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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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창건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고려 시대에 공자와 주자의 초상을 가져와 봉안하고, 조선 시대에는 대성전을 중수하는 등 여러 차례의 보수와 증축을 거쳤다. 건물 배치는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으로 구성되며, 명륜당, 동재, 서재, 대성전, 동·서무, 제기고, 외삼문, 홍살문 등 주요 건물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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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향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교동향교 |
한자 표기 | 喬桐鄕校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읍내리)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28 |
지정일 | 1995년 3월 1일 |
시대 | 조선시대 |
면적 | 일곽 |
상세 정보 | |
문화재청 ID | 21,00280000,23 |
과거 정보 (경기도) | |
유형 (과거)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과거) | 58 |
지정일 (과거) | 1974년 9월 28일 |
해제일 (과거) | 1995년 3월 1일 |
문화재청 ID (과거) | 21,00580000,31 |
2. 연혁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창건되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충렬왕 12년(1286년) 안유는 원나라에서 공자와 주자의 상을 처음 그려왔고, 김문연 등에게는 선현과 72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각종 제기와 악기, 육경과 제자백가의 책, 역사서를 사들여 고려로 가지고 오게 했다. 김문연 등은 서해 방면으로 귀국하면서 지금의 교동에 기착, 기물과 책들을 교동향교에 잠시 봉안하였다가 개경으로 이안하였다.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 큰 바람으로 향교가 파손되어 위안제를 요청하였고, 현종 8년(1667년) 대성전 보수와 양무 신축, 10철 5현 배향을 청하였다. 영조 17년(1741년) 강화부사 조호신이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고, 고종 27년(1890년) 동서 재실을 중건하였다.
1931년 대성전 중수 후, 1949년 전국유림대표회의 결의에 따라 중국 유학자 위패를 매향하고 한국 유학자를 승봉하였으나, 1952년 복위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 중수, 1981년 보수가 이루어졌다.
2. 1. 고려 시대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창건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2. 2. 조선 시대
광해군 원년(1609년) 7월 11일, 교동현감 이직은 경기관찰사 김신원에게 큰 바람으로 향교 지붕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나무가 모조리 뽑혔으며, 명륜당과 동서 재(齋)가 무너졌음을 보고하고 대성전에서 위안제를 거행할 것을 요청하였다.[1] 현종 8년(1667년)에는 각 도의 여러 고을에 배향 신위를 옮겨 정하도록 하면서, 교동현감 구문치가 대성전을 보수하고 양무를 신축하여 10철 5현을 배향하고자 청하며 위판 제작에 필요한 밤나무와 향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교동향교도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1]영조 17년(1741년), 강화부사 조호신은 화개산 남쪽 계곡, 지금의 위치로 향교를 이전하였다. (이전 향교터는 현재 고구리에 남아있으며, 구향교골이라는 지명으로 불린다.)[1] 관학(국립학교)인 향교는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와 가까운 읍치 중심에 위치해야 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관아와 떨어진 곳에 향교를 중수하는 경우도 있었다.[1] 고종 27년(1890년)에는 동서 재실을 중건하였다.[1]
2. 3.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
1931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대성전에는 중국 5성의 위패 및 유교 현인 16위와 한국 유학자 18위를 봉안하고, 동서 무에 각각 한국 9현을 봉안 배향하였는데, 1949년 전국유림대표회의에서 모화사상을 축소하자는 결의에 따라 16현 동서 배향위 가운데 주자와 정이를 제외한 14위의 위패를 매향하고, 해동 18현을 승봉하여 제향하였다. 봄과 가을에 행하던 석전을 폐하고 공자 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다가, 3년 뒤인 1952년에 공문십철과 송조 4현을 복위하는 동시에 석전도 다시 부활시켰다.[5]한국전쟁으로 향교 건물이 퇴락한 것을 1960년에 중수하였으며, 1981년에 동서 재실과 내외삼문의 개건 및 단청 보수가 이루어졌다.[5]
3. 건물 배치
