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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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도경》은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 예종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파견되어 고려에 머무르며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1124년에 완성되어 그림과 함께 40권으로 편찬되었으나, 이후 그림은 유실되고 글만 전해진다. 고려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어 고려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고려의 건국, 왕조 계보, 도성과 궁궐, 복식, 의례, 군사, 종교, 백성들의 생활상 등 다채로운 정보를 제공하며, 송나라와의 관계, 유학, 악률 등에 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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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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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123년(선화 5년)[7] 휘종의 명을 받은 서긍은 고려 예종의 조문을 위해 정사 노윤적(路允迪), 묵경(墨卿)과 함께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었다.[8] 이들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통해 배를 타고 개경에 도착하여, 사신의 숙소인 순천관에서 약 1개월간 머물렀다. 귀국 후 서긍은 보고 들은 내용을 보충하여 1124년 8월 6일[9] 책을 완성하고, 이를 황제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바쳤다.[10]
원래 글과 그림이 함께 있어 '도경(圖經)'이라 하였으나, 1126년 정강의 변으로 완전판은 소실되었다. 1167년 효종 건도 3년, 서긍의 조카 서천(徐蕆)이 다시 간행했지만 그림은 전해지지 않고 글만 남았다.[11]
총 40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서긍의 주관적인 시선이 반영되었다는 한계는 있으나, 고려사 연구에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2. 1. 저자 서긍
서긍(徐兢, 1091년 ~ 1153년)은 자가 명숙(明叔), 호는 자신거사(自信居士)이다. 북송(北宋) 구녕현(甌寧縣)(일설에는 안휘성(安徽省) 화주(和州) 역양(歴陽)) 출신으로, 그림과 서예에 뛰어났다. [2] 지방관을 지낼 때 대종승겸장서학(大宗丞兼掌書學), 형부(刑部)원외랑(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2]1123년(선화(宣和) 5년/고려 인종(仁宗) 원년), 고려 예종(睿宗) 왕우(王俁)가 승하하자 북송은 조의(弔意)를 표하는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하였다. 서긍은 그 일원이었다. 서긍은 고려의 수도 개경에 수개월 동안 머물렀고, 중국으로 귀국한 후 고려의 건국과 정치 제도, 풍속과 사물의 모습에 대해 기록하고 각 장에 그림을 첨부하였다.[3]
2. 2. 저술 목적
1123년(선화 5년)[7] 서긍은 휘종의 명을 받고 고려 예종의 조문을 위해 정사 노윤적(路允迪), 묵경(墨卿)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8] 이들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통해 배를 타고 입국하여 고려의 도성인 개경에 있는 사신의 숙소인 순천관에서 약 1개월을 머물다가 중국에 돌아온 후, 보고 들은 내용을 보충해 다음 해 1124년 8월 6일[9] 이 책을 완성하고 황제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바쳤다.[10]원래 글과 그림이 같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하였으나, 1126년 정강의 변을 거치며 완전판은 소실되었고, 1167년 효종 건도 3년 서긍의 조카인 서천(徐蕆)이 이 책을 다시 간행했지만,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11]
서긍이 『선화봉사고려도경‧원서』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 자신이 사서(史書)의 부분을 저술하였는데, 이는 예로부터 외교 사절이 보고 들은 내용을 계승하여 “글로써 사방의 뜻을 삼는다”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 방식이란 “아홉 겹의 높고 깊은 아치에 거주하며, 사방 만 리까지 멀리 시찰하여, 여러 가지 일이 손바닥 위에 있는 것과 같다”는 중국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중국 황제는 입수한 사방의 정보에 따라) 외국의 국정에 대해 깊이 이해하였다는 것이다.[4]
2. 3. 편찬 과정
1123년(선화 5년)[7] 서긍은 휘종의 명을 받고 고려 예종의 조문을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8] 이들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통해 배를 타고 고려의 도성인 개경에 있는 순천관에서 약 1개월을 머물렀다.[10]귀국 후 서긍은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내용을 보충하여 1124년 (선화 6년) 8월 6일[9] 황제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이 책을 바쳤다. 서긍은 고려에 머무는 동안 직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질문하고 사신의 임무를 다했으며”, 귀국 후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널리 알려진 내용을 모아, 중국과 비슷한 부분은 간략하게 하고, 다른 부분은 자세히 기록했다”고 한다.[4]
원래 글과 그림이 같이 있어 도경(圖經)이라 하였으나, 1126년 정강의 변을 거치며 완전판은 소실되었다.[11] 1167년 (건도 3년) 서긍의 조카인 서천(徐蕆)이 이 책을 다시 간행했지만,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11]
3. 내용
《선화봉사고려도경》은 총 4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송나라 사신 서긍이 1123년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고려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이다. 서긍은 고려의 여러 풍습과 문화를 상세히 기록하여 당시 고려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 제1권 건국(建國) ~ 제6권 궁전(宮殿): 고려의 건국 역사와 왕조 계보, 도성, 궁궐 등에 대한 내용이다. 고구려와의 연관성, 개경의 지리적 특징, 궁궐의 모습 등을 설명한다.
