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순황귀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각순황귀비는 청나라 광서제의 후궁으로, 1889년 13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진빈, 진비로 봉해졌다. 광서제를 보좌하며 개혁을 지지했으나, 서태후의 반감을 사 가택 연금, 강등을 겪었다. 1900년 의화단의 난 당시 서태후의 명령으로 자금성 우물에서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후 각순황귀비의 시호를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타타라 할라 - 단강황귀비
단강황귀비는 청나라 광서제의 후궁으로, 선통제 시대에 존경받았으며, 신해혁명 이후 사망하여 숭릉에 안치되었고, 온정황귀비라는 시호를 받았다. - 만주 양홍기인 - 면흔
가경제의 아들인 면흔은 1등 숭선친왕에 봉해졌으나 황위 계승에는 실패했고, 관료 생활 중 홍수 피해 구호 활동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자금성 인쇄소 관리 부실로 징계를 받았으며, 사망 후 숭선휘친왕으로 추봉되어 그의 아들이 작위를 계승했고, 대중문화 작품에도 등장한다. - 만주 양홍기인 - 영장 (청나라)
건륭제의 셋째 아들 영장은 폐병으로 승마에 능숙하지 못했고 효현순황후 장례 감독 중 부적절한 행동으로 황위 계승에서 제외된 후 순군왕에 추증되었으나, 아들이 없어 영성의 아들 면의가 후사를 이었다. - 서태후 - 광서제
광서제는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1875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서태후의 섭정 아래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된 채 사망했다. - 서태후 - 함풍제
함풍제는 도광제의 아들이자 청나라의 제9대 황제로, 재위 기간 동안 태평천국의 난과 제2차 아편 전쟁 등의 혼란을 겪으며 러시아와 영국에 영토를 할양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고, 붕어 후에는 서태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각순황귀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진비 (珍妃) |
다른 이름 | 각순황귀비 (恪順皇貴妃) |
로마자 표기 | Zhēnfēi (진페이) |
로마자 표기 (다른 이름) | Kèshùn Huángguìfēi (커슌 황구이페이) |
기본 정보 | |
출생 이름 | 타타라 씨 (他他拉氏) |
출생 | 1876년 2월 27일 (광서 2년 2월 3일) |
사망 | 1900년 8월 15일 (광서 26년 7월 21일) |
사망 장소 | 자금성 |
매장 장소 | 청 서릉 숭릉 |
가문 | 타타라 씨 (출생) |
가문 (혼인) | 아이신 교로 |
존호 | 각순황귀비 (恪順皇貴妃) |
통치 정보 | |
배우자 | 광서제 (1889년 결혼, 1900년 사망) |
이미지 | |
![]() |
2. 생애
그녀는 13세 때인 1889년 광서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광서제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2] 언니와 함께 선수녀에 참가하여 입선하였고, 빈(嬪)의 작위가 주어져 진빈이 되었다. 5년 후에는 비(妃)로 승진했다. 미인이면서 밝고 외향적인 성격에 서화에 능하고 바둑도 잘 두는 등 다재다능하여 광서제가 가장 총애하였다.
처음에는 서태후가 진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최고 장인들을 고용하여 그림과 악기 연주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진비는 광서제에게 "강하고 독립적"일 것을 촉구했으며, 정치 개혁을 도입하고 외국어를 가르치려는 그의 시도를 장려했다. 또한 진비는 사진을 좋아하여 외국인들을 자금성으로 초대하여 사진술을 가르치게 했다고 한다. 외국 풍습과의 연관성, 더불어 남성 복장을 하는 특이한 습관은 서태후의 경멸을 불러일으켰다.[3]
진비는 광서제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남용하여 문관 임명 절차에 간섭하였고 청일 전쟁 중인 1894년 11월에 공개되어 황실에 일련의 굴욕적인 공공 스캔들을 초래했다.[4] 보복으로, 1894년 11월 26일, 서태후는 진비와 진비를 강등시키고, 진비와 협력한 궁정 환관의 처형을 명령했다. 두 후궁의 사촌이자 관리로 봉사했던 지루이는 베이징에서 추방되었다.[5] 광서제에게 친정을 건의했기 때문에, 스파이의 보고를 받은 서태후는 격분하여 불효라는 이유로 학대당하여 귀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었다.
