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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황후 (송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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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황후는 북송 인종의 황후로, 응주 금성현 출신이다. 1024년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인종은 장씨를 총애하여 곽황후는 폐위되었다. 폐위 후 정비로 강등되어 도교 사원에서 지내다 인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재황후 책봉을 요구하며 거절했다. 이후 급사하여 인종은 그녀를 슬퍼하며 황후로 복위시켰으나, 시호와 종묘 배향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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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황후 (송 인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정배 칭호북송의 황후
이름곽황후
출생일대중상부 5년 (1012년)
사망일경우 2년 11월 8일 (1035년 12월 10일)
아버지곽윤공
배우자인종
재위 기간
재위 시작천성 2년 11월 21일 (1024년 12월 24일)
재위 종료명도 2년 12월 23일 (1034년 1월 16일)
추가 정보
별칭정비(淨妃), 청오(淸悟), 옥경충묘선사(玉京沖妙仙師), 금정교주(金庭教主), 충정원사(沖靜元師)

2. 생애

응주 금성현 출신이다. 증조부는 곽숭이며, 조부는 곽수린이다. 부친은 곽윤공이다. 천성 2년(1024년)에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인종은 주로 장씨를 총애하여 곽황후는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다. 인종은 장씨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했으나, 어머니 유태후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장씨는 미인의 자리에 머무른 채 사망했다.[10]

1033년 3월, 황태후 유씨가 붕어한 후, 인종은 처음으로 자신의 생모가 이신비였음을 알고 깊이 슬퍼했다. 이후 상미인과 양미인이 함께 총애를 받게 되자, 곽황후는 자주 질투심에 분노했다고 한다. 상미인이 인종 앞에서 황후의 말을 가로막고 말하는 무례를 범했다. 분노한 곽황후가 상미인의 뺨을 때리려 하자, 이를 막으려던 인종의 얼굴을 실수로 때렸고, 황후의 손톱이 인종의 뺨을 상처 입혔다. 격노한 인종은 염문응과 여이간에게 얼굴의 상처를 보여주며 폐후에 대한 상의를 했다. 여이간은 황후에 의해 직무가 파면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옛날에도 (폐후라는) 예가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같은 해 12월(1034년 1월) 곽황후는 폐위되었다[7]。 중승 공도보, 간관어사 범중엄과 단소련 등 10명이 "황후에게 과실이 없으니 폐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호소했지만, 오히려 벌을 받았다.

폐후가 된 곽씨는 비(妃)로서 출가하여 "정비(浄妃)", "옥경충묘선사(玉京沖妙仙師)"의 칭호와 "청오(清悟)"라는 도호를 하사받고, 거처를 장락궁으로 옮겼다. 경우 원년(1034년) 8월, 곽비는 요화궁으로 옮겨졌고, "금정교주(金庭教主)", "충정원사(沖静元師)"와 같은 칭호를 받았다. 한편, 상미인도 폐위되어 동진궁에서 도고(道姑)로 출가했고, 양미인도 별저에 갇히게 되었다. 이듬달, 조씨가 황후로 책봉되었다.

다음 해, 인종은 조황후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 곽비를 매우 그리워했다. 그래서 문병 사자를 보냈는데, 곽비의 대답이 매우 침울했으므로, 인종은 가엾게 여겨 몰래 불렀다. 곽비는 "만약 다시 불러 주신다면, 백관이 보는 앞에서 (황후로) 책봉하는 자리여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비가 가벼운 병을 앓게 되자, 인종은 염문응을 사자로 세워 전의를 보냈지만, 며칠 후(11월 8일, 서기 12월 10일) 곽비는 급사했다. 궁중에서도, 시중에서도 염문응이 독을 썼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인종은 곽씨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황후의 지위를 회복시켰지만, 시호를 하사하는 것과 종묘에 모시는 것은 중단했다.

