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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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신궁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경성부 남산에 건립된 신사이다. 일제는 신사 참배를 강요하며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고, 조선신궁은 그 중심 역할을 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모셨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 참배가 강요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남산공원과 안중근의사기념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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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종교 | 신토 |
모시는 신 | 구니타마 오카미 아마테라스 오카미 |
일본어 명칭 | 조센진구 |
한국어 명칭 | 조선신궁 |
위치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30-65 (과거 일본 제국 경기도 경성부 남산) |
상세 정보 | |
창건 | 1925년 10월 |
본전 양식 | 신명조 |
예제일 | 10월 17일 |
사격 | 관폐대사·칙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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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19년 7월 18일,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모시는 "조선신사(朝鮮神社)"를 창립하고 관폐대사(官幣大社)로 격상한다는 칙령이 내려졌다.[11] 1920년 남산 정상에 20만 평(약 660000m2) 부지에 경내 23000m2 규모로 총 공사비 150만엔을 들여 신전 건립에 착수, 6년 만에 완공하였다. 정문은 돌계단 참배길이었고, 동서로 두 개의 참배길이 더 있었다. 이토 주타가 설계한 본전, 신고(神庫), 축사사(祝詞舎), 수각문(瑞垣門), 칙사전(勅使殿), 수수사(手水舎), 사무소 등이 있었다. 초대 궁사(宮司)는 다카마쓰 시로(高松四郎)였다.[12]
1925년 6월 27일, "조선신사"가 "조선신궁"으로 개칭되었고,[13] 9월 14일에는 진좌제(鎮座祭) 날짜(10월 15일)와 예제일(例祭日)(매년 10월 17일)이 정해졌다.[14] 10월 15일, 원지장전 차장이 칙사로서 신령 위패를 봉안하고 진좌 의식을 거행했으며, 17일에는 원지칙사의 참배 아래 첫 예제가 거행되었다. 이후 예제 때마다 칙사가 참배했고, 궁사는 칙임대우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신궁경기대회"가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되어 야구, 테니스, 육상 경기 등이 열렸다.[15] 이 대회는 1941년 제17회까지 매년 가을 정례 행사로 개최되었다.[16]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신궁은 폐쇄되었다.[17]
2. 1. 건립 배경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조선총독부는 신토를 장려하여 식민 통치와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1912년부터 조선신궁 건립 예산을 편성, 경성부 남산 한양공원에 자리를 잡았다.[1]1920년 기공식을 시작으로 15개 건물과 돌계단, 참배길 등을 조성했다. 조선교육회는 헌목 운동으로 학생 헌금을 모아 나무를 심었다. 1925년 10월 15일,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명칭을 바꾸고 진좌제 행사를 열었다.[11][12][13][14]

1910년 한국 병합 이후, 일본은 일본화 정책을 추진하며 신토 신사 참배를 장려했다.[1][2] 1925년부터 학생들의 신사 참배가 의무화되었고, 1935년에는 대학생과 공무원도 신토 의례에 참석해야 했다.[3][4]
小笠原省三|오가사와라 쇼조일본어는 国魂|쿠니타마일본어 개념으로 일본과 한국 종교 융합을 주장했다. 일부는 단군을 스사노오노미코토와 동일시했으나, 정부는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조선신궁에 일반적인 国魂|쿠니타마일본어를 봉안, 신자들이 자유롭게 해석하도록 했다.[5] 그러나 조선신궁 당국은 国魂|쿠니타마일본어를 "조선 国魂|쿠니타마일본어"로 부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토착 단군 신앙은 아마테라스 숭배에 밀려 억압되었다.[5]
1925년 10월, 신궁 이름을 딴 “조선신궁경기대회”가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되어 야구, 테니스, 육상 경기 등이 열렸다.[15] 이 대회는 1941년 10월 제17회까지 매년 가을 정례 행사로 개최되었다.[16]
