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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현등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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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평 현등사 동종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중국 범종 양식을 모방하면서 한국 종의 문양 요소를 부분적으로 반영한 조선 중기 한·중 혼합 양식의 특징을 보인다. 본래 고려 때 창건된 봉선사에 있었으나, 한국 전쟁 중 현등사로 옮겨졌다. 제작 연대가 명확하고, 조선 중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17세기 한국 종의 부흥기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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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 현등사 동종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등사 동종
현등사 동종
이름가평 현등사 동종
한자 표기加平 懸燈寺 銅鍾
지정 번호보물 제1793호
지정일2012년 12월 27일
시대조선시대 1619년(광해군 11)
소유자현등사
관리자현등사
주소경기도 가평군 현등사길 34 (조종면, 현등사)
문화재청 ID12,17930000,31
추가 정보
유형 문화재 지정 번호 (과거)168 (경기도)
유형 문화재 지정일 (과거)1998년 4월 13일

2. 역사

범종은 본래 경기도 남양주시봉선사에 있었던 것으로, 1619년에 제작되었다.[2] 봉선사조선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중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이후 광해군 대에 중수되면서 이 종이 만들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봉선사가 위험해지자 말사인 현등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2]

2. 1. 제작 배경

범종은 본래 고려 시대에 창건된 봉선사에 있었다. 봉선사조선 제7대 왕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469년(예종 1년)에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크게 중창된 사찰이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봉선사의 법당이 불타 없어지자, 1613년(광해군 5년)에 절을 다시 지었고 1619년에 이 범종을 만들어 봉안하게 되었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봉선사가 위험해지자, 봉선사의 말사(末寺)인 현등사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2]

2. 2. 현등사 이전

범종은 본래 고려 때 창건된 봉선사에 있었다. 봉선사는 조선 제7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1469년(예종 1)에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중창된 사찰이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봉선사의 법당이 소실되자, 1613년(광해군 5)에 다시 중수하고 1619년에 이 범종을 주성하여 소장하여 왔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봉선사가 위험해지자 말사인 현등사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2]

3. 특징

이 동종은 원래 남양주 봉선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현등사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3] 1619년(광해군 11년)에 제작되었으며[3],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반에 사찰에서 만들어진 첫 범종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4]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 연복사 종에서 비롯된 중국 종 양식을 따르면서도, 남양주 봉선사 동종, 흥천사명 동종, 해인사 동종 등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의 전통을 계승한 특징을 보인다.[3] 이는 원래 종이 봉안되었던 봉선사가 왕실의 원찰(願刹)이었던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3] 이처럼 중국 양식과 한국적 요소가 조화롭게 혼합된 조선 중기 범종 양식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4]

종의 몸체에는 제작 배경과 참여자 등을 기록한 주종기(鑄鐘記)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제작자인 승려 천보(天寶)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장인임을 알 수 있어 당시 장인 계보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3] 주조 상태가 양호하고 생동감 있는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 조선 후기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3]

3. 1. 외형

이 동종은 높이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鍾身)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성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3]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아 만든 용뉴는 안정감을 주며, 두 발을 힘차게 내디뎌 천판(天板)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 종의 입구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폭이 넓어지는 종의 형태 또한 아름답다.[3]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 연복사 종에서 비롯된 중국종 양식을 따르고 있다.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 입구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새겼다. 작은 마름모꼴 연곽(蓮廓) 안에는 구슬 모양의 연꽃봉오리가 표현되었고, 천판에 새겨진 내림 연꽃은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寶相華紋)처럼 말려 들어간 형태를 보이며 그 위로는 구슬무늬가 표현되었다. 종복(鍾腹)에는 크고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가 자리 잡고 있으며, 하대(下帶)에는 물거품이 일렁이는 듯한 파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장엄적인 요소들은 1469년에 제작된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호),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호), 그리고 1491년에 제작된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호) 등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종이 소장되어 있던 봉선사가 왕실의 원찰(願刹)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 양식 범종의 여러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3]

종의 배 부분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쓴 주종기(鑄鐘記)가 돋을새김 되어 있다.[3] 이 종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반에 사찰에서 제작된 첫 범종으로서, 외형적으로 중국 범종 양식을 모방하면서도 부분적으로 한국 종의 문양 요소가 반영된 조선 중기 한·중 혼합 양식의 모범적인 조형성을 보여주는 특징을 지닌다.[4] 주조 상태가 양호하며,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무늬들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범종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3]

3. 2. 양식

이 동종은 높이 73.5cm의 아담한 크기로, 종신(鍾身)을 여러 개의 구획선으로 나누고 그 안에 연잎무늬, 당초무늬, 파도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넣어 장식성을 강조한 범종이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맞대어 몸을 꼬아 만든 용뉴는 안정감을 주며, 두 발을 힘차게 내디뎌 천판(天板, 종의 가장 윗부분)을 들어 올리는 모습에서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둥근 곡면을 이루는 천판에서부터 종의 입구로 내려오면서 조금씩 그 폭을 넓힌 종의 형태도 아름답다.[3]

