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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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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고왕은 백제의 제8대 왕으로, 개루왕의 아들이며 166년부터 214년까지 재위했다. 신라와 잦은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하고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펼쳤다. 신라와의 갈등은 길선의 망명으로 시작되었으며, 188년 모산성 공격, 189년 구양 전투, 190년 원산향 공격, 204년 요차성 함락 등의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적현성과 사도성을 축조했으나, 말갈의 반격으로 영토가 축소되기도 했다. 『고사기』에는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소고왕과 구수왕의 기록이 중복되어 있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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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왕
기본 정보
한글 이름초고왕
한자 이름肖古王, 素古王, 速古王
로마자 표기Chogo-wang, Sogo-wang, Sokgo-wang
본명부여초고(扶餘肖古)
왕조
왕조백제
목록제5대 백제 국왕
재위
재위 기간166년~214년
가족 관계
부왕개루왕
모후?
왕비?
자녀?
기타 정보
묘호없음
시호없음
매장지?
종교?
가문부여씨
연호?
호칭어라하
계승
전임자개루왕
후임자구수왕

2. 생애

(내용 없음)

2. 1. 즉위 전

삼국사기』에 따르면 초고왕은 개루왕의 아들이다.[1] 개루왕 재위 말기인 165년에 신라의 반역자 길선(吉宣)을 백제가 받아들이면서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이는 초고왕이 왕위를 계승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다.[2] 이후 개루왕이 재위 39년 만인 166년에 사망하자, 초고왕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1]

2. 2. 신라와의 전쟁

개루왕 말년부터 시작된 신라와의 불화는 초고왕 대에도 이어졌다. 155년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란 모의 후 백제로 망명한 사건이 주요 원인이었다.[8] 초고왕 재위 기간 동안 신라와의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계속되었으며, 주요 전투 기록은 다음과 같다.

초고왕 시기 신라와의 주요 전투
연도장소주요 내용결과 및 비고
167년신라 서부 변경백제가 2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주민 1,000명을 사로잡았다.신라 아달라니사금일길찬 흥선과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강까지 진격하자, 백제가 점령했던 성과 주민들을 돌려주었다.
170년신라 국경백제가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을 침략했다.구체적인 전과 기록은 없다.
188년모산성(母山城)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했다.모산성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나, 충청북도 진천군의 대모산성 설이 유력하다.[3]
189년구양(狗壤)백제군이 신라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배했다.백제군 500명 이상이 전사했다.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지역이다.
190년원산향(圓山鄕), 와산(蛙山)백제가 원산향(현재의 경상북도 예천군[4])을 공격하고 부곡성(缶谷城, 현재의 경상북도 군위군 악계면[5] 추정)을 포위했다. 이후 와산(蛙山, 현재의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신라 장군 김구도(金仇道)를 유인하여 크게 승리했다.백제의 유인 작전이 성공했다.
199년신라 국경백제가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을 공격했다.같은 해 7월 지진 발생 기록이 있다.
204년요차성(腰車城), 사현성(沙峴城)백제가 요차성(현재의 충청북도 보은군 회남면[6] 추정)을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살해했다.신라 내해 이사금이 분노하여 이벌찬 석리음(昔利音)에게 군대를 주어 백제의 사현성(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사현리 부근 추정)을 공격하게 했다.



초고왕 시기 백제는 신라와 소백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으며, 양국 관계는 지속적인 긴장 상태에 있었다.

2. 3. 말갈과의 항쟁

초고왕 재위 기간에는 북방의 말갈과도 여러 차례 충돌했다. 북한강 상류를 통해 남하하는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210년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을 쌓고, 동부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같은 해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을 공격했으나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성문만 불태운 뒤 물러갔다.

214년 가을 9월, 초고왕은 북부 출신 진과(眞果)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말갈의 석문성(石門城) (현재의 황해북도 서흥군 석문사 부근으로 추정됨)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같은 해 겨울, 말갈은 강력한 기병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고, 백제 영토 깊숙이 술천(述川) 또는 술수(述水) (현재의 경기도 여주) 지역까지 침입하였다. 이 공격으로 백제는 상당한 영토를 잃었으며, 이 사건 직후 초고왕이 사망하였다.

