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인 (17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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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다이인(1773년)은 1773년 사쓰마에서 태어났으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정실 부인이다. 3살 때 이에나리와 약혼했으나, 쇼군 정실은 셋케나 미야케에서 맞이하는 관례에 따라 약혼이 어려움을 겪었다. 시마즈 시게히데의 주선으로 결혼에 성공하여 고노에 다다코라는 이름으로 결혼했다. 1796년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이 요절하고 이에나리의 총애를 잃었다. 말년에는 종1위의 관직을 받았으며, 1844년 사망하여 조조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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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이지 시대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고노에 아쓰마로는 공작 작위를 받은 화족 출신으로 귀족원 의원, 귀족원 의장, 가쿠슈인 원장을 역임하며 문벌 정치를 비판하고 범아시아주의를 주창, 동아동문회 설립과 대러동지회 조직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고다이인 (177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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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휘 | 이에나리 (家斉) |
계명 | 준묘원전 (遵묘원殿) |
신분 | |
신분 | 에도 막부 제11대 쇼군 |
출생 | |
출생 | 1773년 11월 18일 (안에이 2년 음력 10월 5일) |
출생지 | 에도 성 |
사망 | |
사망 | 1841년 3월 27일 (덴포 12년 음력 2월 5일) |
사망지 | 에도 성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도쿠가와 하루사다 |
어머니 | 오토미노 가타 (於富の方) |
정실 | 고다이인 |
측실 | 오라쿠노 가타 (於楽の方) 오세키노 가타 (於関の方) 오우메노 가타 (於梅の方) 오소메노 가타 (於染の方) 오미요노 가타 (於美代の方) 오카치노 가타 (御勝の方) 오나미노 가타 (於波奈の方) 오야에노 가타 (於八重の方) 오로쿠노 가타 (於六の方) 오쓰네노 가타 (於常の方) 오노부노 가타 (於信の方) 오가네노 가타 (於金の方) |
자녀 | 55명 (아들 28명, 딸 27명) |
재위 | |
재위기간 | 1787년 ~ 1837년 |
이전 쇼군 | 도쿠가와 이에하루 |
다음 쇼군 | 도쿠가와 이에요시 |
기본 정보 | |
휘 | 히로다이인 (広大院) |
속명 | 시마즈 시게히데의 딸 시게코 (島津重豪女・寔子) |
계명 | 본성원전 (本성院殿) |
출생 | |
출생 | 1773년 |
사망 | |
사망 | 1844년 |
사인 | 병사 |
신분 | |
신분 |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정실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시마즈 시게히데 |
어머니 | 미야케씨 (家女・三宅氏) |
남편 | 도쿠가와 이에나리 |
2. 일생
안영 5년(1776년), 3세 때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증손자인 도요치요(豊千代, 훗날의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약혼하고 '''시게히메'''(茂姫)로 이름을 바꾸었다. 약혼 직후 에도의 히토쓰바시 저택으로 옮겨가 약혼자와 함께 성장했다. 그러나 약혼자 도요치요가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후계자로 결정되면서, 도자마 다이묘의 딸이라는 신분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쇼군의 정실은 셋케나 미야케 출신 여성을 맞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시마즈 시게히데는 이 약혼이 조간인(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양녀)의 유언이었다고 주장했고, 막부는 이를 받아들여 약혼 13년 만에 혼인을 허락했다. 다만 쇼군 정실의 관례를 존중하여, 시마즈 가문의 친척인 고노에 쓰네히로의 양녀가 되어 '近衛寔子|고노에 다다코일본어'라는 이름으로 간세이 원년(1789년)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이 결혼으로 아버지 시게히데와 생모 오토세노카타(お登勢の方)의 친족인 이치다(市田) 씨족이 큰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특히 오토세노카타는 다른 측실들을 에도 저택에서 내쫓는 등 정실처럼 행세하며 횡포를 부렸고, 이는 훗날 사쓰마번의 내부 갈등인 킨시로쿠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1796년에는 쇼군의 아들 도쿠가와 아쓰노스케를 낳아 권세가 더욱 강해졌다. 이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이후 처음으로 정실이 아들을 낳은 사례였으나, 이미 측실 소생의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후계자로 정해져 있었기에 아쓰노스케는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쓰노스케는 3년 만에 요절했고, 1798년의 임신도 유산으로 끝났다. 이후 교만한 행동 등으로 이에나리의 총애를 잃어 더는 자녀를 낳지 못했다.
