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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타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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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시타 히로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1922년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다. 가오슝 상업학교와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1946년 세네터스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수위 타자 3회, 홈런왕 3회를 차지하며 1950년대 일본 프로 야구의 대표적인 타자로 활약했고, 1954년 MVP를 수상했다. 1952년에는 '오시타 소동'으로 니시테츠 라이온즈로 이적했으며, 니시테츠의 황금기를 이끌며 일본 시리즈 3연패에 기여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198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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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타 히로시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오시타 히로시, 1946년 세네터스 시절
오시타 히로시, 1946년 세네터스 시절
이름오시타 히로시
원어 이름Ōshita Hiroshi (大下 弘)
출생일1922년 12월 15일
사망일1979년 5월 23일 (향년 56세)
출생지효고현 고베시 산노미야 (현재 주오구 산노미야)
신장173cm
체중70kg
포지션외야수
투구좌투
타석좌타
선수 경력
아마추어가오슝 주립 가오슝 상업 학교 (현 가오슝 시립 가오슝 고급 상업 직업학교 (중국어))
메이지 대학
프로세네터스 (1946년)
도큐 플라이어스 (1947년 ~ 1951년)
니시테쓰 라이온스 (1952년 ~ 1959년)
첫 출장1946년 4월 27일
마지막 출장1959년 8월 26일, 1960년 3월 1일 (은퇴 경기)
통산 성적타율: 0.304
홈런: 301개
타점: 1226점
감독/코치 경력
한큐 브레이브스 (1961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8년)
다이요 웨일스 (1974년 ~ 1975년)
수상 및 기타
명예의 전당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80년, 경기자 표창)

2. 내력

오시타 히로시는 1922년 12월 15일 효고현 고베시 산노미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전쟁으로 사망하여, 가족은 타이완 가오슝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가오슝 상업학교(현 가오슝 시립 가오슝 고급 상업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와타나베 타이리쿠의 권유로 메이지 대학에 입학했다. 메이지 대학은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 속해 있었으며, 오시타는 야구팀 선수로 활약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복무하며 가미카제 조종사 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6년 일본 프로 야구 리그가 시작되자 세네터스에 입단하여 2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리그 신기록을 세웠다.[39] 이듬해 팀명이 도쿄 플라이어스로 바뀌었고, 오시타는 수위 타자 및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파란색 배트였고, 라이벌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빨간색 배트를 사용했다. 팬들은 그를 "파란 배트 오시타"(青バットの大下)라고 불렀다. 1950년에도 수위 타자를 기록했고, 1951년에는 수위 타자 및 홈런왕을 차지했다. 1951년 그의 타율 .383은 오랫동안 일본 기록으로 남아있었으며, 한 경기 7타수 7안타라는 일본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73]

1951년 시즌 후, 오시타 소동을 거쳐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되었고, 1954년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하며 타율 .321을 기록했다.[2] 라이온스는 일본 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건스에게 패했지만,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세 번(1956~1958년) 꺾고 일본 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으며, 오시타는 1957년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59년 선수 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1,547경기에서 1,667안타를 기록했다. 그는 세 번(1947년, 1950년, 1951년) 수위 타자였고, 세 번(1946년, 1947년, 1951년) 홈런왕이었다.

오시타의 등번호 3번은 라이온스에서 영구 결번되었지만, 1968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감독으로서 다시 그 번호를 착용했다. 1961년 한큐 브레이브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고, 이후 야구 스포츠 해설가가 되었다. 플라이어스 감독 시절에는 경기에서 사인을 사용하지 않고 선수들에게 통금 시간도 없었으나, 팀이 최하위를 기록하여 시즌 후 해고되었다. 1974년과 1975년에 다이요 웨일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다. 1980년, 사망 1년 전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오시타는 테츠코와 결혼하여 아들 마사루와 두 딸 히로코, 히로미를 두었다. 선수 은퇴 후 유소년 야구팀을 지도하다 1978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979년 5월 23일 사망했다.

2. 1. 프로 입단 전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나 1936년 타이완 가오슝시로 이주했다.[10] 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홀로 자랐다.[7] 1930년 고베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비진학반에 들어갔다. 1학년 때부터 급장 또는 부급장을 맡았고,[7] 4학년 때 체육 교사의 권유로 소프트볼을 시작했다. 글러브를 살 돈이 없어 친구 어머니가 만든 수제 글러브를 사용했다.[8] 1935년 주궁 고등 초등학교에 진학하여 하급생들과 소프트볼 팀을 만들어 1루수로 활동했다.[9]

1936년 어머니가 있는 대만 가오슝시로 이주하여 가오슝 제2초등학교 고등과에 전입했다.[10] 1937년 가오슝 상업학교(현 가오슝 시립 가오슝 고급 상업 직업학교)에 입학, 입학 시험 성적이 1등이어서 신입생 대표로 답사를 읽었다.[11] 가오슝 상업 야구부에 입부하여 투수를 맡았고,[12] 육상 경기, 유도, 수영 등 학교 대항 대회에도 출전했다.[13] 문예부 활동도 하며 이반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애독하고, 『오타니 형부 일대기』라는 단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14]

키가 크고 문무를 겸비하여 눈에 띄는 존재였으며, 유곽창기들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15] 3학년 때는 가오슝 여학교 여학생의 러브레터 사건으로 3개월 근신 처분을 받고 기숙사 생활을 했다.[16]