- 제7권 관복(冠服) ~ 제15권 차마(車馬): 고려 관리들의 복식, 의례용품, 군사 제도, 병기, 깃발, 수레와 말 등에 대한 내용이다. 척준경, 이자겸, 김부식 등 주요 인물에 대한 언급도 포함되어 있다.
- 제16권 관부(官府) ~ 제17권 사우(祠宇): 국자감을 비롯한 고려의 주요 관청과 시설, 팔관재를 비롯한 종교 시설과 의식에 대한 내용이다. 특히 약재 거래에 돈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 제18권 도교(道敎): 고려의 도교와 불교 신앙에 대한 내용이다. 국가적 지원을 받은 도교와 팔관회 등 성대한 불교 행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 제19권 백성(民庶) ~ 제23권 잡속(雜俗): 고려 백성들의 생활 모습과 풍속에 대한 내용이다. 주거 형태, 목욕 문화, 농업 및 어업 활동, 토산품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 특히, 고려인들의 청결 습관과 혼욕 문화, 그리고 다양한 해산물 섭취에 대한 기록이 주목할 만하다.
- 제24권 사절 행렬(節仗) ~ 제27권 관사(館舍): 송나라 사절단의 행렬, 조서 수여 절차, 연회 의례, 사신 숙소 등 외교 관련 내용이다.
- 제28권 장막류(供張) ~ 제32권 기명(器皿): 고려의 돗자리, 각종 그릇 등 생활용품과 기술에 대한 내용이다.
- 제33권 배(舟楫) ~ 제39권 해도(海道): 고려의 선박과 해로에 대한 내용이다. '신주(神舟)'라고 불린 사신용 배와 중국과의 해상 교류를 위한 항로를 설명한다.
- 제40권 동문(同文): 고려와 송, 요 등과의 관계, 유학의 발전, 악률, 도량형 등에 대한 내용이다.
3. 1. 건국 및 왕조 계보
서긍은 《고려도경》 제1권 '건국'에서 고려의 건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고려의 선조가 기자 서여(胥餘)라고 주장했다.[12] 이후 주, 진을 거쳐 한 고제 12년 연나라 사람 위만이 무리를 모아 왕이 되었고, 부여 신화와 함께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국명을 고려라 칭했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고씨 고려(고구려)의 건국부터 멸망까지를 설명하고 있다.[12]제2권 '세차(世次)'에서는 왕씨가 등장하여 당시까지의 고려 왕의 계보를 설명하고 있다.[13] 서긍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을 뿐 아니라, 왕조의 성씨만 바뀌었을 뿐 고구려에서 고려로 이어진 것으로 이해했다. 이는 이후 중국 사서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오류이다.
