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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록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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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거록 대전은 기원전 208년, 진나라 말기에 일어난 전투로,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와 항우가 지휘하는 초나라 군대의 대결이었다. 장한은 조나라를 공격하여 한단을 포위했고, 초나라는 송의와 항우를 파견하여 구원하려 했다. 송의가 항우의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제나라로 사자를 보내는 등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고, 항우는 송의를 살해하고 지휘권을 장악했다. 항우는 파부침주의 결의로 황하를 건너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왕리, 소각, 섭간 등 진나라 장수들을 물리쳤다. 전투 결과 항우는 승리했지만, 항복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거록 전투는 항우의 명성을 드높였으나, 이후 초한 전쟁의 발발을 초래하는 등 역사적,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는 "파부침주", "일당십" 등의 고사성어를 남겼으며, 20만 명의 진나라 군인들이 생매장된 '초갱' 유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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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록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거록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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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록 대전
개요
일부초한전쟁
날짜기원전 207년
장소핑샹 현, 싱타이 시, 허베이 성, 중국
결과초나라의 승리
결과 상세진나라의 군사력 심각한 약화
교전 세력
교전국 1초나라
교전국 2진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초나라 지휘관항우
영포
종리말
진나라 지휘관장한 (항복)
사마흔 (항복)
동예 (항복)
왕리 (포로)
사견 (전사)
소교 (전사)
병력 규모
초나라 병력7만 명 (초나라 군대), 8만 명 이상 (다른 반란 국가 군대, 전투 참여 X)
진나라 병력20만 명 (왕리 군대), 20만 명 (장한 군대, 전투 참여 X)
사상자 및 피해
초나라 사상자알 수 없음, 비교적 적음
진나라 사상자전투 중 20만 명 사망
전투 5개월 후, 장한 군대 20만 명 이상 항복 후 생매장

2. 배경

진나라 말기, 진승·오광의 난을 비롯한 대규모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반란군을 진압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황하를 건너 조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 군주 조헐초 회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다.[1]

초 회왕은 송의와 항우에게 군대를 맡겨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고, 한 고제에게는 진나라 본토인 관중을 공격하도록 했다. 회왕은 관중을 먼저 정복하는 자에게 "관중왕" 칭호를 수여하겠다고 약속했다.[1]

송의의 군대는 거록 (핑샹 현, 싱타이 시, 허베이 성) 근처 안양에 도착하여 46일 동안 주둔했다. 항량의 복수를 원했던 항우는 송의에게 공격 명령을 요청했지만, 송의는 거절했다. 폭우로 병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자, 항우는 이를 이용해 송의를 살해하고 군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항우는 송의가 초나라를 배신하고 제나라와 공모했다고 주장하며, 초 회왕에게서 송의를 처형하라는 비밀 명령을 받았다고 발표했다.[1]

2. 1. 진나라 군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진승·오광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수도 함양에서 출격하여, 순조롭게 반란군을 격파하고 진승, 오광 및 항량과 같은 반란군 지휘관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1] 이후 장한은 조(趙)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나라로 침공하여 수도 한단을 파괴하고, 조왕과 장이가 웅거하는 거록성을 부하 왕리, 소각, 섭간에게 포위하게 했다.[1]

2. 2. 초나라 군대

초 회왕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송의를 총사령관으로, 항우를 부장으로 임명하여 조나라 구원에 나섰다.[1] 송의는 안양에 도착하여 46일 동안 주둔했다.[1] 그는 진나라 군대와 조나라 군대가 서로 싸워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소극적인 전략을 취했다.[2]

한편, 항우는 숙부 항량의 복수를 위해 적극적으로 진나라 군대와 싸우기를 원했다.[1] 항우는 송의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것을 요청했지만, 송의는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처형하겠다는 지시를 내렸다.[1]

송의는 아들 송양을 제나라에 보내고, 아들을 위한 송별회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 폭우로 인해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항우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송의에 대한 병사들의 분노를 부추겼다.[1] 결국 항우는 송의를 기습하여 살해하고, 송의가 제나라와 공모하여 초나라를 배신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초나라 군대를 이끌게 되었다.[1]

3. 전투의 전개

항우는 영포종리말에게 2만 명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거록을 지원하도록 보냈으며, 이들은 몇 차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했다.[1] 기원전 208년 12월, 항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영포, 종리말과 합류했다. 당시 거록은 장한의 부장 왕리에게 오랫동안 포위되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항우의 군대는 "모든 초나라 군인이 열 명의 적을 상대하는"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고, 결국 9번의 전투 끝에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사상자가 10만 명을 넘어서자 장한은 거록에서 지원으로 후퇴하여 함양(진나라 수도)의 증원군을 기다리며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40만 명의 진나라 군대를 격파한 항우의 용맹함에 감탄한 다른 반란 세력은 항우에게 합류했고, 항우의 군대는 40만 명으로 늘어났다. 항우가 진영 문에서 이들을 맞이했을 때, 반란군 지휘관들은 무릎을 꿇고 감히 항우를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워했다.