1939년 가오슝 상업 야구부는 주장 겸 에이스 겸 4번 타자인 오시타의 원맨팀이었다. 여름 고시엔 대회 대만 예선에서 자이 농림을 꺾었지만, 4회전에서 자이 중학에 패했다. 1940년과 1941년에도 자이 농림에 패하며 고시엔 진출은 좌절되었다.[17]

1941년 와타나베 다이리쿠의 권유로 메이지 대학 예과에 진학했다.[18] 태평양 전쟁 발발로 학생들에게 징병 유예 특권이 있었던 것도 대학 진학 이유 중 하나였다.[19] 대학 동기로는 오가와 젠지, 가토 마사카즈, 시미즈 키이치로, 스와 히로라, 테즈카 메이지 등이 있었다.[20]

1943년 전황 악화로 리그전이 중단되었고, 5월 23일 릿쿄 대학과의 연습 경기에 대타로 출전해 우익 2루타를 쳤다.[21] 당시 메이지 대학 주장은 시마 세이이치였고, 오시타와 시마의 타격 폼이 유사하다는 이야기가 있다.[23] 1943년 12월 학도 출진으로 히메지 제34부대에 배속되었다. 1945년 4월 야쿠모 전대를 거쳐 8월 육군 항공 사관 학교에서 소위로 종전을 맞이했다.[24]

같은 해 9월 메이지 대학에 복학하여 야구부 재건에 힘썼다. 시미즈의 친구 누누이 죠지의 집에 신세를 지며 메이지 대학 상학부에 복학했다.[25] 이때부터 타구를 멀리 날려 '''퐁 쨩'''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26]

2. 2. 프로 입단 후 (세네터스·도큐 시절)

전후 프로 야구가 재개되면서 신설된 세네터스에 입단한 오시타는 1945년 11월 동서 대항전에서 전후 최초로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했다.[30] 1946년에는 20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리그 전체 홈런의 약 10%에 해당했다.[39] 20번째 홈런을 제외한 모든 홈런이 우측 담장을 넘기는 극단적인 풀 히터였으며, 변화구에 약해 속구만 노려 쳐 삼진도 80개나 기록했다.[40] 20호 홈런이 가까워지자 야구장에서는 관중들과 보도진들이 큰 소리로 20호 홈런 달성을 기대했다.[6] 오시타의 등장은 패전에 힘들어하던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었고, 전대미문의 홈런 붐을 일으켰다. 당시 리그를 대표하던 타자 가와카미 데쓰하루 조차 홈런을 노리는 타격 폼으로 바꿀 정도였다.

1947년부터 오시타는 배트에 푸른색 래커를 칠한 '푸른 배트'를 사용하여 홈런을 연발, 빨간 배트를 사용하던 가와카미와 함께 큰 인기를 얻었다. 나미키 미치코의 〈사과의 노래〉 가사 중 '붉은 사과에 (중략) 푸른 하늘'에서 영감을 받아 푸른색 스프레이로 직접 염색했지만, 나무 색깔이 비쳐 보여 녹색에 가까웠고, 칠하는 방법이 좋지 않아 공에 페인트가 묻어 심판에게 항의를 받고 사용이 금지되었다.[44] 같은 해, 수위 타자와 홈런왕 2관왕을 차지했고,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1948년 6월 1일 주니치 드래곤스 전에서는 대나무 배트를 사용하여 5타수 3안타를 기록했지만, 나무가 아닌 배트로 타격하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기 때문에 발각되어 100엔의 벌금을 냈다.[56][57] 이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위반 배트 사용으로 실제 처분이 내려진 유일한 사례이다.

1949년 8월 18일 삿포로 시 마루야마 구장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최장거리 기록인 추정 비거리 170m의 홈런을 기록했다.[59] 같은 해 다이요 로빈스와의 경기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유일한 7타수 7안타를 기록했다.[60] 1951년에는 당시 최고 기록인 타율 .383으로 수위 타자와 홈런왕 2관왕을 달성했다.[73] 같은 해 리그 2위 타율은 가게야마 가즈오의 .31463으로, 타율 차이 .068543은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오시타의 어머니는 필로폰 중독을 앓고 있었으며, 구단에서 가불한 금액이 상당 부분 어머니의 약값으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단과의 금전 문제로 인해 1952년에는 주변을 끌어들인 퇴단 소동(일명 '오시타 소동')으로 시즌 시작 후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트레이드 이적했다. 이적 후 고라쿠엔 구장의 도큐 팬들로부터 야유를 받은 오시타는 1루에서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이에 도큐 팬들은 침묵했다. 또한 헤이와다이 사건 당시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관중들을 제지하려 했던 점을 인정받아 노구치 마사아키와 함께 연맹 표창을 수상했다. 오시타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후카미 야스히로는 2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해, 프로 야구 사상 유일하게 두 팀에 소속된 홈런왕이 되었다.

