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이토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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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이토 내각은 1892년 8월 8일부터 1896년 9월 18일까지 존속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대신을 맡았다. 이 내각은 원훈들의 입각으로 '원훈 내각'으로 불렸으며, 자유당과의 연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주요 정책으로 정비 절감과 해군 예산 확보를 위한 타협, 영일 통상 항해 조약 체결, 청일 전쟁 승리, 교육 개혁 등을 추진했다. 청일 전쟁 승리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높아졌으나, 삼국 간섭과 을미사변 등으로 조선에서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이토 내각은 항해장려법과 조선장려법을 제정하고, 자유당과의 연대를 통해 정국 안정을 도모했으나, 결국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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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마쓰카타 내각은 1891년 5월 2일부터 1892년 8월 8일까지 존속한 일본 제국의 내각으로, 오쓰 사건, 제2회 제국 의회와의 대립, 대규모 선거 간섭 등으로 붕괴되어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총사퇴하며 막을 내렸으며, 이러한 내각 운영 실패는 이토 히로부미가 원훈 내각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이토 내각 | |
---|---|
기본 정보 | |
내각 명칭 | 제2차 이토 내각 |
일본어 명칭 | 第2次伊藤内閣 |
대수 | 5대 |
관할 | 일본 |
국기 | [[File:Flag of Japan.svg|일본 국기]] |
존속 기간 | 1892년 – 1896년 |
![]() | |
국가 원수 | 메이지 천황 |
성립일 | 1892년 8월 8일 |
해산일 | 1896년 9월 18일 |
정부 수반 직함 | 내각총리대신 |
정부 수반 | 이토 히로부미 |
구성원 수 | 24명 |
이전 내각 | 제1차 마쓰카타 내각 |
다음 내각 | 제2차 마쓰카타 내각 |
정치 | |
정치 성향 | 소수 |
정치 정당 | 메이지 올리가르히 국민협회 동지세사 대일본협회 |
의회 | 소수 |
반대 정당 | 자유당 입헌개진당 동맹정사 |
선거 | 1894년 3월 총선거 1894년 9월 총선거 |
의회 임기 | 1892년 – 1894년 3월 1894년 3월 – 9월 1894년 9월 – 1898년 3월 |
2. 재직 기간
1892년(메이지 25년) 8월 8일부터 1896년 (메이지 29년) 9월 18일까지이다.[2] 재직 일수는 1,485일이다.[2]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이끄는 제1차 마쓰카타 내각이 각료들 간의 불협화음과 통제 불능으로 붕괴되자, 1892년 8월 2일 이토 히로부미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2] 이토 히로부미는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전직 총리대신 경험자들을 내각에 합류시켜 '원훈 내각'을 구성하였다.
1892년 8월 2일부터 1896년 8월 31일까지 존속한 제2차 이토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가 원훈들의 입각을 조건으로 구성하여 '원훈 내각'이라고 불렸다.[41]
이토 히로부미가 내각총리대신에서 사임한 후, 구로다 기요타카가 1896년 8월 31일부터 9월 18일까지 내각총리대신 직무대행을 맡았다.
3. 성립 배경 및 특징
제국 의회 개설 이후, 제1차 야마가타 내각과 마쓰카타 내각은 중의원 다수파였던 야당 세력(민당)과의 대립으로 법률 및 예산 통과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2차 이토 내각 역시 제4회 제국 의회에서 민당의 "민력 휴양·정비 절감" 주장에 직면, 해군 확장 및 산업 진흥 예산안이 삭감될 위기에 처했다.[31]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천황의 "화충협동" 조칙을 통해 정부와 의회 간 타협을 이끌어냈다. 내정비 3억엔과 관료 봉급 1할 삭감을 조건으로 예산안이 통과되면서, 정부는 군함 건조비를 확보하고 의회는 발언권을 확대하는 '윈-윈' 결과를 얻었다.[31]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안정적인 정권 운영을 위해 민당, 특히 자유당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자유당 역시 단순한 정부 비판에서 벗어나 정책 일치점에 따라 협력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반면, 민당의 또 다른 축인 입헌개진당은 반정부 기조를 유지하며 민당 연합을 주장하여 양당 간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1896년 4월 14일, 자유당 총재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내무대신으로 입각하고, 자유당 인사들이 내무성 요직에 임명되면서 자유당의 여당화가 본격화되었다.[9] 이토 히로부미는 진보당 당수 오쿠마 시게노부의 외무대신 영입을 통해 진보당과의 연대도 시도했으나,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반발과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중심으로 한 정당 연계 반대 세력의 강화로 무산되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는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 1896년 8월 31일 사임하였다.[35]
