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널드 존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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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지널드 존스턴은 에든버러 출신으로,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1898년 영국 식민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웨이하이웨이 지방관을 거쳐 1919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가정교사로 자금성에 들어가, 유럽인으로는 유일하게 자금성 내부에서 생활했다. 이후 런던 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웨이하이웨이 행정 장관을 지냈다. 1937년 은퇴 후 스코틀랜드의 섬에서 중국식 정원을 가꾸며 지내다 사망했으며, 저서로는 《자금성의 황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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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널드 존스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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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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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레지널드 플레밍 존스턴 |
출생 | 1874년 10월 13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
사망 | 1938년 3월 6일, 스코틀랜드 에일린 리 |
국적 | 영국 |
직업 | 교육자, 위해위 행정관, 청나라 황제의 스승 |
알려진 업적 | 아이신 교로 푸이의 가정교사 |
기타 이름 | zh: 莊士敦爵士 zh_p: Zhuāngshìdūn juéshì zh_l: Sir Johnston |
학력 | |
모교 | 에든버러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매그달렌 칼리지 |
경력 | |
위해위 행정관 | 재임 시작: 1927년 재임 종료: 1930년 이전: 월터 러셀 브라운 |
훈장 | |
훈장 | 성 마이클-성 조지 훈장 KCMG 대영 제국 훈장 CBE |
2. 생애
레지널드 존스턴은 에든버러에서 태어나 에든버러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 1898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근무하기 시작해, 홍콩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웨이하이로 발령받았다.[2][3]
1919년, 자금성에 살고 있던 푸이의 교사로 선정되어 청나라 궁궐에 들어간 유일한 외국인이 되었다. 푸이가 1924년에 궁에서 추방당하면서 영국으로 돌아갔고, 런던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26년 영국령 웨이하이의 판무관으로 임명되어, 1930년 10월 1일 중화민국으로 반환될 때까지 재임하였다.[3]
1931년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원에서 중국어 교수로 임명되었다.[6] 그는 푸이와 계속 연락을 유지했으며, 1935년에는 만주국을 방문하기도 했다.[6][3]
1937년 은퇴 후 스코틀랜드 로크 크레그니쉬의 작은 섬 에일렌 리를 구입했고, 푸이는 존스턴에게 그 섬에 만주국 황실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는 중국 외 지역에서 유일하게 허가된 사례였다. 존스턴은 섬에 중국식 정원을 가꾸었다.[7][8] 1938년 에든버러에서 짧은 병을 앓고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종교 의식 없이 화장되었고, 유해는 섬과 주변 호수에 뿌려졌다.
존스턴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자 에일린 파워와 약혼한 적이 있으며, 작가 스텔라 벤슨과 가까운 사이였다. 엘리자베스 스파르숏과의 이혼 소송에서 응답자로 지목되었고,[9] 사망 당시 그녀와 약혼한 상태였다. 스파르숏은 존스턴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금성에서 푸이의 어린 시절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 그의 많은 자료와 편지를 불태웠다.[8][3]
2. 1. 초기 생애
레지널드 존스턴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 에든버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교 매그달렌 칼리지에서 근대사 전공 장학금을 받았다. 옥스퍼드에서 존스턴은 세실 클레멘티와 친분을 맺었는데, 둘은 한학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으며 평생 연락을 유지했다.[3]2. 2. 식민지 관리 경력
1898년 영국 식민지성에 들어가, 아시아에 있는 영국의 주요 식민지 중 하나인 홍콩에 배속되었다.[1] 1900년부터 홍콩 총독의 비서관을 맡았고, 1904년에는 영국의 조차지인 웨이하이웨이에 지방관으로 부임했다.[2][3] 그의 뛰어난 근면함 때문에 존스턴은 그의 상관들로부터 유능한 식민지 행정관으로 평가받았다.
1927년 산둥반도 북부의 웨이하이웨이 행정 장관(변무관)으로 취임했다.[3] 웨이하이웨이는 1898년 당시 해협 건너편 뤼순은 러시아가, 산둥반도 남부 자오저우만(칭다오)은 독일이 조차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력 균형을 위해 영국이 조차한 곳으로, "포트 에드워드"라고 불렸다.