2. 3. 오시타 소동

1951년 시즌 후, 오시타는 니시테츠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이 과정에서 1951년 오프 시즌에 퍼시픽 리그 전체를 뒤흔든 이적 소동 (일명 "오시타 소동")이 발생했다.[2]

오시타는 고액 연봉자였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는 낭비가 심했고, 어머니에게서 고액의 "약값" (실제로는 히로뽕을 구하는 데 소비되었다)을 요구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오시타는 도큐 구단에 급여를 미리 빌리는 (대출) 행위를 반복했고, 그 금액은 168만 엔에 달했다.[78]

한편, 앞서 언급한 어머니의 입원비 20만 엔의 대출을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1950년에 사루마루에게 부탁받아 도큐에 입단시킨 메이지 대학 야구부 후배 중, 데라다 라이타, 야마자키 카츠미, 야마가타 토미토가 불과 1년 만에 오시타의 동의 없이 해고된 일도 있어, 오시타는 구단에 대한 불만을 깊게 품고 있었다. 게다가, 1951년 11월 중순 연봉 협상을 위해 구단 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사루마루로부터 감독 보좌 취임 의뢰와 시라키 요이치로 등의 해고 구상을 받았다. 팀의 공로자인 시라키의 해고 소식을 접한 오시타는 구단에 대한 불신이 커져 퇴단을 신청했지만, 사루마루로부터 "불만이 있으면 빚을 전부 갚고 나서 말해라"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격렬한 굴욕감을 느낀 오시타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68만 엔의 빚을 단 이틀 만에 조달했다. 현금을 들고 구단 사무소로 가서 다시 퇴단을 신청했지만, 이때 사루마루로부터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라는 발언이 나오자 격분하여, 오시타의 사루마루에 대한 반발심은 최고조에 달했고, 갈등은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79]

오시타가 도큐에 대해 퇴단을 표명한 사실은 곧바로 언론에 감지되었다. 12월 초, 기자의 취재를 받은 사루마루는 오시타가 퇴단을 요구한 사실을 인정하고, "급여 인상 대책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업가로서 이 시점에서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언급했다.[80] 이에 따라, 언론에서는 "오시타의 호드아웃 사건"이라고 보도했다.[81] 이를 계기로, 다른 구단의 스카우트들이 오시타 영입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오시타와 도큐의 계약이 1년 남아 있었고, 도큐도 정식으로 퇴단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구단의 활동은 수면 아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82]

오시타는 도큐에 잔류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 이적하려면 도큐와 협상해야 했다. 그러나 사루마루와 협상하는 것에 싫증을 느껴, 오시타는 빚을 갚는 데 지원을 받는 등 사적으로 신세를 지고 있던 국제자동차의 정비 주임이라는 직함을 가진 카토 마사시라는 인물에게 위임장을 맡기고 대리인으로 지정한 후, 도쿄를 떠났다. 12월 중순에는 스포츠 신문에 카토에 관한 기사가 게재되어,[83] 카토의 존재가 공론화되었다. 카토는 여러 차례 도큐 측에 회담을 신청했지만, 도큐는 대리인과 협상할 의사가 없어 이를 거절했다. 이 상황을 보고, 결국에는 세 리그 구단까지 오시타와의 직접 협상을 요구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18일,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퍼시픽 리그 회장 후쿠시마 신타로는 도쿄로 돌아와 있던 오시타와 회담했다. 오시타에게 도큐와 직접 대화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는 한편, 세 리그로의 이적은 인정하지 않음을 전달했다.[84]

도큐로서는, 이대로 계약이 성립되지 않을 경우 보류 선수로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급여의 일부는 지급해야 하고 경기에 출전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시타의 이적을 위한 대응을 시작했다.[90] 또한, 오시타와의 직접 대화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오시타와의 갈등이 계속되던 사루마루 대신 도큐 전철 본사의 전무 오카와 히로시를 협상 상대로 내세웠다. 먼저, 12월 28일 1차 오시타와 오카와의 회담이 비행회관에서 열렸지만, 도큐에 잔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오시타와, 퇴단을 요구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오카와의 주장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12월 30일 2차 회담이 세타가야구 신마치의 오카와 자택에서 열렸다. 여기서 오카와는, ① 이 문제는 오카와에게 일임한다, ② 1년 조건부로, 타 구단으로의 트레이드를 인정한다, ③ 사루마루 씨에게 사과한다, 라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지만, 오시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85]

한편, 12월 중순 오시타와 친분이 있던 도큐 구단 사무원 아카네야 히데타로의 소개로, 긴테쓰 펄스의 스카우트 오니시 토시로가 카토에게 접촉했다. 카토와 오니시의 밀담으로, 오시타-카토와 긴테쓰 측의 밀약이 성사되었다. 이에 따라, 오시타는 계약금 500만을, 카토는 중개료로 100만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86]

12월 28일, 오카와에 의한 오시타 방출 담화가 스포츠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에 대해, 신생 구단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오시타 영입에 나섰다. 후쿠오카에서 세이죠 자택으로 돌아와 있던 감독 미하라 오사무가 타바타에 있는 오시타 자택을 방문하여 직접 니시테츠로의 이적을 타진했지만, 오시타로부터 모호한 답변만을 얻었다.[87] 12월 30일 미하라는 카토의 자택을 방문하여, 새해에 오시타를 포함한 셋이 회담하는 데 합의한 후, 곧바로 자유가오카 자택으로 사루마루를 찾아가 오시타 영입 의사를 전달했다.[88] 새해 1월 5일 니시테츠 구단 대표 니시 마타지로가 상경하여, 미하라와 함께 도큐 전철 본사를 방문하여 오카와-사루마루와 회담했다. 도큐 측으로부터 트레이드를 조건으로 오시타 방출 의사가 제시되었다. 다음 날 6일 니시테츠 측의 니시와 미하라, 도큐 측의 총무과장 카와아이와 감독 이노가와 토시하루가 교환 요원 협상을 벌였다. 당초, 도큐 측은 니시테츠의 에이스 가와사키 토쿠지와 주력 타자 후카미 야스히로를 지명했다. 니시테츠 측이 간부 후보였던 가와사키를 거절하자, 어쩔 수 없이 도큐는 오가타 토시아키로 변경했고, 도큐의 오시타와 니시테츠의 오가타·후카미 + 현금 250만의 교환 트레이드가 결정되었다.[89]