2. 1. 황후 책봉

1024년, 곽씨는 장씨와 함께 입궁하였는데, 당시 인종은 장씨를 황후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인 장헌명숙황후 유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0] 1024년 12월 24일(음력 11월 21일), 태후 유씨는 곽씨를 황후로 책봉하였고, 인종은 장씨를 재인(才人)으로 봉하는데 그쳤다.[10] 또한 인종은 왕씨를 비빈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태후 유씨가 '여자의 덕을 중시하여야지 색을 중시하면 안된다(重德不重色)'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왕씨를 유종덕과 혼인시켰다.[10]

수렴청정 중인 유태후의 막강한 권력 때문에 인종은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다.[10] 황후 곽씨는 태후 유씨의 총애를 받아 점차 교만해졌고, 인종은 이런 곽씨를 멀리하며 다른 후궁들을 만나는 것을 방해받았다.[10]

1028년 인종이 총애하던 장재인이 죽은 뒤, 인종은 상미인(尙美人)과 양미인(陽美人)을 총애하였다.[10] 1033년 태후 유씨가 붕어하고, 인종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이신비(李宸妃)였음을 알게 되면서, 태후 유씨에 의해 간택된 곽황후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10]

어느날 상미인이 인종에게 황후를 비방하자, 분노한 황후는 상미인의 뺨을 때리려다 이를 말리던 인종의 뺨을 때려 상처를 입혔다.[10] 인종은 재상 여이간에게 상처를 보이며 황후 폐립을 논하였고,[10] 여이간은 "옛날에도 (폐후라는) 예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같은 해 12월(1034년 1월) 곽황후는 폐위되었다.[7]

2. 2. 황후 시절

1028년 인종이 총애하던 장재인이 죽자, 이후 인종의 총애는 상미인과 양미인에게 기울었다. 특히 상미인의 행동은 곽황후의 질투를 자아냈고, 사사건건 충돌하였다.[10]

1033년 태후 유씨가 붕어한 후, 인종은 상미인과 양미인을 더욱 노골적으로 총애하였다. 어느 날 상미인이 인종에게 황후를 비방하는 말을 하고 황후의 말을 가로막는 등 무례를 범하자, 황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미인의 뺨을 때리려 하였다. 이때 이를 말리려던 인종의 뺨을 내리쳐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인종은 대노하여 재상 여이간에게 상처를 보여주며 황후 폐립을 논하였다.[10] 여이간은 황후에 의해 직무가 파면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기에 "옛날에도 (폐후라는) 예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적극적으로 폐후를 주장하였다.[7]

2. 2. 1. 상미인과의 갈등

1028년 인종이 총애하던 장재인이 죽자, 이후 인종의 총애는 상미인(尙美人)과 양미인(陽美人)에게 기울었다. 특히 상미인의 행동은 곽황후의 질투를 자아냈고, 사사건건 충돌하였다.[10]

1033년 태후 유씨가 붕어한 후, 인종은 상미인과 양미인을 더욱 노골적으로 총애하였다. 어느날 상미인이 인종에게 황후를 비방하는 말을 하고 황후의 말을 가로막는 등 무례를 범하자, 황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미인의 뺨을 때리려 하였다. 이때 이를 말리려던 인종의 뺨을 내리쳐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인종은 대노하여 재상 여이간에게 상처를 보여주며 황후의 폐립을 논하였다.[10]

상미인과 양미인이 함께 총애를 받게 되자, 곽황후는 자주 질투심에 분노했다고 한다. 상미인이 인종 앞에서 황후의 말을 가로막고 말하는 무례를 범했다. 분노한 곽황후가 상미인의 뺨을 때리려 하자, 이를 막으려던 인종의 얼굴을 실수로 때렸고, 황후의 손톱이 인종의 뺨을 상처 입혔다. 격노한 인종은 염문응과 여이간에게 얼굴의 상처를 보여주며 폐후에 대한 상의를 했다.[7]

2. 3. 폐위

1034년 1월 16일(음력 1033년 12월 23일), 범중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조서를 내려 황후 곽씨를 폐위하였다.[10] 폐위된 곽씨는 정비(靜妃)로 격하되었으며 '청오(淸悟)'라는 도교식 이름을 하사받고 도교 사원인 장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7]

곽황후는 상미인, 양미인과 함께 총애를 받던 인종의 후궁들과 갈등을 빚었다. 상미인이 인종 앞에서 황후의 말을 가로막는 무례를 범하자, 분노한 곽황후가 상미인의 뺨을 때리려다 이를 막으려던 인종의 얼굴을 실수로 때려 상처를 입혔다. 격노한 인종은 염문응과 여이간에게 얼굴의 상처를 보여주며 폐후를 논의했고, 여이간은 황후에 의해 직무가 파면된 것에 원한을 품고 폐후를 찬성했다. 중승 공도보, 간관어사 범중엄과 단소련 등 10명이 황후에게 과실이 없으니 폐위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지만, 오히려 벌을 받았다.[7]

폐후가 된 곽씨는 비(妃)로서 출가하여 "정비(浄妃)", "옥경충묘선사(玉京沖妙仙師)"의 칭호와 "청오(清悟)"라는 도호를 하사받고, 장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우 원년(1034년) 8월, 곽비는 요화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금정교주(金庭教主)", "충정원사(沖静元師)"와 같은 칭호를 받았다.