미다이도코로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사쓰마번 정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복동생이자 9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노부가 재정난을 이유로 여러 차례 귀향을 신청했으나, 생모 사후 나리노부가 이치다 일족을 숙청한 것에 분노한 고다이인의 영향력 행사로 막부의 허락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7년 남편 이에나리가 은퇴하자 함께 니시노마루로 옮겨 '오오미다이도코로大御台所일본어'로 불렸다. 1841년 남편이 사망하자 삭발하고 출가하여 '고다이인(広大院일본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종1위의 관직 등급을 받아 '一位様|이치이사마일본어'로 불렸다. 말년에는 이에나리의 측실 오미요노카타가 자신의 외손자인 마에다 요시야스(14대 가가번주)를 차기 쇼군으로 옹립하려던 음모를 저지하기도 했다.
1844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도쿄 미나토구의 조조지(増上寺)에 있다.
2. 1. 어린 시절과 혼약
안영 2년 (1773년) 6월 18일 가고시마성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아츠히메'''(篤姫) 또는 '''오아츠'''(於篤)였다. 고향인 사쓰마에서 자라다가 안영 5년 (1776년), 3세 때 히토쓰바시 하루사다의 아들이자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증손인 도요치요(豊千代, 훗날의 이에나리)와 약혼하였다. 이 약혼은 메이와 6년 (1769년) 시마즈 시게히데의 정실 호히메가 사망하고, 안영 원년 (1772년) 조간인마저 사망하면서 쇼군가 및 히토쓰바시가와의 관계가 약화되어 재정적 부담 증가를 우려한 시마즈 가문의 노력으로 추진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히토쓰바시가의 가로였던 타누마 오키사토 (타누마 오키츠구의 동생)를 통해 막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약혼과 함께 아츠히메는 '''시게히메'''(茂姫)로 이름을 바꾸고, 사쓰마에서 에도로 불려와 시바미타의 사쓰마 번 상저택을 거쳐 에도성 내 히토쓰바시 저택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오엔조노사마'(御縁女様)라 불리며 약혼자인 도요치요와 함께 자랐다.
그러나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아들 이에모토가 급사하고 도요치요가 차기 쇼군으로 결정되면서 이 약혼은 문제가 되었다. 쇼군의 정실은 전통적으로 고셋케나 미야케 출신의 여성을 맞는 것이 관례였으며, 도자마 다이묘의 딸이 정실이 된 전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시게히데는 이 약혼이 자신의 의붓 할머니이자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양녀였던 조간인의 유언이었다고 주장했다. 막부 측은 이 주장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약혼한 지 13년 만에 혼인을 허락하게 되었다.
시게히메는 텐메이 원년 (1781년) 10월경, 도요치요와 함께 히토쓰바시 저택에서 에도성 니시노마루로 거처를 옮겼다. 이에나리가 쇼군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텐메이 7년 (1787년) 11월 15일, 쇼군 정실의 관례를 존중하여 시마즈 가문과 인척 관계였던 공경 코노에가의 코노에 히로히데의 양녀가 되었다. 이때 이름을 시게히메에서 '''네이히메'''(寧姫)로 바꾸었고, 히로히데의 딸 자격으로 혼인하면서 다시 '''코노에 타다코'''(近衛寔子)로 개명하였다. 간세이 원년 (1789년) 2월 4일,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정식으로 혼인하여 미다이도코로가 되었다.
한편, 시게히메의 아버지 시마즈 시게히데의 정실 호히메는 이에나리의 아버지 도쿠가와 하루사다의 여동생이었으므로, 시게히메와 남편 이에나리는 의리상 사촌 관계였다.
2. 2. 쇼군 정실이 되다
안영 5년(1776년), 3살 때 히토쓰바시 하루사다의 아들이자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증손인 도요치요(豊千代, 훗날의 이에나리)와 약혼하였다. 이 약혼은 메이와 6년(1769년)에 히토쓰바시가 출신인 아버지 시게히데의 정실 호히메가, 안영 원년(1772년)에 증조모뻘인 조간인이 사망하면서 쇼군가 및 히토쓰바시가와의 관계가 약해지자, 오테츠다이 부신 등 재정적 부담 증가를 우려한 시마즈 가문 측의 노력으로 성사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히토쓰바시 가문의 가로(家老)는 타누마 오키츠구의 동생 타누마 오키사토였는데, 이를 통해 막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 약혼과 함께 원래 이름인 아츠히메(篤姫)에서 시게히메(茂姫)로 이름을 바꾸고, 고향인 사쓰마를 떠나 에도로 가서 시바미타(芝三田)의 사쓰마 번 상저택(上屋敷)에서 에도성 안의 히토쓰바시 저택으로 옮겨 '오엔조노사마(御縁女様)'라 불리며 약혼자 도요치요와 함께 자랐다.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아들 이에모토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약혼자 도요치요가 차기 쇼군으로 결정되자, 이 약혼은 큰 문제에 부딪혔다. 쇼군의 정실은 3대 이에미츠 이후 셋케나 미야케(친왕가) 출신 여성을 맞이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도자마 다이묘의 딸이 정실이 된 전례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버지 시게히데는 이 약혼이 5대 사쓰마번주 정실이자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양녀였던 조간인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쇼군가의 양녀였던 조간인의 유언이라는 주장을 막부 측에서도 무시할 수 없어, 결국 약혼 13년 만에 혼인을 승인했다.
