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종신부와 부상병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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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종신부와 부상병 학살 사건은 1950년 7월 한국 전쟁 초기 금강 방어선 전투에서 미군 제19보병연대가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후송이 불가능한 중상자들과 함께 남은 군종신부 헤르만 G. 펠홀터와 군의관 버트리 대위는 조선인민군에게 사살당했다. 펠홀터 신부는 국제법상 비전투원이었으며, 이 사건은 미군이 조선인민군의 만행으로 규정하고 조사했다. 펠홀터 신부는 사후 수훈 십자장을 받았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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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신부와 부상병 학살 사건 | |
---|---|
사건 개요 | |
위치 | 대한민국 두만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두만리) |
목표 | 비무장 미국 육군 포로 |
날짜 | 1950년 7월 16일 |
시간 | 21:30 |
시간대 | KST |
유형 | 집단 살해 |
사망자 | 미국 군인 30명, 로마 가톨릭 군종신부 1명 |
부상자 | 미국 군인 1명 |
가해자 | 북한군 병사 |
동기 | 보복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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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정보 | |
관련 전쟁 | 한국 전쟁 |
가해 부대 정보 | |
소속 | 북한군 3사단 |
피해 부대 정보 | |
소속 | 미국 육군 19보병연대 |
2. 배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대한민국(한국)을 침공한 후, 국제 연합(UN)은 한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유엔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극동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군(미군)의 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5년간 서서히 감소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 사령부를 둔 제8군 예하 제24보병사단이[50]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병력이 부족했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방 예산 삭감으로 인해 대부분의 장비가 구식이었다.[51][52] 제24보병사단은 북한의 초기 공세를 막아 제7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1기병사단 등 다른 제8군 지원 부대가 전개될 시간을 벌기 위해 가장 먼저 한국에 투입되었다.[53]
미국 제24보병사단은 오산 전투, 평택 전투 등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남쪽으로 후퇴했다.[7][8]
2. 1. 금강 방어선 전투
미국 제24보병사단(24th Infantry Division)은 오산 전투(Battle of Osan), 평택 전투(Battle of Pyongtaek) 등에서 연이어 패배하며 남쪽으로 후퇴했다.[7][8] 1950년 7월 12일, 사단장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제19보병연대(19th Infantry Regiment), 제21보병연대(21st Infantry Regiment), 제34보병연대(34th Infantry Regiment)에게 금강을 건너 모든 다리를 파괴하고 대전에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1]딘 소장은 제34보병연대와 제19보병연대를 동쪽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고, 큰 피해를 입은 제21보병연대를 남동쪽에 예비대로 배치했다.[12] 금강은 대전의 북쪽과 서쪽을 둘러싸고 있어 도시 외곽 (약 16km~24km) 지점에 자연적인 방어선을 제공했고, 대전 남쪽은 소백산맥이 방어하고 있었다.[13]
1950년 7월 15일, 제19보병연대는 제34보병연대가 남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제2대대를 이동시켰고, 대한민국 육군 병력의 지원을 받았다.[15][16] 연합군은 강 서쪽에 조선인민군 병력이 대규모로 증강되는 것을 관찰했다. 7월 16일 오전 3시, 조선인민군은 제19보병연대 진지에 탱크, 포병, 박격포를 동원한 대규모 포격을 가했고, 병사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16]
