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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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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건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여 조선인민군 창설에 기여한 인물이다.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만주 지린성에서 성장하여 항일 유격대 활동을 시작,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며 김일성의 측근이 되었다. 광복 후 연변에서 활동하다 1946년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설을 지휘하고 초대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나 1950년 지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평양의 강건종합군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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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강건
북한어강건
본명강신태 (강신태)
별명킹콩
인물 정보
출생1918년 6월 23일
출생지상주시, 경상북도, 대한민국, 일본 제국
사망1950년 9월 8일 (향년 32세)
사망지안동시, 경상북도, 대한민국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
충성조선인민군
복무 기간1945년–1950년
최종 계급중장
지휘총참모장
참전한국 독립 운동

국공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경력
소속 부대동북항일연군, 소련군, 동북민주연군, 조선인민군
지휘 경력총참모장
기타 정보
서훈공화국영웅

2. 생애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본명은 강신태이다.[1] 1918년 6월 23일 일제강점기 조선 상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2][3]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20]

16세인 1933년부터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민족 해방 운동에 참여했으며,[2][3] 어학 실력과 유격전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했다. 1935년 편성된 동북항일연군에서 저우바오중의 부하로 활동했고, 이후 김일성과 가까워져 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도 함께 소속된 핵심 측근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까지 이 부대에서 소련군 대위 계급의 장교로 복무했다.[5]

광복 후 다른 동료들이 귀국할 때 김창봉, 최광, 임철수 등과 함께 연변에 남아 활동하다가 1946년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설 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24] 중장 계급을 받았다.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총참모장으로 참전하여 인민군의 남침을 지휘했으나, 1950년 9월 8일 전선 시찰 중 고향 상주와 멀지 않은 경상북도 안동 부근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6][14]

사후 김일성박헌영이 장례식에서 직접 관을 운구했으며[2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15][20] 평양의 제1군관학교는 그의 공적을 기려 강건종합군관학교로 개명되었다. 아들 강창주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다.

2. 1. 초기 생애 및 항일 무장 투쟁

강건(본명: 강신태)[1]은 1918년 6월 23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상주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2][3]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20] 녕안시에서 공부하던 중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으며, 16세인 1933년경부터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여 민족 해방 운동과 군사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2][3]

그는 어학 실력이 뛰어나고 유격전에도 재능을 보여 어린 나이에 매우 빠른 승진을 했다. 10대 시절부터 오랜 친구인 김일성을 위해 반일 게릴라를 모집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키가 유난히 크고 종종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것으로 기억된다.[4]

1935년 편성된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제5군 소속으로 활동했으며,[7] 저우바오중(周保中)의 부하로 활동했다. 1936년에는 제5군 제3사 제9단 정치 위원을, 이후 제2로군 총지휘부 경위대 부 정치 위원을 지냈다. 만주에서 기린 평화 보위군을 조직하고 지휘하기도 했다.[7] 김일성 밑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다른 많은 인물들처럼 강건은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강건(그리고 만주에서 싸운 다른 한국인들)은 김일성보다 더 나은 군사적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김일성은 러시아인들과의 관계를 잘 구축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도자로 부상했다.[8]

1940년 12월, 당 간부 회의에서 북야영 당 임시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40년대 초,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다른 항일 부대원들과 함께 소련 영토로 이동했다.[5] 1942년, 한국군과 중국군으로 구성된 제88특별여단 제2대대 정치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소련군 대위 계급을 받았다. 1943년 가을에는 채세영이 행방불명되자 후임으로 제4대대장에 취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 부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5]

2. 2. 광복 후 활동 및 조선인민군 창군

광복 후 다른 동료들이 모두 귀국할 때 김창봉, 최광, 임철수와 함께 연변에 남아 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9월, 연길에 도착하여 소련군 연길 경비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활동했으며[20], 동북 지역 거주 조선인들 사이에서 높은 위신을 얻고 주보중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동북 지역 조선인들에게 군대 입대를 호소하여 많은 이들이 무기와 겨울 옷을 가지고 입대하도록 이끌었고, 이를 통해 7천 명 병력의 경비 제1단(단장: 박락권), 제2단(단장: 최명석), 제3단(단장: 박근식)을 결성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 연변위원회를 조직하고 당 서기에 취임했으며, 1946년 1월에는 동북 민주 연군 길동 군구 사령원 겸 연길 경비 제1여단장을 맡았다.

1946년 여름, 북한에서 민주 기지론이 형성되고 간부 부족 문제가 대두되자 북한으로 돌아와[9] 조선인민군 창설을 도왔다. 처음에는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임명되어[24] 중장 계급을 받았다.

200px, 김책, 김일, 그리고 강건이 1949년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국내에서 생산된 최초의 49식 기관단총을 받는 모습.]]

만주에서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던 강건은 김일성보다 더 나은 군사적 경력을 가졌다는 평가도 있지만[8], 김일성은 소련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지도자로 부상했다.[8] 강건은 총참모장으로서 소련 군사 전략가들의 도움을 받아 남침 계획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9], 침략을 이끌도록 선택되었다.[10] 그는 1948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강건은 무자비하면서도 공격적이고 목표 달성에 열정적인 군인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그가 지휘하는 군대의 성격에도 반영되었다.[11] 한국 전쟁 발발 후 총참모장으로 참전했으나, 1950년 9월 8일 전선 시찰 중 경상북도 안동 부근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사망했다.

