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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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읍성은 고려 우왕 4년(1378)에 개축되었다고 전해지는 읍성으로, 조선 시대에도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징례문이 중수되었으며, 문종~세조 시기에는 해자가 설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특히 1910년대 초기에 징례문이 철거되고 성벽이 훼손되었다. 경주시는 2002년부터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18년 향일문을 복원하는 등 2030년까지 읍성 전체를 복원할 계획이다. 4개의 성문과 치, 해자 등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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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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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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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이름 | 경주읍성 (慶州邑城) |
영어 이름 | Gyeongjueupseong Walled Town |
지정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96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북부동 1번지 |
시대 | 고려, 조선 |
소유 | 국·공유 |
면적 | 7,557m² |
문화재청 ID | 13,00960000,37 |
2. 역사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경주는 통일신라 시대 이후 지방 통치의 중심지였으며, 주로 중심이 되는 지방 도시에 읍성을 쌓았으므로 경주에 읍성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경통지』에 고려 우왕 4년(1378)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처음 이 성이 만들어진 것은 그 이전의 일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지금의 읍성은 조선 전기에 다시 지어졌으며,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0년(1632) 부윤 전식이 동·서·북문을 만들면서 다시 지었다.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읍성의 둘레는 약 1.2km, 높이는 약 4m 정도였다.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어 그 문을 통해 출입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경주시 도시계획으로 성이 대부분 헐리고 현재는 동쪽 성벽 약 50m 정도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4문 가운데 남문인 징례문(徵禮門)에 걸려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2. 1. 고려 시대
경주는 통일신라 시대 이후 지방 통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읍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경통지』에 고려 우왕 4년(1378)에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처음 성이 만들어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동경통지』에는 “고려 우왕 4년(1378)에 개축하였고, 높이는 12척 7촌이다.”라는 기록이 있다.2. 2. 조선 시대
조선 전기에 경주읍성이 다시 지어졌으며,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인조 10년(1632) 부윤 전식이 동·서·북문을 만들면서 읍성을 다시 지었다.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읍성의 둘레는 약 1.2km, 높이는 약 4m 정도였다.경주읍성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헌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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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 | "주위가 4075척, 높이는 12척인데, 성내에 우물이 80개소나 있다" |
《동경잡기》 | "징례문은 읍성 남문인데 임진왜란에 불탄 것을 인조 10년(1632)에 부윤 전식이 중수하고, 동.서.북문도 차례로 건축하였다" |
《문종실록》 | 둘레 4,075척, 높이 11척 6촌, 적대 26개소, 문 3개소, 여장 1,155첩, 우물 83개소 |
2. 3. 일제강점기
1912~1932년 사이 경주읍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초기의 파괴가 심각하였다. 자동차 사용이 늘어나면서 도로가 새로 만들어지거나 넓혀지면서 파괴 속도는 더 빨라졌다.[1]김신재 교수의 ‘1910년대 경주의 도시변화와 문화유적’에 따르면, 징례문은 1912년에 철거되었다. 그해 11월에 데라우치 마사타게 조선 총독이 경주에 와서 석굴암 등 신라 유적을 둘러보았다. 당시 성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차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총독이 차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미리 징례문을 철거했다는 것이다.[1]
이로써 읍성의 남북을 잇는 도로가 뚫렸고, 1915년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신작로는 차가 다니는 길을 말한다. 1918년 10월 대구에서 불국사역까지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철로 개설에 많은 석재가 필요하였다.[1]
읍성의 많은 석재가 철도 개설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천년 고도의 상징인 징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도남루(故都南樓)’ 현판은 물론 주춧돌 하나라도 찾을 수 없다. 2009년 봉황로 정비 사업 때 징례문 터에서 아무런 석재도 발견되지 않았다.[1]
2. 4. 대한민국
경주시는 2002년부터 경주읍성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2018년까지 토지 매입, 가옥 철거, 성채 및 치성 일부를 복원했다.[1] 2018년 11월 8일에는 동문인 향일문(向日門)과 동쪽 성곽 324m를 복원 완료했다.[1]시는 총 437억원을 투입하여 2030년까지 전체 성곽 2.4km 중 동·북쪽 성곽 1025m를 연결하고, 동·북문, 치성 11개소를 복원할 계획이다. 또한, 성 안에 남아있는 동경관 및 집경전과 같은 유적을 정비하고, 성곽 주변 토지와 가옥을 추가로 매입하여 철거할 예정이다. 2019년까지 동쪽 성곽 잔여 구간 160m를 정비할 계획이다.[1]
3. 구조
읍성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 통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읍성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경통지』의 기록을 통해 고려 우왕 4년(1378) 이전에 처음 축성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현재의 읍성은 조선 전기에 다시 지어졌으며, 임진왜란(1592) 때 소실된 것을 조선 인조 10년(1632) 부윤 전식이 동·서·북문을 만들면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읍성의 규모는 둘레 약 1.2km, 높이 약 4m 정도였다. 동서남북에 각각 성문이 있어 출입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성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시계획으로 경주시가 확장되면서 성의 대부분이 헐리고, 현재는 동쪽 성벽 약 50m 정도만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남문인 징례문(徵禮門)에 걸려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3. 1. 성문
징례문(徵禮門)은 경주읍성의 남문으로, 성덕대왕신종이 걸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숭례문을 제외하고 전국 읍성 문루 중 가장 컸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불탄 뒤 1632년 부윤 전식이 수리하고, 1757년(영조 때) 개축하였으나, 1915년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1909년 초 사진에는 고도남루(故都南樓)라는 편액이 흐릿하게 보인다.향일문(向日門)은 경주읍성의 동문이다. 발굴 시 웅성 자리가 발견되어 2018년 11월 8일에 웅성과 함께 복원되었다.
