지만 타격은 그대로였다"라고 말했다.[565]
FA권 취득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구단은 5년 총액 50억엔의 대형 계약을 제시했지만 마쓰이는 이를 거절하고 당시 프로 야구 사상 최고 금액인 연봉 6.1억엔으로 단년 계약을 맺었다. 계약 개정 후 기자 회견에서 차기 FA권 행사를 언급하며 "이대로 요미우리로 남게 될지, 아니면 미국에 진출할 지는 양자택일이 된다"라고 말했다.[566]
4. 9. 2001년 (9년 차)
‘일본 제일’, ‘타격 3관왕’이라는 목표를 내걸어[567] 정규 시즌이 개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13일에 FA권을 취득했고, 7월 9일에 구로다 히로키로부터 통산 300호 홈런을 달성했다. 28세 0개월 만에 달성한 것은 오 사다하루가 기록한 27세 3개월에 뒤를 이은 역대 2번째 최연소 기록이며, 1200경기만의 달성은 역대 6번째로 빠른 기록이다.[568] 올스타전까지는 작년과 같이 타구가 오르지 않고 76경기에서 18개의 홈런을 기록하였지만 후반기에는 64경기에서 32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경이로운 페이스를 보여주며 개인 최다이자 일본 프로 야구 역대 8번째인 5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센트럴 리그에서는 1985년 랜디 바스(당시 한신 타이거스 소속) 이래 17년 만의 일이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1977년 오 사다하루 이후 25년 만의 쾌거였다. 홈런 부문에서 최강의 라이벌인 로베르토 페타지니와의 9개 차이를 낸 50개째의 홈런은 2002년 시즌 마지막 경기인 야쿠르트전(도쿄 돔)에서 기록했다. 7월과 8월에는 2개월 연속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고, 9월 7일 히로시마전에서 프로 야구 신기록이 되는 5년 연속 100득점을 기록했다.시즌 종반까지는 타율이 3할 5푼대를 유지해 3관왕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시즌 종반에는 부진으로 인해 결국 수위타자 경쟁에서 주니치의 후쿠도메 고스케에게 타이틀 자리를 양보했다. 타율, 홈런, 출루율에서는 개인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고, 홈런왕과 타점왕, 최고 출루율, 그리고 시즌 MVP를 연거푸 석권했다.
2001년, 마쓰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NPB 역사상 최고액인 6400만달러의 6년 계약 제안을 거절했다.[1]
4. 10. 2002년 (10년 차)
마쓰이는 2002년에 자신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50개를 기록했으며, 이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1] 이 해에 마쓰이는 센트럴 리그에서 3번째 MVP로 선정되었고, 팀을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또한, 9번 연속 올스타전에 출전하였으며, 3번째로 리그 홈런과 타점에서 1위를 차지했다.[1]마쓰이는 일본에서 10시즌 동안 총 1268경기에 출전하여 4572 AB, 1390안타, 901득점, 332홈런, 889타점, 타율 0.304, 장타율 0.582를 기록했다. 그의 125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은 일본에서 두 번째로 긴 기록이었다.[1]
2002년에는 영화 ''고질라 vs 메가기라스''에 카메오로 출연했다.[2][1]
5. 뉴욕 양키스 시절
마쓰이 히데키는 2002년 12월 19일 뉴욕 양키스와 3년 2100만달러에 계약하며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다.[3] 계약 축하를 위해 도쿄에서 퍼레이드가 열렸고, 많은 기자와 사진가들이 그를 따라 일본에서 메이저 리그로 이동했다.[4]
2003년 3월 31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첫 타석에서 적시타를 기록했고, 4월 8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홈 개막전에서는 만루 홈런을 쳐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5] 그러나 변화구와 넓은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하지 못해 타격 부진을 겪기도 했다. 조 토리 감독의 조언으로 타격 자세를 교정하며 컨디션을 회복했다.
7월에는 MLB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3위를 기록하며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일본인 선수로는 노모 히데오, 이치로에 이어 세 번째였다. 7월 17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는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며 팀 승리에 기여했다.
정규 시즌에는 신인으로서 양키스 선수 중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163경기에 출전했지만,[578] 홈런은 16개에 그쳤다. 하지만 득점권 타율은 팀 내 최고인 3할 3푼 5리, 타점은 팀 내 2위인 106타점을 기록하며 뛰어난 클러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조 디마지오가 기록한 양키스 신인 최다 2루타 기록(44개)에 2개 차이로 근접했다. 그러나 병살타는 리그 2위(25개), 땅볼 아웃은 리그 최다(223개)를 기록하며 아쉬움을 남겼다.[579] 신인왕 투표에서는 앤젤 베로아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581]
2004년에는 31홈런, 108타점을 기록하며 더욱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올스타전에 팬 투표로 선출되었고, 미일 통산 350홈런과 150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
2005년에는 타율 0.305, 116타점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팀의 중심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시즌 후 양키스와 4년 총액 5200만달러에 계약을 연장했다.[8]
2006년에는 손목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결장했지만, 2007년에는 미일 통산 2000안타와 메이저 리그 통산 100홈런을 달성하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2008년에는 왼쪽 무릎 부상으로 고전했지만, 2009년에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28홈런, 90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지구 우승에 공헌했다. 특히 2009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6경기에서 타율 0.615, 3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22] 이는 일본인 선수 최초의 월드 시리즈 MVP 수상이었다.