2. 4. 기타 치적

초고왕은 재위 기간 동안 신라말갈과 여러 차례 충돌하며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또한 다양한 자연재해와 천문 현상이 기록되어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 삼국사기 기록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초고왕 대의 주요 사건들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연도내용
167년7월, 군사를 보내 신라 서쪽의 두 성을 함락하고 1,000명의 주민을 사로잡았다. 8월, 신라 아달라니사금이 일길찬 흥선과 함께 대규모 반격을 감행하자, 한강 유역까지 진격해 온 신라군에게 점령했던 성과 주민을 돌려주었다.
170년3월, 일식이 있었다. 10월,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을 침범했다.
186년10월, 구름 없는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북서쪽에 혜성이 나타나 20일 후에 사라졌다.
187년5월, 수도와 한강의 우물이 모두 말랐다.
188년2월, 궁궐을 크게 수리했다. 군사를 보내 신라의 모산성(母山城, 충청북도 진천군 대모산성으로 추정[3])을 공격했다.
189년4월, 일식이 있었다. 7월, 신라 구양(狗壤, 충청북도 옥천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여 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190년8월, 군사를 보내 신라 서쪽의 원산향(圓山郷, 경상북도 예천군으로 추정[4])을 공격하고 부곡성(缶谷城, 경상북도 군위군 악계면으로 추정[5])을 포위했다. 신라 장군 김구도(金仇道)가 반격해오자 후퇴하는 척하며 와산성(蛙山城, 충청북도 보은군)까지 유인하여 크게 승리했다.
191년9월, 각성(角城)과 인후성(咽喉城)에 치우기(혜성의 일종)가 나타났다.
199년7월, 지진이 발생했다.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을 공격했다.
204년7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요차성(腰車城, 충청북도 보은군 회남면으로 추정[6])을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이에 신라 내해니사금이 분노하여 이벌찬 석리음(昔利音)을 장군으로 삼아 사현성(沙峴城,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사현리 부근으로 추정)을 공격하게 했다. 10월, 동쪽 우물 근처에 혜성이 나타났다.
205년7월, 금성이 달을 가리는 현상(금성엄월, 金星犯月)이 관측되었다.
208년가을, 메뚜기 떼의 습격과 가뭄으로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 도적이 많아지자 왕이 백성들을 위로했다.
209년10월, 태풍이 불어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210년2월, 정현성(沙峴城)과 사도성(沙道城) 두 성을 쌓고 동쪽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10월, 말갈이 사도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성문만 불태운 뒤 물러갔다.
211년8월,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11월, 겨울임에도 얼음이 얼지 않았다.
212년6월, 일식이 있었다.
213년7월, 서쪽 지방의 회회(洄澮)라는 사람이 흰 사슴을 잡아 바치자 왕이 이를 길조로 여겨 곡식 100섬을 하사했다.
214년9월, 북부의 진과(眞果)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말갈의 석문성(石門城, 황해북도 서흥군 석문사 부근으로 추정)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월, 말갈의 강력한 기병이 반격하여 술수(述水, 경기도 여주군남한강 유역)까지 침입했다. 이 직후 초고왕이 사망했다.



=== 일본과의 관계 ===

일본의 역사서 『고사기』에는 응신천황 시대에 백제왕 '''조고왕'''(照古王)이 등장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조고왕은 말 한 쌍과 『논어』 등의 서적을 일본에 보내고, 학자인 아직기(阿知吉師)와 왕인(和邇吉師)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 조고왕을 백제의 초고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활동 연대를 고려할 때 13대 근초고왕을 가리킨다는 설도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2. 5. 최후

210년 10월, 말갈이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했으나, 성문이 불타는 데 그치고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214년 가을 9월, 초고왕은 북쪽 지역의 진과(眞果)에게 1,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말갈의 석문성(石門城)(황해북도 서흥군의 석문사 부근으로 추정됨)을 공격하여 함락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같은 해 겨울(음력 10월), 말갈의 강력한 기병대가 술수(述水, 현재의 경기도 여주군 일대 한강으로 추정됨)까지 쳐들어왔다. 이 침입 직후 초고왕은 사망했다. 재위 49년이었으며, 사망 원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초고왕 대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67년''' 가을 7월, 백제는 군사를 몰래 보내 신라 서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000명의 남녀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신라왕은 일길찬 흥선에게 군사 2만 명을 주어 동쪽 여러 성을 공격하게 했고, 신라왕 자신도 정예 기병 8,000명을 이끌고 한강까지 진격했다. 백제는 신라군의 기세를 막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이전에 빼앗았던 것을 돌려주었다.
  • '''170년''' 봄 3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국경을 침범했다.
  • '''186년''' 겨울 10월, 구름 없이 번개가 쳤다. 북서쪽에 혜성이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 '''187년''' 봄 5월, 수도와 한강의 우물이 모두 말랐다.
  • '''188년''' 봄 2월, 궁궐을 크게 수리했다. 군사를 보내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했다.
  • '''189년''' 봄 4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백제군이 신라의 구양(狗壤)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500여 명이 죽었다.
  • '''190년''' 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 서쪽의 원산향(圓山鄕)을 공격하고 진격하여 부곡성(缶谷城)을 포위했다. 신라 장군 구도(仇道)가 기병 500명을 이끌고 반격하자 백제군은 거짓으로 후퇴했다. 구도가 와산성(蛙山城) 아래까지 추격하자 백제군이 반격하여 크게 이겼다.
  • '''191년''' 가을 9월, 각성(角城)과 인후성(咽喉城) 두 성 위에 치우기(蚩尤旗, 혜성의 일종)가 나타났다.
  • '''199년''' 가을 7월, 지진이 발생했다.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략했다.
  • '''204년'''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요차성(腰車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이에 신라왕 내해가 분노하여 이벌찬 이음(利音)을 장군으로 삼아 정예병 6부대를 이끌고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하게 했다. 겨울 10월, 동쪽 우물 위에 혜성이 나타났다.
  • '''205년''' 가을 7월, 금성이 달을 가렸다.
  • '''208년''' 가을, 메뚜기 떼의 피해와 가뭄으로 곡식이 익지 않았다. 도적이 많았으나 왕이 백성들을 위로했다.
  • '''209년''' 겨울 10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 '''210년''' 봄 2월,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 두 성을 쌓고 동쪽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성문을 불태우고 달아났다.
  • '''211년''' 가을 8월,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 '''212년''' 여름 6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 '''213년''' 가을 7월, 서쪽 지방의 회회(洄洄)라는 사람이 흰 사슴을 잡아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를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 곡식 100섬을 하사했다.
  • '''214년''' 가을 9월, 왕은 북쪽 변방의 진과(眞果)에게 군사 1,000명을 주어 말갈의 석문성(石門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겨울, 말갈의 강한 기병이 침입하여 술천(述川)까지 이르렀다. 이 해에 왕이 사망했다.