1930년 초 영국 국왕으로부터 서 칭호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1일, 웨이하이웨이가 장제스의 난징 국민 정부에 반환될 때까지 장관을 역임했으며, "웨이하이웨이를 청나라 만다린(관인)처럼 통치했다"고 전해진다.[3][13]
2. 3. 푸이의 가정교사
1919년, 존스턴은 식민부에 의해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당시 비주권 군주로서 자금성에 거주하고 있던 열세 살의 푸이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4] 스코틀랜드 출신인 존스턴은 미국 선교사의 딸이자 황후의 가정교사였던 이저벨 잉그램과 함께 청나라 내정 안에 출입이 허용된 유일한 외국인이었다.[4] 존스턴은 높은 황실 칭호를 받았으며 자금성과 원명원에서 모두 거주했다.[4]존스턴은 단순한 가정교사 이상의 존재로, 고립된 청소년이었던 푸이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푸이에게 양복, 자전거, 전화, 잡지 등 유럽의 최신 수입품을 제공하고, "양복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발을 자르게 하는 등 푸이에게 서구식 교육과 문물을 소개했다.[5]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푸이에게 꼭 필요한 안경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5]

신해혁명 이후에도 자금성에 거주하던 푸이의 후견인 순친왕 자이펑과, 서태후의 측근이었던 이홍장의 아들이자 청나라의 흠차전권대신이었던 이징팡의 권유로 존스턴이 푸이의 가정교사로 선택되었다. 푸이는 처음에 외국인인 존스턴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지만, 첫 만남에서 그의 어학 능력과 박학다식함에 감탄하여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존스턴은 푸이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신뢰를 얻었다. 푸이는 존스턴에게 매일 교육을 받으면서 자금성 안에서 생활하면서도 존스턴이 가져온 유럽(영국)풍의 근대적인 생활 양식과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존스턴은 명나라 황족의 후손인 연은후 주유순을 만나 자금성에서 푸이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4]
이후 푸이는 존스턴, 정효서 등의 추천을 받아 자금성 내의 경비 절감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환관의 부패와 자금성 내 미술품 횡령을 일소하기 위해 중화민국 정부의 힘을 빌려 약 1,200명에 달하던 환관의 대부분을 해고하고, 여관을 추방하는 등 자금성 내의 근대화를 꾀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푸이의 "근대화"에 대해 영향력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환관 등 일부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으며, 환관이나 중화민국 정부 내 일부로부터 어용 매스 미디어를 통해 공격을 받기도 했다.
1924년 제2차 펑즈 전쟁에 따른 베이징 정변으로 펑위샹과 쑨웨가 베이징을 지배하게 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펑위샹과 쑨웨는 정변 후 황제 칭호를 폐지하고 청실 우대 조건의 일방적인 청산을 통보하여, 자금성에 군대를 보내 푸이와 존스턴 등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당초 푸이는 순친왕의 왕궁인 북부로 일시적으로 몸을 의탁했고, 이후 존스턴은 정효서와 진보침의 의향을 받아 상하이 조계나 톈진 조계 내의 영국 공관과 네덜란드 공관에 보호를 요청했지만, 영국 공관에서는 내정 간섭이 될 것을 우려하여 수용을 거부했다.
결국 존스턴은 간토 대지진 의연금 등을 통해 푸이와 안면이 있었던 일본의 요시자와 겐키치 특명전권공사에게 수용을 타진했다. 요시자와 공사는 최종적으로 수용을 표명했고, 푸이 일행은 11월 29일에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에 들어가 일본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11] 이듬해 1925년 2월에는 정효서와 일본 지나 주둔군, 주 톈진 일본 총영사관의 중재로, 푸이 일행은 톈진시의 일본 조계인 장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 사건은 러일 전쟁 승리 이후 만주로의 진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 육군 (관동군)과 푸이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일본 정부 및 일본 육군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동맹국이며, 당시에도 강력한 우호국이었던 영국 국민인 존스턴의 요청을 받아 푸이를 일시적으로 보호하는 정도였으며, 푸이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의사는 없었다.