무술변법 이후, 서태후에 의해 자금성 내 냉궁에 유폐되었다.[5] 1900년 의화단 전쟁 중 8개국 연합군의 침략으로 조정은 자금성을 탈출하여 시안으로 피난했는데, 이때 진비는 자금성 내 우물에서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5]
청나라 조정에 속한 많은 역사적 기록이 분실되거나 검열되었기 때문에, 진비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불분명하다. '검산 일기'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서태후는 진비를 가택 연금에서 풀어 자신 앞에 데려오라고 명령했고 "원래 너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는 젊고 예쁘니, 가는 길에 외국 군인들에게 강간당할 가능성이 높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서태후가 자살을 명령하려는 의도임을 깨달은 진비는 광서제가 베이징에 남아 외국 열강과 협상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격분한 서태후는 결국 진비를 자금성 북동부의 영하궁 뒤에 있는 우물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푸이의 가정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 경은 궁정 환관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1]
스털링 시그레이브는 이 극적인 이야기는 에드먼드 백하우스 경에 의해 지어졌고 서태후는 8월 14일 전에 베이징을 떠났다고 하며, 진비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환관들에 의해 그들 스스로 행해졌거나, 우물에 몸을 던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서태후 사후,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로 시호가 내려졌으며 서릉에 있는 광서제의 숭릉 비원침으로 이장되었다. 진비가 던져진 우물은 자금성 내에 현존한다.
2. 1. 가족 배경
각순황귀비의 본명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버지는 창서(長敘)로 호부 우시랑을 지냈으며, 조부는 유태(裕泰)로 1851년 섬감총독을 지냈다. 조모는 과이가 씨이며, 어머니는 조씨 부인이다. 형제 세 명과 누이 네 명이 있었는데, 넷째 누이가 온정황귀비(1873–1924)이다.
2. 2. 광서제 시대
1889년 광서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광서제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2] 13세에 언니와 함께 선수녀에 참가하여 입선하였고, 빈(嬪)의 작위가 주어져 진빈이 되었으며, 5년 후에 비(妃)의 작위로 승진했다. 미인이면서 밝고 외향적인 성격에 서화에 능하고 바둑도 잘 두는 등 다재다능하여 광서제가 가장 총애한 여성이었다.처음에는 서태후가 진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최고 장인들을 고용하여 그림과 악기 연주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진비는 광서제에게 "강하고 독립적"일 것을 촉구했으며, 정치 개혁을 도입하고 외국어를 가르치려는 그의 시도를 장려했다. 또한 진비는 사진을 좋아하여 외국인들을 자금성으로 초대하여 사진술을 가르치게 했다고 한다. 외국 풍습과의 연관성, 더불어 남성 복장을 하는 특이한 습관은 서태후의 경멸을 불러일으켰다.[3]
진비는 광서제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남용하여 문관 임명 절차에 간섭하였고 청일 전쟁 중인 1894년 11월에 공개되어 황실에 일련의 굴욕적인 공공 스캔들을 초래했다.[4] 보복으로, 1894년 11월 26일, 서태후는 진비와 진비를 강등시키고, 진비와 협력한 궁정 환관의 처형을 명령했다. 두 후궁의 사촌이자 관리로 봉사했던 지루이는 베이징에서 추방되었다.[5]
광서제에게 친정을 건의했기 때문에, 스파이의 보고를 받은 서태후는 격분하여 불효라는 이유로 학대당하여 귀인으로 신분이 강등되었다. 『국문비승』에 따르면 1894년 10월 28일, 임신 3개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태후로부터 정장(廷杖, 알몸으로 매질하는 형벌)을 당해 엉망으로 맞고 전신이 경련하는 인사불성에 빠졌으며, 더불어 진비 측근의 환관과 여관 수십 명이 살해되었다. 그 후 출산 기록이 보이지 않고 "청궁의안"에서는 부인과 장애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비와 진비는 결국 1895년 5월 29일에 복위되었지만, 진비는 1896년 중반부터 궁정 행사에서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4] 무술변법 이후, 서태후에 의해 자금성 내 냉궁에 유폐되었다.[5]
2. 3. 죽음
1889년 광서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나 광서제와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1900년 서태후가 내려준 감탕약(甘湯藥)을 마시고 갑작스레 병에 걸려 향년 24세로 훙서(薨逝)하였으며, 훙(薨)한 그 해에 서태후가 내린 하명으로 인하여 비(妃)에서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로 추서되었다.[5]1900년 의화단 전쟁 중 8개국 연합군의 침략으로 조정은 자금성을 탈출하여 시안으로 피난했는데, 이때 진비는 자금성 내 우물에서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5]
청나라 조정에 속한 많은 역사적 기록이 분실되거나 검열되었기 때문에, 진비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불분명하다. '검산 일기'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서태후는 진비를 가택 연금에서 풀어 자신 앞에 데려오라고 명령했고 "원래 너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는 젊고 예쁘니, 가는 길에 외국 군인들에게 강간당할 가능성이 높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거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서태후가 자살을 명령하려는 의도임을 깨달은 진비는 광서제가 베이징에 남아 외국 열강과 협상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격분한 서태후는 결국 진비를 자금성 북동부의 영하궁 뒤에 있는 우물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푸이의 가정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 경은 궁정 환관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1]
스털링 시그레이브는 이 극적인 이야기는 에드먼드 백하우스 경에 의해 지어졌고 서태후는 8월 14일 전에 베이징을 떠났다고 하며, 진비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가 "환관들에 의해 그들 스스로 행해졌거나, 우물에 몸을 던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무술변법 이후, 서태후에 의해 자금성 내 냉궁에 유폐되었고, 의화단의 난 중, 의견을 진술했다는 이유로 격분한 서태후가 살해를 명령하고, 환관 최옥귀 등이 우물에 던져 살해했다. 향년 24세. 죽은 후 버려졌으나,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서태후는 유골을 수습하여, 궁중에서 사망한 시녀들의 집단 묘지에 매장했다.