3. 2. 도성과 도읍
고려의 도성인 개경은 산등성이에 위치하여 평탄하지 않고 넓지 않아, 백성들의 거주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벌집과 개미구멍 같다고 묘사되었다.[14] 이는 유목민과 달리 종묘와 사직, 고을과 마을을 갖춘 고려가 기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14]고려의 성곽 제도와 개경의 성문 및 왕궁 궁문에 대한 자료는 각각 3권(성읍)과 4권(문궐)에 기록되어 있다.
3. 3. 궁궐
宮殿중국어은 개경에 있는 고려의 궁궐에 대한 내용이다. 《고려도경》의 〈궁전〉 1, 2(권5, 6)에 해당한다.[12][13]3. 4. 복식과 인물
서긍의 《고려도경》 제8권 '인물' 편에는 북송을 중심으로 동남쪽 이적(夷狄)들 중 고려의 인재가 가장 왕성하다고 소개하며, 척준경 등 서긍이 직접 만났던 벼슬아치들의 이름과 이자겸, 윤언식, 김부식, 김인규, 이지미 등을 আলাদা 소개하고 있다.[12]이자겸은 당시 고려의 유력한 척신 세력으로, 그의 권력은 왕권을 위협할 정도였다. 서긍은 이자겸의 권세와 영향력을 상세히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고려 정치 상황의 불안정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서긍은 김부식을 학식이 뛰어나고 문장이 능숙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은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3. 5. 의례 및 군사
高麗儀物중국어에는 왕이 사용하는 의물로 금화오서모(金花烏犀帽), 자라포(紫羅袍), 백서반(白犀盤), 자금어대(紫金魚袋) 등이 있었다.[12] 의물에는 봉선(封扇), 개선(蓋扇), 정절(旌節), 금월부(金鉞斧), 용선(龍扇), 봉거(鳳炬), 작선(雀扇), 황개(黃蓋), 홍라정(紅羅綎), 자개(紫蓋), 방상시(方相氏), 반자(班刺), 금고(金鼓), 각(角), 소(簫), 지(篪), 적(笛), 배(排), 소(簫), 도피(桃皮), 화각(畵角), 장고(杖鼓) 등이 있었다.[12]高麗軍制중국어에는 중앙군으로 6위(六衛)인 응양군(鷹揚軍), 용호군(龍虎軍), 흥위군(興威軍),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가 있었다. 2군(二軍)으로는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가 있었다.[12]
高麗兵器중국어에는 장창(長槍), 횡도(橫刀), 궁시(弓矢), 갑주(甲胄) 등이 있었다.[12]
高麗旗幟중국어에는 독기(纛旗), 아기(牙旗), 대오방기(大五方旗), 소오방기(小五方旗), 주작기(朱雀旗), 현무기(玄武旗), 백택기(白澤旗), 각(角), 금(金), 고(鼓) 등이 있었다.[12]
高麗車馬중국어에는 복두(幞頭), 개(蓋), 자(紫), 나(羅), 우(羽), 의(扆), 삽(翣), 금(金), 교의(交椅), 은(銀), 안(鞍), 즐(櫛), 복(服), 마(馬) 등이 있었다.[12]
3. 6. 관청 및 시설
서긍은 제16권 관부(官府)에서 국자감, 약국(藥局), 창름(倉廩), 영어(囹圄), 부고(府庫) 등 고려의 주요 관청 및 시설을 소개했다. 특히 고려는 다른 물품은 물물교환으로 교역했지만, 약을 살 때는 반드시 전보(錢寶)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16]제17권 사우(祠宇)에서는 팔관재가 매우 성대한 의식이었다고 설명하면서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흥국사, 국청사(國淸寺) 등의 사찰과 숭산묘(崧山廟), 동신사(東神祠), 오룡묘(五龍廟) 등의 사당을 소개했다.[16]
3. 7. 종교
서긍은 《고려도경》 제18권에서 고려의 도교와 불교 신앙에 대해 기록하였다. 고려의 도교는 국가적인 지원을 받아 발전했으며, 도교 사원인 도관(道觀)이 건립되고 도사(道士)가 임명되었다. 또한, 도교 의례가 국가 행사로 거행되기도 하였다.불교 역시 고려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팔관재와 같은 불교 행사는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흥국사, 국청사(國淸寺) 등 많은 사찰이 존재했다. 서긍은 이러한 종교 시설과 행사를 통해 고려의 종교적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3. 8. 백성과 풍속
고려 백성들은 왕성이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라 평탄하지 못해, 벌집이나 개미구멍 같은 집에 거주하였다.[14] 서민들은 흙 침상에서 생활하였고, 땅을 파서 온돌을 만들고 그 위에 누웠는데, 이는 겨울이 매우 춥고 솜옷이 부족했기 때문이다.[15] 고려 여인들은 말을 타는 풍습이 있었다.[15] 하급 관리들은 궁정에서 화톳불을 피우거나 초롱을 잡고, 시간을 알리는 등의 일을 하였다.[15]고려인들은 깨끗함을 좋아하여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을 하고 외출하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하였다.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는 혼욕 문화도 있었다.[15] 농업으로 곡식을 얻고, 어업을 통해 미꾸라지, 전복, 조개, 진주조개, 왕새우, 문합, 붉은 게, 굴, 거북이다리, 해조, 다시마 등을 얻었으며, 귀천 없이 해산물을 즐겨 먹었다.[15] 땔감으로는 나무를 사용했다.[15] 물물교환이 일반적이었지만, 약을 사는 데는 반드시 돈을 사용했다.[15]
