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라-베베르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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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무라-베베르 협정은 1896년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 체결된 각서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한반도 내 세력 균형을 조정한 외교 문서이다. 이 각서의 주요 내용은 고종의 환궁 문제에 대한 양국의 입장, 대한제국 내각 대신 임명에 대한 권고, 일본 전신선 보호를 위한 일본 위병의 헌병 전환, 일본 및 러시아 군대의 한반도 주둔 허용 등 4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이 협정을 통해 일본은 조선 내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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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라-베베르 협정 | |
---|---|
조약 정보 | |
조약명 | 고무라-베베르 협정 |
다른 이름 | 소무라-웨버 협정 (小村・ウェーバー協定) 한일 간도 협약 (韓日間島協約) (일부 주장) |
체결일 | 1909년 9월 4일 |
위치 | 청나라 베이징 |
서명자 | 고무라 주타로 웨베르 |
관련국 | 대한제국 (간접) 일본 제국 청나라 |
조약 내용 | |
주요 내용 | 일본의 남만주 철도 부설권 인정 간도 지역의 청나라 영유권 인정 |
대한제국 관련 |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권 강화 인정 (일부 주장) |
논쟁 | |
협약의 유효성 | 대한제국의 동의 없이 체결되어 무효라는 주장 존재 간도 지역의 영유권 분쟁의 근거 |
간도 영유권 문제 | 협약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과 중국 간의 영유권 분쟁 지속 |
2. 배경
2. 1.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사건)
2. 2. 아관파천
3. 각서 체결 과정
4. 주요 내용
각서는 총 4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9][10][11]
- 제1조는 고종의 환궁 문제는 국왕 자신의 판단에 일임하며, 러시아와 일본은 안정상 문제가 없다고 여겨질 때 환궁하는 것을 충고한다는 것이었다.[9][10][11]
- 제2조는 현재 대한제국 정부의 내각 대신들은 국왕의 의사대로 임명되었으며 이후에도 러시아와 일본은 국왕에게 관대하고 온화한 인물을 내각 대신에 임명하도록 항상 권고한다는 것이었다.[9][10][11]
- 제3조는 한국의 부산과 경성 사이에 설치된 일본 전신선 보호를 위해 배치한 일본 위병을 헌병으로 대신하며, 이들 헌병은 한국 정부가 안녕질서를 회복하게 되는 지역부터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9][10][11]
- 제4조는 한성 및 개항장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을 배치하며, 상황이 안정되면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또 러시아도 공사관 및 영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할 수 있으며, 상황이 안정되면 철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9][10][11] 이 조항에 따라 러일 양국은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
4. 1. 제1조: 고종 환궁 문제
고종의 환궁 문제는 국왕 자신의 판단에 일임하며, 러시아와 일본은 안정상 문제가 없다고 여겨질 때 환궁하는 것을 충고한다는 내용이었다.[9][10][11]4. 2. 제2조: 내각 대신 임명
현재 한국 정부의 내각 대신들은 국왕의 의사대로 임명되었으며, 이후에도 러시아와 일본은 국왕에게 관대하고 온화한 인물을 내각 대신에 임명하도록 항상 권고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9][10][11]4. 3. 제3조: 일본 전신선 보호
한국의 부산과 경성 사이에 설치된 일본 전신선 보호를 위해 배치한 일본 위병을 헌병으로 대신하며, 이들 헌병은 한국 정부가 안녕질서를 회복하게 되는 지역부터 철수시킨다는 내용이다.[9][10][11]4. 4. 제4조: 일본군 및 러시아군 주둔
각서는 총 4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9][10][11] 제4조는 한성 및 개항장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을 배치하며, 상황이 안정되면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또 러시아도 공사관 및 영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할 수 있으며, 상황이 안정되면 철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9][10][11] 이 조항에 따라 러일 양국은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5. 각서의 영향 및 평가
고무라-베베르 각서는 일본이 조선 내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일본 역시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확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 또한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 인정과 아관파천의 성립을 인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2][3] 아관파천을 허용한 것은 고무라 주타로의 실책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외무차관으로 승진시켰다.[1][7] 한 달 후,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러시아와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했지만, 조선에서의 러시아 우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8] 일본 제국의회는 러시아를 가상 적국으로 간주하고 육군 6개 사단 증설을 가결했다.[6]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이 각서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행보의 일환으로 평가하며, 조선의 주권 훼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コトバンク「小村・ウェーバー協定」
https://kotobank.jp/[...]
[2]
서적
半藤(1983)p.66
[3]
서적
杵淵(1997)pp.224-226
[4]
서적
朝鮮王朝実録(1983)pp.348-349
[5]
서적
杵淵(1997)pp.226-227
[6]
서적
杵淵(1997)p.228-229
[7]
서적
半藤(1983)pp.93-94
[8]
서적
古屋(1966)pp.28-29
[9]
웹인용
교과서 용어해설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024-01-27
[10]
웹인용
웨베르-고무라 각서(Waeber-Komura 覺書)
https://encykorea.ak[...]
2024-01-27
[11]
웹인용
"[한민족 4천년 역사에서 결정적인 20장면]서구 열강들 엇갈린 이해관계…대한제국의 멸망 부채질하다"
https://www.kwnews.c[...]
강원일보
2024-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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