또한, 니시테츠 외에도 마이니치 오리온스·한큐 브레이브스도 오시타 영입을 노리고 있었다. 마이니치는 이토 쇼시치·카타오카 히로쿠니를 교환 요원으로 제시했지만, 아라마키 준을 요구하는 도큐 측과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한큐는 토쿠라 카츠시로와의 교환을 타진했지만 도큐는 아베 하치로를 요구하는 등, 교환 요원이 합의점을 찾지 못해 이야기가 무산되었다.[90]

구단 간 합의가 성립됨에 따라, 미하라는 "대리인" 카토에게도 금전을 동원하여 끈질기게 협상을 벌였다. 어떻게든 오시타·카토와 도큐 수뇌부와 미하라의 회담이 설정되었고, 자리에서 사루마루가 카토에게 그동안의 오해를 사과하여, 드디어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듯했다.[91] 1월 19일 가구라자카요정에서 오시타와 카토, 니시테츠 대표 니시와 주장 가와사키 토쿠지가 협의하여 계약금·급여를 결정했지만, 계약서서명날인하는 단계에서 오시타는 어머니와 상의하고 싶다며 날인을 거부한 채, 다시 모습을 감췄다.[92]

1월 말, 카토가 긴키 닛폰 철도가 회합에 사용하고 있는 스미다강 근처의 요정에 드나들었다는 사실로,[92] 긴테츠와 카토·오시타 간의 뒷거래를 도큐 측이 파악했다. 도큐 구단 간부는 오카와에게 알리지 않고, 국제자동차 사장에게 카토의 행적을 직소하는 동시에, 뒷거래에 가담한 것을 이유로 아카네야를 해고한다. 이를 알게 된 오시타는 격분하여, 도큐가 결정한 구단으로는 절대 이적하지 않겠다고, 신문 지상에 분노의 메시지가 실렸다. 이에 따라, 2월 6일 오카와는 카토·아카네야와 토에이 본사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오카와는 아카네야에게 도큐로 돌아오도록 요청하는 등 회유하여, 카토와 아카네야의 분열에 성공했다. 이후, 아카네야는 오시타는 니시테츠로 가는 것이 낫다고 말하기 시작했다.[93]

이 무렵, 발신인 오시타 히로시 명의로 니시테츠 구단 사장 앞으로 "귀사와 계약한 적이 없다"는 취지의 괴문서가 도착했지만, 보존해 두었던 오시타의 서명과 필적이 달라 위조된 필체임이 밝혀졌다. 또한, 운수대신 사토 에이사쿠가 이 소동에 개입하여, 과거 철도국에 재직했던 도큐·오카와에게, 오시타를 긴테츠로 이적시키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94]

2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오시타는 카토를 피하기 시작하고, 도망자처럼 쉴 새 없이 거처를 바꾸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퍼시픽 리그 이사장 무라카미 미노루로부터 각 구단 대표에게, ① 오시타 문제는 백지화한다, ② 오시타 영입을 희망하는 구단은 다시 이사장에게 연락한다, 라는 두 가지 사항이 전달된다. 이에 대해, 니시테츠만이 오시타 영입 의사를 계속 표명했고, 긴테츠를 포함한 다른 구단으로부터의 제안은 없었다. 또한 이 무렵, 도큐·오카와는 오시타의 대리인 카토와의 대화로, 오시타는 긴테츠로의 이적을 희망하고 있다는 취지를, 니시테츠·니시에게 말했다.[92]

3월 초 퍼시픽 리그 이사장 무라카미와 퍼시픽 리그 회장 후쿠시마 등 뜻있는 사람들이 오시타에게 오카와와의 회담 자리를 마련하여,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도록 권고했다. 이에 따라, 니시테츠 우타카 이사오·나카지마 쿠니히코 두 스카우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본 결과, 오시타가 아키타에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오시타는, 아키타 출신인 아카네야의 친가 여관 (어떤 설에서는 아카네야의 연줄인 요리집)에 있었다고 한다.[90] 우타카·나카지마의 손에 의해 오시타는 도쿄로 연행되었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오시타는 오카와와의 회담에 얼굴을 내밀지 않고, 행방을 감춰 버렸다.[95]

3월 초 퍼시픽 리그 대표자 회의에서, 퍼시픽 리그 회장 후쿠시마로부터 각 구단 대표에게, ① 오시타는 니시테츠로 이적시키도록 노력한다, ② 긴테츠는 오시타 영입을 위해 막대한 금전을 사용했으므로 니시테츠로부터 긴테츠에게 오시타를 대신할 선수를 제공할 것을 희망한다, ③ 마이니치에게는 영입을 단념시킨다, 라는 세 가지 사항이 전달된다. 이후, 도큐 사장 오카와 히로시, 긴테츠 사장 사에키 이사무, 니시테츠 사장 기무라 시게키치의 톱 회담이 열려, ① 오시타는 원만하게 니시테츠로 이적, ② 니시테츠로부터 도큐로 오가타 토시아키·후카미 야스히로가 이적, ③ 니시테츠로부터 긴테츠로 키토 마사카즈가 이적, 이라는 방침을 결정했다.[92]

3월 말, 시즌이 시작되었음에도 오시타의 행방이 파악되지 않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4월 초 퍼시픽 리그 회장 후쿠시마는 니시테츠·니시에게, 설득에 따르지 않는 오시타를 프로 야구계에서 추방할 각오를 전달했다.[92] 4월 7일 도큐는 문제 해결의 길이 모두 막혔다고 하여 커미셔너 제소를 했다. 제소에 따라, 커미셔너에 의한 진상 규명을 위한 관계자 소환이 예상되었다. 그래서 우타카는, 소환을 앞두고 오시타와 카토가 마지막 협상을 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카토의 자택에 잠복하여, 카토를 방문한 오시타의 신병을 마침내 확보했다.[96]

4월 10일 오시타는 도큐 구단 사무소를 방문하여 오카와와 사루마루를 만나, 과거 행동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니시테츠로의 이적을 승낙했다. 이에 따라 도큐는 제소를 취하했고, 4월 11일이 되어서야 드디어 오시타의 니시테츠 이적이 실현되어,[97] 소동이 종결되었다.