5. 1. 2003년 (1년 차)
2003년 시즌 개막전은 일본 도쿄 돔에서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열렸으며, 마쓰이는 2번 좌익수로 출전하여 일본 팬들 앞에서 1호 홈런을 기록했다.[582] 미국으로 돌아온 후 61타석 동안 홈런을 기록하지 못하며 부진했지만, 4월 24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2호 홈런을 때려냈다.[582]이후 빠른 페이스로 홈런을 양산하며 6월 4일에는 전년보다 41경기 빠른 53경기 만에 10호 홈런을 달성했다.[582] 5월 마지막 주에는 주간 MVP를 두 번째로 수상했고, 6월 19일과 20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경기에서는 메이저 리그 이적 후 처음으로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전반기에만 1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582]
올스타전에는 팬 투표 외야수 부문 선출은 놓쳤지만, 최종 투표에서 120만 표를 얻어 '32번째의 남자'로 2년 연속 출전했다.[583] 홈런 더비 참가가 제안되었지만 사퇴했다.[583]

7월 15일에는 미일 통산 350홈런과 1500경기 연속 출장을 달성했다.[583] 8월 7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에서는 메이저 리그 이적 후 처음으로 2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고,[583] 8월 15일 시애틀 매리너스전부터는 4번 타자로 정착했다.[583] 9월 30일 미네소타 트윈스전에서는 일본인 선수 최초로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583]
최종적으로 3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타율은 3할에 미치지 못했지만, 세 부문 모두 전년도를 웃도는 성적을 기록하며 양키스의 중심 타자로 자리 잡았다.[583]
플레이오프에서는 11경기에서 타율 0.412, 3홈런, 13타점을 기록하며 활약했다.[584]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최다 타이인 14안타와 28루타를 기록했고, 3차전에서는 1경기 최다 타이인 5안타와 5득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3연승 후 4연패를 당하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584]
5. 2. 2004년 (2년 차)
개막 경기에서는 홈런왕 타이틀에 대한 의욕을 보였지만,[585] 4월 9일부터 5월 29일까지 46경기, 202타석 연속 무홈런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자신의 생일인 6월 12일에는 오른쪽 발목 부상으로 경기 도중 교체되기도 했지만, 지명타자로 계속 출전했다. 6월 20일에는 개인 통산 세 번째로 주간 MVP를 수상했다(6경기 타율 0.455, 3홈런, 10타점).[586] 6월 한 달 동안 전 경기 출루, 월간 타율 0.398, 6홈런, 23타점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다음 달 경기 출장을 놓쳤다. 7월 28일에는 어니 뱅크스를 제치고 메이저 리그 데뷔 후 425경기 연속 출장 신기록을 세웠다.[587]정규 시즌 종료 후, 3년 연속 전 경기 출장을 달성함과 동시에 메이저 리그 개인 최고 기록인 타율 0.305와 116타점을 기록했다. 타율은 이치로를 넘어서는 리그 7위였고, 타점은 8위였다. 타율, 홈런, 타점의 타격 3개 부문 모두 일본인 선수 중 최고 성적이었다. 마쓰이는 타율과 타점이 전년도보다 훨씬 좋아진 것에 만족했지만, 홈런이 감소한 것은 다음 시즌의 과제로 삼겠다고 다짐했다.[588] 9월 8일에는 미일 통산 400홈런을 달성했고, 팀은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2승 3패로 패했다. 마쓰이 자신도 20타수 4안타, 타율 0.200으로 부진했다. 특히 5차전에서는 5타석 모두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아웃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2005년까지 3년 계약이 만료되어 시즌 후 계약 연장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한때 다른 팀으로의 이적도 고려했지만, 최종적으로 양키스와 4년 총액 5200만달러에 계약을 연장했다. “최고로 행복하다”라고 말하며 높은 금액과 계약 연장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마쓰이는 경기장에서의 재능뿐만 아니라 일본 팬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라는 평가처럼, 비즈니스 측면에서의 공헌도 역시 높게 평가받았다.[589] 이 계약에는 트레이드 거부권, 부상 외의 이유로 인한 마이너리그 강등 거부권, 일정 수준 이상의 출전 기회 보장 조항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5. 3. 2005년 (3년 차)
2005년 마쓰이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출전을 포기하고 정규 시즌에 집중했다. 그러나 춘계 캠프에서 왼쪽 무릎 통증과 꽃가루 알레르기로 어려움을 겪었다.[590]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막전에서 홈런 1개를 포함해 4안타를 치며 좋은 출발을 보였고, 4월 18일에는 메이저 리그 데뷔 후 처음으로 50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5월 11일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 중 수비 도중 왼쪽 손목 부상을 당해 교체되었다. 이로 인해 1993년부터 이어져 온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1768경기로 중단되었다. 검사 결과 왼쪽 손목(요골) 골절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재활에 전념했다.
