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195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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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평 전투는 1951년 5월, 한국 전쟁 중 경기도 가평군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에 맞서 미국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가 방어전을 펼친 전투이다.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한국군과 미군 제24 보병사단을 지원하다가 고립되었지만,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많은 사상자를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좌절되었으며, 미군은 부대 표창을 받았고, 대한민국 보훈처는 참전용사들에게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다. 가평 전투는 6.25 전쟁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국과 대한민국 양국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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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평군의 역사 - 가평 전투
가평 전투는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경기도 가평에서 영국군 제27여단이 중공군의 춘계 공세에 맞서 벌인 방어 전투로, 오스트레일리아군과 캐나다군이 각각 504고지와 677고지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며 유엔군의 방어선 유지에 기여하여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1951년 5월 -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선거
이시영 부통령 사임 후 1951년 국회 간접 선거로 실시된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 김성수 후보가 이갑성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 1951년 5월 - 십칠조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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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전투 (1951년 5월)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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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전투 (1951년 5월) | |
전쟁 정보 | |
분쟁 | 6.25 전쟁 |
날짜 | 1951년 5월 26일 ~ 5월 27일 |
장소 | 경기도 가평 |
결과 | 유엔군의 승리 |
병력 1 | 제213 야전포병대대 |
병력 2 | 제20군 |
사상자 1 | 0명 사상 |
사상자 2 | 1000~4000명 사상 |
2. 배경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초기 몇 달 동안 남한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며 빠르게 진격했으나, 유엔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시작했으나, 19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전황은 다시 바뀌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은 후퇴해야 했고, 이후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가평 전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전투 중 하나이다.
2. 1. 제213 야전포병대대의 배치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유타주 남부의 시더시티, 리치필드, 비버, 세인트 조지 출신으로 구성되었다.[1]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몰몬교) 교인으로 유타주 정착민의 후손들이었다.[1] 당초 독일로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훈련 도중 한국 전쟁으로 변경되었다.[2] 1951년 1월 26일 미국을 출발하여 2월 16일 한반도에 도착했다.[3]3. 전투 경과
1951년 5월 말, 경기도 가평군 지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의 대대적인 공세에 맞서 미국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한국군과 미군 제24 보병사단 제21 보병연대에 대한 화력지원 임무를 수행했다.[7]
제213 야전포병대대가 지원하던 한국군과 제21 보병연대가 이동하면서,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보병 엄호 없이 고립되었다. 이를 알게 된 4,000명의 중공군은 5월 26일 밤, 포위망을 탈출하려 시도했다. 대대장 프랭크 댈리(Frank Dalley)는 "오늘 취침은 없다"고 명령했고, 240명의 장병들은 밤새 포격과 백병전을 수행하며 진지를 지켜냈다.[7]
중국인민지원군 제180사단은 5월 27일 9시, 경기도 가평군 북면, 강원도 사북면, 화천군 사내면의 경계에 있는 매봉(鷹峰)에 이르렀지만, 식량과 탄약 부족, 통신 두절, 봉쇄 등의 어려움에 직면했다.[15]
가평군 북면 화악리에서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화천으로 탈출하려던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군에게 발견되었고, 큰 인명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3. 1. 중공군의 공세 시작
1951년 5월 말, 경기도 가평군 지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6] 당시 미국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가평에서 한국군과 미군 제24 보병사단 제21 보병연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7] 이들의 작전 지역은 가평군 북면 상홍적리(화악리 윗홍적마을)였다.[8]제213 야전포병대대가 지원하던 한국군은 아무런 통지 없이 후방으로 이동하였고,[2] 공격 중이던 제21 보병연대가 중공군을 포위하기 위해 전진 이동하면서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보병의 엄호 없이 고립되었다.[7]