이 소동에 대한 비난은, 과거 사생활에서의 스캔들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해졌고, 오시타의 정신 감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마저 나왔다고 한다.[98]

2. 4. 프로 입단 후 (니시테쓰 시절)

1945년 11월에 열린 동서 대항전에서 전후 최초로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을 기록했다.[30] 1946년에는 20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해 리그 전체 홈런(211개)의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39] 20홈런 중 마지막 홈런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우측 담장을 넘긴 극단적인 풀 히터였다. 속구만을 노리고 공격적으로 타석에 섰기 때문에 삼진도 80개나 기록했다.[40] 20호 홈런이 가까워질 때마다 야구장에서는 관중들과 보도진들이 큰 소리로 20호 홈런 달성을 기대했다.[6] 오시타의 등장은 패전에 시달리던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었고, 전대미문의 홈런 붐을 일으켰다. 당시 리그를 대표하던 타자 가와카미 데쓰하루 조차 홈런을 노리는 타격 폼으로 변경할 정도였다.

1947년 시즌부터는 배트에 푸른색 래커를 칠한 '푸른 배트'를 사용하여 홈런을 연발, 빨간 배트를 사용하던 가와카미와 함께 큰 붐을 일으켰다.[44] '푸른 배트'는 가와카미의 '붉은 배트'에 대항하는 의미로 나미키 미치코의 〈사과의 노래〉 가사 중 '붉은 사과에 (중략) 푸른 하늘'에서 착안, 오시타 본인이 직접 푸른색 스프레이로 칠한 것이었다. 하지만 배트의 나무 색깔이 비쳐 초록색에 가까웠고, 칠하는 방법이 좋지 않아 공에 페인트가 묻어 심판 측에서 불만을 제기, 사용이 금지되었다. 같은 해 수위 타자와 홈런왕 2관왕을 차지했고,[45]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

1948년 6월 1일 대 주니치 전에서는 대나무 배트를 사용하여 5타수 3안타의 맹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목제가 아닌 배트로 타격을 하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기 때문에 100엔의 벌금을 냈다.[56][57] 일본 프로 야구에서 위반 배트 사용 시 주의 또는 사용 금지 규정이 있지만, 실제로 처분이 내려진 것은 오시타의 사례가 유일하다.

1949년 8월 18일 삿포로 시 마루야마 구장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최장거리 기록인 추정 비거리 170m의 홈런을 기록했다.[59] 같은 해 다이요 로빈스와의 경기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유일한 7타수 7안타를 기록했다.[60] 1951년에는 당시 최고 기록인 타율 .383으로 수위 타자와 홈런왕 2관을 달성했다. 같은 해 리그 2위 타율은 가게야마 가즈오의 .31463으로, 타율 차이 .68543은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 기록이다.

오시타의 어머니는 필로폰 중독을 앓고 있었으며, 구단에서 가불한 금액이 상당 부분 어머니의 약값으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단과 금전 문제로 불화가 생겨 1952년에는 주변을 말려들게 한 퇴단 소동(이른바 '오시타 소동') 끝에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트레이드 이적했다. 이적 후 고라쿠엔 구장의 도큐 팬들로부터 조롱을 받은 오시타는 출루한 1루에서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이에 도큐 팬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헤이와다이 사건 당시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관중들을 제지하려 했던 점을 인정받아 노구치 마사아키와 함께 연맹 표창을 수상했다. 오시타의 트레이드 상대였던 후카미 야스히로는 2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을 차지, 프로 야구 사상 유일하게 두 팀에 재적한 홈런왕이 되었다.

1954년 래리 레인즈에 이어 리그 2위 타율인 .321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MVP를 수상했다. 니시테쓰는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일본 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다. 오시타는 4번 타자로 이나오 가즈히사, 나카니시 후토시, 도요다 야스미쓰와 함께 니시테쓰의 황금 시대를 구축했다. 1959년에 은퇴했다.

현역 시절 등번호는 세네타스 시절부터 줄곧 '''3'''번이었다. 이 번호는 니시테쓰에서 임시 결번이었지만, 오시타가 도에이 감독으로 취임한 후 주니치에서 이적한 히로노 이사오가 9년 만에 이 등번호를 부여받았다.

2. 5. 은퇴 후

은퇴 이후에는 NHK의 야구 해설자, 한큐 브레이브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지만 1년 만에 해임되었다.[2] 이듬해 기술 고문 직책으로 구단에 남아있었으나, 전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차 끓이기 등의 잡일을 도맡기도 했다. 이후 간사이 TV·후지 TV의 해설자를 지냈다.