9월 12일, 124일 만에 탬파베이 레이스전에 복귀하여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복귀를 알렸다. 복귀 후 14경기에서 타율 0.403을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며 최종적으로 51경기 출장, 타율 0.302를 기록했다. 팀은 9년 연속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 16타수 4안타, 0홈런, 1타점으로 부진하며 2년 연속 디비전 시리즈에서 패배했다.
2005년 11월 15일, 마쓰이는 4년 5,200만 달러(5200만달러) 계약을 체결하여 이치로 스즈키를 제치고 일본인 선수 최고 연봉을 기록했다.[8]
5. 4. 2006년 (4년 차)
2월에는 자신의 자서전을 출간, 책의 내용에는 스스로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마음가짐이나 사고법(思考法)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출간 후 무려 30만 부를 넘을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개막 이후인 4월 7일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에서 2회 첫 번째 타석에서 땅볼을 친 다음 1루로 출루하는 도중 왼쪽 넓적다리에 통증이 일어나 4회의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에 교체되는 등 벤치에서 신세를 져야만 했다. 그 다음날부터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극도의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병원에서의 MRI 진단 결과 왼쪽 넓적다리의 가벼운 근육 파열이 있는 것으로 판명돼 부상은 순조롭게 회복할 수 있었다. 부상자 명단의 기한이 지나는 4월 23일에 출장 선수로 등록되면서 같은 날에 있은 탬파베이 레이스전에서 16일 만에 선발 멤버로 복귀했다.5월 6일, 홈구장에서 열린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미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일본에서 뉴욕까지 찾아온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회장인 가네다 마사이치가 마쓰이의 2000안타를 달성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면서 명구회 가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당초 외야수의 실책으로 기록되었지만, 후에 판정이 번복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판정에 대해 양팀 선수들간의 한바탕 실랑이와 난투극이 일어났다. 일본인으로서의 미·일 통산 2000안타는 이치로에 뒤를 이은 역대 2번째였다. 6월 26일 이후 타격 부진에 빠지는 슬럼프를 겪게 되었다.
7월에는 타격이 양호할 정도로 28경기의 타율 3할 4푼 5리와 28타점, 장타율 7할 3푼 5리, 13홈런, 31득점을 기록하는 등 리그 톱이 되는 성적이었다. 8월 2일에는 7월의 아메리칸 리그 월간 MVP에 선정되었다. 2003년 6월에 월간 신인 MVP를 수상했지만 월간 MVP는 첫 수상이었다. 8월 5일,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통산 100호 홈런을 달성, 여름 경기에서의 활약과는 정반대로 시즌 종반으로부터 플레이오프에 있어서는 오른쪽 무릎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슬럼프에 빠지는 등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릴 수 없었다. 팀은 3년 연속으로 지구 시리즈에서 패배하면서 마쓰이도 타율이 1할 8푼 2리(11타수 2안타)로 끝났다. 시즌 성적은 25홈런과 103타점을 기록하였지만, 마쓰이 본인은 시즌 종료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번 시즌은 실패 밖에 없었다.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발언하는 것과 부상 요소에서의 범퇴를 반복했던 것에 대해 고백을 했다.[591] 시즌 종료 후인 11월 14일에 뉴욕의 한 병원에서 오른쪽 무릎에 있는 연골을 제거하는 내시경 수술을 받아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트레이드와 관련해서 마쓰이 본인도 트레이드가 타진되었을 경우에는 계약 조항에 있는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결국 트레이드는 실현되지 않고 양키스의 잔류가 확정되었다. 타점을 많이 올리기 위해 이 해에는 팀내에서 ‘팩맨’이라는 애칭이 붙여지기도 했는데,[592] 게임의 캐릭터와 같이 타점을 덥석덥석 감추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의 애칭이었다.