5월 26일,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과 미국 육군 제24보병사단이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제령리(濟寧里)와 화악리(華岳里)로 이동한 것을 발견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는 가평 북동쪽부터 포천 북동쪽까지의 방어선에 큰 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중련합사령부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가평으로 병력을 보내 정찰하고 제20군 예하 제60군과 협력하여 전투할 것을 명령받았다.[14]
같은 날 16시 30분, 중국인민지원군 제60군 제180사단은 제60군에 병력의 위험을 보고하고 그날 저녁 북서쪽으로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18시, 제180사단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과 강원도 춘성군 서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몽덕산(蒙德山)과 가덕산(加德山)을 경유하여 다음날 9시, 경기도 가평군 북면, 강원도 사북면, 화천군 사내면의 경계에 있는 매봉(鷹峰)에 이르렀지만, 식량과 탄약 부족, 통신 두절, 봉쇄된 상태에 놓였다.[15]
보병부대에 포위된 것을 알게 된 4,000명의 중공군들은 5월 26일 밤에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해 제213 야전포병대대 본부 및 본부포대와 A포대의 240명이 지키는 진지로 진격해 왔다.[8][9] 이들은 협곡인 통골[10]과 드렁골[11] 양쪽을 통해서 공격해 왔다.[12]
3. 2. 제213 야전포병대대의 방어전
유타주 시더시티 출신 장병들[6]로 구성된 미국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1951년 5월 말, 가평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 제24 보병사단 제21 보병연대에 대한 화력지원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7] 당시 작전 지역은 가평군 북면 상홍적리(화악리 윗홍적마을)였다.[8]포대가 지원하던 한국군이 통지 없이 후방으로 이동하고,[2] 공격 중이던 제21 보병연대가 중국인민지원군을 포위하기 위해 전진 이동하면서,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보병 엄호 없이 고립되었다.[7] 이를 알게 된 4,000명의 중공군은 5월 26일 밤, 협곡인 통골[10]과 드렁골[11] 양쪽을 통해 포위망을 탈출하려 시도했다.[12]
대대장 프랭크 댈리(Frank Dalley)는 "오늘 취침은 없다"고 명령했다.[7] 240명의 장병들은 댈리 대대장과 A포대장 레이 콕스(Ray Cox) 대위를 중심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밤새 포격과 백병전을 수행했다.[7] 근접 전투를 위해 신관을 0.5초로 설정하여 적들의 머리 바로 위에 포탄이 터지도록 했다.[2] 그 결과,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진지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13]
5월 27일 새벽, 미군 제24보병사단 제21보병연대 의무중대는 후퇴하던 중공군 병사들과 마주쳐 수류탄과 카빈총으로 이들을 무찔렀다.[19]
오전 8시, A포대 지휘관 레이 콕스 대위는 18명의 병사와 포탑이 없는 105mm M7 자주포[13], 50구경 기관총으로 수색대를 편성하여 중공군을 수색했다.[7] 남은 중공군은 산등성이 너머로 퇴각하려 했지만, 미군은 포탄을 퍼부어 이들의 탈출로를 차단했다.[7] 참전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중공군은 총을 내려놓고 투항했다.[1]
3. 3. 중공군의 퇴각과 미군의 반격
1951년 5월 26일 16시 30분, 중국인민지원군 제60군 제180사단은 병력의 위험을 보고하고 그날 저녁 북서쪽으로 돌파하기로 결정했다.[15] 같은 날 18시, 제180사단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과 강원도 춘성군 서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몽덕산(蒙德山)과 가덕산(加德山)을 경유하여 5월 27일 9시, 경기도 가평군 북면,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화천군 사내면의 경계에 있는 매봉(鷹峰)에 이르렀지만, 식량과 탄약 부족, 통신 두절, 봉쇄 등의 어려움에 직면했다.[15]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사단 전체 병력은 1,000명도 채 남지 않았고, 험난한 산길에서 많은 군인이 길을 잃고 흩어졌으며, 돌파구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16]가평군 북면 화악리에서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화천으로 탈출하려던 중국인민지원군은 미군 항공 정찰에 발견되었고, 전투 끝에 300명이 넘는 병사들이 큰 인명피해를 입고 후퇴했다.[17][18] 5월 27일 새벽, 미군 제24보병사단 제21보병연대 의무중대는 작은 개울을 따라 후퇴하던 중공군 병사들과 마주쳐 수류탄과 카빈총으로 이들을 무찔렀다.[19]
같은 날 오전 8시, A포대 지휘관 레이 콕스 대위는 18명의 병사와 포탑이 없는 M7 자주포[13], 50구경 기관총으로 수색대를 편성하여 중공군을 수색했다.[7] 남은 중공군은 산등성이 너머로 퇴각하려 했지만, 미군이 포탄을 퍼부어 탈출로를 차단했다. 참전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 때 중공군은 총을 내려놓고 투항했다.[1]
4. 전투 결과 및 영향
1951년 4월의 가평 전투에서 자신들보다 5배나 많은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영연방 제27보병여단의 승리와 임진강에서 중공군에게 패했지만 3일 동안 중공군을 막아낸 영연방 제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 그리고 이 5월의 가평 전투에서 미국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의 승리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고, 휴전을 추진하는 분위기 속에 지루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는 전황의 변화가 이어졌다.