1968년 도큐의 후신인 도에이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감독 시절 '사인 없음, 벌금 없음, 통금 시간 없음'의 '삼무주의'를 내걸었으나(오너였던 오카와 히로시의 제안이었다), 팀은 최하위에 머물며 시즌 도중에 해임되었고 이이지마 시게야 2군 감독이 감독 대행이 되었다.[3] 선수에게 "~씨"를 붙여 부르고, 기용하지 않은 선수에게 "면목 없다"고 사과하는 등 좋은 성품으로 선수들에게 존경받았으나, 팀 운영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주포인 하리모토 이사오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동조자로 지목되어 "하리 씨, 협력해 달라"고 자주 호소했으나, "협력하지 않는 것은 오해다"라는 애매한 답변만 돌아왔다. 급기야 하리모토 앞에서 와키자시를 꺼내 자신의 팔 동맥을 잘라 "내 기분이다! 알아줘!"라고 소란을 피우는 사건까지 일으켰다. 하리모토는 후에 자신의 저서에서 '오시타 씨는 순수하고 깨끗해 감독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다이요 웨일스의 타격 코치를 맡아 나가사키 게이이치, 야마시타 다이스케 등을 일류 선수로 성장시켰다.[3] 당시 오시타 부부는 도쿄도 세타가야구에 살았지만, 다이요 퇴단 후 야구가 번성한 지바현을 마음에 들어 해 지바 시 이나게 식물원의 마루베니 파미유 하이츠로 이사했다.

프로 야구계 은퇴 후에는 소년 야구 발전에 힘썼다. 자신의 단지 내 아이들을 모아 지바 파미유스의 감독으로 고시엔 출전 선수들(이와쿠라 고등학교 선수들)을 키워냈고, 소년 야구 팀 오시타 라이어스(현재의 지바 시 주오 구 오모리 라이어스), 후지 TV 여자 야구 팀 뉴 양키스, 요코하마 혼모쿠 리틀 리그의 감독 등을 역임했다.

1978년 6월, 도쿄 도 스미다 공원에서 소년 야구 지도를 하던 중 쓰러져 며칠간 요양했으나, 국립 지바 병원에서 뇌혈전 진단을 받았다. 좌반신 마비 후유증으로 이사와 온천 등에서 재활에 힘썼으나, 결국 수족이 불구가 되어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1979년 5월 23일 새벽, 뇌혈전으로 요양 중 사망했다. 향년 56세. 이듬해 1980년 고즈루 마코토, 치바 시게루와 함께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3] 사망 당시 사인은 '뇌혈전 후유증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보도되었으나, 이후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한 사실이 헨미 준과 구와하라 이에토시의 저서에서 밝혀졌다.

3. 인물

오시타 히로시는 1922년 12월 15일 효고현 고베시 산노미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전쟁에서 사망했고, 가족은 타이완 가오슝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 가오슝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타나베 타이리쿠의 권유로 야구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일본 사립 메이지 대학에 입학하여 메이지 대학 야구팀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복무했으며, 1945년 8월 15일 종전 전 가미카제 조종사 훈련을 받았다.[2]

1946년 일본 프로 야구 리그에 입단하여 센세이터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 2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이듬해(1947년) 센세이터스는 도쿄 플라이어스로 팀명을 변경했고, 오시타는 수위 타자 및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일본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팬들은 그를 "파란 배트 오시타"(青バットの大下, 아오 밧토노 오시타일본어)라고 불렀고, 그의 라이벌인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빨간 배트 가와카미"(赤バットの川上|, 아카 밧토노 가와카미일본어)로 알려졌다. 1950 시즌에도 수위 타자를 기록했으며, 1951 시즌에도 수위 타자 및 홈런왕을 차지했다. 1951년 그의 타율 .383은 오랫동안 일본 기록으로 남아있었으며, 한 경기에서 7타수 7안타라는 일본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2]

1951 시즌 이후 니시테츠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되었고, 1954년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하며 타율 .321을 기록했다. 1957년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59년 선수 생활을 은퇴했으며, 통산 1,547경기에서 1,667안타(경기당 1안타 이상)를 기록했다. 일본에서 세 번(1947년, 1950년, 1951년) 수위 타자였고, 세 번(1946년, 1947년, 1951년) 홈런왕이었다.[2]

1961년 한큐 브레이브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고, 이후 야구 스포츠 해설가가 되었다. 1974년과 1975년에 다이요 웨일스의 타격 코치를 맡았다. 1980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테츠코와 결혼하여 아들 마사루와 두 딸 히로코, 히로미를 두었다. 선수 생활 은퇴 후 수년간 유소년 야구팀을 지도했다. 1978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979년 5월 23일 사망했으며, 지바현 지바시 와카바 구역에 묻혔다.

4. 상세 정보

오시타 히로시는 프로 야구 선수 시절과 은퇴 이후 지도자 및 해설가로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다음은 주요 경력과 기록을 정리한 표이다.

구분내용
선수 경력 (통산 14년)세네터스·도큐·규에이·도큐 (1946년 ~ 1951년), 니시테쓰 라이온스 (1952년 ~ 1959년)
지도자 경력한큐 브레이브스 타격 코치 (1961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감독 (1968년), 다이요 웨일스 타격 코치 (1974년 ~ 1975년)
기타 경력야구 스포츠 해설가
주요 기록1경기 7안타 (1949년), 사이클링 히트 (1954년), 4경기 연속 홈런 (1949년), 통산 1000경기 출장 (1954년)
올스타전 출전6회 (1951년 ~ 1955년, 1957년)
등번호3 (1946년 ~ 1959년, 1968년), 1 (1961년), 30 (1974년 ~ 1975년)



다음은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상세 기록을 연도별로 정리한 표이다.