3. 사후
1900년 시이모뻘이 되는 서태후가 내려준 감탕약(甘湯藥)을 마시고 갑작스레 병에 걸려 향년 24세로 훙서(薨逝)하였으며, 훙한 그 해에 서태후가 내린 하명으로 비(妃)에서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로 추서되었다.
의화단의 난 중, 의견을 진술했다는 이유로 격분한 서태후가 살해를 명령하고, 환관 최옥귀 등이 우물에 던져 살해했다. 향년 24세. 죽은 후 버려졌으나,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자 서태후는 유골을 수습하여 궁중에서 사망한 시녀들의 집단 묘지에 매장했다.
서태후 사후,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로 시호가 내려졌으며 서릉에 있는 광서제의 숭릉 비원침으로 이장되었다.
진비가 던져진 우물은 자금성 내에 현존한다. 생전에 거처했던 경인궁 옆 불당(회원당)에 언니 진비가 1920년경 필사한 "정위통성"의 편액이 걸려 있다.
4. 미디어에서
- 1948년 영화 《자금성의 슬픔》에서 저우쉬안이 연기하였다.
- 1975년 영화 《황후》와 1976년 영화 《마지막 폭풍》에서 샤오 야오가 연기하였다.
- 1991년 영화 《이련영: 어전 태감》에서 쉬판이 연기하였다.
- 1992년 드라마 《청나라의 흥망》에서 치자이메이가 연기하였다.
- 2003년 드라마 《건국대업》에서 아시루가 연기하였다.
- 2010년 드라마 《행복한 시어머니, 예쁜 며느리》에서 저우무인이 연기하였다.
- 2010년 드라마 《창궁지성》에서 장멍이 연기하였다.
- 2013년 드라마 《명의전기: 서낙락》에서 왕샤오천이 연기하였다.
- 2016년 드라마 《자금성의 마지막 의원》에서 주천이 연기하였다.
남편인 광서제와 마찬가지로 후세에 전해지는 초상 사진은 없다고 여겨진다.
1960년부터 유포된 '진비'의 사진(오른쪽 그림)은 특히 유명하지만, 그 여성은 진비가 아니라는 연구가 계속 존재해 왔다. 특히 이마의 머리카락을 보면 황비가 아니라 당시 기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머리 모양이었다[10]。최근, 사진 속 여성은 황윈셴이라는 청나라 말기의 기녀임이 밝혀졌다. 이 사진은 처음에 명기 앨범 '해상경홍영'(1910년 출판)에 수록되었다[11]。
참조
[1]
서적
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A Mosaic of the Hundred Days: Personalities, Politics and Ideas of 1898
Harvard University Press
[3]
문서
[4]
문서
[5]
논문
Gendering the Nation: The Proliferation of Images of Zhen Fei (1876-1900) and Sai Jinhua (1872-1936) in Late Qing and Republican China
2009
[6]
문서
光緒十五年 正月 二十七日
[7]
문서
光緒二十年 正月 一日
[8]
문서
光緒二十年 十月 二十九日
[9]
문서
光緒二十一年 五月 六日
[10]
웹사이트
讲座|徐家宁:光绪与珍妃传世照片辨伪
https://www.thepaper[...]
澎湃新闻
2021-03-17
[11]
웹사이트
讲座|再谈珍妃的照片
http://jiuyingzhi.co[...]
旧影志
2024-03-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