교동향교는 전성기 향교 건축 체제를 갖추고 있다. 즉, 내삼문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제향 공간과 내삼문에서 명륜당 사이의 강학 공간을 구성하는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홍살문에서 외삼문에 이르는 진입 공간, 명륜당에서 내삼문 사이에 이르는 과정적 공간까지 네 개의 공간이 네 개의 계단을 통해 높낮이 차이를 두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따른다.[1]
3. 1. 전학후묘 배치
교동향교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 형태를 따르면서, 네 개의 공간과 계단을 통해 높낮이 차이를 두었다. 향교 대지 자체가 경사진 곳에 있어 제향공간은 위계성을 따라 뒤쪽 높은 곳에 배치하였다.[1]강학공간은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일렬로 나란히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1] 명륜당과 동·서재가 이루는 강학공간의 배치 기법은 전성기 향교건축의 배치에 비해 덜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동·서재는 명륜당의 측면에 위치하여 그 연장선이 자연스럽게 강학공간의 마당을 형성하도록 했지만, 마당의 앞뒤 폭이 외삼문 기단과 명륜당 기단을 기준으로 약 2.85m 정도로 매우 좁아, 마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한국의 향교나 서원에서 보기 드문 형태로서, 초기 한국 향교 건축에서 '강학공간'에 대한 명확한 설정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다소 부족했던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동·서재의 경우 동재는 부엌이, 서재는 광(창고)이 딸린 일반 살림집의 형태이다. 전성기 재사가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고, 특히 재사의 형태가 정연해져서 동재가 서재보다 높고, 재사에 기거하는 향교생들의 서열상 명륜당에서 가까운 부분이 상위자들에게 돌아가는 형태로 구성되는 개념을 교동향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명륜당 뒷면에서 제향공간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약 15단의 계단을 통해 2.5m 정도의 높이차를 두어 내삼문까지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내삼문과의 간격은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있지만, 상당 부분이 경사지 위에 수경으로 처리되어 강학공간이라기보다는 조경공간을 위한 전이공간으로 보여진다. 이는 향교의 강학공간이 공간보다는 건물 자체로서 인정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향공간을 둘러싼 담 오른쪽에는 제기고가 설치되어 제향공간을 위한 지원영역을 구축하였다. 내삼문 안에는 일반적인 향교의 제향공간에서 볼 수 있는 품(品)자형 배치로 대성전이 한 단 높은 곳에, 앞면 낮은 곳에 동무와 서무가 나란히 배치되었다. 대성전의 동·서쪽 영역과 대성전 영역을 이루는 기단 부위의 진입이 중앙의 계단 설치와 더불어 양옆면에 램프(Lamp)를 이용하여 다양한 진입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건물은 모두 옆면과 뒷면에 방화벽이 둘러싸고 있다.
3. 2. 강학공간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서재가 일렬로 병치된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1] 명륜당과 동·서재가 이루는 강학공간의 배치 기법은 전성기 향교건축의 배치에 비해 미진화된 수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데, 후벽면이 일직선상에 놓여있으면서도 동·서재가 명륜당의 측면에 위치하여 그 연장선이 자연스럽게 강학공간의 중정을 형성하도록 했지만, 중정의 앞뒤 폭이 외삼문 기단과 명륜당 기단을 기점으로 약 2.85m 정도로 좁아, 외삼문과 명륜당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협소한 공간을 이루며 거의 중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그간의 향교나 서원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로서 초창기 한국의 향교 건축에서 '강학공간'에 대한 명확한 설정과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다소 결여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동·서재의 경우 동재는 부엌이, 서재는 광(창고)이 딸린 일반 살림집의 형태이다. 전성기 재사가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고 특히 재사의 형태가 정연해져서 동재가 서재보다 높고 재사에 기거하는 향교생들의 서열상 명륜당에서 가까운 부분이 상위자들에게 돌아가는 형태로 구성되는 개념을 교동향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명륜당 뒷면에서 제향공간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약 15단의 계단을 통해 2.5m 정도의 높이차를 두어 내삼문까지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내삼문과의 간격은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있지만 상당 부분이 후원으로서 경사지 위에 수경으로 처리되어 강학공간이라기보다는 조경공간을 위한 전이공간으로 보여짐으로써, 향교의 강학공간이 공간보다는 건물 자체로서 인정되는 모습을 보인다.