강건이 사망한 후 김일성박헌영이 장례식에서 직접 관을 운구했으며[25],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평양의 제1군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 강건종합군관학교로 개명되었다.

2. 3. 한국 전쟁 참전과 사망

1948년 조선인민군 창군과 함께 초대 총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24], 소련 군사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 전쟁 남침 계획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9] 그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총참모장으로서 조선인민군의 남침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10] 강건이 이끄는 부대는 매우 공격적이었으며, 김일성의 요구대로 8월 15일까지 전쟁을 끝내려 하였다.[11] 그의 지휘 아래 인민군은 초기에 군사적 성공을 거두어 대한민국군유엔군부산 교두보까지 밀어붙였다.[12]

200px, 김책, 김일, 그리고 강건(오른쪽)이 1949년 김일성으로부터 49식 기관단총을 받는 모습.]]

1950년 8월 4일, 부산 교두보 전투가 시작되던 날 아침, 강건은 임시 지휘소로 사용하던 육류 포장 공장에서 미군의 500파운드 폭탄 공격을 받아 머리와 팔에 부상을 입었다.[13] 이후 전선 사령부를 전진시켜 후속 부대의 이동 상황을 시찰하던 중[20] 1950년 9월 8일, 자신의 고향인 경상북도 상주와 멀지 않은 안동시 부근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했다.[14]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화국영웅 칭호를 추서받았으며[15][20], 사망 이틀 뒤 평양에서 김일성박헌영이 직접 관을 운구하는 등[25]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16] 평양의 제1군관학교는 그의 이름을 따 강건종합군관학교로 개명되었다.

3. 사후

1968년 김일성은 강건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웠으며, 그의 이름을 딴 강건종합군관학교가 북한에 있다.[17]

4. 평가

유성철에 따르면, 강건은 군사 전술에 뛰어나고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전형적인 군인이었다고 한다[21]. 이러한 면모 때문에 김일성보다 소련 측의 신임을 더 얻었으며, 해방 후에도 조선이 아닌 만주에 파견되었다는 평가가 있다[21].

허진은 강건이 "정치학 및 전투 훈련에서 항상 김일성보다 성적이 좋았다. 사물에 대한 판단력과 기억력, 사업 조직력이 뛰어나 참모들로부터 매우 유능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러시아어도 빨리 배워 통역 없이도 소련 지휘관들과 의견을 교환할 정도였다"라고 평가했다.

사후 북한에서는 강건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이름을 딴 강건종합군관학교가 설립되었고, 1968년에는 김일성의 지시로 동상이 세워졌다[17][20]. 또한, 그가 지휘했던 인민군 제2사단은 "근위 강건 제2보병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았다[22].

5. 강건을 다룬 작품

6. 훈장

참조

[1] 서적 The War For Korea, 1950–1951 University Press of Kansas
[2] 서적 The Korean War: A Histor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3] 서적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Columbia University Press
[4] 서적 Enter the Dragon, China's Undeclared War Against the U.S. in Korea, 1950–51
[5] 웹사이트 North Korean Korean Leaders During the Korean War http://www.paulnoll.[...] 2013-12-09
[6] 웹사이트 Eye Witness: A North Korean Remembers http://www.johndclar[...] 2013-12-09
[7] 서적 Communism in Korea: The Societ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8] 서적 The War For Korea, 1950–1951 University Press of Kansas
[9] 웹사이트 North Korean Korean Leaders During the Korean War http://www.paulnoll.[...] 2013-12-09
[10] 서적 The War For Korea, 1950–195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1] 서적 The War For Korea, 1950–1951 University Press of Kansas
[12] 서적 Enter the Dragon, China's Undeclared War Against the U.S. in Korea, 1950–51
[13] 서적 Enter the Dragon, China's Undeclared War Against the U.S. in Korea, 1950–51
[14] 웹사이트 Eye Witness: A North Korean Remembers http://www.johndclar[...] 2013-12-09
[15] 웹사이트 North Korean Korean Leaders During the Korean War http://www.paulnoll.[...] 2013-12-09
[16] 웹사이트 Eye Witness: A North Korean Remembers http://www.johndclar[...] 2013-12-09
[17] 서적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Columbia University Press
[18] 서적 朝鮮戦争 恒文社
[19] 서적 北朝鮮五十年史―「金日成王朝」の夢と現実 朝日新聞社
[20] 서적 朝鮮戦争 (下) (歴史群像シリーズ (61))
[21] 뉴스 6ㆍ25때 북한군 작전국장/유성철 “나의 증언”:3 http://www.hankookil[...] 1990-11-03
[22] 웹사이트 조국해방전쟁에서 위훈을 세운 근위부대들 http://www.naenara.c[...] 네나라 2015-07-27
[23] 뉴스 소련 거점‘김일성의 88여단’은 북한 인민군 모체가 됐다 https://news.naver.c[...] 2014-08-18
[24] 간행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전쟁은 술로 시작됐다 http://shindonga.don[...] 신동아 2000-05
[25] 뉴스 6·25전후 北 희귀영상 공개 http://www.donga.com[...] 2007-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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