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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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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감녕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본래 익주 파군의 호족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는 불량배들을 이끌고 약탈을 일삼았으나, 유표, 황조를 섬기며 손권에게 귀순하여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적벽 대전, 남군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관우를 상대로 1천 명의 병사로 3만 군사를 막아내기도 했다. 손권에게 "장료가 조조에게 있다면, 감녕은 나에게 있다"는 칭찬을 받을 정도로 용맹함을 떨쳤다. 215~220년 사이에 사망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촉나라 사마가에게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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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감녕의 청나라 시대 삽화
감녕
이름감녕
본관익주파군 임강현
흥패 (興覇, Heungbae)
직위절충장군 (折衝將軍, Jeolchung Janggun)
몰년기원후 215년?
상세 정보
출생지충칭시 중현
사망지알 수 없음
자녀감귀 (甘貴, Gam Gwi)
감서 (甘舒, Gam Seo)
활동 시기후한 말기
섬긴 세력영제 → 독립 세력 → 황조손권
신호소의무혜유애령현왕 (昭毅武恵遺愛霊顕王, Souimuhyeyuaeryeonghyeonwang)
관직
관직명서릉태수 (西陵太守, Seoneung Taesu)
임기 시작기원후 214년 경
임기 종료기원후 215년
관직명절충장군 (折衝將軍, Jeolchung Janggun)
임기 시작기원후 215년
임기 종료알 수 없음

2. 생애

감녕은 남양 사람이었으나 파군으로 이주해 왔다.[62] 젊은 시절부터 호협하여 동네 무뢰한들을 이끌고 자경단을 조직, 치안 유지에 힘썼다.[62] 조정의 관리라도 자신들을 존중하면 함께 즐겼고, 그렇지 않으면 부하들을 시켜 혼내주는 등 방약무인으로 행동했다.[62] 이러한 행위는 20여 년간 지속되었다.[62]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고,[61] 싸움 실력이 뛰어나 익주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언 사후, 유장이 익주목을 승계하자 감녕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하고 형주로 도주했다.[63] 형주에서는 유표를 따랐으나, 남양에 주둔하면서도 중용되지 않았다.[8] 이후 황조에게 의탁했지만, 황조 역시 감녕을 예우하지 않았다.[9]

주유여몽의 추천으로 손권에게 등용된 감녕은, 손권으로부터 기존 신하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61] 감녕은 손권에게 황조를 치고 형주를 아우르며, 나아가 익주까지 엿보자는 전략을 제안했다. 손권은 이를 받아들였고, 장소가 반대하자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였다.[14] 손권이 황조를 토벌하고 강하군을 손에 넣자, 감녕에게 병사를 주어 당구에 주둔하게 했다.[61]

208년 겨울부터 209년까지 적벽 대전과 강릉 전투에 참전하였다. 감녕은 별동대를 이끌고 이릉(夷陵)을 점령했다.[21]

215년, 손권은 동맹인 유비와 남부 형주의 분할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감녕은 노숙과 함께 익양에 합류하여 관우와 대치했다.[22] 같은 해 초, 조조의 완현(皖縣) 주둔지를 공격하는 데 참여했으며, 쇠사슬로 무장하고 가장 먼저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의 병사들은 완현의 수비 사령관 주광(朱光)을 사로잡았다. 여몽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공로를 인정받아 파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했다.[25] 그해 말, 손권이 합비를 장악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했다.[26]

217년,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손권의 濡須(Ruxu, 육수) 주둔지를 공격했다. 감녕은 3천 명의 선봉대를 지휘했다.[27]

감녕은 촉한사마가가 쏜 화살에 맞고 부지구의 큰 나무 밑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나무에 있던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그의 시신을 에워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각색일 뿐 정사에는 사마가가 감녕을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33] 감녕이 사망하자 손권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2. 1. 익주의 토호

감녕은 원래 남양 사람이었으나 파군으로 이주해 왔다.[62] 젊은 시절부터 호협하여 동네 무뢰한들을 이끌고 자경단을 조직, 치안 유지에 힘썼다.[62] 조정의 관리라도 자신들을 존중하면 함께 즐겼고, 그렇지 않으면 부하들을 시켜 혼내주는 등 방약무인으로 행동했다.[62] 이러한 행위는 20여 년간 지속되었다.[62] 물소 꼬리로 만든 깃발을 등에 지고, 활 등을 손에 들고, 허리에는 방울을 달고 다녀, 사람들은 방울 소리만 듣고도 그가 온 것을 알았다고 한다.[61] 그는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했고,[61] 싸움 실력이 뛰어나 익주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2. 2. 익주를 떠나다

유언 사후, 유장이 익주목을 승계하자 감녕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하고 형주로 도주했다.[63] 형주에 도착한 뒤에는 형주목 유표를 따랐으나, 남양에 주둔하면서도 중용되지 않았다.[8] 이후 황조에게 의탁했지만, 황조 역시 감녕을 예우하지 않았다.[9]