3. 1.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결의

항우는 영포에게 선발대를 맡겨 거록으로 급행하게 했다. 그러나 영포는 병력에서 우세한 진나라 군대에게 고전했기에, 항우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넜다. 그리고 3일치의 식량만을 남겨두고, 도하에 사용했던 배와 요리용 솥 등을 모두 황하에 버렸다.[1]

이는 병사들에게 배수의 진을 치게 하여,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필사즉생의 각오를 심어준 것이다. 이러한 결의는 서양의 "돌아갈 다리를 불태우다(to cross the Rubicon)"라는 속담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3. 2. 거록 전투의 승리

항우는 영포종리말에게 2만 명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거록을 지원하도록 보냈으며, 그들은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했다.[1] 기원전 208년 12월, 항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영포와 종리말과 합류했다. 항우는 부하들에게 3일치의 식량만 챙기도록 명령하고, 나머지 식량과 솥, 조리 도구를 모두 파괴하고 강을 건너는 데 사용했던 배를 침몰시켰다.

항우의 군대는 매우 격렬하게 싸웠고, 결국 9번의 연속된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왕리의 보급선이 끊어졌고 진나라 군대는 치명적인 패배를 겪었다. 진나라 장수 소각(蘇角|소각중국어)은 전투 중에 사망했다.[1] 한편, 왕리는 포로로 잡혔다. 섭간(涉間|섭간중국어)은 항복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길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장한은 지원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항우가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다른 반란 세력의 군대가 조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거록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거대한 진나라 군대를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전투 지역 외곽에 주둔했다. 항우가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을 때, 다른 반란군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들의 진영에서 전투를 지켜보았다. 항우가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것을 본 후, 다른 반란 세력은 그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그에게 합류했다.

4. 전투의 결과

항우의 초군은 병력에서 열세였음에도 거록 대전에서 승리하여, 항우 휘하에 제후의 병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장한진나라 군대는 이후 아홉 번에 걸친 항우의 제후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패배했다.[1] 거듭된 패배로 사기가 떨어진 장한은 사마흔동예의 설득에 따라 초군에 항복했고, 진나라는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을 잃게 되었다.[1]

항우는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 명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의심하여, 기원전 207년 11월 신안(新安; 현재의 이마, 허난성)[2] 외부 남쪽에서 영포에게 이들을 모두 생매장하라고 명령했다.[2]

거록 대전 승리 후,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관중으로 향하여 진나라의 심장부를 침략할 준비를 했다. 기원전 207년 겨울, 마지막 진나라 황제 자영은 유방에게 함양에서 항복했고, 이는 진나라의 종말을 가져왔다.[1] 항우는 홍문 연회 이후, 기원전 206년 초 유방이 군대를 함양에서 철수시키자 함양을 점령했다. 항우는 자영과 그의 가족을 처형하고, 아방궁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1]

이후 유방은 한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한, 사마흔, 동예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초한 전쟁이 시작되었다.[1]

4. 1. 진나라 군대의 항복

항우의 초군이 병력에서 열세였음에도 승리하면서, 항우 휘하에 제후의 병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장한진나라 군대는 이후 아홉 번에 걸친 항우의 제후 연합군과의 회전에서 모두 패배했다.[1] 거듭된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장한은 부하인 사마흔동예의 설득에 따라 초군에 항복했고, 이로써 진나라는 사실상 전쟁 수행 능력을 잃게 되었다.[1]

장한은 부장 사마흔을 함양으로 보내 원군과 물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환관 조고는 진이세 황제를 속여 장한이 군사적으로 실패하고 반란군과 공모했다고 거짓으로 고발했고, 황제는 장한의 요청을 묵살했다. 조고는 심지어 암살자를 보내 사마흔을 암살하려 했지만, 사마흔은 살아남아 장한에게 보고했다.

장한이 퇴각할지 항복할지 고민하는 동안, 항우의 군대는 장한을 완전히 포위하여 진나라 군대가 철수하는 것을 막았다. 궁지에 몰린 장한은 부장 사마흔, 동이와 함께 병사 20만 명을 이끌고 기원전 207년 여름, 마침내 항우에게 항복했다.

