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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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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성신사는 일제강점기인 1898년 서울 남산에 일본 이세 신궁의 신체를 모셔 '남산대신궁'으로 창건된 신사이다. 1916년 경성신사로 개칭되었으며, 국토 개발의 시조로 여겨지는 신들을 합사하고 국폐소사로 격상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폐지되었으며, 이후 숭의여자대학교가 들어섰다. 경성신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숭배하였으며, 한국적인 색채를 드러내기 위해 조선 구니타마를 단군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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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종교신토
위치경기도 경성부 왜성대정
건립일1898년 11월 3일
파괴일1945년 11월 17일
제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오나무지노미코토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
단군?
신사 격국폐소사
예제일10월 18일
로마자 표기Keijō-jinja
일본어 명칭京城神社
한국어 명칭경성신사
이미지
신사 복합 시설 일부

2. 역사

1892년경, 한성(현재의 서울) 거류 일본인 유지들에 의해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위한 요배소(遙拝所, 원거리 참배소)가 설치되었다.[7] 일청전쟁 이후인 1897년, 한성 주재 일본 영사와 조선 정부 간에 남산 북록 일부에 대한 영구 임대차 계약이 체결되자, 거류지회에서는 이를 “왜성대공원(倭城台公園)”이라 명명하여 정비하였다. 1926년 3월, 시자총대회(氏子總代會) 결의에 따라 경내 확장과 사전(社殿) 건립이 계획되었다. 1936년에는 봉찬회(奉賛會)가 설립되었으나, 시국 때문에 자재 조달이 어려워 착공하지 못했다.[12] 1945년 11월 17일에 폐지되었다.[13]

2. 1. 초기 역사 (남산대신궁)

1898년 10월 3일 서울의 일본거류민단이 일본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신체(神體) 일부를 가져와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을 창건하였다.[7][8][9] 1916년 5월 22일 정식 신사가 되어 경성신사로 개칭되었다.[10] 1929년 9월 서쪽 50m 지점에 신사를 다시 짓고 천좌식(遷座式)을 열었다. 예전 건물은 절사(節社)인 하치만구(八幡宮)의 사전(社殿)이 되었다. 1936년 8월 1일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국폐소사로 격상되었고,[11] 절사로 하치만구(八幡宮)·이나리샤(稻荷社)가 있었다.

2. 2. 경성신사로 개칭

1898년 10월 3일 서울의 일본거류민단이 일본 이세신궁에 모셔진 신체(神體) 일부를 가지고 와서 남산 왜성대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창건하였다.[8][9] 1916년 5월 22일 정식 신사가 되어 경성신사로 개칭하였다.[10]

2. 3. 신사 확장 및 국폐소사 격상

1898년 10월 3일 서울의 일본거류민단이 일본 이세신궁(伊勢神宮)에서 신체(神體) 일부를 가져와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을 창건하였다.[8][9] 1916년 5월 22일 정식 신사가 되면서 경성신사로 개칭되었다.[10] 1929년 9월 서쪽 50m 지점에 신사를 다시 짓고 천좌식(遷座式)을 열었으며, 이전 건물은 절사(節社)인 하치만구(八幡宮)의 사전(社殿)이 되었다. 1936년 8월 1일 조선총독부가 관리 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국폐소사(國幣小社)로 격상되었고,[11] 절사로 하치만구(八幡宮)·이나리샤(稻荷社)가 있었다.

2. 4. 신사 철거 및 이후

1945년 경성신사는 해체되었다. 신사가 철거된 자리에는 일시적으로 단군성조묘(檀君聖祖廟)가 세워졌다가 현재는 숭의여자대학교가 들어서 있다.[13]

3. 신앙

경성신사는 아마테라스를 주신으로 모셨고, 이후 오쿠니타마, 오쿠니누시, 스쿠나히코나를 추가로 합사했다.[2] 이 신사는 쿠니타마를 '조선 쿠니타마'로 칭하며 한국적인 색채를 드러냈는데, 지역 주민들은 이를 단군과 동일시하기도 했다.[2] 1936년 조선총독부는 오쿠니타마가 단군이 아니며, 한국 신의 일반적인 명칭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그 이름을 구니타마노오카미로 변경했다.[2]