토산품으로는 소나무, 인삼, 더덕, 복령과 같은 약재나 나물, 모시, 삼베옷, 비단, 모직물 등의 천, 구리와 같은 광물, 나전칠기 등이 있었다. 밤은 복숭아만 하고 달고 맛있었지만, 사과, 참외, 복숭아, 배, 대추 등은 맛이 없고 작았다.[15]
3. 9. 사절 행렬 및 외교 의례
節仗중국어에서는 송나라 사절단의 행렬을 설명하고 있다. 고려에서는 사신을 영접할 때 의장(儀仗)을 갖추어 맞이했는데, 이는 고려의 위엄을 보이고 사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중요한 의례였다.[5]受詔중국어에서는 고려 조정이 중국 사절을 위해 준비한 외교 의례를 소개한다. 사신이 가져온 조서(詔書)를 받는 절차는 매우 엄숙하게 진행되었으며, 이는 고려가 중국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준다.[5]
燕禮중국어에서는 고려의 연회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연회는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라, 음악과 춤, 그리고 다양한 음식이 어우러진 종합적인 외교 행사였다. 이를 통해 고려는 사신에게 자국의 문화를 알리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했다.[5]
館舍중국어에서는 사신이 머무는 숙소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고려는 사신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관사(館舍)를 제공하고,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여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고려는 사신을 극진히 대접하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5]
3. 10. 생활 용품과 기술
서긍은 《고려도경》 제28권(공장 1)에서 고려 돗자리가 편안하여 오랑캐의 풍속 같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국왕, 귀족, 사신 접대에서나 쓰이는 것이었고, 서민들은 대부분 흙 침상에서 생활하였다. 서민들은 땅을 파서 온돌[火坑]을 만들고 그 위에 누웠는데, 이는 고려의 겨울이 매우 추운데다 솜옷 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16]제32권(기명 3)에서는 다기(茶俎), 술독(瓦尊), 등잔(藤尊), 도로(陶爐), 밥그릇, 옹기 등 고려의 여러 가지 그릇과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16]
3. 11. 선박과 해로
고려의 선박은 대체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특히, 사신을 태우는 배는 '신주(神舟)'라고 불렀는데, 그 규모와 정교함이 일반 배와는 달랐다. 신주는 뱃길을 따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었으며, 고려의 뛰어난 조선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6]고려의 해로는 주로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사용되었다. 개경에서 출발하여 예성강을 따라 황해로 나아가, 산둥 반도 또는 저장성 지역으로 향하는 항로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해로는 고려와 중국 간의 외교, 무역, 문화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송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에는 해로를 통한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5]
고려의 항해술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높은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고려인들은 별자리를 관측하여 항해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바람과 조류를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 또한, 나침반과 같은 항해 도구를 사용하여 정확한 방향을 유지하며 항해하는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항해술은 고려가 해상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 12. 중국과의 관계
同文|동문중국어은 고려와 송, 요 등과의 관계, 유학의 발전, 악률, 도량형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5]4. 가치와 영향