2. 2. 조선신궁 건립과 운영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조선총독부는 각 지역에 관립 신사를 세우고 민간 신사도 지원하며 신토를 장려했다. 이는 조선에서 일본의 식민 행정과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912년부터 조선신궁 건립 예산을 편성하여 경성부 남산 한양공원에 자리를 정했다.[1]1920년 기공식을 갖고 15개의 건물과 돌계단, 참도 등을 조성했다. 조선교육회는 헌목 운동을 벌여 학생들의 헌금을 모아 나무를 심었다. 5년 동안 작업한 끝에 1925년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0월 15일 진좌제 행사를 열었다.[6]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에게 봉헌되었다.[6] 이세 신궁의 신명 양식으로 건축되었다.[7][8]
1910년 한국의 병합 이후, 일본 정부는 일본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종교적 행위이기도 했지만 애국심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던 신토 신사 참배를 포함했다.[1][2] 1925년부터는 학생들의 신토 신사 참배가 의무화되었고, 1935년에는 대학생과 공무원들의 신토 의례 참석이 의무화되었다.[3][4]
小笠原省三|오가사와라 쇼조일본어는 国魂|lt=Okunitama|simple|Kunitama Omikami일본어 개념을 사용하여 일본과 한국의 종교를 융합하려는 주장을 옹호했다. 일부 사람들은 단군을 스사노오노미코토와 동일시했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조선신궁에 일반적인 오쿠니타마를 봉안하여 신자들이 자신만의 해석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5] 小笠原省三|오가사와라 쇼조일본어는 이러한 입장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그의 옹호는 조선신궁과 京城神社|ko=경성신사|simple=1일본어에 오쿠니타마를 봉안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5]
그러나 조선신궁의 국가 당국은 오쿠니타마를 "조선 오쿠니타마"라고 부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토착적인 단군 전통은 신사에서 아마테라스를 숭배하는 것을 선호하여 억압되었다.[5]
1930년대 정부가 사람들의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신사 참배가 증가했다.[5][6] 이로 인해 이 신사를 비롯한 다른 신사들은 많은 원망의 대상이 되었고, 1945년 한국 해방 후 며칠 만에 많은 신사들이 불타 없어졌다.[6]
1919년 7월 18일,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을 신으로 모시는 “조선신사(朝鮮神社)”를 창립하고 관폐대사(官幣大社)로 격상한다는 칙령이 내려졌다.[11] 1920년 남산 정상의 20만 평(약 660000m2)의 용지에 경내 23000m2 규모로 총 공사비 150만엔을 들여 신전 건립에 착수하여 6년 만에 완공하였다. 돌계단으로 된 정문 참배길 외에도 동서로 두 개의 참배길이 있었고, 이토 츄타(伊東忠太) 설계의 본전, 신고(神庫), 축사사(祝詞舎), 수각문(瑞垣門), 칙사전(勅使殿), 수수사(手水舎), 사무소 등이 있었다. 초대 궁사(宮司)는 다카마쓰 시로(高松四郎)였다.[12]
1925년 6월 27일, “조선신사(朝鮮神社)”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개칭되었고,[13] 같은 해 9월 14일에는 진좌제(鎮座祭) 날짜(같은 해 10월 15일)와 예제일(例祭日)(매년 10월 17일)이 정해졌다.[14]
1925년 10월 15일, 원지장전(園池掌典) 차장이 칙사(勅使)로서 신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진좌(鎮座)의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7일에는 원지칙사(園池勅使)의 참배 아래 첫 예제가 거행되었다. 이후 예제 때마다 칙사의 참배가 있었고, 본사의 궁사(宮司)는 칙임대우였다.
신사 창건 같은 해 10월, 신궁 이름을 딴 기념 체육제인 “조선신궁경기대회(朝鮮神宮競技大会)”가 막 완공된 경성운동장(京城運動場)(현재의 서울 흥인지문 운동장)에서 개최되어 야구, 테니스, 육상 경기 등이 진행되었다.[15] 이 종합 스포츠 대회는 1941년 10월 제17회까지 개최되어 매년 가을의 정례 행사가 되었다.[16]
2. 3.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총독부는 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22] 중일전쟁이 시작된 1937년 이후에는 신사 참배 강요가 더욱 심해졌다.[22] 이에 따라 조선신궁을 비롯한 여러 신사들은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6]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신사참배 강요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으로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던 일본은, 그동안 기독교 교회 내부에 비교적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허용해왔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압력도 강해졌다.