5. 5. 2007년 (5년 차)
3월 26일, 도야마현 출신의 25세 일본인 여성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기자 회견 당시 신부의 직업이 회사원이자 일반인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고려하면서 얼굴 사진이나 출신지, 이름은 공개하지는 않았다.[593]
개막 경기에서 8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했지만, 초반에는 타격감이 좋아 한때 타율이 3할 3푼 7리로 수위타자에 오르기도 했다. 4월부터 5월에는 개인 최다인 19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다. 2008년 올스타전은 같은 해 마지막으로 해체되는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올스타전이었고, 마쓰이도 “이런 무대는 두 번 다시 없다. 나올 수 있으면 일생의 추억이 된다고 생각한다”라며 올스타전 출전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6월에도 타격 호조가 지속되며 수위타자 경쟁을 했지만, 6월 18일 경기 직전 왼쪽 무릎 통증이 발생하여 6월 27일에는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시즌 종료 후 수술한 오른쪽 무릎을 무의식중에 감싸면서 왼발에 부담이 걸린 것이 원인이었다. 7월 17일에는 “(수술을) 구단으로부터 권유받으면 받아들인다”라고 생각했으나,[594] 이틀 후 제너럴 매니저로부터 수술 권유를 받았을 때는 태도를 바꿔 2시간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거부했다.[595] 그 후 2개월간 치료와 재활 훈련을 거쳐 8월 19일 토론토 블루 제이스전에서 복귀, 주로 7번·지명타자로 출전했지만 이후 타격이 침체되며 부진을 겪었다.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도 어려운 상황에서 9월 21일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 선발 출장(8번·지명타자)하는 것을 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종료 직후인 9월 22일에는 왼쪽 무릎 내시경 수술을 받았고, 다음 날 양키스가 14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자 마쓰이 본인도 “책임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596] 최종적으로 시즌 타율은 3할을 밑돌았고, 타율 2할 9푼 4리, 안타 99개, 홈런 9개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뉴욕 데일리 뉴스의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47%가 마쓰이 방출에 찬성했고,[597] 11월에는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트레이드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598]
2007년 5월 6일,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NPB와 MLB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하며 일본 골든 플레이어스 클럽에 입성했다. 원래 라울 이바녜스의 실책으로 판정되었으나, 햇빛 때문에 공을 놓친 것이 득점 변경으로 이어져 마쓰이의 안타로 기록되었다.[9] 이날 마쓰이는 4타수 2안타를 기록했고, 두 번째 안타(통산 2001번째)는 깨끗한 우전 안타였다. 8월 5일에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길 미치를 상대로 3회말 홈런을 쳐 메이저 리그 역사상 100홈런을 친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10]
2007년 마쓰이는 아메리카 리그에서 희생 플라이 10개로 3위, 삼진당 볼넷 1.00개로 9위를 기록했다. 2007년 겨울, 양키스가 투수 1~2명과 마쓰이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하는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가 널리 퍼졌으나,[11] 어떤 거래도 성사되지 않았고 마쓰이는 양키스에 남았다.
5. 6. 2008년 (6년 차)
‘타율 3할, 30홈런, 100타점, 도루 4개’를 목표로 시즌을 시작했다. 작년에는 무릎 수술 후 재활 훈련에 전념했지만, 트레이닝 조정이 늦어져 시범 경기 초반 타격 부진을 겪었다. 그러나 부상으로 이탈한 알렉스 로드리게스 대신 4번 타자로 나섰다. 4월 4일 양키 스타디움 홈런 등 시범 경기에서 4홈런을 기록했다. 개막전 4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 7회 2점 홈런을 쳐 나가시마 시게오의 통산 444개를 넘는 미일 통산 445호 홈런을 달성했다. 그러나 타격은 부진했고, 5월 이후 무릎과 허벅지 통증으로 몸 상태가 나빠졌다. 로드리게스 복귀 후 5번에서 7번으로 타순이 내려갔고, 지명타자로 기용되었다. 2009년부터는 지명타자로 등록되어,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내셔널 리그 홈구장(부시 스타디움) 올스타전 팬투표에는 등록되지 않았다.
5월 하순 수비 연습을 재개했고, 5월 27일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 미일 통산 450호(6호) 홈런을 쳤다. 그러나 뉴욕 포스트는 6월 1일, 양키스 수뇌부가 “마쓰이 활약과 관계없이 계약은 올 시즌이 마지막”이라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599] 구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마쓰이의 다음 시즌 계약은 “백지 상태”라고 말했다.[600] 마쓰이는 18타석 연속 무안타 등 타격 부진이 이어졌다.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내셔널 리그 홈구장 인터 리그(교류전)에서는 선발 출장하지 못했다. 6월 17일, 한신 타이거스가 마쓰이 영입 조사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마쓰이는 “고맙다”라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요미우리, 오릭스 버펄로스, 독립 리그 이시카와 밀리온 스타스도 영입에 관심을 보였다고 보도되었다. 그러나 “일본 복귀는 별개 문제”라며 메이저 리그 잔류 의지를 강조했다.[601] 7월 20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서 2003년 이후 6년 만에 두 번째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지만, 이후 13타석 연속 무안타로 타격 슬럼프에 빠져 불완전 연소로 시즌을 마감했다.