이 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 종에서 비롯된 중국종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시문하였다.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蓮廓, 종 몸체 위쪽에 네모나게 둘러싼 부분) 안에 새겨진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 천판의 내림 연꽃이 중앙을 향해 보상화문처럼 말려든 형태와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종복(鍾腹, 종의 배 부분)에 크게 자리 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 그리고 하대(下帶, 종 아랫부분의 띠)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의 장엄 요소는 조선 전기의 왕실 발원 범종 양식을 따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1469년에 제작된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호),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호), 그리고 1491년에 제작된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호) 등이 있다. 이 종이 원래 봉안되었던 봉선사 또한 왕실의 원찰(願刹, 왕실의 복을 빌던 절)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 양식 범종의 여러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3]

종의 배 부분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쓴 주종기(鑄鍾記, 종을 만든 기록)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 주종기는 1619년(광해군 11년)에 승려 천보(天寶)가 직접 글을 짓고 새긴 것으로, 종을 만들게 된 이유,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 발원하는 내용,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이 질서 있게 적혀 있다. 주종장(鑄鍾匠, 종을 만드는 장인)은 일반적으로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추정된다. 천보는 조선 후기 승려 주종장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승려 장인의 계보나 범종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3]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 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된 범종으로, 주조 상태가 양호하고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무늬들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범종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러 측면에서 조선 후기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3] 또한 현등사 동종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반에 사찰에서 제작된 첫 범종으로서, 종의 외형은 중국 범종 양식을 따르면서도 부분적으로 한국 종의 문양 요소가 반영된 조선 중기 한·중 혼합 양식의 모범적인 조형성을 보여주는 특징을 지닌다.[4]

3. 3. 주종기

종의 배 부분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주종기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주종기는 1619년(광해군 11년)에 승려 천보(天寶)가 직접 글을 짓고 새긴 것으로, 종을 만들게 된 이유,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종의 무게, 발원 내용,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다. 종을 만든 주종장(鑄鍾匠) 역시 주종기를 작성한 천보로 추정된다. 천보는 조선 후기 승려 주종장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승려 장인의 계보나 범종 양식의 변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3]

4. 의의와 평가

이 동종은 고려 후기 연복사 종에서 비롯된 중국종 양식을 따르면서도, 조선 전기의 왕실 발원 범종 양식을 계승한 중요한 예시이다. 종의 중심부를 세 개의 융기선으로 구획하고 천판에서 종의 입 사이에 다양한 무늬를 새겼는데, 작은 마름모꼴의 연곽 안에 표현된 구슬 모양의 연꽃봉우리, 천판의 내림연꽃이 중앙을 향해 말려든 형태와 그 위로 표현된 구슬무늬, 종복(鍾腹)에 크게 자리 잡은 역동적인 연화당초무늬, 그리고 하대에 표현된 물거품이 일렁이는 파도무늬 등은 1469년 작 남양주 봉선사 동종(보물 제397호)이나 흥천사명 동종(보물 제1460호), 그리고 1491년 작 합천 해인사 동종(보물 제1253호) 등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의 전통을 잘 보여준다. 원래 이 종을 소장했던 봉선사 또한 왕실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이전에 만들어진 궁중 양식 범종의 여러 가지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이해된다.

종의 배 부분에는 반듯한 해서체로 주종기(鑄鐘記)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주종기는 1619년(광해군 11)에 천보(天寶)가 글을 짓고 새긴 것으로, 종을 만들게 된 연유, 종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 발원하는 내용, 참여한 사람 등을 질서 있게 기록하였다. 주종장(鑄鍾匠)으로 추정되는 천보는 조선 후기 승려 주종장 가운데 유일하게 임진왜란 이전부터 활동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승장(僧匠) 계보나 범종의 양식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인물이다.[3]

이 종은 1619년에 조선 전기 궁중 양식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제작되었으며, 주조 상태도 양호하고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는 무늬들을 조화롭게 배열하여 범종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명확한 조성 연대는 고견사동종(1630년) 및 보광사종(1634년)과 매우 유사한 형상을 보여줌으로써 조선 중기 범종의 조형성과 주조 기법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편년 자료를 제공해주는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이 종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대대적인 사찰 불사(佛事)와 더불어 17세기 한국 종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 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3][5]

5. 사진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 2012-12-27
[2] 웹인용 가평 현등사 동종(加平懸燈寺銅鍾) http://encykorea.aks[...] 2021-08-11
[3] 웹인용 가평 현등사 동종 (加平 懸燈寺 銅鍾) http://www.heritage.[...] 2021-08-11
[4] 웹인용 가평 현등사 동종 http://gapyeong.gran[...] 2018-08-11
[5] 웹인용 가평 현등사 동종 http://gapyeong.gran[...]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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