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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동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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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산 동수 전투는 927년 후삼국 시대에 고려와 후백제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신라를 공격한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기 위해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이 출전했으나, 견훤의 기습에 의해 고려군은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신숭겸 등 8명의 장수를 잃고 군사 493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왕건은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고려는 건국 이후 최대의 패배를 겪으며 수세에 몰렸다. 이후 왕건은 신숭겸을 기리고, 930년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며 수세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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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동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공산 동수 전투(公山 桐藪 戰鬪)
전체후삼국 시대
날짜927년
장소신라 공산(현재 팔공산) 파군재
결과고려 건국 이후 최대 패배
교전 세력
교전국 1고려
교전국 2후백제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왕건
복지겸
신숭겸
김낙
전의갑
전이갑
지휘관 2견훤
최승우
애술
신덕
상귀
최필
소달
병력
병력 1왕건 5000명
후방 배치군 1만 명
총병력 1만 5000명
병력 22만 명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신숭겸 등 8명의 장수 전사
4930명 전사
사상자 2불명

2. 배경

926년 9월, 후백제견훤고려 근품성을 공격하면서 후삼국 시대고려후백제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라견훤을 반역자로 여겨 대체로 고려를 지지하였고, 이에 견훤신라에 불만을 품었다.

927년 9월, 견훤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근품성(현재 문경시)과 고울부(현재 영천시)를 함락시키고 금성(현재 경주)으로 진군했다.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은 시중 공선에게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신라를 돕게 했다.

그러나 고려군이 도착하기 전인 11월, 후백제군이 경주를 점령하여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왕건은 이 소식에 크게 분노하여 5,0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직접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전했다.

2. 1. 후삼국 시대의 전개

후삼국 시대 당시 고려후백제는 처음에는 별다른 충돌없이 평화롭게 지냈으나 926년 9월에 후백제견훤고려 근품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로 고려후백제는 수차례에 걸쳐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대체로 고려를 지지하였는데, 이는 견훤신라의 무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모반을 일으켜 스스로 나라를 일으킨 역적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견훤은 늘 신라에 불만을 품고 지냈다.

927년 9월, 견훤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신라 근품성(근암성, 현재 문경시)과 고울부(현재 영천시)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수도 금성(현재 경주)으로 진군했다. 위기를 느낀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왕건은 9월 초에 시중 공선에게 1만 명의 군사를 맡겨 신라를 돕기 위한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이 미처 신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후백제군이 11월에 경주를 점령하여 친고려적인 행동을 자주 하였던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였으며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또한 왕제 효렴과 재신 영경 등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보물들을 약탈한 후에 귀환길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크게 분노하여 친히 50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퇴각하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전했다.

2. 2. 신라와 후백제의 관계

후삼국 시대 당시 고려후백제는 처음에는 별다른 충돌없이 평화롭게 지냈으나 926년 9월에 후백제견훤고려 근품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로 고려후백제는 수차례에 걸쳐 충돌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대체로 고려를 지지하였는데, 이는 견훤신라의 무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모반을 일으켜 스스로 나라를 일으킨 역적이라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견훤은 늘 신라에 불만을 품고 지냈다.

927년 9월, 견훤은 마침내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신라 근품성(근암성, 현재 문경시)과 고울부(현재 영천시)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수도 금성(현재 경주)으로 진군했다. 위기를 느낀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하여 9월 초에 시중 공선에게 1만 명의 군사를 맡겨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이 미처 신라에 도착하기도 전에 후백제군이 11월에 경주를 점령하여 친고려적인 행동을 자주 하였던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였으며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또한 왕제 효렴과 재신 영경 등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보물들을 약탈한 후에 귀환길에 올랐다.

2. 3. 고려의 참전

927년 9월, 후백제견훤신라 금성(현재의 경주)으로 진군하자, 신라 경애왕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해 시중 공선에게 1만 명의 군사를 맡겨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이 신라에 도착하기 전에 후백제군이 11월에 경주를 점령하고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5,000명의 정예 기병을 직접 이끌고 후백제군을 추격하기 위해 출전했다.

3. 전투 과정

견훤은 왕건의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이를 역이용하여 고려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공격에 밀려 포위당했고, 왕건은 위기에 처했다. 이때 신숭겸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왕의 갑옷을 입고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착각하여 그를 죽였다. 김낙도 왕건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다가 전사했다. 전의갑전이갑 형제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왕건은 간신히 탈출했으나, 신숭겸, 김낙 등 8명의 장수와 5천여 명의 군사 중 대다수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후백제군은 승리 후 대목군, 칠곡군, 약목면 등을 점령하고 고려군의 양식을 불태웠다.

대구에는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3. 1. 왕건의 전략과 견훤의 역습

왕건은 발 빠른 기병대를 이끌고 후백제군보다 먼저 대구 공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퇴각하는 후백제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견훤이 이 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역으로 이용하여 공산으로 향하던 고려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고려군은 곧 후백제군의 공격에 밀려 포위당했고, 왕건은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다. 이때 고려의 개국 공신 중 하나였던 신숭겸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왕의 갑옷을 입고 백마에 올라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착각하여 화살을 쏘아 신숭겸을 죽이고 그 수급을 취하였다. 또 다른 고려 장수 김낙도 왕건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전의갑전이갑 형제도 싸우던 중에 전사했다.