이후 인종은 상미인, 양미인과 주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기도 하였고, 상미인은 조정의 일에 간섭하기도 하였다. 황태후 양씨(楊氏)가 인종의 잘못을 간언하자, 인종은 황후 곽씨와 마찬가지로 상미인과 양미인을 폐하여 도교 사원으로 내쫓고[11] 상미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군비에 충당시켰다. 같은 해, 조씨를 새로운 황후로 책봉하였다.

인종은 조황후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 곽비를 매우 그리워하여 문병 사자를 보냈는데, 곽비의 침울한 대답에 인종은 가엾게 여겨 몰래 불렀다. 곽비는 "만약 다시 불러 주신다면, 백관이 보는 앞에서 (황후로) 책봉하는 자리여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비가 가벼운 병을 앓게 되자, 인종은 염문응을 사자로 세워 전의를 보냈지만, 며칠 후(11월 8일, 서기 12월 10일) 곽비는 급사했다. 궁중과 시중에서는 염문응이 독을 썼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인종은 곽씨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황후의 지위를 회복시켰지만, 시호를 하사하는 것과 종묘에 모시는 것은 중단했다.

2. 4. 폐위 이후

1035년 11월, 곽씨가 가벼운 병을 앓자 인종은 전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으나 며칠 후 곽씨는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10] 인종은 슬퍼하였고 황후로 복위시켰지만, 시호를 내리지도 않았고 종묘에 배향하지도 않았다.[10]

이후 인종은 황후 조씨와 사이가 나빠져 곽씨를 그리워하며 사자를 보내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곽씨는 병을 앓고 있었고, 인종에게 "저를 다시 맞이하고 싶으시면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황후로) 책립하여 달라"고 말하였다.[10] 하지만 이미 새로운 황후가 있었기에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곽씨가 사망한 후, 궁중과 시중에서는 염문응이 독을 썼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인종은 곽씨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황후의 지위를 회복시켰지만, 시호를 하사하는 것과 종묘에 모시는 것은 중단했다.

2. 5. 죽음과 복권

1035년 11월, 곽씨가 가벼운 병을 앓자 인종은 전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으나 며칠 후 곽씨는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10] 인종은 슬퍼하였고 황후로 복위시켰지만, 시호를 내리지도 않았고 종묘에 배향하지도 않았다.[10]

인종은 황후 조씨와 사이가 나빠진 이후 곽씨를 그리워하여 사자를 보내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곽씨는 병을 앓고 있었고, 인종에게 "저를 다시 맞이하고 싶으시면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황후로) 책립하여 달라"고 말하였다.[10] 그러나 이미 새로운 황후가 있었기에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곽비가 가벼운 병을 앓게 되자, 인종은 염문응을 사자로 세워 전의를 보냈지만, 며칠 후(11월 8일, 서기 12월 10일) 곽비는 급사했다. 궁중과 시중에서는 염문응이 독을 썼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인종은 곽씨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황후의 지위를 회복시켰지만, 시호를 하사하는 것과 종묘에 모시는 것은 중단했다.

3. 가족 관계


  • 부 : 곽윤공(郭允恭)
  • 모 : 두씨(杜氏)
  • 인종(仁宗)

4. 평가

5. 기타

5. 1.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참조

[1] 서적 Song Shi null
[2] 서적 Song Shi null
[3]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olume II: Tang Through Ming 618 - 1644
[4] 서적 Song Shi null
[5] 서적 Song Shi null
[6] 서적 宋史
[7] 서적 宋史
[8] 서적 宋史
[9] 서적 송회요집고
[10] 서적 송사
[11] 문서 하지만 몇해 지나지 않아, 상미인과 양미인 모두 복위되어 입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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