8월 13일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2홈런 4안타 5타점으로 타격이 폭발했지만, 왼쪽 무릎 악화로 시즌 첫 연속 결장했다. 8월 21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3점 홈런 2개로 1경기 7타점을 기록했다. 이틀 후 보스턴전에서도 2점 홈런을 기록했다. 8월 중순부터 타격 호조를 보이며 타율 2할 8푼 1리, 25타점, 8홈런을 기록했고, 9월 19일 시애틀전에서 26호 홈런을 쳐 지명타자 연간 최다 홈런 기록(당시 구단 기록)을 경신했다. 메이저 리그 이적 후 두 번째로 많은 28홈런, 팀 3위 90타점으로 팀의 3년 만의 지구 우승에 공헌했다. 시즌 후 “타율이 낮은 것은 반성, 28홈런은 나쁘지 않다”라며 평가했다. 4년 만에 부상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것을 기뻐했으며,[602] 스포팅 뉴스 선정 아메리칸 리그 올스타 지명타자 부문에 선정되었다.[603]
5. 7. 2009년 (7년 차)
2009년 6월 12일, 마쓰이는 35번째 생일에 3점 홈런을 쳐 뉴욕 양키스가 뉴욕 메츠를 상대로 6회에 7-6으로 앞서게 했다.[17] 7월 20일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짐 존슨을 상대로 9회말 1아웃에서 끝내기 솔로 홈런을 쳐 양키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4연승과 9번째 끝내기 승리를 기록, 보스턴 레드삭스와 함께 지구 1위를 기록하게 했다.[18] 8월 21일, 펜웨이 파크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양키스가 20-11로 승리한 경기에서 2개의 홈런을 쳐 개인 통산 최다인 7타점을 기록했다.[19] 그는 1930년 루 게릭 이후 펜웨이 파크에서 한 경기 7타점을 기록한 최초의 양키스 타자가 되었다. 두 경기 후, 마쓰이는 7경기 만에 세 번째로 2개의 홈런을 쳤다. 마쓰이는 8월 한 달 동안의 활약으로 팬들이 선정하는 MLB 이달의 클러치 퍼포머(Pepsi 제공)로 선정되었다.[20] 9월 19일, 시즌 26번째 홈런을 쳐 돈 베일러가 가지고 있던 지명 타자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을 갱신했다.[21]2009년 월드 시리즈에서 마쓰이는 6경기에서 타율 0.615(13타수 8안타), 3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양키스가 디펜딩 챔피언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꺾는 데 기여했으며, 6차전에서 6타점으로 바비 리차드슨의 단일 경기 월드 시리즈 기록(1960년 월드 시리즈 3차전)과 타이를 이뤘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3경기에서는 지명 타자 포지션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뉴욕에서 열린 3경기에서만 선발 출장했지만, 그의 활약으로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그는 이 상을 수상한 최초의 일본 출신 선수이자 월드 시리즈에서 풀타임 지명 타자로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22] 1994년 일본 시리즈 팀 동료 댄 글래든 (1987년, 1991년, 미네소타)과 함께 북미와 일본에서 모두 챔피언십을 우승한 선수로 합류했다.[23] 또한,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과 함께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같은 월드 시리즈에서 타율 0.500 이상을 기록하고 3개의 홈런을 친 세 번째 선수가 되었다.[24]
6.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 시절
2009년 뉴욕 양키스에서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후, 마쓰이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1년 계약을 맺고 이적했다. 이적 후 빨간 유니폼을 착용하면서 언론에서는 마쓰이를 ‘'''빨간 고질라'''’(赤ゴジラ일본어)라고 불렀다. 일본에서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시마 시게노부가 ‘빨간 고질라’라고 불린 적이 있었는데, 히로시마 팀의 유니폼이 빨간색이고 등번호도 마쓰이와 같은 55번이었기 때문이다.
개막 직후부터 4번 타자로 출전하며 주로 지명타자로 활약했고, 2008년 6월 이후에는 좌익수 수비를 보는 경기도 있었다. 4월 6일 개막전에서는 4번째 홈런을 기록했고, 4월 13일에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옛 소속팀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경기를 치렀다. 경기 전 월드 시리즈 우승 기념 ‘우승 반지’ 수여식에서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고, 옛 동료들이 마쓰이에게 다가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608] 4월 26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는 메이저 리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고, 이후 타석에서는 통산 500삼진을 기록했다. 6월 26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인터 리그 경기에서는 만루 홈런을 쳐 메이저 리그 통산 150홈런을 달성했다.