2. 3. 오나라에 등용되다

주유(周瑜)와 여몽(呂蒙)의 추천으로 손권(孫權)에게 등용된 감녕(甘寧)은, 손권으로부터 기존 신하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61] 감녕은 손권에게 황조(黃祖)를 치고 형주(荊州)를 아우르며, 나아가 익주(益州)까지 엿보자는 전략을 제안했다. 손권은 이를 받아들였고, 장소가 반대하자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였다.[14] 마침내 손권이 황조를 토벌하여 원수를 갚고 강하군(江夏郡)을 손에 넣자, 감녕에게 병사를 주어 당구에 주둔하게 했다.[61]

興平|흥평중국어 원년(194년), 유언이 죽고 아들 유장이 뒤를 이었을 때, 이각한중군에 파견한 호모에 호응한 유장의 장군인 심미 등과 함께 유장에게 반역했으나 패하여 형주로 도망한 인물 중에 감녕이라는 인명이 있다. (촉지 「유언전」의 주에 인용된 『영웅기』).

감녕은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여 남양에 살게 되었으나 임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유표의 부하인 강하군 태수 황조에게 의탁했지만, 일반적인 식객으로 취급받았다. 『오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감녕은 부하나 식객 800명을 데리고 황조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했기에 감녕은 임용되지 않았다. 감녕은 유표가 대성하지 못하고 곧 멸망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자신도 휩쓸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강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유표의 부하인 강하 태수 황조의 군세가 하구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과할 수 없어 그대로 황조 밑에 머물렀다. 냉대를 받은 채 3년 정도 지났다. 후에 황조 군의 장수로서 대립하는 손권의 군에게 패한 황조를 구원하여 그 전을 맡아 추격해 온 손권의 장수인 능조를 쳐 죽이는 등의 공을 세웠지만, 감녕의 대우는 그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또한, 능통으로부터는 이 일로 아버지의 원수라며 평생 원망을 받게 된다.

도독소비는 감녕을 중용하도록 황조에게 간언했지만, 황조는 오히려 감녕의 식객을 빼앗으려 했고, 감녕의 식객들은 감소해갔다. 감녕은 황조의 진영을 떠날 수 없어 답답해했지만, 소비의 도움으로 주현 현령으로 추천되어 황조 밑을 떠날 수 있었다. 감녕은 과거의 식객과 새로 부하가 된 자들 수백 명을 데리고 현으로 향했고, 이윽고 그곳을 도망쳐 나와 손권의 진영에 가입했다.

소비가 체포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감녕은 손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마루에 머리를 쳐서 피를 흘리며 소비의 구명을 호소해 옛 은덕에 보답했다.[66]

2. 4. 주요 전투 활약

208년 겨울부터 209년까지 감녕은 주유의 지휘 아래 적벽 대전에 참전하여 조조의 군대를 물리치고 오림(烏林)에서 승리했다.[21] 이어진 강릉 전투에도 참여했다. 주유가 이끄는 손권의 군대는 남군(南郡; 현재의 후베이성, 장링 현 일대)에서 조조의 장수 조인을 공격했지만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감녕은 별동대를 이끌고 이릉(夷陵; 현재의 후베이성, 이창 시 일대)을 점령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릉에 도착했을 때 불과 수백 명의 병력만 데리고 있었지만, 그 지역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여 병력이 약 1,000명으로 늘어났다.[21] 조인은 5,000~6,000명의 군대를 보내 이릉의 감녕을 포위했다. 조인의 군대는 높은 망루를 건설하고 거기에서 이릉에 화살을 쏟아부었다. 감녕의 부하들은 두려워했지만 지휘관은 침착했다. 사자를 보내 주유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따르고 능통을 남겨 방어하게 한 채 증원을 이끌고 감녕을 도왔다.[21] 주유, 여몽 등은 이릉의 포위를 풀었고, 능통은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자리를 잘 지켜냈다. 결국, 조조 측에서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많은 병력과 자원이 소모되면서 조인은 남군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로 인해 손권의 군대가 남군을 점령하게 되었다.