4. 1. 인명 피해 및 전과
이 전투에서 미군은 중공군 전사자 350명, 포로 831명의 전과를 올렸다.[13] 반면 미군의 피해는 부상자 몇 명만 발생했을 뿐, 전사자는 한 명도 없었다.[7] 미군은 노획한 중공군 총기류를 두 트럭 분량만큼 파괴했고, 중공군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전사자들을 매장했다.[7]인류학자이자 한국학자인 브리검영 대학교의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명예교수는 이 전투를 "전 세계에 남을 만한, 한쪽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one of the most lopsided battles in history)"라고 평가했다.[20]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이날의 승리를 '기적의 전투'라 부르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1]
이러한 공로로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같은 해 12월 해리 S. 트루먼 미국의 대통령에게 부대 표창을 받았다.[21][22] 대한민국 보훈처는 2011년 5월 26일 이 부대원들의 출신지인 유타주 시더시티에서 기념식을 열고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다.[26]
4. 2. 전략적 의의
가평 전투에서 미군은 중공군 전사자 350명, 포로 831명의 전과를 올렸고, 미군 측 사상자는 소수의 부상자뿐이었다.[13][7] 미군은 두 트럭 분량의 총기를 노획하여 파괴했고, 중공군 부상자를 치료하고 전사자를 매장했다.[7] 인류학자이자 한국학자인 브리검영 대학교의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명예교수는 이를 "전 세계에 남을 만한, 한쪽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one of the most lopsided battles in history)"라고 평가했다.[20]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이 전투를 '기적의 전투'라 부르며, 같은 해 12월 해리 S. 트루먼 미국의 대통령에게 부대 표창을 받았다.[1][21]4월 가평 전투에서 영연방 제27보병여단이 중공군을 막아낸 승리, 임진강에서 영연방 제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 그리고 5월 가평 전투에서 미국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의 승리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더 이상 없었고, 휴전을 추진하는 분위기 속에 지루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는 전황의 변화가 나타났다.
4. 3. 한미 관계에 미친 영향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유타 주 남부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원래 독일 배치 예정이었으나 훈련 도중 한국 전쟁에 파병되었다.[2]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몰몬교) 교인이자 유타 주 정착민의 후손들이었다.[1]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1951년 1월 26일 미국을 출발하여 2월 16일 한반도에 도착했다.[3]5. 기념 및 평가
가평 전투는 대한민국과 미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있으며, 그 역사적 중요성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8년 유타주 시더시티에 6.25 전쟁 참전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2011년에는 가평 전투 6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2021년 가평 전투 70주년 기념식에서는 가평군에서 지원한 가평석으로 제작된 새로운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연기되었다가 70주년 기념식과 함께 개최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가평군에 제213 야전포병대대 전적비가 세워졌으며, 2015년에는 북면으로 이전되어 관리되고 있다. 가평군은 미국 시더시티와 2009년 자매결연을 맺어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2015년 5월 프랭크 댈리 미 육군 준장을 5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가평 전투는 미군이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면서도, 아군 피해는 거의 없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로 평가받는다.[20]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이 전투를 '기적의 전투'로 부르며,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부대 표창을 받았다.[1][21][22]
4월의 가평 전투에서 영연방 제27보병여단의 승리, 임진강 전투에서 영연방 제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 그리고 5월 가평 전투에서 미국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의 승리는 중공군의 5차 공세를 좌절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전쟁은 지루한 고지 쟁탈전으로 전환되었고, 결국 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5. 1. 미국 내 기념 활동