2. 4. 중국 반환 이후
런던 대학교에서 중국어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런던 대학교 동양 아프리카 연구원에 기반을 두었다. 1935년 자신의 서재를 기증했는데, 이 서재는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중국 및 동아시아 서적 컬렉션 중 하나로, 16,000권이 넘는 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6]푸이와 인연을 유지하여, 1930년대 런던 큐의 모틀레이크 로드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푸이의 누이와 그의 남편을 맞이했고, 1935년 7월에는 만주국을 방문하기도 했다.[6][3]
1937년에 은퇴하여 스코틀랜드 로크 크레그니쉬의 작은 섬인 에일렌 리를 구입했고, 푸이는 레지널드 플레밍 존스턴 경에게 그 섬에 만주국의 황실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허가하여 중국 외에 유일하게 그럴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으며, 중국식 정원을 가꾸었다.[7][8] 짧은 질병을 앓은 후 에든버러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언으로 종교 의식을 거행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의 뜻에 따라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는 섬과 주변 호수에 뿌려졌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한때 역사학자 에일린 파워와 약혼했으며, 작가 스텔라 벤슨과 가까웠다. 그는 엘리자베스 스파르숏의 이혼 소송에서 응답자로 지목되었으며,[9] 사망 당시 그녀와 약혼한 상태였다. 스파르숏은 그의 명백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금성에서 푸이의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그의 많은 자료와 편지를 불태웠다. 스파르숏은 자신의 행동을 "여자가 남자(그녀의 평판)를 위해 최고의 희생을 하면 아마도 오랫동안 그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정당화했다.[8][3]
존스턴의 저서 ''자금성의 황혼''(1934)은 베이징에서의 그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푸이의 삶을 극화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자료로 사용되었다. 그는 영화에서 피터 오툴에 의해 묘사되었다.
1925년 말 톈진 항에서 P&O의 기선을 타고 영국으로 귀국했다. 영국으로 귀국하기 직전에 톈진에 머물고 있던 푸이를 방문했는데, 존스턴의 헌신에 깊이 감사한 푸이는 이 자리에서 존스턴에게 기념품을 하사했다.[12]
2. 5. 말년
1931년 태평양 회의 참석차 다시 중화민국을 방문하여 푸이와 재회했다. 1934년 공무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작은 섬에서 방대한 중국 고전 장서와 함께 지냈다.[14]같은 해 푸이의 가정교사 시절부터 푸이가 만주국 "원수"(집정)가 되기까지의 동향을 적은 『자금성의 황혼』(원제: ''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을 저술했으며, 이 책은 푸이에게 헌정되었다. 1935년 만주국을 방문하여 "황제"가 된 푸이와 재회하는 등, 푸이와의 교류는 평생 지속되었다.[6][3]
1937년 은퇴 후 스코틀랜드 로크 크레그니쉬의 작은 섬 에일렌 리를 구입했고, 푸이는 레지널드 플레밍 존스턴 경에게 그 섬에 만주국 황실기를 게양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는 중국 외 지역에서 유일하게 허가된 사례였다. 존스턴은 섬에 중국식 정원을 가꾸었다.[7][8] 1938년 짧은 병을 앓은 후 에든버러에서 사망했다. 유언에 따라 종교 의식 없이 화장되었고, 유해는 섬과 주변 호수에 뿌려졌다.
존스턴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한때 역사학자 에일린 파워와 약혼했으며, 작가 스텔라 벤슨과 가까운 사이였다. 엘리자베스 스파르숏과의 이혼 소송에서 응답자로 지목되었고,[9] 사망 당시 그녀와 약혼한 상태였다. 스파르숏은 존스턴의 명백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금성에서 푸이의 어린 시절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 그의 많은 자료와 편지를 불태웠다. 스파르숏은 자신의 행동을 "여자가 남자(그녀의 평판)를 위해 최고의 희생을 하면 아마도 오랫동안 그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해명했다.[8][3]
3. 저서
- Queen of the Fairies영어 (1892)
- The Last Days of Theodoric the Ostrogoth and Other Verses영어 (1904)
- Province of Shantung영어에 관한 논평 (1905)
- 베이징에서 만달레이까지: 티베트 쓰촨과 윈난을 거쳐 북중국에서 버마로 가는 여정(1908)
- 북중국의 사자와 용 (1910)
- A Chinese Appeal to Christendom Concerning Christian Missions영어 (1911)
- 불교 중국 (1913)
- Letters to a Missionary영어 (1918)
- The Chinese Drama영어 (1921)
- 자금성의 황혼 (1934)
- 유교와 현대 중국 (1935)
4. 평가
레지널드 존스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부정적, 중립적인 시각이 모두 존재한다.