한편, 『삼국사기』의 백제 초기 기록에는 초고왕(肖古王)을 근초고(近肖古)로, 구수왕(仇首王)을 근구수(近仇首)로 중복하여 기록했다는 지적이 있다.[7] 즉, 『삼국사기』의 초고왕은 즉위년이 근초고왕과 같은 병오(丙午)년이며, 재위 기간은 166년부터 214년이고, 구수왕의 재위 기간은 214년부터 234년이다. 이러한 기록은 일본의 『고사기』에 나오는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 및 『일본서기』 주석에 인용된 백제계 사서의 소고(肖古), 귀수(貴須)와 연대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초고왕과 구수왕의 재위 기간에 해당하는 166년부터 234년 사이의 기록은 중국의 『후한서』나 『위지』 등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7] 이 때문에 초고왕과 구수왕은 후대에 근초고왕근구수왕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거나, 혹은 그 반대로 초고왕과 구수왕의 기록을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대로 옮겨 기록하면서 왕계를 늘린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는 기원전 37년부터 시작되는 『삼국사기』 백제 왕계의 초기 기록 일부가 후대에 추가되거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7]

4. 가계


  • 조부 : 기루(己婁, ? ~128, 재위:77~128)
  • 조모 : 미상
  • 부왕 : 개루(蓋婁, ? ~166, 재위:128~166)
  • 모후 : 미상
  • 왕비 : 미상
  • * 아들 : 구수(仇首, ? ~234, 재위:214~234) - 장남.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부여구수(扶餘仇首)였다.
  • 동생 : 고이(古尒, ? ~286, 재위:234~286) - 초고왕의 동생이라는 설과 함께 이설도 존재한다.[9]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부여고이(扶餘古爾)였다.
  • 동생 : 우수(優壽, ? ~?) - 260년에 내신좌평(內臣佐平)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백제의 제8대 왕 고이는 초고왕의 동생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제13대 왕 근초고왕은 두 왕족 세력 간의 오랜 다툼 이후 자신의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초고왕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5. 평가 및 의의

백제의 제8대 왕 고이왕은 초고왕의 동생이라고 전해진다. 후대의 제13대 왕 근초고왕은 당시 존재했던 두 왕족 세력 간의 오랜 다툼 이후, 자신의 혈통적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초고왕의 이름을 따서 왕명을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삼국사기』의 초기 백제 왕계 기록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초고왕(『삼국사기』에서는 소고왕(肖古王)으로도 표기)과 근초고왕(근소고왕), 그리고 구수왕근구수왕의 기록이 중복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된다.[7]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고왕(초고왕)의 즉위년은 근소고왕(근초고왕)과 같은 병오(丙午)년이며, 재위 기간은 166년부터 214년까지이고, 구수왕의 재위 기간은 214년부터 234년까지이다.

이러한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별개로,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에 등장하는 조고왕(照古王)이나 『일본서기』 및 그 주석서에 인용된 백제계 사서에 나오는 소고(肖古), 귀수(貴須) 등은 연대적으로 볼 때 『삼국사기』의 근소고(근초고왕) 및 근구수(근구수왕)와 일치한다는 분석이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서 초고왕과 구수왕이 활동했다고 기록된 시기(166년~234년)는 중국의 『후한서』나 『위지』 등이 다루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 중국 사서들에는 해당 시기 백제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된다.[7]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삼국사기』의 근소고(근초고왕)와 근구수(근구수왕) 기록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며, 실제로는 소고(초고왕)와 구수(구수왕)를 각각 근소고와 근구수로 기록하고, 그 앞에 다시 소고와 구수를 배치함으로써 왕계를 인위적으로 늘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삼국사기』 백제 왕계에서 기원전 37년부터 시작되는 초기 기록 중 일부는 후대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7]

6. 대중 문화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삼국사기
[2] 서적 삼국사기
[3] 서적 삼국사기 平凡社
[4] 일반
[5] 일반
[6] 일반
[7] 학술지 대화전대의 기년(삼) https://doi.org/10.3[...] 北海道教育大学 1982-09-01
[8] 웹인용 초고왕(肖古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19-11-18
[9]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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