3. 3. 제향공간
내삼문 안에는 일반적인 향교의 제향공간에서 볼 수 있는 품(品)자형 배치로 대성전이 한 단 높은 곳에, 앞면 낮은 곳에 동무, 서무가 병렬로 배치되었다.[1] 대성전 영역을 이루는 기단 부위의 진입은 중앙의 계단 설치와 더불어 양옆면에 램프(Ramp)를 이용하여 다양한 진입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건물은 모두 옆면과 뒷면에 방화벽이 둘러싸고 있다. 제향공간 한 곽을 두른 담 오른쪽에 제기고가 설치되어 제향공간을 위한 지원영역을 구축하였다.4. 주요 건물
교동향교의 주요 건물로는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대성전, 동무, 서무, 제기고, 외삼문, 홍살문 등이 있다. 이 건물들은 각각 교육, 제사, 생활 등의 기능을 담당하며,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명륜당: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 동재와 서재: 유생들의 생활 공간이다.
- 내삼문: 대성전과 동서무가 있는 제사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 대성전: 제사 공간의 중심 건물이다.
- 동무와 서무: 제사를 돕는 건물로, 현재는 향토관과 충효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제기고: 제사 용품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 외삼문: 향교의 정문이다.
- 홍살문: 향교 입구에 세워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문이다.
4. 1. 명륜당
한국의 목조건축에서는 일반적으로 앞면에 짝수 칸을 쓰지 않는데, 교동향교 명륜당은 특이하게도 앞면 4칸, 옆면 2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앙 2칸은 대청으로 사용하고, 양옆에는 대칭적으로 각 1칸씩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대청의 앞면에는 띠살무늬 들어열개문을, 뒷면에는 판장문 미닫이를 설치하였다. 오른쪽 온돌방 주변에는 함실을 설치하여 윗부분을 수납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좌우측 온돌방의 앞면 창호는 상부에 위치하여 대청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5량 구조에 민도리 형식의 소박한 가구를 갖추고 있으며, 외무의 보뺄목 밑에는 헛첨차 형태의 구조물이 받치고 있다. 막돌초석 위에 방주를 세우고 팔작지붕에 홑처마를 올린 형태로, 단청을 제외하면 일반 민가의 건축 구조와 유사하다. 명륜당 뒷면과 내삼문 사이 공간에는 계단 양쪽에 조경이 조성되어 있으며, 진흙을 쌓고 항아리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굴뚝과 함께 계단 왼쪽에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진 괴석이 있다.4. 2. 동재와 서재
동재와 서재는 강당 앞면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평면은 모두 'ㄱ'자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평면 구조는 조금 차이가 있다. 동재는 정면 3.5칸, 측면 5칸의 ㄱ자 형태로서 장방향의 3칸과 단방향의 2칸을 온돌방으로 구성하고 중앙에 정면 1.5칸 측면 2칸 규모의 부엌 공간을 배치하였다. 중정을 향하는 장방향 부분의 온돌 앞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단방향 부분에는 온돌방 전면에 전실 형태의 퇴간을[2] 부엌과 온돌방에 걸쳐 내부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온돌방들은 앞면 모두 띠살창호로, 뒷면은 모두 윗부분에 살창을 두었다.[3] 내부는 5량 구조로서 민도리 형식의 가구 구조로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다. 동재 앞과 외삼문 사이에는 사선 방향으로 명륜당의 것과 같은 진흙으로 하단을 만들고 나무로 윗부분을 만든 납기둥 모양의 굴뚝이 있다.서재는 앞면 2칸, 측면 3칸의 ㄱ자형태로 동재보다 규모가 다소 작은데, 측면 2칸은 칸막이가 없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앞면 2칸은 흙바닥의 광(창고)을 이루고 있으며, 온돌방 앞면은 띠살창호, 뒷면은 상부에 빗살창호를 두고 광에는 판장문 외의 채광창을 두지 않았다.[4] 가구는 5량, 팔작지붕에 홑처마, 그리고 민도리 양식의 소박한 형태다.