4. 2. 항복한 진나라 군사 학살

항우는 항복한 진나라 군사 20만 명이 불충하다고 여겼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의심하여 기원전 207년 11월 신안(新安; 현재의 이마, 허난성)[2] 외부 남쪽에서 모두 생매장했다. 항우는 진나라 군사들을 군대의 식량 공급에 부담을 주는 짐으로도 여겼다. 영포는 항우의 명령에 따라 이 학살을 실행했다.[2]

4. 3. 진나라의 멸망과 초한 전쟁의 시작

거록 전투의 승리 이후,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관중으로 향하여 진나라의 심장부를 침략할 준비를 했다. 기원전 207년 겨울, 마지막 진나라 황제 자영은 유방에게 함양에서 항복했고, 이는 진나라의 종말을 가져왔다.[1] 항우는 관중으로 들어가는 동쪽 관문인 한곡관에 도착했을 때, 유방이 이미 관중을 점령한 것을 보았다. 항우는 유방이 회왕의 이전 약속에 따라 "관중왕"이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불쾌해했다.[1] 홍문 연회 이후, 기원전 206년 초 유방이 군대를 함양에서 철수시키자 함양을 점령했다. 항우는 자영과 그의 가족을 처형하고, 아방궁을 불태우도록 명령했다.[1]

병력에서 열세였던 항우의 초군이 승리하면서 항우 휘하에 제후의 병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장한진나라 군대는 이후 아홉 번에 걸친 항우의 제후 연합군과의 회전에서 모두 패배했고, 최종적으로 장한이 부하인 사마흔동예의 설득에 따라 초군에 항복하면서 진나라는 계속 전쟁 수행 능력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었다.[1]

항우는 장한, 사마흔, 동예를 휘하에 두었지만, 진나라 군대의 항복한 병사 20만 명이 불온한 기미를 보이자 영포에게 모두 죽이도록 했다.[1]

그 후, 제후 연합군은 함양으로 진군했고, 항우는 먼저 함양을 점령했던 초의 장군 유방과 함양 교외에서 회견(홍문 연회)했다.[1]

초의 회왕(의제)은 항우와 유방 중 함양을 포함한 관중을 먼저 평정한 자에게 관중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르면 관중은 유방에게 주어져야 했지만, 항우는 압도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회왕과의 약속을 뒤엎고, 유방을 변경의 한중으로 좌천시켰다. 한편 관중은 항우의 영향력 아래 있던 장한, 사마흔, 동예 세 사람에게 분할하여 주었다.[1]

이후 유방은 한중에서 거병하여 장한, 사마흔, 동예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초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1]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거록 대전' 문서의 '역사적 의의 및 평가' 섹션 내용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원문 소스가 제공되어야 수정이 가능합니다.)

6. 대중문화 속 거록 전투

대중문화에서 거록 대전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 '''파부침주(破釜沉舟)''':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결사의 각오로 싸움에 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영어 표현으로는 "to cross the Rubicon"(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다) 또는 "to reach the point of no return"(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다)과 유사하다.
  • '''일당십(以一當十)''':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당해낸다는 뜻으로, 매우 용맹함을 이르는 말이다.
  • '''좌벽상관(坐壁上觀)''':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의 싸움을 구경만 한다는 뜻으로,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이다.


명나라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모곤(茅坤)은 거록 대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항우가 전투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순간이자, ''사마천''이 가장 만족스러워했던 기록이다."[3]

청나라의 예술가 정판교는 ''거록 대전''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잔혹함과 야만성은 기만과 교활함에 가려져 있었고, 조조주온은 모두 왕좌를 주장했다. 이것은 멋진 말을 탄 영웅과 아름다운 처녀와 같은 것이 아니며, 오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4]

6. 1. 성어(관용구)


  • "파부침주"(破釜沉舟중국어):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결사의 각오로 싸움에 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 영어의 "to cross the Rubicon"(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다) 또는 "to reach the point of no return"(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다)과 유사하게 사용된다.
  • "일당십"(以一當十중국어):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당해낸다는 뜻으로, 매우 용맹함을 이르는 말.
  • "좌벽상관"(坐壁上觀중국어):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의 싸움을 구경만 한다는 뜻으로,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

6. 2. 문학 작품

명나라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모곤(茅坤중국어)은 거록 대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항우가 전투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순간이자, ''사마천''이 가장 만족스러워했던 기록이다."[3]

청나라의 예술가 정판교는 ''거록 대전''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잔혹함과 야만성은 기만과 교활함에 가려져 있었고, 조조주온은 모두 왕좌를 주장했다. 이것은 멋진 말을 탄 영웅과 아름다운 처녀와 같은 것이 아니며, 오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4]

참조

[1] China -- Periodicals -- History 中國歴史學會史學集刋 Volumes 35-36 https://books.google[...] 該學會 (The Society) 2003
[2] 웹사이트 义马 http://ha.xinhuanet.[...]
[3] 문서 (項羽最得意之戰,太史公最得意之文。)
[4] 문서 (千奸萬黠藏凶戾,曹操朱溫皆稱帝。何似英雄駿馬與美人,烏江過者皆流涕。)
[5] 웹사이트 http://hk.crntt.com/[...] 2017-08-10
[6] 기타 出典は中国国際放送の『『史記・項羽本紀』②〜頭角を現す項羽〜』
[7] 서적 秦末汉初大变局 辽宁人民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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