망미문(望美門)은 경주읍성의 서문으로, 현재는 철거되었다.
공진문(拱辰門)은 경주읍성의 북문으로, 2030년까지 복원될 예정이다.
3. 2. 방어 시설
치(雉)는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현재 4개가 복원되어 있다. 해자(垓子)는 성벽 바깥쪽에 둘러 판 못으로, 조선 문종~세조 때 설치되었다. 현재 복개 도로가 해자이다. 여장(女牆)은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일부 복원되어 있다.4. 훼손과 복원
경주읍성은 1912~1932년 사이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초기의 파괴가 심각하였다. 자동차 사용이 늘어나면서 도로가 새로 만들어지거나 넓혀지면서 훼손 속도는 더 빨라졌다. 데라우치 마사타게 조선 총독이 경주에 와서 석굴암 등 신라 유적을 둘러보기 위해 1912년에 징례문을 철거했다. 이로 인해 읍성의 남북을 잇는 도로가 뚫렸고, 1915년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1918년 철도 개통에 읍성의 많은 석재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천년 고도의 상징인 징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1]
경주시는 읍성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8년에는 동문인 향일문(向日門)과 동쪽 성곽, 웅성이 함께 복원되었다.[1]
4. 1. 훼손
경주읍성은 1912~1932년 사이에 대부분 훼손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초기의 파괴가 심각하였다. 자동차 사용이 늘어나면서 도로가 새로 만들어지거나 넓혀지면서 훼손 속도는 더 빨라졌다.김신재 교수의 ‘1910년대 경주의 도시변화와 문화유적’에 따르면, 징례문은 1912년에 철거되었다. 그 해 11월에 데라우치 마사타게 조선 총독이 경주에 와서 석굴암 등 신라 유적을 둘러보았다. 당시 성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차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총독이 차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미리 징례문을 철거했다는 것이다.[1]
이로 인해 읍성의 남북을 잇는 도로가 뚫렸고, 1915년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신작로가 개설되었다. 신작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의미한다. 1918년 10월 대구에서 불국사역까지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철로를 만드는 데 많은 석재가 필요했다.[1]
읍성의 많은 석재가 철로 개설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써 천년 고도의 상징인 징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도남루(故都南樓)’ 현판은 물론이고 주춧돌 하나도 찾을 수 없다. 2009년 봉황로 정비 사업 때 징례문 터에서 아무런 석재도 발견되지 않았다.[1]
4. 2. 복원
경주시는 2002년부터 경주읍성 복원사업을 펼쳐 2017년까지 1600억원을 들여 토지 12000m2를 매입하고 가옥 56채를 철거했으며, 2004년에는 성채와 치성 1개소를 복원했다. 경주시는 2030년까지 총 4370억원을 투입하여 전체 성곽 2.4km 중 동·북쪽 성곽 1025m를 연결하고, 동·북문과 치성 11개소를 복원할 계획이다. 또한 성 안에 남아 있는 동경관, 집경전 등의 유적을 정비하고, 성곽 주변 토지 19100m2와 가옥 79채를 추가로 매입하여 철거할 예정이다.[1]2018년 11월 8일에는 동문인 향일문(向日門)과 동쪽 성곽 324m가 우선 복원되었으며, 2019년까지 동쪽 성곽의 나머지 160m 구간이 정비될 예정이었다.[1] 발굴 과정에서 웅성 자리가 발견됨에 따라, 2018년 복원 시 웅성도 함께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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