조선인민군 부대는 서쪽 강둑에 집결하여 제1대대의 C중대와 E중대를 공격했고, 이어서 B중대에 대한 두 번째 상륙 공격을 감행했다.[17] 조선인민군은 대대 전체를 압박하여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연대장은 모든 지원 병력과 장교에게 방어선을 지키도록 명령했고, 이들은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조선인민군 병력이 후방에 침투하여 예비 병력을 공격하고 보급선을 차단했다.[18] 제19보병연대는 전선이 얇아져 금강 방어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조선인민군 부대를 격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19]
3. 두만리 학살
1950년 7월 16일, 북한군 부대는 미군 제19연대의 보급로 바로 뒤편인 대전 서쪽 외곽 유성 남쪽의 두만리 마을 근처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20] 이 바리케이드는 금강 전선으로 탄약과 부상병을 수송하려는 미군에게 큰 문제를 야기했다.[21]
윌리엄 F. 딘 소장은 제19연대장에게 바리케이드 돌파를 명령했지만(7월 16일 13시경),[22] 북한군은 두만리 도로 위에 최소 6개의 기관총 진지를 설치해 미군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몰아내지 못했다.[22][23]
바리케이드는 부상병 후송을 막았고,[24] 미군은 지프를 이용해 후송을 시도했으나 기관총 사격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16시까지 보급 수송대가 바리케이드에 쌓였고, 기갑 부대와 항공기까지 동원되었으나 진전이 없었다.[24][25] 결국 500여 명의 연대 병력이 바리케이드를 돌파하기 위해 집결했고, 대전의 중장갑 부대가 반대편에서 공격을 가했다.[26] 이 동안, 제19연대 미군은 보급품 확보와 부상병 간호를 위해 바리케이드를 우회하여 주변 언덕을 통해 이동했다. 한 대의 전차가 바리케이드를 통과해 제19연대 사령관을 후송했지만, 19시, 지휘관들은 연대에게 바리케이드 동쪽 능선을 따라 부상병을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27][28]
미군 공식 전사 기록에는 학살 장소가 두만리 인근 야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91][92] 가톨릭 신문 보도에 따르면, 마을 원로들은 '펠홀터'라는 이름은 모르지만 군종장교 전사 사실은 알고 있었으며, 두만리와 얕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둔 용담리를 선종 장소로 지목했다. 마을 주민들은 학살당한 미군들을 가매장했고, 10월 이후 충청 지역 수복 후 미군들이 유해를 찾아갔다고 주장하여,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더 정확할 가능성도 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1979년, [https://new.mnd.go.kr/user/imhc/upload/pblictn2/history_of_war_in_korea02/index.html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p. 491)])에는 이 학살 사건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원문에는 군목으로 오기되어 있으나, 군종신부로 수정)
- 잔여 병력의 야간 철수
연대장 일행의 차량 종대가 적 차단선을 돌파한 뒤, 북쪽 혼성 병력을 지휘하게 된 펜스터마허(Fenstermacher) 대위는 20시 30분경 철수 준비를 시작했다. 500여 명의 병력과 100여 대의 차량이 집결 중이었는데, 차량은 파기, 병력은 경부본도 동쪽 고지 능선을 따라 유성을 목표로 철수, 보행이 어려운 중상자들은 들것으로 옮기기로 했다. 차량 소각 중 펜스터마허 대위가 적탄에 맞아 쓰러졌고, 남은 병력은 21시에 철수로를 찾아 나섰다.
1950년 7월 19일자 New York Herald Tribune 보도에 따르면, 100여 명의 보병, 포병, 공병, 의무대 혼성 병력이 도로 동쪽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 중 30여 명은 부상자였고, 들것에 누운 중상자도 여럿 있었다. 40여 명이 들것을 운반했지만, 산을 오르며 이탈자가 발생, 산 정상에서 남은 병사들은 더 이상 중상자들을 운반할 수 없다고 했다. 헤르만 G. 펠홀터 군종신부가 남겠다고 하여, 군종신부와 중상자들만 남았다. 적병이 고지 위로 쫓아오자, 군종신부는 중상을 입은 군의관 린턴 J. 버트리(Linton J. Buttrey) 대위에게 피하라고 권유했다. 버트리 대위가 빠져나오자, 적병이 부상병을 위해 기도하는 군종신부를 살해했다. 본부 중대 제임스 W. R. 해스킨스(James W. R. Haskins) 상사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봤지만, 구할 수 없었다. 철수 병력은 밤을 틈타 남하하여 유성과 대전에 집결했는데, 다음 날인 17일 대전에 집결, 재편된 병력은 당초 대평리 정면에 투입된 제19연대원 900여 명 중 434명뿐이었다.
위 내용은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가 1961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https://history.army.mil/html/books/020/20-2/CMH_Pub_20-2.pdf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43)]에 기반한다. 해당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100여 명의 보병, 포병, 공병, 의무대, 본부 병력이 도로 동쪽 산으로 올라갔다. 약 30명의 부상자를 데려갔는데, 들것에 실린 중상자도 여럿 있었다."