시게히메는 텐메이 원년(1781년) 10월경 도요치요와 함께 히토쓰바시 저택에서 에도성 니시노마루(西の丸)로 거처를 옮겼다. 쇼군 정실의 관례를 따라, 이에나리가 쇼군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텐메이 7년(1787년) 11월 15일, 시마즈 가문과 인척 관계였던 코노에 가문의 코노에 히로히데의 양녀가 되었다. 이때 이름을 시게히메에서 네이히메(寧姫)로 바꾸었고, 혼인 직전 다시 '''고노에 타다코'''(近衛寔子)로 개명하여 간세이 원년(1789년) 2월 4일 이에나리와 정식으로 혼인하고 미다이도코로(御台所)가 되었다.
한편, 시게히메의 의붓어머니인 호히메는 이에나리의 고모였으므로, 시게히메와 남편 이에나리는 사촌 관계이기도 했다. 이 결혼으로 아버지 시게히데를 비롯해 생모 오토세노카타(お登勢の方)의 친족인 이치다(市田) 씨족까지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2. 3. 권세와 몰락
도쿠가와 이에나리와의 결혼은 도자마 다이묘의 딸이 쇼군의 정실이 되는 전례 없는 일이었기에, 셋케인 고노에 쓰네히로의 양녀가 되어 '近衛寔子|고노에 다다코일본어'라는 이름으로 혼인하였다. 이 결혼으로 아버지 시마즈 시게히데는 "쇼군의 장인이 되는 외양 대명"이라는 전례 없는 지위를 얻어 막강한 권세를 누렸고, 이는 훗날 "다카나와 게바 쇼군"이라 불리는 기반이 되었다. 생모 오토세노카타와 그 친족인 이치다 씨족 역시 권세를 등에 업고, 오토세노카타는 남동생 이치다 모리쓰네를 본래 시마즈 일족만 오를 수 있었던 사쓰마번의 잇쇼지카쿠 직책에 임명하고, 다른 측실들을 에도 저택에서 내쫓는 등 정실처럼 행세하였다. 이러한 이치다 일족의 번정 사유화와 오토세노카타의 횡포는 훗날 사쓰마번의 심각한 내부 갈등인 킨시로쿠 붕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796년에는 쇼군의 다섯째 아들 아쓰노스케를 낳았다. 이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정실 오에요노카타 이후 처음으로 쇼군의 정실 부인이 아들을 낳은 사례로, 시게히메(고다이인) 부녀의 위세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아쓰노스케 출생 3년 전에 이미 측실 소생인 민지로(후의 이에요시)가 쇼군 후계자로 정해져 있었기에, 아쓰노스케는 고산쿄 중 하나인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을 이어받았다. 안타깝게도 아쓰노스케는 3년 뒤인 1799년에 요절하였고, 1798년에도 임신했으나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교만한 행동 등으로 이에나리의 총애를 점차 잃어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실(미다이도코로御台所일본어)로서 측실이 낳은 이에나리의 많은 자녀들을 형식상 자신의 양자로 삼아(어대처 어양), 정실로서의 권세는 흔들리지 않았다.[2]
고다이인은 미다이도코로로서의 강력한 권위를 이용하여 사쓰마번의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복동생이자 9대 번주인 시마즈 나리노부가 번의 재정난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쓰마로의 귀국을 요청했지만 막부가 이를 번번이 거절했는데, 이는 고다이인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로 알려져 있다. 교와 원년(1801년) 생모 오토세노카타가 사망한 후, 나리노부가 번정에서 이치다 일족을 배제하자 이에 격분한 고다이인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또한 덴포 3년(1832년)에는 조카이자 사쓰마 번 가로인 이치다 요시노리를 통해 당시 번주 나리쿠니(고다이인의 조카)에게, 나리쿠니의 적자 나리아키라의 양자로 남편 이에나리의 적자인 이에요시의 아들 하츠노조를 들이도록 제안하기도 했으나, 요시노리와 나리쿠니는 정중히 거절하였다.
1837년 은퇴한 남편 이에나리와 함께 니시노마루로 거처를 옮겨 '오오미다이도코로大御台所일본어'라 불리게 되었다. 1841년 남편이 사망하자 삭발하고 출가하여 '고다이인(広大院일본어)'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종1위 관직 등급을 받아 '一位様|이치이사마일본어'로 불렸다. 말년에는 이에나리의 측실이었던 오미요노카타가 자신의 외손자인 마에다 요시야스(14대 가가번주)를 차기 쇼군으로 옹립하려던 음모를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44년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도쿄 미나토구의 조조지(増上寺)에 있다.