1939년에는 장로교회가 경찰관 입회하에 신사 참배를 결의했고, 이에 반대한 약 2000명의 목사와 신도가 체포·투옥되었다(신사참배거부운동). 일본기독교단은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조선의 교회에 파견되어 “국가의 제사를 요구하는 것은 개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논리로 반대파 목사들을 설득했다. 신사 참배 거부 운동으로 인해 200여 개의 교회가 폐쇄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2. 4. 폐쇄와 그 이후
1945년 8월 16일, 태평양 전쟁 종전 이튿날 일본인들은 조선신궁에서 신들을 하늘로 돌려보낸다는 의미의 승신식을 거행하고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10월 7일에는 남은 시설을 모두 소각했다.[6] 한국에 있던 많은 신사들이 한국인들에 의해 불태워진 것과 달리, 조선신궁은 일본인들이 직접 폐쇄 행사를 진행했고, 신물(神物)은 일본으로 보내졌다.[6]이후 조선신궁 터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었고,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2][9][6] 또한, 같은 장소에 또 다른 독립운동가인 김구의 동상도 세워졌다.[6]
3. 논란
조선신궁 건립이 결정된 직후, 이마이즈미 사다스케(今泉定助), 아시즈 고지로(葦津耕次郎), 카모 히야키(賀茂百樹)(카모 마부치(賀茂真淵) 후손), 히다 케이지(肥田景之) 등 신사 관계 유력자들과 1938년에 “해외신사협회(海外神社協会)”를 조직한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 등은 "조선신궁에는 조선 국토의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919년 일본 정부가 발표한 "제신을 천조대신(天照大神)과 메이지 천황으로 한다"는 방침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하며 일본 정부 및 총독부와 논쟁을 벌였다.[19]
오가사와라는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한 내선융화의 일고찰(朝鮮神宮を中心としたる内鮮融和の一考察)』,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내선 양민족의 미래에 미치는 것(朝鮮神宮を拝して内鮮両民族の将来に及ぶ)』을 저술하여, 신도는 예로부터 그 땅의 신과 위인을 섬기고, 그 땅의 양식을 도입한 신사를 건립해 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조선신궁에는 조선의 위인을 섬기고, 조선의 양식을 주로 한 사전을 건축해야 하며, 신직(神職)에는 조선 명가의 유서 깊은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21]
일부 신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단군 봉제론이 일어났으나, 이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 신사신보사(神社新報社)는 “해외의 신영토에 천조대신을 섬기는 것은 유럽 여러 나라가 아시아의 식민지에 기독교를 수반한 것과 비슷하지만, 일본의 사상에는 없는 것이며, 신도 사상의 변질이다”라고 비판했다.[19]
3. 1. 조선신궁 제신 논쟁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는 国魂|lt=Okunitama|simple|Kunitama Omikami일본어 개념을 사용하여 일본과 한국의 종교를 융합하려는 주장을 옹호했다. 일부 사람들은 단군을 스사노오노미코토와 동일시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조선신궁에 일반적인 오쿠니타마를 봉안하여 신자들이 자신만의 해석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5] 오가사와라 쇼조는 이러한 입장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그의 옹호는 조선신궁과 경성신사(京城神社)에 오쿠니타마를 봉안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5]그러나 조선신궁의 국가 당국은 오쿠니타마를 "조선 오쿠니타마"라고 부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토착적인 단군 전통은 신사에서 아마테라스를 숭배하는 것을 선호하여 억압되었다.[5]
조선신궁 착좌 직전에, 이마이즈미 사다스케(今泉定助)·아시즈 고지로(葦津耕次郎)·카모 히야키(賀茂百樹)(카모 마부치 후손)·히다 케이지(肥田景之)(신직, 실업가, 중의원 의원[18]) 등 신사 관계 유력자들과, 후에 1938년에 “해외신사협회”를 조직한 오가사와라 쇼조 등이 “조선신궁에는 조선 국토의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1919년 일본 정부가 발표했던 “제신을 아마테라스(天照大神)·메이지 천황으로 한다”는 방침의 재검토를 요구하여, 일본 정부·총독부와 신사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었다.[19] 오가사와라는 『조선신궁을 중심으로 한 내선융화의 일고찰』,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내선 양민족의 미래에 미치는 것』을 저술하여, 신도는 고래로부터 그 땅의 신과 위인을 섬기고, 그 땅의 양식을 도입한 신사를 건립해 왔으므로, 조선신궁에는 조선의 위인을 섬기고, 조선의 양식을 주로 한 사전을 건축해야 하며, 신직에는 조선 명가의 유서 깊은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21] 신사인들 사이에서는 단군 봉제론이 일어나, 단군을 “조선국혼신”으로서 봉제하는 주장으로 발전했지만, 신사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9] 신사신보사(神社新報社)는 “해외의 신영토에 천조대신을 섬기는 것은 유럽 여러 나라가 아시아의 식민지에 기독교를 수반한 것과 비슷하지만, 일본의 사상에는 없는 것이며, 신도 사상의 변질이다”라고 단정했다.[19]
4. 사진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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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神宮御祭神論争」再解釈の試み : 神社の<土着性>とモダニズムの視点か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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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朝鮮を知る事典
平凡社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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