4. 주요 정책 및 활동
민당은 민력휴양과 정비절감을 주장하며 정부와 대립했고, 특히 해군 예산을 둘러싼 갈등이 심했다. 메이지 천황의 화애협동 조칙과 6년간 내정비에서 매년 30만엔, 관리 봉급 1할을 조함비로 충당하는 조건으로 타협하여 예산안을 통과시켰다.[41]
조약개정 교섭 과정에서 민당과 우익 단체들은 대외경파의 입장을 강화하며 반발했지만, 이토 내각은 두 번의 중의원 해산을 통해 영일 통상 항해 조약을 체결하고 치외법권 철폐에 성공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히로시마에 대본영과 제국의회를 이전하여 전시 체제를 확립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지만, 삼국 간섭으로 인해 랴오둥 반도는 반환해야 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인해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전시 중 정부와 민당의 협조 관계는 점차 붕괴되었고, 1896년에는 항해장려법, 조선장려법을 제정하여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연주의를 포기하고 자유당 총재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내무대신으로 입각시켜 자유당을 여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진보당 당수 오쿠마 시게노부의 입각에 대한 반발과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초연주의 고수로 인해 정권 유지가 어려워져 사표를 제출했다.
4. 1. 교육
이토 내각은 실학을 통한 인재 육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노우에 고와시 문부대신은 직업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가르치는 실업보습학교를 세우고, 전문 지식을 가르치는 직업 전문 학교인 도제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등 직업 교육과 실업 보습 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다.[2]
또한, 고등문관시험 제도를 도입하여 어느 대학 출신이든 관료가 되려면 시험을 치르도록 하고,[2] 3년간의 시용 기간을 없애고 합격 즉시 관료로 채용하는 등 관료 채용 범위를 넓혔다. 이러한 제도 개혁은 제국대학 출신들의 반발을 샀지만, 1895년부터 시험이 순조롭게 시행되면서 사이온지 긴모치 문부대신에 의해 교토 제국대학이 설립되는 등(1897년 6월 창립) 관료의 문호는 점차 확대되었다.[2]
4. 2. 외교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영일 통상 항해 조약을 체결하여 영사 재판권 철폐에 성공했다.[38] 이는 메이지 시대의 중요 과제였던 불평등 조약 개정의 중요한 성과였다. 이노우에 가오루 등 이전 외상들이 외국과의 타협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달리, 무쓰는 영국과의 교섭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38]
1894년 8월 1일에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했지만, 삼국 간섭으로 인해 랴오둥 반도를 반환해야 했다.[39]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직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연합하여 일본에 랴오둥 반환을 권고했고, 일본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39]
조선 문제에서는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인해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39] 1895년 10월 미우라 고로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을 일으켰으나,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아관파천)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더욱 줄어들었다.[39]
4. 3. 경제