"약 40명이 들것 운반 임무를 맡았으나, 산을 오르며 많이 사라졌다. 산 정상에서 중상자들과 함께 있던 병사들은 더 이상 이들을 옮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군종신부 헤르만 G. 펠홀터는 부상자들과 함께 남았다."
"북한군 접근 소리가 들리자, 군종신부 권유로 군의관 린턴 J. 버트리 대위가 탈출했다. 멀리서 본부 중대 제임스 W. R. 해스킨스 상사가 젊은 북한군 병사들이 부상병들과 기도하는 군종신부를 살해하는 것을 망원경으로 보았다."
3. 1. 펠홀터 신부와 부상병들의 죽음

1950년 7월 16일, 한국 전쟁 초기, 금강에서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후퇴하던 미군 제19보병연대 병사들은 심각한 부상으로 걷기 힘든 부상병 약 30명을 들것에 태워 이동했다. 그러나 산을 오르던 중 많은 병사들이 이탈했고, 남은 병사들은 더 이상 부상병들을 운반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29]
이에 연대 군의관 리턴 J. 버트리 대위와 군종신부 헤르만 G. 펠홀터 신부는 다른 병력이 올 때까지 부상병들과 함께 남기로 했다.[32][29] 버트리 대위는 군의관임을 나타내는 적십자 완장을, 펠홀터 신부는 미 육군 군종감실(Chaplain Corps (United States Army)) 소속 군종신부임을 나타내는 커다란 흰색 라틴 십자가 완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소지하지 않은 비전투원이었다.[33]
얼마 후, 미군 전선을 넘어온 조선인민군 제3사단 소속 정찰대가 접근하는 소리가 들렸다.[32] 펠홀터 신부는 버트리 대위에게 도망치라고 했고, 버트리 대위는 탈출 중 총상을 입었지만 간신히 도망쳤다.[29][33] 펠홀터 신부는 부상병들에게 종부성사와 병자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했다.
이때, 제19보병연대 사령부 및 사령부 중대 소속 관측병들은 망원경으로 젊고 훈련받지 않은 듯한 조선인민군 병사들이 부상병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32][29] 이들은 소련제 소총과 PPSh-41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펠홀터 신부가 부상병들을 위해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자,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그의 머리와 등에 총을 쏘았다.[29][33] 이어서 자동 소총으로 중상을 입은 30명의 병사들을 모두 사살한 후 철수했다.[32][29][33][34]
이 공격은 멀리 떨어진 언덕에서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제19보병연대의 다른 병사들이 목격했다. 펠홀터 신부는 사후에 수훈 십자장을 받았다.[35][36][37] 그는 한국 전쟁에서 사망한 최초의 군종신부 중 한 명이 되었다.
펠호이터의 미국 군사 훈장 | |
-- | 수훈 십자장 |
-- | 청동 성십자 |
-- | 한국 참전 기념 메달 |
유엔 한국 참전 메달 |
이 사건은 비무장 상태의 군종신부와 부상병들을 살해한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였다.
