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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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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옹은 탁군 출신으로, 유비와 어려서부터 친분을 맺고 그를 따라다니며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황건적의 난 때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형주에서 종사중랑을 지내며 사신 역할을 했다. 211년 유비가 익주로 갈 때 동행했으며, 유비와 유장이 대립하자 유장을 설득하여 항복을 이끌어냈다. 익주 평정 후 소덕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유머와 재치를 보여주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간옹을 미축, 손건, 이적과 함께 조화롭고 기품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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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옹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간옹
본명경옹
로마자 표기Gan Yong
헌화
출생지유주 탁군
사망지미상
직업정치인
관직
소속유비
종사중랑201년 ~ 214년
소덕장군214년 ~ ?

2. 생애

간옹은 훌륭한 변론가이자 웅변가였다. 그의 글과 연설은 노자 철학을 따랐다. 그는 자유분방했고 형식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유비 옆에 앉을 때도 장비미축과 같은 유비의 오랜 신하들은 항상 격식을 차렸지만, 간옹은 대담하게 행동했고, 적절한 예절을 무시하며 편안하게 앉았다. 제갈량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했을 때는 소파 전체를 차지하고, 베개에 기대어 편안한 자세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4]

한 번은 익주에 가뭄이 들어 주류를 금지하는 법이 시행되었다. 술을 빚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았다. 지나치게 열성적인 관리들은 집에서 술 빚는 도구를 압수하고, 도구 소유자들을 술을 빚는 사람만큼 죄가 있는 것처럼 처벌할 것을 제안했다. 간옹과 유비가 땅을 순찰할 때, 어떤 부부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간옹은 유비에게 말했다. "저들은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려 합니다. 체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비가 물었다. "어떻게 아는가?" 간옹이 대답했다. "그들은 그렇게 할 도구를 갖추고 있습니다. 마치 술 빚는 도구 소유자들이 술을 빚을 도구를 가진 것과 같습니다." 유비는 웃으며 술 빚는 도구를 소유한 가족들을 사면했다. 이것이 간옹의 재치였다.[5]

2. 1. 초기 생애와 유비와의 만남

간옹은 탁군(涿郡|탁군중국어), 즉 현재의 허베이성줘저우시(涿州市)에서 태어났다. 본래 성은 경(耿)이었으나, 고향 유주에서는 간(簡)과 발음이 같았기에 성을 간으로 바꿨다.[1] 어려서부터 유비와 친했고, 유비를 따라다니며 주선 업무를 보았다.[9]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유비, 관우, 장비, 전예 등과 함께 의용군을 결성하여 교위 추정을 따라 참전했다. 이후에도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다. 유비가 형주에 의탁했을 때 미축, 손건과 함께 종사중랑(從事中郎)을 지냈으며,[2] 유비의 사신 또는 특사 역할을 수행했다.

2. 2. 형주에서의 활동

유비형주에 의탁했을 때, 간옹은 미축, 손건과 함께 종사중랑(從事中郎)을 지냈다. 그들은 유비의 사신 또는 특사로 파견되는 것 외에 정치적인 활동가로서 역할을 수행했다.[2]

211년, 유비가 장로에 맞서 관할 지역을 방어하도록 돕겠다는 명분으로 익주(현재의 쓰촨성충칭시를 포함)에 들어갔을 때, 간옹을 사신으로 보내 유장을 만났다. 유장은 간옹을 매우 총애했다.[3] 이후, 유비와 유장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유비가 우위를 점하고 익주의 수도 성도를 포위했을 때, 간옹은 유장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했다. 유장은 이에 동의했고, 간옹과 함께 수레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가 항복했다. 214년 익주를 점령하고 성도에 새로운 근거지를 세운 후, 유비는 간옹을 소덕장군(昭德將軍)의 자리에 임명했다.[3]