그러나 5월 월간 타율 1할 8푼 4리, 7월 2할 2푼 8리를 기록하는 등 타격 부진에 시달렸고, 7월 이후에는 좌완 투수가 등판할 때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있었다. 팀 성적 부진으로 젊은 선수들이 주로 기용되면서 수비 기회도 거의 없었고, MLB 공식 홈페이지는 “팀 전력에서 제외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609][610]
이후 컨디션을 회복하며 최종적으로 타율 2할 7푼 4리, 21홈런, 84타점, OPS 8할 2푼을 기록했다. 9월 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는 1993년 이후 17년 만에 대타로 출전했고, 토니 레긴스 에인절스 단장은 마쓰이의 타격에 대해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11월 2일, 1년 계약이 끝나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고, 에인절스는 다음 시즌 조건 제시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611]
6. 0. 1. 2010년
2009년 12월 16일, 마쓰이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650만달러 규모의 1년 계약에 합의했다.[25] 그는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양키스를 가장 사랑했다"고 말했지만 더 이상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그의 에이전트가 협상을 위해 연락했을 때 "양키스는 [계약 조건 면에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에인절스와 재빨리 계약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저는 그들이 저에게 거는 높은 기대를 정말 느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또한 제가 수비를 시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26]2010년 시즌 개막전에서 마쓰이는 에인절스 4번 타자로 출전하여 4타수 2안타, 홈런 1개를 기록했다.[27] 에인절스에서 145경기에 출전하는 동안 그는 .274의 타율, 21개의 홈런, 84타점을 기록했다. 마쓰이는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고, 2010년 11월 23일, 에인절스는 그에게 연봉 조정을 제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28]
2010년 12월 14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연봉 425만달러(당시의 비율로는 3.57억엔)로 1년 계약을 맺었고,[612] 입단 기자회견에서 마쓰이는 “모두를 끌어들여서 갈 수 있는 플레이를 하고 싶다”라고 말해 의지를 나타냈다.[613] 애슬레틱스 이외에도 다른 구단들이 마쓰이의 영입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조건 제시를 한 것은 애슬레틱스 뿐이었다.[614]
7.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시절
마쓰이는 2011년 시즌을 앞두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스프링 캠프에서는 목과 어깨 결림, 화분증 등으로 슬럼프를 겪으며 조정을 받았다.[615] 3월 21일에는 숙소에서 넘어지는 사고로 얼굴에 상처를 입은 채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616] 시범 경기에서는 타율 1할 6푼 9리, 1홈런, 2타점으로 부진했다.[617]
4월 3일(일본 시간 4일) 개막 3차전(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시즌 첫 안타(2루타)를 기록하며 미일 통산 2500안타를 달성했다. 5월 3일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는 2년 만에 끝내기 홈런을 쳤으나, 이후 부진으로 5월 월간 타율이 1할 9푼 7리에 그쳤다. 좌완 투수가 선발 등판하는 경기에서는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고, 6월에는 우완 투수가 등판하는 경기에도 선발에서 빠지는 일이 잦았다.
6월 9일 밥 게렌 감독이 해임되고 밥 멜빈이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기회를 얻었다. 멜빈 감독은 과거 시애틀 매리너스 감독 시절부터 마쓰이를 높게 평가했으며, 감독 교체 후 첫 경기인 6월 10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좌완 마크 벌리로부터 홈런(4호)을 기록했다. 6월 17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에서 미일 통산 499호 홈런(6호)을 기록하는 등 7경기에서 타율 3할 4리, 3홈런으로 회복세를 보였다. 21일 뉴욕 메츠전에서는 지명 타자 제도가 없어 이적 후 처음으로 외야 수비를 맡았다.[618] 그러나 이후 다시 부진에 빠져 전반기 타율은 2할 9푼에 머물렀다.
7월 20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6회초 시즌 7호 홈런을 기록하며 미일 통산 500홈런(요미우리 시절 332개, 메이저 리그 9년째 168개)을 달성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메이저 리그에서 현역 생활을 마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619] 7월 25일에는 6년 만에 주간 MVP를 수상했고, 7월 한 달간 타율 3할 6푼 5리, 3홈런, OPS 9할 9푼 7리로 팀 월간 MVP를 수상했다.
마쓰이가 컨디션을 회복하는 동안 오클랜드는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에서 멀어져 트레이드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8월 말까지 트레이드는 성사되지 않았다. 9월 10일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 미일 통산 505호 홈런(12호)을 기록하며 일본인 통산 홈런 단독 7위가 되었지만, 8월과 9월 타율은 2할 4푼 4리, 3홈런, OPS 6할 4푼으로 다시 하락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할 5푼 1리, 12홈런, 팀내 2위인 72타점, OPS 6할 9푼 8리로, 100경기 이상 출전 기준 메이저 리그 이적 후 최저 기록이었다. 홈 구장인 O.co 콜리세움에서는 타율 2할 3푼 4리, 홈런 4개, OPS 6할 6푼 3리로 부진했지만, 원정 경기에서는 타율 2할 6푼 7리, 홈런 8개, OPS 7할 2푼 9리를 기록했다.[620] 10월 31일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고, 이후 메이저 리그 구단의 영입 제안이 없어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무소속 상태로 다음 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7. 0. 1. 2011년

2010년 12월 14일, 마쓰이는 2011 시즌을 위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425만달러의 1년 계약을 체결했다.[29] 2011년 4월 3일, 오클랜드–앨러미다 카운티 콜리시엄에서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NPB와 MLB 통산 2,500번째 안타를 기록했고,[30] 2011년 7월 20일, 코메리카 파크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통산 500번째 홈런을 쳤다.[31]
8. 탬파베이 레이스 시절
2012년 4월 30일, 마쓰이는 탬파베이 레이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32] 5월 15일에는 레이스의 트리플 A 산하 팀인 더럼 불스에 합류했다. 5월 28일, 레이스가 5월 29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경기에 마쓰이를 콜업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왔다.[33] 레이스에 합류하면서, 그가 선호하는 등번호 55번이 투수 맷 무어의 번호였기 때문에, 전 팀 동료 마이크 무시나를 기리기 위해 등번호 35번을 선택했다. 5월 29일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한 두 번째 타석의 첫 번째 공에서, 마쓰이는 2점 홈런을 쳤다.[34]
2012년에는 마쓰이에 대해 보도하기 위해 35명의 일본 언론인이 배정되었다.[35]
그러나 이후 두 달 동안 마쓰이의 타격은 인상적이지 못했고, 타율 .147을 기록했다. 그는 2012년 7월 25일에 레이스에서 지명 할당되었고,[36] 8월 1일에 방출되었다.[37] 레이스에서 활동하면서 마쓰이는 미국(MLB)과 일본(NPB)에서 10시즌 동안 최고의 프로 선수로 활동하는 데 성공했으며,[38] 이는 역사상 최초의 선수였다.