3. 2. 고려군의 포위와 신숭겸의 희생

견훤은 왕건의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이를 역이용하여 공산으로 향하던 고려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공격에 밀려 포위당했고, 왕건은 위기에 처했다. 이때 신숭겸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왕의 갑옷을 입고 백마에 올라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착각하여 화살을 쏘아 죽이고 그 수급을 취하였다. 김낙도 왕건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전의갑전이갑 형제도 싸우다 전사했다.

3. 3. 고려군의 패배

견훤은 왕건의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이를 역이용하여 공산으로 향하던 고려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고려군은 후백제군의 공격에 밀려 포위당했고, 왕건은 위기에 처했다. 이때 신숭겸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왕의 갑옷을 입고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착각하여 그를 죽였다. 김낙도 왕건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다가 전사했다. 전의갑전이갑 형제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왕건은 간신히 탈출했으나, 신숭겸, 김낙 등 8명의 장수와 5천여 명의 군사 중 대다수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후백제군은 승리 후 대목군, 칠곡군, 약목면 등을 점령하고 고려군의 양식을 불태웠다.

대구에는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4. 전투의 결과

공산 전투에서 고려는 건국 이래 가장 큰 패배를 겪었다. 이로 인해 고려는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계속 밀리는 상황에 놓였다.

4. 1. 고려의 수세와 후백제의 공세

고려는 이 전투에서 건국 이래 최대의 패전을 당했고, 이후 후백제와 여러 차례 싸웠으나 계속 패하여 수세에 몰렸다. 이러한 상황은 견훤최승우를 시켜 왕건에게 보낸 서신인 《대견훤기고려왕서》에 잘 드러나 있다. 왕건은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이긴 후에야 수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우측에 선 이)과 태조 왕건(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이))

4. 2. 왕건의 서신과 고창 전투

견훤최승우를 시켜 왕건에게 《대견훤기고려왕서》라는 서신을 보내 고려의 상황을 조롱하였다. 왕건은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에 대승을 거두고 나서야 수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 전투 이후

왕건은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한 신숭겸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며,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하고 직접 제례를 지냈다.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 지방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후백제군이 신숭겸의 시신을 왕건의 것으로 착각하고 그 목을 가져갔는데, 이에 왕건은 시신의 목을 황금으로 조각하여 함께 매장하도록 하였다. 1120년(고려 예종 15년)에는 신숭겸김낙을 추모하는 향가인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찬양케 하였다.

대구에는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공산 전투 당시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5. 1. 전사자 추모

왕건은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한 신숭겸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며,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하고 직접 제례를 지냈다.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 지방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후백제군이 신숭겸의 시신을 왕건의 것으로 착각하고 그 목을 가져갔는데, 이에 왕건은 시신의 목을 황금으로 조각하여 함께 매장하도록 하였다.

1120년(고려 예종 15년)에는 신숭겸김낙을 추모하는 향가인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찬양케 하였다. 현재 곡성의 덕양서원과 용산재, 대구의 표충사, 춘천시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동양서원 등에 신숭겸김낙이 배향되고 있다.

5. 2. 대구 지역의 지명 유래

대구에는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공산 전투 당시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6. 역사적 의의

공산 전투는 후삼국 시대의 세력 판도를 뒤흔든 중요한 사건이었다. 고려는 이 전투에서 건국 이후 가장 큰 패배를 겪었고, 이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계속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견훤최승우를 통해 왕건에게 보낸 서신인 《대견훤기고려왕서》에 잘 드러나 있다. 왕건은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이기고 나서야 비로소 수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신숭겸, 김낙 등 많은 충신들이 목숨을 바쳐 왕건을 구한 이 전투는 고려 건국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고, 왕건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6. 1. 후삼국 시대 정세 변화

공산 전투는 후삼국 시대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고려의 초기 성장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고려는 이 전투에서 건국 이래 최대의 패전을 당했고, 이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며 수세에 몰렸다. 이러한 상황은 견훤최승우를 시켜 왕건에게 보낸 서신인 《대견훤기고려왕서》에 잘 나타나 있다. 왕건은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이기고 나서야 수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 2. 고려 건국의 밑거름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 김낙 등 많은 충신들이 목숨을 바쳐 왕건을 구했다. 이러한 희생은 고려 건국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으며, 왕건의 리더십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927년 공산 전투에서 고려는 건국 이래 최대의 패배를 겪었고, 이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계속 밀리는 상황이었다. 견훤최승우를 시켜 왕건에게 보낸 서신인 《대견훤기고려왕서》에는 이러한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왕건은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이기고 나서야 수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투 이후, 태조 왕건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숭겸의 시신을 찾아서 통곡하며,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하고 직접 제사를 지냈다.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 지방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세 개의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후백제군이 신숭겸의 시신을 왕건으로 착각하고 목을 가져갔기 때문에, 왕건은 황금으로 머리 조각을 만들어 함께 매장하도록 했다.

1120년(예종 15년)에는 신숭겸김낙 장군을 추모하는 향가인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그들의 업적을 기렸다. 현재 신숭겸은 곡성의 덕양서원과 용산재, 대구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동양서원 등에 배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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