연도소속팀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번트희생플라이볼넷고의사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46세네터스/도큐1044483955911117920206741640--49--480--.281.366.522.888
194711748643559137231117233631290--47--450--.315.387.536.922
19481335394965013219416207722670--42--155--.266.325.417.742
1949130540476951452953829810227100--58--659--.305.387.6261.013
195010646040159136296132167218111--54--4438.339.423.539.961
1951도큐89371321561231552622663571--47--2184.383.465.7041.169
1952니시테쓰99403355611092531317959961--45--2315.307.388.504.892
1953114474443601362961221361865--24--1435.307.344.481.825
19541385755147616533622276881194352--2506.321.386.537.923
195513952446974141215122086373564470556.301.361.443.804
1956115382347319014241205234582151317.259.304.346.649
19571114303954412123241605524422673434.306.354.405.759
1958622121991944621571013101210195.221.265.286.552
19599027725420771003962713431422316.303.344.378.722
통산: 14년1547612155007631667293662012695861146863122535223260856.303.368.490.858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세네터스는 1947년에 도큐(도큐 플라이어스)로, 1948년에 큐에이(큐에이 플라이어스)로, 1949년에 도큐(도큐 플라이어스)로 구단명을 변경


오시타 히로시는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다음과 같은 타이틀과 상을 수상했다.

타이틀횟수연도
수위 타자31947년, 1950년, 1951년
홈런왕31946년, 1947년, 1951년
최다 안타11947년[47]
최다 출루21950년, 1951년



상 이름수상 횟수수상 연도
MVP1회1954년
베스트 나인8회1947년, 1949년~1954년, 1957년
일본 시리즈 MVP1회1957년
일본 시리즈 감투상1회1954년
일본 시리즈 수위 타자상1회1957년
올스타전 MVP1회1957년 1차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980년[3]


4. 1. 출신 학교

4. 2. 선수 경력

오시타 히로시는 1946년 일본 프로 야구 리그에 입단하여 세네터스·도큐 플라이어스·규에이 플라이어스·도큐 플라이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2] 그 해 2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6] 이듬해(1947년) 팀명을 도쿄 플라이어스로 변경했고, 오시타는 수위 타자 및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일본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47] 팬들은 그를 "푸른 배트 오시타"(ao batto no Ohshita)라고 불렀다.[44] 1950 시즌에도 수위 타자를 기록했으며,[67] 1951 시즌에도 수위 타자 및 홈런왕을 차지했다.[73] 1951년 그의 타율 .383은 오랫동안 일본 기록이었다.[74]

1951 시즌 이후 오시타는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되었고,[97] 1954년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하며 타율 .321을 기록했다.[2] 라이온스는 퍼시픽 리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스에게 패했다. 그러나 라이온스는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세 번(1956년부터 1958년까지) 격파했고, 오시타는 1957년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1959년 선수 생활을 은퇴했으며,[2] 1,547경기에서 1,667안타(경기당 1안타 이상)를 기록했다. 그는 일본에서 세 번(1947년, 1950년, 1951년) 수위 타자였고, 세 번(1946년, 1947년, 1951년) 홈런왕이었다.

연도소속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번트희생플라이볼넷고의사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46세네터스
도큐
큐에이
도큐
1044483955911117920206741640--49--480--.281.366.522.888
194711748643559137231117233631290--47--450--.315.387.536.922
19481335394965013219416207722670--42--155--.266.325.417.742
1949130540476951452953829810227100--58--659--.305.387.6261.013
195010646040159136296132167218111--54--4438.339.423.539.961
195189371321561231552622663571--47--2184.383.465.7041.169
1952니시테츠99403355611092531317959961--45--2315.307.388.504.892
1953114474443601362961221361865--24--1435.307.344.481.825
19541385755147616533622276881194352--2506.321.386.537.923
195513952446974141215122086373564470556.301.361.443.804
1956115382347319014241205234582151317.259.304.346.649
19571114303954412123241605524422673434.306.354.405.759
1958622121991944621571013101210195.221.265.286.552
19599027725420771003962713431422316.303.344.378.722
통산: 14년1547612155007631667293662012695861146863122535223260856.303.368.490.858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세네터스는 1947년에 도큐(도큐 플라이어스)로, 1948년에 큐에이(큐에이 플라이어스)로, 1949년에 도큐(도큐 플라이어스)로 구단명을 변경

4. 3. 지도자·기타 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타격 코치 (1961년)[3]
  • 도에이 플라이어스 감독 (1968년) - 경기에서 사인을 사용하지 않았고 선수들에게 통금 시간도 없었지만, 팀이 퍼시픽 리그에서 최하위를 기록하자 시즌 후 구단주에 의해 해고되었다.[3]
  • 다이요 웨일스 타격 코치 (1974년 ~ 1975년)[3]
  • 야구 스포츠 해설가

4. 4. 수상·타이틀 경력

오시타 히로시는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수많은 상과 타이틀을 획득했다. 1946년 센세이터스에 입단하여 20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새로운 기록을 세웠고, 이듬해 팀명을 도쿄 플라이어스로 변경한 후에는 수위 타자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하며 일본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2]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파란색 배트였으며, 라이벌인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빨간색 배트를 사용했다. 팬들은 그를 "파란 배트 오시타"라고 불렀고, 가와카미는 "빨간 배트 가와카미"로 알려졌다.

