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고견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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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창 고견사 동종은 1630년(인조 8년)에 제작된 종이다. 고견사 동종은 17세기 전반 승장의 선도적 역할을 한 설봉이 제작했으며, 사찰 연혁, 제작 기간, 사용 물품 등을 자세히 기록한 명문(銘文)을 가지고 있다. 불좌상과 불탑 등 독특한 문양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당시 불교 문화와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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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고견사 동종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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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거창 고견사 동종 |
원어 | 居昌 古見寺 銅鍾 |
지정 종류 | 보물 |
지정 번호 | 1700 |
지정일 | 2010년 12월 21일 |
소재지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의상봉길 1049, 고견사 (수월리) |
소유자 | 고견사 |
문화재자료 지정 (해제) 정보 | |
지정 종류 (과거) | 문화재자료 |
지정 번호 (과거) | 170 |
지정일 (과거) | 1988년 12월 23일 |
해제일 (과거) | 2010년 12월 21일 |
2. 역사
고견사 대웅전에 있는 이 동종은 1630년(인조 8년)에 '견암사 동종'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1] 동종 명문에 적힌 견암사는 지금의 고견사와 같은 절이다.[1] 고견사는 667년(문무왕 7년)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처음 세웠으나, 1271년(원종 2년) 절이 거제현에 속하게 되면서 견암사로 이름이 바뀌었다.[1] 이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절을 운현(雲賢), 김복(金福), 종해(宗海) 스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고견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1]
2. 1. 제작 장인
고견사 동종의 명문(銘文)은 사찰의 연혁, 동종 제작에 소요된 실제 기간, 제작에 들어간 물품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문(記文)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1] 이 명문을 통해 동종의 제작에는 동대장(都大匠) 미지산 설봉 사문 천보(彌智山 雪峯 沙門 天宝)를 비롯하여 치죽(緇竹), 득남(得男), 득일(得一) 등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1]특히 주조를 총괄한 설봉(雪峯)은 17세기 전반 승장(僧匠)의 선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로 평가되며, 이 동종은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1]
3. 형태 및 특징
전체 높이는 97.2cm, 입지름은 59.7cm로, 1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동종 가운데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1] 전체적으로 옅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둥글고 높게 솟은 천판(天板) 위에는 음통(音筒)이 없는 쌍룡(雙龍) 형태의 종뉴(鍾鈕)가 자리하고 있다. 특이하게 용의 이마에는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1]
종신(鍾身)은 마치 포탄을 엎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는 천판에서 시작된 바깥 선이 종신 중간 부분까지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갑자기 직선 형태로 변하여 시각적으로 종구(鍾口) 부분이 좁아 보이기 때문이다. 종신 표면은 세 줄의 횡선으로 상·하단으로 구분된다.[1]
3. 1. 문양
종신(鍾身)은 3줄의 횡선을 이용하여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되며, 다양한 도안으로 장식되어 있다.[1]상단에는 먼저 천판 아래에 넓은 연판문(蓮瓣文)이 얕게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사다리꼴 형태의 연곽(蓮廓) 4개가 배치되어 있다. 연곽을 두른 띠(연곽대, 蓮廓帶)에는 당초문(唐草文)이 사용되었으며, 연곽 안에는 활짝 핀 연꽃 봉오리(연뢰, 蓮蕾) 9개가 표현되어 있다. 연곽과 연곽 사이의 공간에는 불좌상(佛坐像), 불탑(佛塔), 범자(梵字文), 위패(位牌) 등이 네 면에 동일하게 배치되었다. 그 아래에는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으로 이루어진 띠 장식이 있다. 특히 상단에서 주목할 부분은 연곽 사이에 새겨진 불좌상과 불탑이다. 이들은 기존의 양식과 달라 조선 시대 동종에서는 유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표현이다. 불좌상은 사각형과 연꽃으로 구성된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수인(手印)은 구품인을 취하고 있다. 불탑은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갖춘 3층 형태가 연꽃 위에 표현되어 있다.[1]
하단은 상단에 비해 구성이 단순하다. 제작 연대를 기록한 주성기(鑄成記)를 기준으로, 위쪽에는 연화당초문이 있고 아래쪽에는 물결(수파, 水波)과 구름 속 용(운룡문, 雲龍文)이 장식되어 있다. 특히 주성기 아래의 수파·운룡문은 용의 모습을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1]
4. 명문
고견사 동종의 명문(銘文)은 조선 후기 일반적인 동종과 다르게 사찰의 연혁, 동종 제작에 소요된 실제 기간, 제작에 들어간 물품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문(記文)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다.[1] 명문을 통해 동종의 제작 장인은 동대장미지산설봉사문천보(圖大匠彌智山雪峯沙門天宝)를 비롯하여 치죽(緇竹), 득남(得男), 득일(得一) 등이 참여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1]
5. 가치 및 의의
이 범종은 조선 후기 범종 중에서도 17세기 전반 승장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던 설봉(雪峯)이 만든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1] 보관 상태가 양호하며, 세부 문양 등의 주조 기술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예술적 가치가 높다.[1]
특히 연곽 사이에 부조된 불좌상(佛坐像)과 불탑(佛塔)은 기존의 양식과 차별화된 독특한 형태로, 조선 시대 동종 연구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표현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1] 또한, 명문(銘文)은 조선 후기 일반적인 동종과 달리 사찰의 연혁, 동종 제작에 소요된 실제 기간, 제작 물품 등을 자세히 기록한 기문(記文) 형태를 띠고 있어, 당시 불교 문화와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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