2008년 9월, 6.25 전쟁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유타주 시더시티에 위치한 로터리 100주년 참전용사 공원(Rotary Centennial Veterans Park)에서 6.25 전쟁 참전 기념비 헌납식이 열렸다.[23] 이 기념비 가운데에는 미국의 참전용사에 대해 미국 국민들이 가진 "겸손한 감사와 존경"의 태도를 상징하는 청동 병사가 세워졌다.[23] 이 행사에 주샌프란시스코 대한민국 총영사관 부총영사 신 W. 성(Sung W. Shin)이 참석해서 “한국 전쟁은 때때로 ‘잊혀진 전쟁’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실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을 위한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 그리고 고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축사를 하였다.[23] 시더시티에 사는 재미한인 서니 리(Sunny Lee)는 대한민국 정부에 사업계획서를 보냈고 정부에게서 4만달러를 받아 참전용사비 건립을 도왔다.[24] 참전용사들의 방한을 지원하고 가평 전투 60주년 기념식에도 참가했던 서니 리는 유타주에서 21년간 거주하다 2020년 8월에 뇌출혈로 사망했다.[25]2011년 5월, 가평 전투 60주년을 맞아 미국 유타주 시더시티 남유타 주립대학 캠퍼스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다.[26] 이 행사에는 제213 야전포병대대 부대원 52명, 그 외 6.25 전쟁 참전용사 26명, 그들의 가족, 이정관 샌프란시스코 주재 한국 총영사, 김기호 국가보훈처 과장, 시더시티 주민 등이 참가했다.[26] 참전용사들은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미리 모여 먼저 사망한 동료 참전용사들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국가보훈처는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들에게 평화의 사도 메달을 수여했다.[26]
2021년 가평 전투 70주년 기념식이 다니엘 S. 로버츠(Daniel S. Roberts) 대령, 타일러 스미스(Tyler Smith) 준장, 조니 오(오정훈) 교수(Professor Johnny Oh), 에밀리오 수아조(Emilio Suazo) 소령 등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27] 마일 윌슨-에드워드(Maile Wilson-Edwards) 시더시티 시장은 "한국 전쟁 참전용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가평 기념비를 공식적으로 헌정할 수 있게 돼 영광스럽다."라고 말했다.[27] "We honor, respect and remember our heroes."라고 새겨진 새로운 기념비 제막식이 2020년 10월에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연기되어 70주년 기념식과 함께 개최되었다.[28] 이 기념비는 가평군청이 2020년에 지원한 가평 지역의 화강암인 가평석(加平石)으로 제작되었다.[29]
참전 군인들은 이제 90대의 고령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몇 명 남지 않았다.
5. 2. 대한민국 내 기념 활동
2010년 10월 8일,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영연방 한국전 참전 기념비 입구에 제213 야전포병대대 전적비가 세워졌다. 가로 1.4m, 세로 1.2m 크기의 펼친 책 형태의 전적비에는 당시의 전황이 한국어와 영어로 새겨져 있다.[33] 같은 날 오후에 열린 전적비 제막식에는 이진용 가평군수, 조 버지스 시더시티 시장, 다니엘 로버츠 참전용사회장 등이 참석했다.[34] 가평군 관계자는 “이 참전 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두 지역 간 교류를 더욱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35] 이 전적비는 2015년 9월에 가평군 북면 카이저길 45-23(이곡리 446-11) 미국 한국전 참전 기념비 옆으로 이전되었고 한국전쟁맹방국용사선양사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36] 포대 진지가 있던 북면 화악리(윗홍적) 옆 화악지암길 도로변에도 이를 기념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전과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12]2009년 9월 30일, 가평군과 시더시티는 자매결연을 맺고 문화, 경제, 교육적 유대를 함께 나누기로 합의했다.[30] 이진용 가평군수는 "반세기 전 맺어진 우정이 이제 동반자 관계로 이어지게 됐다. 결연을 계기로 양 도시가 상승효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협력을 강화해 나가겠다"라고 말했고, 제럴드 셰랫 시더시티 시장은 "가평과 첫 번째로 자매결연을 맺게 된 것을 시민과 함께 기뻐한다. 상호 도움이 되는 관계로 유지, 발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31] 두 도시는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협력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32]
국가보훈처는 2015년 5월에 프랭크 댈리 미 육군 준장을 5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하였다.[37] 가평의 미국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서 2021년 5월 26일 가평 전투 70주년 기념식이,[38] 2022년 5월 26일에는 가평 전투 71주년 기념식이 개최되었다.[39]
5. 3. 역사적 평가
