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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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천 충렬사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 등 6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42년에 건립된 사우이다. 이후 추가 배향을 거쳐 현재 29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김상용을 주향으로 동·서 벽에 각각 배향 인물을 배치하고 있다. 충렬사 관련 문서와 유물을 보관하고 있으며, 건립 및 사액, 추가 배향 과정에서 위차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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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충렬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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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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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21 |
지정일 | 1995년 3월 1일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 |
시대 | 조선시대 |
2. 역사
1642년(인조 20)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 이상길 등 6인을 모시기 위해 강화도 유생과 유수부의 재정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김상용이 살았던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위치하며,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다.
이후 함께 순절한 인물들의 후손들의 호소로 황선신, 강흥업, 권순장, 김익겸, 윤전, 홍명형, 이돈오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1788년에는 홍익한과 윤계도 추가되었다. 그러나 계속된 추가 배향으로 위차 문제가 발생하여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김상용을 주향으로 하고, 동쪽과 서쪽에 다른 인물들을 순서대로 배향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2. 1. 건립 배경
1642년(인조 20)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우의정 김상용, 공조판서 이상길, 장령 이시직, 돈녕도정 심현, 천총(千摠) 구원일을 모시기 위하여 강화도 내의 유생과 유수부(留守府)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건립된 사우이다.김상용이 살았던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仙杏里)에 위치해 있으며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6인을 모셨으나, 이들과 함께 순절하고도 사우에 들어가지 못한 인물의 후손들의 호소로 1657년에 훈련정 황선신, 훈련첨정 강흥업을, 1658년에는 금부도사 권순장, 생원 김익겸, 필선 윤전을, 1728년(영조 4)에 좌승지 홍명형을, 1787년(정조 11)에 광흥수(廣興守) 이돈오를 각각 추가로 모셨다.
1788년에는 척화파로서 순절했던 홍익한과 병자호란 때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를 함께 추가로 모셨다. 그러나 이와 같이 계속해서 추가로 모시다 보니 위차(位次)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숙종 연간 이래 조정에서까지 논란을 벌이기도 했는데, 결국 김상용을 주향(主享)으로 하여 동쪽에 이상길·홍명형·이시직·윤계·황선신·권순장·김익겸, 서쪽에 심현·홍익한·윤전·이돈오·송시영·구원일·강흥업의 순으로 각기 배향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29위가 배향되어 있다.
2. 2. 건립 및 사액
1642년(인조 20)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장령 이시직(李時稷), 돈녕도정 심현(沈誢), 천총 구원일(具元一)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강화도 내의 유생과 유수부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건립된 사우이다.김상용이 살았던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仙杏里)에 위치해 있으며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다. 건립 당시에는 6인을 제향했으나, 이들과 함께 순절하고도 사당에 들어가지 못한 인물의 후손들의 호소로 1657년에 훈련정 황선신(黃善身), 훈련첨정 강흥업(康興業)을, 1658년에는 금부도사 권순장(權順長), 생원 김익겸(金益謙), 필선 윤전(尹烇)을, 1728년(영조 4)에 좌승지 홍명형(洪命亨)을, 1787년(정조 11)에 광흥수 이돈오(李惇五)를 각각 추가로 모셨다.
1788년에는 척화파로서 순절했던 홍익한(洪翼漢)과 병자호란 때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尹棨)를 함께 추가로 모셨다. 그러나 이와 같이 계속해서 추가로 모시다 보니 위차(位次)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숙종 연간 이래 조정에서까지 논란을 벌이기도 했는데, 결국 김상용을 주향(主享)으로 하여 동쪽에 이상길·홍명형·이시직·윤계·황선신·권순장·김익겸, 서쪽에 심현·홍익한·윤전·이돈오·송시영·구원일·강흥업의 순으로 각기 배향하게 되었다.
2. 3. 추가 배향 및 위차 문제
효종 9년(1658년) 김상용이 살았던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仙杏里)에 사액되었다. 건립 당시 6인을 제향했으나, 이들과 함께 순절하고도 입향(入享)되지 못한 인물의 후손들의 호소로 1657년에 훈련정 황선신, 훈련첨정 강흥업을, 1658년에는 금부도사 권순장, 생원 김익겸, 필선 윤전을, 영조 4년(1728년)에 좌승지 홍명형을, 정조 11년(1787년)에 광흥수(廣興守) 이돈오를 각각 추향하였다.1788년에는 척화파로서 순절했던 홍익한과 병자호란 때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를 함께 추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계속해서 추향하다보니 위차(位次)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숙종 연간이래 조정에서까지 논란을 벌이기도 했는데, 결국 김상용을 주향(主享)으로 하여 동쪽에 이상길, 홍명형, 이시직, 윤계, 황선신, 권순장, 김익겸을, 서쪽에 심현, 홍익한, 윤전, 이돈오, 송시영, 구원일, 강흥업의 순으로 각기 배향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29위가 배향되어 있다.
3. 배향 인물
인천 충렬사에는 주벽인 김상용을 중심으로 동벽위와 서벽위에 여러 인물들이 배향되어 있다.
동벽위에는 이상길(전 공조판서), 홍명형(승문원부제조), 이시직(봉상시정), 윤계(남양부사), 윤집(교리), 황선신(강화부중군), 권순장(별좌), 김익겸(생원), 이돈서, 민성(파총), 안몽상(파총), 전기업, 이삼(파총), 김득남(첨사) 등이 있다.
서벽위에는 황일호(의주부윤), 심현(돈녕부도정), 홍익한(장령, 삼학사), 윤전(필선), 김수남(서장관), 강위빙(익찬), 이돈오(훈련도감낭청), 송시영(사복시주부), 구원일(강화좌부천총), 강흥업(강화우부천총), 황대곤(파총), 차명세(파총), 어재연(진무중군, 신미양요 순절), 어재순(신미양요 순절) 등이 있다.
3. 1. 주벽
주벽 | 동벽위(東壁位) | 서벽위(西壁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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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金尙容) ((전)우의정) |
3. 2. 동벽위
인물 |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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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李尙吉) | (전)공조판서 |
홍명형(洪命亨) | 승문원부제조 |
이시직(李時稷) | 봉상시정 |
윤계(尹棨) | 남양부사 |
윤집(尹集) | 교리 |
황선신(黃善身) | 강화부중군 |
권순장(權順長) | 별좌 |
김익겸(金益謙) | 생원 |
이돈서(李惇敍) | |
민성(閔垶) | 파총 |
안몽상(安夢祥) | 파총 |
전기업(全起業) | |
이삼(李參) | 파총 |
김득남(金得男) | 첨사 |
3. 3. 서벽위
4.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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