두 건물 모두 벽체를 방화벽으로 하여 화재에 대한 엄격한 보호구조를 택했고, 전성기 향교에서 보이는 평면구조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거의 일반 살림집의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3. 내삼문
대성전과 동서무가 있는 제사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명륜당 바로 뒤에 있다. 계단 오른쪽 아래에 노룡암(老龍巖)이라는 작은 바위가 있다. 숙종 43년(1717년)에 이봉상이 '노룡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영조 49년(1773년)에 이달해가 글을 지어 새겼던 것을 198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2]4. 4. 대성전
교동향교 대성전은 약 1.2m 높이의 막돌허튼층쌓기로 만든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앞면 5칸[5], 옆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 양쪽에 풍판을 달았다. 겹처마이며 전체 건물에 단청을 하였다. 퇴간부에만 팔각추 형태의 장주형 주춧돌과 원형 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난 초석에 네모난 기둥으로 되어 있다. 향교 내의 유일한 초익공 형식의 공포를 갖추고 있으나 그것도 후면부에는 민도리 형식으로 보뺄목만 내놓은 상태이다. 대성전 가운데 앞면 3칸에는 띠살창호로 들어열개문을 달고[6] 가구는 1고주 7량 구조로 윗부분 종도리 밑에는 판대공으로 간단히 받치는 구조를 취하였다. 대성전 앞면에 있는 방형의 판석은 가로 2.05m에 세로 1.19m로 생단(牲壇)으로 여겨진다.4. 5. 동무와 서무
동무와 서무는 모두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흙바닥으로 되어 있다. 앞면에만 창호가 설치되어 있는데, 양옆 칸에는 띠살문이, 가운데 칸에는 문 없이 위쪽에 띠살창만 있다. 맞배지붕에 풍판이 있으며, 내부는 5량 구조에 민도리 형식의 백골집이다.[5] 동무 앞에 놓여 있는 가로 0.27m, 세로 0.37m 크기의 석물은 손을 씻던 곳으로 여겨진다. 현재 동무와 서무는 각각 향토관과 충효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4. 6. 제기고
앞면 3칸, 옆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 맞배지붕 옆에는 풍판이 있고 좌우측 및 뒷면 벽체는 두터운 방화벽을 쌓아 만들었다. 앞면부에만 판장문 미닫이로 열고 닫을 수 있게 했으며, 왼쪽 판장문 윗쪽에 환기용 살창이 설치되어 있다. 가구는 3량 구조이며 홑처마에 납기둥, 민도리 형식으로 소박한 형태이다. 내부에는 유기 보궤와 용작, 작, 작대, 저상, 향합, 향로, 촛대, 목두, 축변, 향상, 가마, 식정, 제복, 유건 등이 있다.4. 7. 외삼문
향교로 들어가는 진입로 약 30m 부근에 홍살문이 설치되어 있다. 홍살문을 지나 진입로가 약간 꺾여서 외삼문에 이르는데, 전면부에 몇 단의 계단을 두고 외삼문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외삼문은 솟을삼문 형식이다.[2]4. 8. 홍살문
원주형 주춧돌 위에 두 개의 원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에 홍살을 얹었으며,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의 장식을 두었다. 앞에는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2]5. 현대적 의의
교동향교는 전통적인 교육 가치를 보존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 유산이다.
참조
[1]
문서
경상도나 충청도 지역의 경우 명륜당 앞으로 강학공간이 형성되며, 전라도나 경기도 지역의 경우 명륜당 뒤로 강학공간이 형성되는 형태를 주로 채택한다.
[2]
서적
한국의 민가 연구
보진재출판사
1981
[3]
문서
왼쪽 온돌방 부분의 전면 창호를 제외하고 전면 온돌방 부분의 창호는 전실 부분의 한짝과 측면의 살창을 제외하고는 전혀 창호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기거를 위한 온돌방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4]
문서
명륜당을 향해 있는 오른쪽면의 일부에만 창호가 형성되고 앞면 및 옆면 전반에 창호가 전혀 없는 상태로 지어져 있어 일반적인 재사의 평면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의 평면적인 미진화성을 보여주고 있다.
[5]
논문
조선 시대 향교 건축의 배치와 공간 구성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1990-10
[6]
문서
대개의 경우 전면창호를 미닫이문으로 설치하며 들어열개문으로 설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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