9. 은퇴
2012년 12월 27일, 마쓰이는 공식적으로 야구 은퇴를 발표했다.[39] 2013년 5월 5일 도쿄 돔에서 그의 은퇴식이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일본 정부는 그와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국민영예상을 수여했다.
2013년 7월 28일, 마쓰이는 뉴욕 양키스와 하루 계약을 맺고 팀의 일원으로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양키스 구단은 팀에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던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다.[40][41] 2015년, 마쓰이는 단장 브라이언 캐시먼의 특별 보좌역으로 양키스에 복귀했다.
2018년 1월 15일, 마쓰이는 91.3%의 득표율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2] 43세의 나이로 헌액된 그는 노모 히데오가 가지고 있던 기록을 깨고 최연소 헌액 선수가 되었다.[43]
마쓰이는 2020년 하계 올림픽의 성화 봉송 주자 중 한 명이었다.[44]
10. 은퇴 이후
2012년 12월 27일, 마쓰이는 공식적으로 야구 은퇴를 발표했다.[39] 2013년 5월 5일 도쿄 돔에서 열린 은퇴식에서 일본 정부는 그와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국민영예상을 수여했다.
2013년 7월 28일, 마쓰이는 뉴욕 양키스와 하루 계약을 맺고 팀의 일원으로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양키스 구단은 팀에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던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었다.[40][41] 2015년, 마쓰이는 단장 브라이언 캐시먼의 특별 보좌역으로 양키스에 복귀했다.
2018년 1월 15일, 마쓰이는 91.3%의 득표율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2] 43세의 나이로 헌액된 그는 노모 히데오가 가지고 있던 기록을 깨고 최연소 헌액 선수가 되었다.[43]
마쓰이는 2020년 하계 올림픽의 성화 봉송 주자 중 한 명이었다.[44]
11. 야구 선수로서의 특징
마쓰이 히데키는 프로 입단 당시 빠른 발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때 외야수로 전향하기도 했고, 주루에 정평이 나 있었다. 100m를 11초대에 주파한 기록도 있으며, 메이저 리그에서도 늦은 편은 아니었다.[639] 요미우리 시절에는 연간 9개의 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미우리가 다카하시 요시노부, 기요하라 가즈히로 등 거포들을 영입하며 장거리포 위주로 타선을 굳히면서,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는 줄어들었다. 잇따른 다리 부상으로 주루 플레이가 어려워지자, 일각에서는 주루와 수비에 대해 ‘3류’라는 비판도 있었다.[640]
마쓰이는 주루 중 부상을 막기 위해 발톱 손질 등 몸 관리에 신경을 썼다.[641]
11. 1. 타격
2004년일본어은 전년도 16개의 홈런에 그쳤던 것을 반성하고, 오프 시즌에 대폭적인 근육 증량에 힘썼다. 그 결과 마쓰이의 몸, 특히 상반신이 한층 커졌다.[131]그것이 효과를 발휘하여, 무게 중심을 낮추고 스탠스를 넓힌 것으로[132], 좌측 방향으로의 홈런이 증가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는 홈런과 타점 2관왕을 차지했다.[133]
도쿄 돔에서 열린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와의 일본 개막전에 앞서 개최된 양키스와 요미우리의 친선 경기에서 금의환향 홈런을 날렸다. 데블 레이스와의 개막 2연전에서는 "2번 타자・좌익수"로 풀 출장했으며, 2차전에서는 일본 팬들 앞에서 1호 홈런을 기록했다.
미국 본토 개막전 이후 61타석 동안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4월 24일 레드삭스전에서는, 관전하러 온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2호 홈런을 기록, NPB・MLB 통산 350호 홈런을 달성했다. 이후 전년보다 훨씬 빠른 페이스로 홈런을 양산하여, 6월 4일에는 전년보다 41경기 빠른 53경기 만에 10호 홈런에 도달했다. 5월 마지막 주에는 두 번째 주간 MVP도 수상했다.