1123년(선화 5년) 휘종의 명을 받은 서긍은 고려 예종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8]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통해 고려에 들어와 개경의 순천관에서 약 한 달간 머물렀다.[10] 귀국 후 보고서 형식으로 『고려도경』을 황제에게 바쳤다.[10] 원래는 글과 그림이 함께 있었으나, 1126년 정강의 변을 거치며 완전판은 소실되었고, 1167년 서긍의 조카 서천이 이 책을 다시 간행했지만,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전한다.[11]
4. 1. 고려사 연구 기여
1123년(선화 5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은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부족한 고려사 연구를 보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7]중국과 한국(朝鮮半島)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류가 잦았지만, 중국에는 한국(朝鮮半島) 관련 저술이 많지 않았다. 『계림기(雞林記)』, 『계림지(雞林志)』, 『계림유사(雞林類事)』, 『조선부(朝鮮賦)』, 『조선도설(朝鮮図説)』, 『조선지(朝鮮志)』, 『조선사략(朝鮮史略)』 등은 내용이 소략하거나 소실되어, 『고려도경』이 고대 중세 중한 관계 및 교통사 연구에 가장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6] 특히, 이 책에서 "고구려"를 "고려"로 바꾸어 표기한 것은 이후 중국 사서에 영향을 미쳤다.
송나라 사람인 서긍의 주관적인 시선이 반영되었다는 한계는 존재하지만, 고려 당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도경』은 고려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4. 2. 한중 관계 연구 자료
1123년(선화 5년)[7]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은 고려 시대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군사, 예술, 기술, 복식, 풍속 등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 중 하나이다. 중국과 한국(朝鮮半島)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교류가 잦았지만, 중국에는 한국 관련 저술이 많지 않았다. 『계림기(雞林記)』, 『계림지(雞林志)』, 『계림유사(雞林類事)』, 『조선부(朝鮮賦)』, 『조선도설(朝鮮図説)』, 『조선지(朝鮮志)』, 『조선사략(朝鮮史略)』 등은 내용이 부실하거나 소실되었기 때문에,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図経)』만이 고대 중세 중한 관계 및 교통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6] 이 책은 기존에 사용되던 "고구려"를 "고려"로 바꾸어 표기하였으며, 이는 이후 중국 사서에 영향을 미쳤다.5. 한국어 번역본
徐兢중국어 지음, 박상득 옮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図経)》, 국서간행회(1995/09), ISBN 4336037752
참조
[1]
서적
고대 조선 문헌 해제
[2]
서적
欽定四庫全書‧史部十一‧宣和奉使高麗圖經‧提要
欽定四庫全書
[3]
서적
宣和奉使高麗図経‧原序
欽定四庫全書
[4]
서적
宣和奉使高麗図経・原序
欽定四庫全書
[5]
서적
宣和奉使高麗図経
欽定四庫全書
[6]
웹사이트
국립고궁박물원-선화봉사고려도경
http://www.npm.gov.t[...]
[7]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0-10-26
[8]
문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서
[9]
문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서
[10]
서적
고대 조선 문헌 해제
[11]
문서
중국어 위키번역
[12]
문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권
[13]
문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권
[14]
문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제3권
[15]
뉴스
[커버스토리/목욕탕]한국 목욕의 역사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3-09-04
[16]
문서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2권, 기명3(器皿 三)
[17]
웹인용
타이완 국립 고궁박물원
https://web.archive.[...]
201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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