4. 사건 이후
전투의 혼란과 그 후의 철수로 인해, 미군은 희생자의 유해를 3구밖에 수습하지 못했고, 학살을 저지른 조선인민군 부대를 체포하는 데도 실패했다. 사망한 페르홀터 대위는 부상병과 함께 남았던 점을 인정받아 수훈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는 미국 육군이 용기를 기리기 위해 수여하는 훈장 중 두 번째로 높은 것이다. 그는 이 전쟁에서 용기를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은 최초의 군종 신부였다.[81] 1952년 12월, 타임지에 그의 부고 기사가 게재되었다. 페르홀터 대위는 6.25 전쟁 당시 이미 사망했거나 실종된 12명의 군종 신부 중 첫 번째였다. 이 12명 중에는 6.25 전쟁에서 두 번째로 수훈 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군종 신부인 Emil Kapaun|에밀 J. 카파운영어도 포함되어 있었다.[82]
4. 1. 미군의 대응과 조사
이 사건은 미군이 조선인민군이 저질렀다고 비난한 일련의 만행 중 하나였다. 군종신부-의무병 학살 사건 이후, 303고지, 피의 협곡 학살 등 사건을 겪은 미군 지휘관들은 1950년 7월 27일 전쟁 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46][42]1953년 말, 조지프 매카시가 이끈 미국 상원 정부 운영 위원회는 한국 전쟁 동안 발생했다고 알려진 최대 1,800건의 전쟁 범죄 사건을 조사했다. 군종신부-의무병 학살 사건은 최초로 조사된 사건 중 하나였으며, 이 사건에서 이 사건의 이름이 붙여졌다.[43] 처형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버트레이는 위원회에 증언을 요청받았으며, 미국 정부는 조선인민군이 제네바 협약의 조항을 위반했으며, 그들의 행동을 규탄했다.[44]
1981년 미국은 버지니아주 알링턴의 알링턴 국립 묘지에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을 포함한 여러 전쟁에서 사망한 군종신부들의 이름을 나열한 일련의 기념비를 세웠다. 펠홀터의 이름도 그 기념비에 새겨졌다.[45]
4. 2. 펠홀터 신부 추모
6.25 전쟁에서 전사한 첫 군종신부인 허먼 G. 펠홀터(Herman G. Felhoelter) 신부에게는 수훈십자장이 추서되었다.[93] 펠홀터 신부는 부상병들과 함께 남는 것을 자원한 공로로 이 훈장을 받았으며, 이는 미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무공 훈장이다.[40] 그는 이 전쟁에서 무공 훈장을 받은 최초의 군종 신부였다.[34]펠홀터 신부의 유해는 미국으로 돌아가 루이빌의 성 미카엘 묘지에 안장되었다.[40] 알링턴 국립 묘지의 채플린 언덕에는 펠홀터 신부를 포함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가톨릭 군종 신부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52년 12월, 타임지에 펠홀터 신부의 짧은 부고 기사가 실렸다.[41] 2020년에는 한국 가톨릭 주도로 펠홀터 신부 추모 사업이 추진되었다.[94]
4. 3. 조선인민군의 반응과 역사적 평가
후속 연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사령부는 초기에 포로나 무장하지 않은 부상병을 학대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리지 않았다.[47][46] 군종신부와 부상병 학살 사건 및 이와 유사한 잔혹 행위는 "통제되지 않은 소규모 부대, 앙심을 품은 개인, 또는 포로에게 불리하고 점점 더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저질러진 것으로 여겨진다.[47] 전선에서 조선인민군 병사들이 열악한 상황으로 고통받을수록, 미군 부상병과 포로에 대한 학대가 더 심해졌다.[48] 군사 역사학자 T. R. 페렌바흐는 이 사건을 분석하며,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일본 제국의 수십 년간의 압제적인 군대에 의한 고문과 포로 처형에 익숙했을 것이라고 썼다.[49]1950년 7월 28일, 유엔 정보부는 조선인민군 제3사단장 리영호 장군의 명령을 입수했다. 이 문서에는 김책 총사령관[47]과 최용건 조선인민군 선임참모부 사령관의 서명이 있었고, 포로 살해는 "엄격히 금지"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리영호 장군은 각 부대의 문화 담당 부서에 이 규칙을 사단 병사들에게 알리도록 지시했다. 다음 달에 발생한 더욱 심각한 303고지 학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인민군 사단장들은 포로 대우에 대한 더욱 엄격한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47]
5. 학살 장소 논란
미군의 공식 전사 등에는 학살 장소가 두만리(village of Tuman) 인근 야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가톨릭신문에 의하면 마을 원로들이 '펠홀터'라는 이름은 모르고 있었지만 군종장교가 전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두만리와 얕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접해 있는 용담리를 선종 장소로 일관되게 지목하였다고 한다.[91][92]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한 미군들을 가매장했고 10월 이후 충청 지역이 수복된 후 미군들이 다시 유해를 찾아갔다고 하는 주장이 있으므로, 마을 주민들의 의견이 더 정확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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