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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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이왕은 백제의 제8대 국왕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나, 삼국유사 등 다른 기록에는 초고왕의 외삼촌으로 기록되어 있어 출생에 대한 논란이 있다. 구수왕 사후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으며, 52년간 재위했다. 재위 기간 동안 신라, 낙랑, 말갈 등 주변 세력과 충돌했고,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 낙랑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여 6좌평과 16관등 체제를 정비하고 공복 제도를 제정했으며, 뇌물 수수 및 절도 행위에 대한 처벌 법령을 마련했다. 고이왕은 한강 유역 지배력을 확장하고 마한을 완전히 지배했으며, 신라와 잦은 전투를 벌이는 등 백제의 기틀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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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고이왕 |
한자 이름 | 古爾王 |
로마자 표기 | Goi-wang |
다른 이름 | 부여고이(扶餘古爾) |
출생일 | 미상 (166년 전후) |
사망일 | 286년 11월 (음력) |
재위 기간 | 234년 ~ 286년 11월 (음력) |
매장지 | 미상 |
자녀 | 책계왕 |
부왕 | 개루왕? |
모후 | 미상 |
형제자매 | 3남 중 차남? (초고왕?, 부여우수) |
왕비 | 미상 |
전임자 | 사반왕 |
후임자 | 책계왕 |
묘호 | 없음 |
시호 | 없음 |
종교 | 토착 신앙 |
가문 | 미상 |
연호 | 없음 |
호칭 | 어라하 |
목록 | 제8대 백제 국왕 |
추정 건축물 | |
![]() | |
문화유산 | |
관련 문화유산 | 풍납토성 |
발굴 성과 | 국립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발굴 |
언어별 표기 | |
일본어 (히라가나) | こにおう |
일본어 (가타카나) | コイワン |
2. 생애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라고도 하고, 초고왕의 외삼촌이라고도 하여 출생에 대한 논란이 있다.[1] 초고왕 사후 20년 뒤에 즉위하여 52년간 재위하였기에 초고왕의 동생인지에 대한 이견도 있다. 구수왕 사후 장자 사반왕이 즉위했으나,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자 고이왕이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2]
고이왕은 재위 중 신라, 낙랑, 말갈 등과 잦은 충돌을 겪었다. 신라와는 괴곡(충청북도 괴산군)·봉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을 위한 잦은 충돌이 있었다. 246년 위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낙랑군의 변방을 침입하였다.[4]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기습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 백제가 있었음이 추측된다.[4]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렸다. 260년에는 6개의 좌평을 두는 등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하고, 관직에 따라 자주색, 다홍색, 푸른색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3]
일부 학자들은 고이왕이 온조왕의 직계 후손이 아닌, 우태-비류 계열의 인물이며, 중국 기록에 나오는 "구태"가 고이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백제의 진정한 건국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 1. 즉위 초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보이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 및 《삼국유사》에는 초고왕의 외삼촌이라 되어 있어 논란이 있다. 초고왕 사후 20년 뒤에 즉위하여 그때로부터 다시 52년을 재위하였으므로 초고왕의 동생 여부에 이견이 존재한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구수왕이 죽은 뒤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고이왕이 사반왕을 강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2. 2. 통치 제도 정비
260년 봄 정월, 고이왕은 기존의 좌우보 체제를 개혁하여 여섯 개의 좌평(佐平)을 두었다. 이들은 왕명 출납, 창고 관리, 의례 제정, 형벌 제도, 군사 업무를 각각 분담하여 맡았다. 또한, 16품의 관등 체계를 정비하고, 관직에 따라 자주색, 다홍색, 푸른색 옷을 입게 하는 등 품계에 따른 왕과 귀족의 공복에 관한 제도도 정했다.[3]262년에는 뇌물을 금지하는 규정을 제정하여 부정한 관리에게는 뇌물의 3배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또한 수도 남쪽에 농지를 개간하도록 명령하였다.
직책 | 역할 | 품계 | 복색 |
---|---|---|---|
내사(Minister of the Interior) | 행정 명령 담당 | 1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재상(Minister of the Treasury) | 창고 관리 | 1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예상(Minister of Rites and Ceremonies) | 의례 제정 | 1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병상(Minister of Defense) | 주택, 방어, 군사 관련 사항 담당 | 1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형상(Minister of the Court) | 재판과 형벌 담당 | 1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군상(Minister of the Military) | 외부 인마 관련 사항 담당 | 1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달솔(Dalsol) | 2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
은솔(Eunsol) | 3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
덕솔(Deoksol) | 4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
한솔(Hansol) | 5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
나솔(Nasol) | 6품 | 자주색, 은화 장식 | |
장덕(Jangdeok) | 7품 | 주홍색 | |
사덕(Sideok) | 8품 | 주홍색 | |
고덕(Godeok) | 9품 | 주홍색 | |
계덕(Gyedeok) | 10품 | 주홍색 | |
대덕(Daedeok) | 11품 | 주홍색 | |
문덕(Mundok) | 12품 | 파란색 | |
무덕(Mudok) | 13품 | 파란색 | |
좌군(Jwagun) | 14품 | 파란색 | |
진무(Jinmu) | 15품 | 파란색 | |
거극(Geuku) | 16품 | 파란색 |
2. 3. 대외 관계
고이왕은 재위 기간 중 신라, 낙랑, 말갈 등과 잦은 충돌을 겪었다. 신라와는 괴곡(충청북도 괴산군)·봉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을 위한 잦은 충돌이 있었다.246년 위나라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낙랑군의 변방을 침입하였다.[4] 또한, 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방군을 기습하여 대방태수 공존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 백제가 있었음이 추측된다.[4] 그러나 위나라의 반격을 우려한 고이왕은 포로들을 돌려보내며 급히 화친을 청했다.[4]
고이왕은 중국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고 공격적인 태세로 전환했다. 중국이 백제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한강 유역을 공격하자, 중국이 지배하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했다.