1950년과 1951년에도 수위 타자를 기록했으며, 특히 1951년에는 수위 타자홈런왕을 동시에 차지했다. 1951년 그의 타율 .383은 오랫동안 일본 기록이었으며, 한 경기 7타수 7안타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2]

1951년 시즌 이후 니시테츠 라이온스로 트레이드된 후, 1954년 퍼시픽 리그 MVP를 수상했다.[2] 1957년에는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2]

1959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1,547경기에서 1,667안타(경기당 1안타 이상)를 기록했다. 수위 타자 3회(1947년, 1950년, 1951년), 홈런왕 3회(1946년, 1947년, 1951년)를 기록했다.

은퇴 후 지도자와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198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4. 4. 1. 타이틀

타이틀횟수연도
수위 타자31947년, 1950년, 1951년
홈런왕31946년, 1947년, 1951년
최다 안타11947년
최다 출루21950년, 1951년


4. 4. 2. 수상

大下 弘|오시타 히로시일본어는 선수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여러 상을 받았다.

상 이름수상 횟수수상 연도
MVP1회1954년
베스트 나인8회1947년, 1949년~1954년, 1957년
일본 시리즈 MVP1회1957년
일본 시리즈 감투상1회1954년
일본 시리즈 수위 타자상1회1957년
올스타전 MVP1회1957년 1차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980년
수위 타자3회1947년, 1950년, 1951년
홈런왕3회1946년, 1947년, 1951년
최다 출루수2회1950년, 1951년
최다 안타1회1948년

[2][3]

4. 5. 개인 기록

연도소속팀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번트희생플라이볼넷고의사구사구삼진병살타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46세네터스/도큐1044483955911117920206741640--49--480--.281.366.522.888
194711748643559137231117233631290--47--450--.315.387.536.922
19481335394965013219416207722670--42--155--.266.325.417.742
1949130540476951452953829810227100--58--659--.305.387.6261.013
195010646040159136296132167218111--54--4438.339.423.539.961
1951도큐89371321561231552622663571--47--2184.383.465.7041.169
1952니시테츠99403355611092531317959961--45--2315.307.388.504.892
1953114474443601362961221361865--24--1435.307.344.481.825
19541385755147616533622276881194352--2506.321.386.537.923
195513952446974141215122086373564470556.301.361.443.804
1956115382347319014241205234582151317.259.304.346.649
19571114303954412123241605524422673434.306.354.405.759
1958622121991944621571013101210195.221.265.286.552
19599027725420771003962713431422316.303.344.378.722
통산: 14년1547612155007631667293662012695861146863122535223260856.303.368.490.858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세네터스는 1947년에 도큐(도큐 플라이어스)로, 1948년에 큐에이(큐에이 플라이어스)로, 1949년에 도큐(도큐 플라이어스)로 구단명을 변경

  • '''1경기 7안타'''(1949년 11월 19일) ※일본 기록
  • '''사이클링 히트''' : 1회(1954년 7월 1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전, 헤이와다이 구장) ※역대 10번째, 끝내기 홈런은 역대 최초[141]
  • '''올스타전 출전''' : 6회(1951년 ~ 1955년, 1957년)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54년 6월 2일 ※역대 27번째
  • '''4경기 연속 홈런''' : 1949년 8월 25일 ~ 28일(달성 당시 역대 2위 기록) 한때 단일 리그 시대의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었으나 1972년에 나카지마 하루야스의 6경기 연속 기록이 발견됨[142]


위의 결과에서 모든 ``, ``, ``, ``, `` 템플릿을 제거했다.

4. 6. 등번호

연도등번호
1946년 ~ 1959년, 1968년3
1961년1
1974년 ~ 1975년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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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Japanese MVP Winners https://web.archive.[...]
[3] 웹사이트 Japanese Baseball Hall of Fame https://web.archive.[...]
[4]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 1999 日外アソシエーツ
[5] 웹사이트 大下 弘 https://baseball-mus[...]
[6] 서적 プロ野球最強のベストナイン 全時代の一流選手の真価を問う PHP研究所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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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嶋清一 戦火に散った伝説の左腕 彩流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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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서적 増補新版 現代世相風俗史年表 昭和20年(1945)-平成20年(2008) 河出書房新社 2003-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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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서적 1995
[73] 문서 初代首位打者の[[中根之]]の記録(.376)を15年ぶりに更新。この記録は{{by|1970年}}にチームの後輩にあたる[[張本勲]]が.3834で更新した。 1970
[74] 문서 前年の[[別当薫]]を超え、[[チャーリー・マニエル|マニエル]]に抜かされるまで28年間保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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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웹사이트 政財界を巻き込む大騒動の末、西鉄入りした大下弘/プロ野球仰天伝説167 https://column.sp.ba[...] 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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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 野球コラム 自らの腕をナイフで切り覚悟を示した大下弘監督/プロ野球仰天伝説135 https://column-sp-ba[...]
[122]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 野球コラム 大下弘を心配する苅田久徳/週ベ回顧 https://column-sp-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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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웹사이트 最近のベイスターズの選手たちが羨ましい……「大洋ホエールズOB」としての長崎慶一さんに会いに行く(前編) https://bunshun-j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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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서적 風雲の軌跡
[132] 서적 さよなら平和台 夢を、思い出をありがとう 西日本新聞社
[133] 서적 西鉄ライオンズ―最強球団の内幕 葦書房
[134] 서적 豪打列伝 文春文庫
[135] 서적
[136] 뉴스 【中日】大島洋平、1試合6安打!セ・リーグタイ記録!球団史上初の快挙 なおドラゴンズは… https://hochi.news/a[...] 20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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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서적 일본 프로 야구 기록 대감 고단샤
[142] 서적 일본 프로 야구 기록 대감 고단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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