6월 19일, 20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전에서는 메이저리그 이적 후 첫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전반기만으로 전년을 넘어선 17홈런에 도달했다. 올스타전에는 팬 투표 외야수 부문에서의 선출에는 실패했지만, 최종 투표에서 120만 표를 얻어 선출되어, 2년 연속 출전을 이루어냈다. 토리 감독으로부터 홈런 더비 참가를 제안받았지만, "제가 나가면 맥주 캔이 날아올 겁니다"라며 거절했다.[134]
올스타전 이후인 7월 15일에는 NPB・MLB 통산 1500경기 연속 출전에 달성했다. 8월 7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에서 MLB 이적 후 첫 2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15일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전년도 월드 시리즈 이후 처음으로 4번 타자로 나섰고, 시즌 후반에는 4번 타자로 자리 잡았다.
11. 2. 주루
프로에 입단할 당시에는 빠른 발을 가졌다는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한때 외야수로 전환된 적도 있어 원래 주루에는 정평이 나 있었다. 100m 주파 시간은 11초대를 기록한 적도 있어 메이저 리그 내에서도 그리 늦은 편은 아니었다.[639] 요미우리 시절 입단 3년차와 5년차에는 연간 9개의 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다카하시 요시노부, 기요하라 가즈히로, 에토 아키라와 같은 거포들을 잇달아 영입하면서 장거리포 위주로 타선을 굳혔고, 이후 마쓰이가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보여주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최근에는 잇따른 다리 부상으로 인해 만족스러운 주루 플레이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일각에서는 주루와 수비에 대해 ‘3류’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640]마쓰이는 주루 도중 부상을 막기 위해 평소 발톱 손질을 하는 등 몸 관리에 세심한 신경을 썼다.[641]
11. 3. 수비
마쓰이는 2006년 시즌 개막 전에 열린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출전을 포기하고 시즌에 대비했다.[143] 그러나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고질적인 왼쪽 무릎 통증이 재발하고, 지병인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등,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143] 본인도 "솔직히 좋지 않다"며 불안감을 드러냈지만,[143] 개막전에서 1홈런을 포함한 4안타를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4월 18일에는 데뷔 이후 500경기 연속 출장을 달성했다.11. 4. 연속 경기 출장
마쓰이 히데키는 감독의 신뢰와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 2006년 부상으로 기록이 중단될 때까지 일본에서 1250경기, 메이저 리그에서 518경기에 연속 출장했다. 이는 미·일 통산 1768경기에 해당하며, 메이저 리그 데뷔 이후 518경기 연속 출장은 일본인 선수 역대 1위 기록이다.[45]마쓰이는 "치밀한 컨디션 관리"를 통해 꾸준한 경기력을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642] 2006년 부상 이후 "처음으로 체중계를 샀다"라고 말하거나, 2007년 팀의 플레이오프 패배 당시 "컨디션을 정돈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젊었을 때는 그런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타고난 체력이 연속 경기 출장의 가장 큰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05년에는 "홈런보다는 오히려 연속 경기 출장"이라고 말할 정도로[642] 이 기록에 큰 의미를 두었으며, "먼 곳으로부터 일부러 와 주는 팬을 위해서"라는 생각으로[642] 휴식일에도 대타, 대주자, 수비 교체 등으로 짧은 시간이나마 출전하며 2006년 부상 당하기 전까지 기록을 이어갔다.
하지만 뉴욕 현지 언론에서는 "기록을 세우는 것보다 심신이 지쳤을 경우에는 차라리 쉬는 것이 팀에게 도움이 된다"라며 마쓰이의 연속 경기 출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642] 마쓰이 역시 2006년 부상 직후 "마음 속에 무서워하는 자신이 있었다"라고 밝히며[643] 기록 중단에 대한 부담감을 느꼈음을 고백했고, 동시에 자신을 지원해 준 토리 감독에게 감사를 표했다.[643]
2006년 5월 11일, 양키스 소속으로 519번째 경기였던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마쓰이는 슬라이딩 캐치를 시도하다 왼쪽 손목 골절 부상을 당했다.[46] 이 경기는 MLB 규정에 따라 마쓰이의 출장 기록에 포함되지 않았고,[46] 마쓰이는 다음 날 수술을 받았다.[47] 이후 9월 12일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전에 복귀하여 4타수 4안타 1볼넷 2득점을 기록했다.[47]
12. 인물
마쓰이는 2008년 3월 27일 기자 회견을 통해 뉴욕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신부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25세이며 "명망 있는 회사에서 평판이 좋은 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2006년 오프 시즌 이후 일본에서 만났다.[50] 마쓰이의 첫 아들은 은퇴 무렵 미국에서 태어났다. 2016년 11월 기준으로, 마쓰이는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코네티컷주에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51] 2017년 1월, 그의 아내는 부부의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52] 그는 2021년 현재도 뉴욕시에 거주하고 있다.
13.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지명 타자 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