2. 3. 익주 평정과 촉한 건국

간옹은 어려서부터 유비와 친했고, 여기저기 따라다니며 주선 업무를 보았다. 유비가 형주에 들어가자 미축, 손건과 함께 종사중랑(從事中郞)에 임명되었고, 여전히 사자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2] 211년(건안 16년) 유비가 유장의 요청에 따라[9] 익주로 갈 때 함께 갔으며, 유장은 간옹을 매우 아꼈다. 이후 유장과 유비는 사이가 벌어져 전쟁벌였고, 마침내 214년[9] 유비가 성도를 포위하면서 간옹을 항복 권고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유장은 간옹의 설득에 따라 같은 수레를 타고 나와 항복하였다. 익주가 평정되자 소덕장군(昭德將軍)에 올랐고, 미축에 버금가는 대우를 손건과 같이 받았다.[10]

2. 4. 사망 시기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며, 건안 24년(219년)에 유비한중왕으로 추대한 군신이나, 장무 원년(221년)에 유비를 황제로 추대한 군신 중에도 간옹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7]

3. 성품과 평가

간옹은 뜻이 크고 오만하며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유비와 함께 있을 때도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앉는 등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제갈량 등을 대할 때는 평상에 누워 말할 정도였다.[11]

익살과 재치가 뛰어나, 가뭄으로 금주령이 내려져 술 빚는 도구를 가진 사람도 처벌받던 시기에, 길 가던 남녀를 보고 유비에게 "저들이 간음하려 하는데 왜 체포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유비가 이유를 묻자 "저들에게 그 도구가 있으니 간음하려는 자와 같다"고 대답하여, 유비를 크게 웃게 하고 도구를 가진 사람들을 석방하게 하였다.[11]

진수미축, 손건, 간옹, 이적을 조화롭고 기품이 있어 그 시대에 대우받았다고 평가하였다.[12]

3. 1. 자유분방함과 유머

간옹은 뜻이 크고 오만하며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유비와 함께 있을 때도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앉는 등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제갈량 등을 대할 때는 아예 평상에 누워 말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었다.[11] 이러한 성격은 그의 글과 연설에도 반영되어, 노자 철학을 극단적으로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4]

또한 간옹은 익살과 재치가 뛰어났다. 한번은 가뭄으로 금주령이 내려져 술 빚는 도구를 가진 사람도 처벌받게 되었는데, 간옹은 길 가던 남녀를 보고 유비에게 "저들이 간음하려 하는데 왜 체포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유비가 이유를 묻자 "저들에게 그 도구가 있으니 간음하려는 자와 같다"고 대답하여, 유비를 크게 웃게 하고 도구를 가진 사람들을 석방하게 하였다.[11][5]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간옹을 미축, 손건, 이적과 함께 조화롭고 기품이 있어 그 시대에 대우받았다고 평가하였다.[12]

3. 2. 진수의 평가

진수미축, 손건, 간옹, 이적이 조화롭고 기품이 있어 그 시대에 대우받았다고 평가하였다.[12] 또한 이들은 고상하고 교양 있는 인물들로, 예의를 잘 지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평했다.[6]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여포서주에서 싸울 때부터 등장하며 유비와 함께 각지를 전전한다. 유비가 의형제들과 재회하고자 원소로부터 빠져나올 때 유표 설득을 핑계로 대라고 헌책했으며, 자신은 그 감시역을 구실로 같이 나온다. 장판 전투에서는 쫓기다 부상을 당해 숨어있다가 유비의 두 부인을 찾고 있던 조운에게 구조된다. 유장에게 항복을 권할 때 처음에는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가 유장의 신하 진복에게 꾸지람을 받고 사과하는 장면이 추가되었다.[1]

참조

[1]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Sanguozhi vol. 38
[2] 서적 Sanguozhi vol. 38
[3] 서적 Sanguozhi vol. 38
[4] 서적 Sanguozhi vol. 38
[5] 서적 Sanguozhi vol. 38
[6] 서적 Sanguozhi vol. 38
[7] 서적 三国志集解
[8] 서적 삼국지 38권 촉서 제8 간옹
[9] 서적 삼국지 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
[10] 서적 삼국지 38권 촉서 제8 손건
[11] 문서 “彼有其具, 與欲釀者同”
[12] 서적 삼국지 38권 촉서 제8 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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