258년에는 말갈 족장 나갈이 공물을 바치자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기도 했다.
2. 3. 1. 신라와의 관계
고이왕은 266년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성주 직선(Jikseon)이 이끄는 정예병 200명의 역습으로 패퇴하였다.[3] 272년, 278년, 284년에도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278년에는 고곡(Goegok) 성을 포위하였다.286년 봄, 고이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그해 겨울에 사망했다.
고이왕 재위 기간 동안 백제는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고, 한반도 남서부의 느슨한 연맹체였던 마한의 남은 국가들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또한 동쪽의 라이벌인 신라의 국경을 공격하기도 했다.
고이왕은 240년 신라 침공을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고, 255년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 장군 익종(Ikjong)을 죽였다. 그러나 신라군의 반격으로 백제군은 고곡 서쪽에서 패퇴하였다. 같은 해 겨울,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261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283년에도 신라 국경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였다.
잦은 신라와의 교전의 중심지는 괴곡(충청북도괴산군)·봉산(경상북도영주시)이었다.
2. 3. 2. 중국과의 관계
고이왕은 재위 기간 동안 중국 위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다. 246년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 낙랑군의 변방을 침입하여 백성을 빼앗았으나, 위나라가 군사를 돌릴 것을 우려하여 포로들을 돌려보냈다.[4] 이 사건은 《삼국사기》와 중국의 《삼국지》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한나라와 낙랑군, 대방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백제가 대방군을 기습하여 대방태수 공존(Gong Zun)을 전사하게 한 사건의 배후에 고이왕이 있었음이 추측된다.[4]
고이왕은 중국에 대한 방어적인 태도를 버리고 공격적인 태세로 전환했다. 중국이 백제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한강 유역을 공격하자, 중국이 지배하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했다.
2. 3. 3. 기타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루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 및 《삼국유사》에는 초고왕의 외삼촌이라 되어 있어 논란이 있다. 초고왕 사후 20년 뒤에 즉위하여 그때로부터 다시 52년을 재위하였으므로 초고왕의 동생 여부에 이견이 존재한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구수왕이 죽은 뒤 구수왕의 장자인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하자, 고이왕이 사반왕을 강제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고이왕은 관리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자에게는 3배를 징출(徵出)케 하는 동시에 종신 금고(禁錮)에 처한다는 법령을 내렸다. 262년에는 관인의 수뢰자나 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획득한 것의 세 배를 징수하고 종신금고형을 처벌로 하는 포고를 하였다.
286년 11월 재위 53년 만에 붕어했다.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3. 평가
4. 가계
《주서》 및 《수서》의 백제전에 시조라 기록된 '구태(仇台)'라는 이름을 ‘구이’로 읽어서 ‘고이’와 음운상으로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함으로써 고이왕을 백제의 건국자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하여[10],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 - 비류(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11]
관계 | 이름 | 비고 |
---|---|---|
조부 또는 선조 | 기루(己婁) | ? ~128, 재위:77~128 |
조모 | 미상 | |
부왕 또는 선조 | 개루(蓋婁) | ? ~166, 재위:128~166 |
모후 | 미상 | |
형 | 초고(肖古) | 이설 있음[12] |
동생 | 우수(優壽) | |
국왕 | 고이(古尒) | ? ~286, 재위:234~286, 이설 있음[13] |
아들 | 책계 | |
아버지 | 백제 개루 | |
어머니 | 알 수 없음 | |
형제 | 부여 초고(扶餘肖古) | ?–214, 백제 제5대 왕, 학계에서 논란이 있음[5] |
부여 우수(扶餘優壽) | ?–?, 260년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되었다는 삼국사기 내용이 유일하다. | |
왕비 | 공손도의 딸 | 대방군의 군사령관 공손도(公孫度, ?–204) |
아들 | 부여 책계(扶餘責稽) | ?–298, 장남, 백제 제9대 왕 |
참조
[1]
서적
백제의중앙과지방 (Central area and regions of Baekje)
Juryuseong
2005
[2]
간행물
Samguk sagi
[3]
간행물
Samguk sagi
[4]
간행물
Sanguozhi
[5]
웹사이트
고이왕
https://www.doopedia[...]
2020-08-31
[6]
기타
[7]
웹사이트
서해에서 사냥하다
https://db.history.g[...]
[8]
웹인용
백제의 국가 탄생과 화성 마하리 무덤떼
https://ggc.ggcf.kr/[...]
2024-06-14
[9]
웹인용
국립문화재硏,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발굴성과 공개
https://www.mk.co.kr[...]
2024-06-14
[10]
서적
한중일 국가기원과 그 역사
맑은소리
2008
[11]
기타
[12]
서적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오판)
웅진닷컴
2004
[1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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