2. 4. 말년
덴포 8년(1837년) 남편인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은퇴하여 오고쇼가 되어 니시노마루로 옮기자, 시게히메도 남편을 따라 니시노마루로 거처를 옮기고 "오오미다이도코로(大御台所)"로 불리게 되었다.덴포 12년(1841년) 윤 1월 30일, 남편 이에나리가 사망하자 같은 해 2월 21일에 삭발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법명을 "고다이인(広大院)"이라 칭했다. 이에나리 사후, 로주 미즈노 타다쿠니는 덴포의 개혁의 일환으로 기강 숙정을 내세우며 사찰 봉행 아베 마사히로에게 치센인(智泉院)의 처분을 명했다. 치센인은 이에나리의 애첩이었던 오미요노카타의 아버지가 세운 절이었는데, 오오쿠 여성들의 출입이 잦아 풍기가 문란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아베 마사히로는 닛케이를 체포하고 치센인을 폐지했으나, 쇼군가의 권위를 고려하여 오오쿠 관계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다만, 니시노마루 오오쿠의 필두 시녀였던 하나조노와 오미요노카타는 압금(칩거)에 처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며[3], 이때 고다이인의 측근이었던 야마다 히나타노카미(山田日向守)와 이나다 하치로자에몬(稲田八郎左衛門)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4].
덴포 13년(1842년) 2월 25일, 종1위의 선지를 받아 이후 "이치이노사마(一位様)"라고 불리게 되었다. 생전에 종1위를 받은 것은 텐에이인 이후 처음 있는 일로, 고다이인의 높은 권세를 보여준다. 남편 사후 고다이인은 니시노마루 오오쿠에서 혼마루 오오쿠로 옮겨, 쇼군 생모의 거처였던 이치노고텐·신자시키(一之御殿・新座敷)를 "마츠노고텐(松御殿)"으로 개칭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마츠노고텐에는 다이묘 가문으로 시집간 이에나리의 딸들이 자주 방문했으며, 고다이인은 이들을 비호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5]. 만년에는 이에나리의 또 다른 측실이었던 오미요노카타가 자신의 외손자인 마에다 요시야스(14대 가가번주)를 차기 쇼군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이를 저지하기도 했다.
덴포 15년(1844년) 5월 10일,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를 보좌하던 상급 여관 아네코지가 덴푸라를 조리하던 중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혼마루가 전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화재로 고다이인은 오스에(奥女中)들의 등에 업혀 후키아게고텐(吹上御殿)으로 피신했으나, 오오쿠 여성 수백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10일, 고다이인은 오오쿠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법명은 고다이인덴 초요묘쇼테이닌 다이시(広大院殿超譽妙昭貞忍大姉)이다. 묘소는 도쿄 조조지(増上寺)에 있으며, 남편 이에나리와는 다른 사찰에 안장되었다.
3. 평가
4. 유산
전후 조조지와 도쿠가와 가문 묘소가 세이부 철도에 매각될 때 고다이인의 묘도 발굴되었다. 유골 분석 결과, 혈액형은 O형이었고, 사지뼈를 통해 추정한 키는 143.8cm였다. 이는 함께 발굴된 다른 쇼군 정실이나 측실들의 유골과 비교해도 상당히 작은 키였다. 덧붙여 고다이인은 생전에 미인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고다이인 묘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 기모노 자수로 추정되는 섬유 조각들이 흙탕물 속에 떠다니는 정도였고, 유골 외의 유품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참고 문헌: 『조조지 도쿠가와 쇼군 묘와 그 유품·유체』)
또한 그녀의 묘소에는 웅장한 팔각탑이 세워져 있었으나, 발굴 과정에서 사라진 뒤 기요세 조메이지로 옮겨졌다. 현재는 이에야스의 정실인 덴에이인의 묘탑과 함께 등롱처럼 취급되고 있다. 묘를 옮긴 후 다른 쇼군 정실들은 남편과 나란히 합장되었지만, 고다이인은 게이쇼인, 겟코인 등 측실들과 함께 합장묘에 안치되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에도 시대 후기 오오쿠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 등 여러 대중 매체에서 등장인물로 다루어졌다.
5. 1. 영화
- 도쿠가와의 여제 오오쿠 (1988년, 닛카츠) - 미츠야 카코
5. 2. 드라마
6. 계보
참조
[1]
서적
近世国家の支配構造
雄山閣
[2]
서적
大奥学事始め 女のネットワークと力
NHK出版
[3]
서적
旗本夫人が見た江戸のたそがれ
文春新書
[4]
서적
大奥学事始め 女のネットワークと力
[5]
서적
大江戸の姫さま
角川選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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