3. 1. 초기 신앙 (아마테라스)

처음에는 이 신사는 아마테라스만을 숭배했지만, 나중에 일본 식민지 신사에서 사용된 開拓三神|가이타쿠 산진일본어인 오쿠니타마, 오쿠니누시, 스쿠나히코나를 추가했다.[2]

독특하게도 이 신사는 구니타마를 조선 구니타마라고 언급하여 한국적인 색채를 뚜렷하게 드러냈는데, 이는 이 신사가 많은 한국 풍습을 통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2] 많은 지역 주민들은 "조선 구니타마"를 단군과 동일시했다.[2]

1936년 정부는 오쿠니타마가 실제로는 한국 신의 일반적인 명칭이지 단군이 아니라는 내용의 메모를 발표했다. 또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비슷하게 이름을 구니타마노오카미로 변경했다.[2]

3. 2. 개척삼신 합사

경성신사는 처음에는 아마테라스만을 모셨으나, 이후 일본 식민지 신사에서 사용된 개척삼신(開拓三神)인 오쿠니타마|おおくにたま일본어, 오쿠니누시|おおくにぬし일본어, 스쿠나히코나|すくなひこな일본어를 추가로 합사했다.[2]

특이하게도 이 신사는 쿠니타마를 '조선 쿠니타마'라고 칭하여 한국적인 색채를 뚜렷하게 드러냈는데, 이는 이 신사가 많은 한국 풍습을 통합하려 했기 때문이다.[2] 많은 지역 주민들은 '조선 쿠니타마'를 단군과 동일시했다.[2]

1936년 조선총독부는 오쿠니타마가 실제로는 단군이 아니라 한국 신의 일반적인 명칭이라는 내용의 메모를 발표했다. 또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비슷하게 이름을 쿠니타마노오카미로 변경했다.[2]

3. 3. 조선 쿠니타마와 단군

처음에는 이 신사는 아마테라스만을 숭배했지만, 나중에 일본 식민지 신사에서 사용된 開拓三神|가이타쿠 산진일본어인 오쿠니타마, 오쿠니누시, 스쿠나히코나를 추가했다.[2]

독특하게도 이 신사는 쿠니타마를 조선 쿠니타마라고 언급하여 한국적인 색채를 뚜렷하게 드러냈는데, 이는 이 신사가 많은 한국 풍습을 통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2] 많은 지역 주민들은 "조선 쿠니타마"를 단군과 동일시했다.[2]

1936년 정부는 오쿠니타마가 실제로는 한국 신의 일반적인 명칭이지 단군이 아니라는 내용의 메모를 발표했다. 또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비슷하게 이름을 쿠니타마노오카미로 변경했다.[2]

4.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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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Assimilating Seoul: Japanese Rule and the Politics of Public Space in Colonial Korea, 1910–1945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 서적 Overseas Shinto Shrines: Religion, Secularity and the Japanese Empire Bloomsbury Academic 2022-10-06
[3] 간행물 소울・남산의 신역화-식민도시와 신사 경내
[4] 기록 신사 제신 병창립 조사표
[5] 간행물 내무성 고시 제264호 관보 제5660호 1945-11-22
[6] 웹사이트 [다크 헤리티지를 찾아서] 서울미래유산에 남겨진 일제 신사의 유구 https://www.fnnews.c[...] 2018-02-02
[7] 기록 신사 명세장 (경성신사)
[8] 간행물 소울・남산의 신역화-식민도시와 신사 경내
[9] 기록 신사 제신 병창립 조사표
[10] 간행물 신사 창립 허가 조선총독부 관보 제1141호 1916-05-25
[11] 간행물 조선총독부 고시 제434호 조선총독부 관보 호외 1936-08-01
[12] 기록 경성신사봉찬회설립취의병희망
[13] 간행물 내무성 고시 제264호 관보 제5660호 194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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