215년, 손권은 동맹인 유비와 남부 형주의 분할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여몽능통을 보내 유비로부터 장사군(長沙), 영릉(零陵; 현재의 후난성, 융저우 일대) 및 계양(桂陽; 현재의 후난성, 천저우 일대)의 세 군을 점령하게 했으며, 유비의 장수 관우의 보복을 막기 위해 노숙에게 형주 남부의 영토를 관할하는 익양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22] 감녕은 노숙과 함께 익양에 합류했다.[22] 관우는 3만 명의 군사가 있다고 주장하며 정예병 5,000명을 익양에서 10 ''리'' 떨어진 상류의 얕은 곳에 배치하고 밤에 얕은 곳을 건너려 계획했다.[22] 노숙은 부하들과 관우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했다. 당시 감녕은 300명의 병력밖에 없었지만 노숙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저에게 500명의 병력을 더 주신다면, 관우와 맞서겠습니다. 제가 접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관우는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건넌다면, 그를 사로잡겠습니다."[22]

노숙은 1,000명의 병력을 선택하여 감녕의 지휘 아래 두었다. 감녕은 밤에 관우의 위치로 향했다. 감녕의 예상대로 관우는 얕은 곳을 건너지 않고 그곳에 야영지를 세웠다.[22] 그곳은 '관우의 여울'(關羽瀨)로 불리게 되었다.[22][23]

215년 초, 감녕은 조조의 완현(皖縣; 현재의 안휘성 첸산 현) 주둔지를 공격하는 데 참여했으며, 요새의 성벽을 기어오르는 부대를 지휘했다. 쇠사슬로 무장한 그는 가장 먼저 성벽을 기어올랐고, 그의 병사들은 완현의 수비 사령관 주광(朱光)을 사로잡았다. 여몽은 최고의 공로를 세웠고, 감녕은 두 번째로 높은 공로를 인정받아 승리했다. 감녕은 파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했다.[25]

그해 말, 감녕은 손권이 합비를 장악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했는데, 합비는 조조의 장수 장료가 지키고 있었다. 손권은 며칠 동안 도시를 포위하고 초기 교전에서 패배한 후 합비를 점령할 수 없었고, 결국 군대에 역병이 발생하자 군대를 철수했다. 손권의 다른 부대들이 먼저 퇴각했고, 손권 자신은 소요진(逍遙津)에 약 1,000명의 병력과 몇몇 장교(여몽, 장흠, 능통, 감녕 포함)와 함께 남아 있었다. 장료는 그 기회를 틈타 맹렬한 반격을 가해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감녕은 궁수들을 이끌고 적에게 화살을 쏘았고, 능통 등은 그들의 주군을 보호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다. 감녕은 병사들에게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쟁 북을 치고 나팔을 크게 불라고 외쳤다. 손권은 결국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의 군대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는 전투 후 감녕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했다.[26]

217년,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손권의 濡須(Ruxu, 육수) 주둔지를 공격했다. 손권은 약 7만 명의 병력으로 적에게 대항했다. 감녕은 3천 명의 선봉대를 지휘했다. 손권은 감녕에게 야음을 틈타 적을 기습하라는 은밀한 명령을 내렸고, 이에 감녕은 정예 병사 100명을 선발했다.[27] 전투 전에 손권은 감녕과 그의 병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보냈다. 연회가 끝난 후, 감녕은 술을 은잔에 따라 두 잔을 마신 후 장교에게 술을 권했다. 장교는 무릎을 꿇고 감히 술을 받지 못하자 감녕은 칼을 뽑아 무릎에 올려놓고 말했다. "그대는 우리 주군을 존경하면서 나를 존경하지 않는가?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장교는 감녕의 모습이 매우 엄숙함을 보고 마지못해 술을 마셨고, 그런 다음 각 병사에게 술 한 잔씩 마시도록 명령했다.[28]

자정이 가까워지자 감녕과 그의 100명의 병사들은 조조의 진영을 기습하여[29]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수십 명의 적군을 살해했다. 조조의 군대는 충격을 받아 경보를 울리고 진영 전체를 횃불로 밝혔다. 그때쯤 감녕과 그의 병사들은 이미 안전하게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와 북을 치고 뿔피리를 불며 "만세(wansui)!"를 외쳤다.[30]

2. 5. 최후

감녕은 촉한사마가가 쏜 화살에 맞고 부지구의 큰 나무 밑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나무에 있던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그의 시신을 에워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각색일 뿐 정사에는 사마가가 감녕을 죽였다는 내용은 없다.[33]

그 뒤 감녕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지고, 바닷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고깃덩어리를 던지면 까마귀가 공중에서 받아먹는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감녕이 사망하자 손권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삼국지》 감녕전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더 이상 제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건강실록》에는 감녕이 215~216년 겨울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34] 호주의 중국학자 레이프 드 크레스피니는 감녕이 220년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35]

3. 능력

감녕은 난폭하고 과격했으며, 살생을 즐겼지만, 쾌활하고 사교적이며 전략을 사용할 줄 알았다.[41] 그는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했으며, 재물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잘 대했으며, 그들은 또한 기꺼이 그의 목숨을 걸고 싸웠다.[42]

《삼국지》 〈오서 감녕전〉에 따르면, 감녕은 손권에게 다음과 같은 계책을 말했다.

손권은 그의 의견을 칭찬하고 받아들였다.