청일 전쟁에서 얻은 3억엔에 달하는 배상금을 바탕으로, 정부는 적극적인 식산흥업·부국강병을 계획하는 전후 경영에 착수했고, 일본은 전쟁 특수에 휩싸였다. 1895년에 계획되어 제9 의회에서 가결된 1896년도 예산안은 주세, 담배 전매제, 영업세, 등록면허세, 국채 및 배상금으로 세입을 충당했으며, 1.525억엔에 달하는 세출은 육군 사단 증설, 해군 확장 계획, 야하타 제철소 건설비, 관영 철도 건설, 전화 사업 확대, 대만 경영비 등 다채로운 용도로 사용되었다.[41] 또한 항해 장려법·조선 장려법에 의한 항로 개척·조선 등 해운 발전 지원과 수출 장려, 일본 권업 은행법 등 특수 은행 설립에 따른 대만 경제 발전 추진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1894년 1월 22일 고토 쇼지로 농상무 대신과 사이토 슈이치로 차관이 부정 의혹으로 사임하고,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대신, 가네코 겐타로가 차관으로 취임하면서 농상무성도 상업 조직 창립을 계획했다. 야하타 제철소 설립 준비를 위해 제철 사업 조사회를 발족하고, 일본 발전에 상공 국가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정부 경제 자문 회의인 농상공 고등 회의 개최에 진력하는 등 일본 경제 방침에 적극 관여했다.
전후 경영은 세입·세출 균형이 크게 무너져 국채·외채에 의존하는 적자 재정에 빠졌고, 진출한 해외 시장에서 구미·중국계 상인과의 대립을 야기하는 등 마이너스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호황에 휩싸인 일본은 공업 생산을 크게 늘리고, 생산 증가에 따른 해외 수출, 기업 급성장 등 일본의 번영이 나타난 것도 확실하며, 제2차 이토 내각 퇴진 후에도 1897년(메이지 30년) 금본위제 이행, 1901년(메이지 34년) 야하타 제철소 조업 등으로 일본은 공업 국가로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5. 내각 구성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1892년(메이지 25년) 8월 8일부터 1896년(메이지 29년) 9월 18일까지 존속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내각총리대신에서 사임한 후, 구로다 기요타카 백작이 1896년 8월 31일부터 9월 18일까지 내각총리대신 임시 대행을 맡았다.[1]
직책 | 대신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
내각총리대신 | 이토 히로부미 | 무소속 |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 |
외무대신 | 무쓰 무네미쓰 | 무소속 | 1892년 8월 8일 | 1896년 5월 30일 | |
사이온지 긴모치 | 무소속 | 1896년 5월 30일 | 1896년 9월 18일 | ||
내무대신 | 이노우에 가오루 | 무소속 | 1892년 8월 8일 | 1894년 10월 15일 | |
노무라 야스시 | 무소속 | 1894년 10월 15일 | 1896년 2월 3일 | ||
요시카와 아키마사 | 무소속 | 1896년 2월 3일 | 1896년 4월 14일 | ||
이타가키 다이스케 | 자유당 | 1896년 4월 14일 | 1896년 9월 18일 | ||
대장대신 | 와타나베 구니타케 | 무소속 | 1892년 8월 8일 | 1895년 3월 17일 | |
마쓰카타 마사요시 | 무소속 | 1895년 3월 17일 | 1895년 8월 27일 | ||
와타나베 구니타케 | 무소속 | 1895년 8월 27일 | 1896년 9월 18일 | ||
육군대신 | 오야마 이와오 | 육군 | 1892년 8월 8일 | 1896년 9월 18일 | |
해군대신 | 니레 가겐오리 | 해군 | 1892년 8월 8일 | 1893년 3월 11일 | |
사이고 주도 | 국민협회 | 1893년 3월 11일 | 1896년 9월 18일 | ||
사법대신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육군 | 1892년 8월 8일 | 1893년 3월 11일 | |
공석 | 1893년 3월 11일 | 1893년 3월 16일 | |||
요시카와 아키마사 | 무소속 | 1893년 3월 16일 | 1896년 9월 18일 | ||
문부대신 | 고노 도가마 | 입헌개진당 | 1892년 8월 8일 | 1893년 3월 7일 | |
이노우에 고와시 | 무소속 | 1893년 3월 7일 | 1894년 8월 29일 | ||
요시카와 아키마사 | 무소속 | 1894년 8월 29일 | 1894년 10월 3일 | ||
사이온지 긴모치 | 무소속 | 1894년 10월 3일 | 1896년 9월 18일 | ||
농상무대신 | 고토 쇼지로 | 무소속 | 1892년 8월 8일 | 1894년 1월 22일 | |
에노모토 다케아키 | 해군 | 1894년 1월 22일 | 1896년 9월 18일 | ||
체신대신 | 구로다 기요타카 | 육군 | 1892년 8월 8일 | 1895년 3월 17일 | |
와타나베 구니타케 | 무소속 | 1895년 3월 17일 | 1895년 10월 9일 | ||
시라네 센이치 | 무소속 | 1895년 10월 9일 | 1896년 9월 18일 | ||
척식무대신 |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 육군 | 1896년 4월 2일 | 1896년 9월 18일 | |
무임소대신 | 구로다 기요타카 | 육군 | 1895년 3월 17일 | 1896년 9월 18일 | |
내각관방장관 | 이토 미요지 | 무소속 | 1892년 8월 8일 | 1896년 9월 18일 | |
내각법제국 장관 | 오자키 사부로 | 무소속 | 1892년 8월 8일 | 1892년 8월 20일 | |
공석 | 1892년 8월 20일 | 1892년 9월 29일 | |||
스에마쓰 겐초 | 무소속 | 1892년 9월 29일 | 1896년 9월 18일 | ||
colspan="6" | | |||||
출처:[1] |
5. 1. 국무대신
백작
백작
육군중장

자작

후작

백작

자작

자작

자유당총리
백작

자작

백작
자작
대장·체신대신 겸임

백작
육군중장

자작
해군중장

국민협회회두
백작
해군대장
육군중장

백작
육군중장
자작


자작
후작

백작

자작
해군중장
백작
육군중장
자작
대장·체신대신 겸임


자작
백작
육군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