이 전투에서 미군은 중공군 전사자 350명, 포로 831명의 전과를 올렸지만, 미군 전사자는 한 명도 없이 소수의 부상자만 발생했다.[13][7] 미군은 두 트럭 분량의 총기류를 노획해 파괴했고, 중공군 부상자들을 보살피며 전사자들을 매장했다.[7] 브리검영 대학교의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명예교수는 이러한 전과에 대해 "전 세계에 남을 만한, 한쪽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전투(one of the most lopsided battles in history)"라고 평가했다.[20]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이날의 승전을 '기적의 전투'로 부르며 자부심을 가진다.[1] 이 전과로 제213 야전포병대대는 같은 해 12월 해리 S. 트루먼 미국의 대통령에게 부대 표창을 받았다.[21][22] 대한민국 보훈처는 2011년 5월 26일 이 장병들의 출신지인 유타주 시더시티에서 개최된 기념식에서 자유의 메달을 전달하였다.[26]4월의 가평 전투에서 자신들보다 5배나 많은 중공군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영연방 제27보병여단의 승리와 임진강 전투에서 중공군으로 인해 패했지만 3일 동안 중공군을 막아낸 영연방 제29여단의 글로스터 고지 전투, 그리고 이 5월의 가평 전투에서의 미국 유타주 방위군 제213 야전포병대대의 승리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후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고, 휴전을 추진하는 분위기로 지루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는 전황의 변화가 이어졌다.
6. 관련 작품
Kapyong영어 전투와 관련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40]
6. 1. 대한민국 작품
가평전투, 미국 씨다Cedar시 참전용사 600명의 기적은 KBS에서 2009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이다.6. 2. 미국 작품
2002년 다큐멘터리 《[https://www.youtube.com/watch?v=q3Skz3JBTqA&t=1425s Miracle at KapYong: The Story of the 213th]》는 UBEE 최우수 다큐멘터리상(2002년), 커뮤니케이터 어워드 오브 디스팅션(2003년), 비디오그래퍼 어워드 오브 엑설런스(2003년), 텔리 어워드 파이널리스트(2003년), 플래티넘 오로라 어워드(2005년)를 수상했다.[40]참조
[1]
간행물
Battle At Kapyong
https://issuu.com/am[...]
Valor
2015-11-04
[2]
뉴스
미군 600명이 중공군 4000명 물리친 기적의 가평 전투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1-06-03
[3]
서적
Fire Mission!: The Story of the 213th Field Artillery Battalion in Korea 1951-1954
1stBooksLibrary
[4]
서적
China's battle for Korea
Indiana University Press
[5]
서적
China's battle for Korea
Indiana University Press
[6]
서적
Freedom Is for Those Willing to Defend It: Stories of Men in War
Trafford Publishing
[7]
서적
Freedom Is for Those Willing to Defend It: Stories of Men in War
Trafford Publishing
[8]
서적
Korean Presidential Unit Citation
[9]
서적
OUTSTANDING PERFORMANCE OF THE 213TH ARMORED FIELD ARTILLERY BATTALION
[10]
웹사이트
마을명 : 통골
http://www.gpc.or.kr[...]
가평문화원
2015-06-13
[11]
웹사이트
마을명 : 드렁골
http://www.gpc.or.kr[...]
가평문화원
2015-06-13
[12]
문서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리 217-1에 있는 '미군 제213야전 포병대대 가평전투 안내' 표지판 내용
https://map.naver.co[...]
[13]
서적
Fire Mission!: The Story of the 213th Field Artillery Battalion in Korea 1951-1954
1stBooksLibrary
[14]
서적
抗美援朝战争史 第2卷
軍事科學出版社
[1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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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기적의 전투' 승리함성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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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6.25 전쟁영웅에 프랭크 댈리 美 육군 준장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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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한국전쟁참전 및 가평전투 70주년 기념 행사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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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이곡리서 미군 한국전쟁참전·가평전투 71주년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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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TV DOCUMENT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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