진수는 "감녕은 거칠고 살인을 자주 저질렀지만, 쾌활한 인품과 뛰어난 계략을 가지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를 존경하며 용감한 자들을 두텁게 대우했기에, 그들 또한 그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고 평했다. 또한 감녕은 종종 명령에 반했기에 손권의 분노를 샀지만, 여몽은 감녕에 대해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감녕과 같은 투장은 얻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4. 여몽과의 일화

감녕의 부하가 죄를 짓고 여몽에게 의탁했다. 감녕이 그를 죽일까 두려워한 여몽은 그를 숨겼다. 나중에 감녕이 여몽의 집을 방문하여 여몽의 어머니에게 선물을 가져갔을 때, 여몽은 그 부하를 감녕에게 돌려보냈고, 감녕은 그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44]

그러나 감녕은 약속을 어기고 부하를 나무에 묶어 활로 쏘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여몽은 분노하여 군사를 모아 감녕을 공격하려 했다. 여몽의 어머니는 "주군(손권)은 너를 가족처럼 대하며 중요한 책임을 맡겼다. 사적인 감정 때문에 감녕을 죽이려 하다니? 감녕이 죽으면, 주군이 이 일에 대해 묻지 않더라도, 너는 이미 신하로서의 역할을 넘어서는 것이다."라며 여몽을 꾸짖었다.[45]

여몽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는 감녕의 배로 가서 "흥패, 어머님께서 자네에게 식사를 대접하려 하시네. 어서 올라오게!"라고 웃으며 말했다. 감녕은 눈물을 흘리며 "제가 당신을 실망시켰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여몽을 따라 그의 어머니를 만나 하루 종일 잔치를 벌였다.[45]

5. 가계

감녕의 조상은 전국 시대 진나라 재상 감무(甘茂)이다.[36] 감녕의 아들 감귀(甘瓌)는 죄를 지어 회계군(현재의 저장성 사오싱)으로 유배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37] 감녕의 또 다른 아들 감술(甘述)은 삼국 시대 동오에서 상서를 지냈다. 감술의 아들 감창(甘昌)은 오나라에서 태자태부를 지냈다.[38] 감창의 아들 감탁(甘卓)은 자가 계사(季思)였으며, 진나라에서 진남대장군과 형주 자사를 지냈다.[39][40]

6. 평가

진수는 감녕을 "거칠고 살인을 자주 저질렀지만, 쾌활한 인품과 뛰어난 계략을 가지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를 존경하며 용감한 자들을 두텁게 대우했기에, 그들 또한 그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고 평가했다.[41][42] 여몽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감녕과 같은 투장은 얻기 어렵다"고 평가했다.[41]

7. 대중 문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감녕은 "금범적"이라 불리는 해적으로 묘사되며, 젊은 시절에는 무리와 함께 강호를 휩쓸고 다녔다고 한다. 황개의 "고육지책"에 감택과 협력하여 조조를 속이는 계략에 참여했고, 거짓 투항해 온 채중을 이용하여 적진에 불을 지르는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과장되거나 극적으로 묘사되었다.[46][47]

완성 공략전에서는 쇠사슬을 휘두르며 성을 함락시켰고, 유수로 침공한 조조에게는 부하 100명으로 야습을 가해 병사를 한 명도 잃지 않고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이때 아군끼리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 병사들의 머리에 거위 깃털을 붙였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하구 전투에서 능통의 아버지 능조를 죽였기 때문에[48], 능통과는 원수지간이었으나, 악진과의 전투에서 능통이 조휴의 화살을 맞고 위기에 처했을 때 감녕이 악진을 활로 쏘아 물리치면서 서로 화해하고 굳건한 친교를 맺게 된다.

이릉 전투에서는 병든 몸을 이끌고 출진했다가 사마가의 화살을 맞고 부지구의 큰 나무 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때 나무에 있던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그의 시신을 에워쌌다는 이야기가 묘사되었다.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과 ''무쌍 오로치''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또한, 토탈 워: 삼국에서도 유표 세력 소속으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삼국지》에서는 유성추를 사용하는 모습도 보인다.

참조

[1] 문서
[2] 서적 Sanguozhi
[3] 서적 Wu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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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Wu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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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Wu Shu
[12] 서적 Sanguozhi
[13] 웹사이트 楚关 http://www.cidianwan[...] 2018-04-07
[14]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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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Sanguozhi
[19] 간행물 Yingxiong Ji
[20] 서적 Wu Shu
[21] 서적 Sanguozhi
[22] 웹사이트 Gan Ning (Xingba) 甘寧 (興霸) http://kongming.net/[...] Copyright © 2002 - 2003 Lady Wu Translated from Chen Shou’s Sanguozhi 2003
[23]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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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서적 오서
[63] 서적 영웅기(英雄記)
[64] 문서
[65] 서적 오서
[66] 서적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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