긍정적 평가
- 동서양 문화 교류 기여: 존스턴은 동양과 서양 문화를 모두 경험하고 이해한 인물로, 두 문화 간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푸이의 교육 기여: 푸이의 가정교사로서 서구식 교육을 제공하고, 푸이가 넓은 세상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왔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부정적 평가
- 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이익 대변: 존스턴은 대영제국의 식민지 관리로서, 결국 영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푸이의 비극적 삶에 영향: 푸이의 교육에 기여했지만, 결과적으로 푸이가 일본의 꼭두각시 황제가 되는 등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 것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중립적 평가
- 시대적 한계 속 개인의 역할: 존스턴은 제국주의 시대라는 한계 속에서 개인적인 신념과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의 관점한국에서는 영화 "마지막 황제"를 통해 존스턴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의 삶은 제국주의 시대의 복잡성과 개인의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5. 서훈
- 1918년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15]
- 1930년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2등급(KCMG, 작위급 훈장)[16]
6. 기타
존스턴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역사학자 에일린 파워와 약혼한 적이 있으며, 작가 스텔라 벤슨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스파르숏의 이혼 소송에서 응답자로 지목되었고,[9] 사망 당시 그녀와 약혼한 상태였다. 스파르숏은 존스턴의 명백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금성에서 푸이의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그의 많은 자료와 편지를 불태웠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여자가 남자(그녀의 평판)를 위해 최고의 희생을 하면 아마도 오랫동안 그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해명했다.[8][3]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는 존스턴의 저서 ''자금성의 황혼''(1934)에 담긴 베이징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푸이의 삶을 극화한 것이다. 영화에서 존스턴은 피터 오툴이 연기했다.
참조
[1]
웹사이트
Family history of Sir Reginald A. Fleming Johnston KCMG CBE
http://www.lasbury.c[...]
2022-10-28
[2]
서적
From Peking to Mandalay: A Journey from North China to Burma Through Tibetan Ssuchʻuan and Yunnan
https://archive.org/[...]
E. P. Dutton & Company
1908
[3]
서적
Scottish Mandarin: The Life and Times of Sir Reginald Johnston
https://books.google[...]
Hong Kong University Press
2012-10-01
[4]
간행물
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뉴스
Born Too Late
https://www.nybooks.[...]
New York Review of Books
1988-02-18
[6]
웹사이트
Richmond Herald, 17th December, 1932 - KEW'S PRINCESS
https://www.britishn[...]
[7]
문서
Knight Frank LLP p. 4
http://media.rightmo[...]
Knight Frank LLP
[8]
서적
The Last Emperor
Scribner's
1975
[9]
웹사이트
The Discovery Service
https://discovery.na[...]
[10]
문서
総理衙門章京とは、総理衙門において様々な事務を担当する職である。総理衙門は国内の重要案件を扱うため機密性が高く、単なる事務も[[胥吏]]に任すわけにはいかなかったため、設けら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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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ジョンストン 2005年 下巻 P.366
[12]
문서
ジョンストン 2005年 下巻 P.388
[13]
문서
レジナルド・フレミング・ジョンストン『紫禁城の黄昏』下巻 P.388。中山理訳、祥伝社 2005年
[14]
문서
レジナルド・フレミング・ジョンストン『紫禁城の黄昏』上下、中山理訳 祥伝社 2005年
[15]
저널
Fifth Supplement to The London Gazette
https://www.thegazet[...]
1918-03-12
[16]
저널
Supplement to The London Gazette
https://www.thegazet[...]
193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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