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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권씨 (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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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귀인 권씨 (덕종)는 조선 덕종의 후궁으로, 수의교위 권치명의 딸이다.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덕종이 일찍 사망하여 소생은 없었다. 성종 때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폐비 윤씨 폐위에 영향을 미쳤으며, 무오사화 당시 김일손의 실록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다. 1494년에 사망했으며, 연산군 때 작위가 삭탈되고 묘가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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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권씨 (덕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작위소훈, 숙의, 소용
이름귀인 권씨
별칭소훈 권씨(昭訓 權氏)
숙의 권씨(淑儀 權氏)
배우자덕종(의경세자)
아버지권치명
친척허반(조카)
출생일미상
출생지조선
사망일1494년 6월 8일
사망지조선
국적조선
왕조조선

2. 생애

권씨는 수의교위를 지낸 권치명의 딸로, 양반 출신으로 정식 간택 절차를 거쳐 입궁하였다.[1] 1456년(세조 2년) 음력 8월 23일 당시 세자였던 덕종(의경세자)의 소훈으로 간택되었고,[1] 같은 해 음력 11월 3일 동궁에 들어왔다.[3] 그러나 이듬해인 1457년(세조 3년) 음력 9월 2일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여 소생은 없었다.[2] 이후 남편 덕종이 추존되면서 권씨는 종2품 숙의로 진봉되었고, 여러 후궁들을 총괄하여 다스렸다.[4] 1483년(성종 14년) 음력 6월 15일 세조, 덕종, 예종의 여러 후궁들과 함께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5]

성종 즉위 후인 1477년(성종 8년) 음력 3월 20일, 남편 덕종 사망 후 궁 밖에서 살던 권씨의 집에 익명서 한 장이 투입되었다. 익명서에는 성종의 후궁인 숙용 정씨숙의 엄씨왕비 윤씨(훗날의 폐비 윤씨)와 그 소생인 원자(훗날의 연산군)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익명서는 권씨의 하인을 통해 궁궐 내부로 보고되었는데, 여러 정황을 통해 익명서를 투입한 것이 중전 윤씨의 소행임이 밝혀지면서 결국 윤씨는 왕비 자리에서 폐위된다.[4]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12일,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김일손이 작성한 실록 내용 일부, 즉 "권 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인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라는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의금부에 잡혀왔다. 이는 세조가 며느리인 권씨와 관계를 가지려 했다는 것이다.[7] 연산군은 이 내용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김일손에게 출처를 추궁했고, 김일손은 권씨의 조카인 허반에게서 들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허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결국 허반은 곤장 30대를 맞았으나 끝까지 함구했고, 김일손은 계속 심문을 받았다.[7] 김일손은 의금부 압송 다음 날인 음력 7월 13일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실록에 쓴 사실도 밝혀지는 등[9]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결국 능지처참 형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을 근거로 유자광과 이극돈 등은 무오사화를 일으켰다.[10][11]

권씨는 1494년(성종 25년) 음력 4월 26일에 사망하였다.[12] 사후 폐비 윤씨 폐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작위가 삭탈되고 무덤이 파헤쳐졌다. 그러나 무덤 안에서 권씨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권씨는 평소 불교를 믿었는데, 권씨가 죽자 비구니 혜명 등이 권씨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몰래 화장한 후 거짓으로 무덤을 만든 것이었다. 이 일로 연산군은 매우 분노하여 혜명 등을 국문하게 하였다.[13]

2. 1. 가계와 후궁 간택

권씨는 수의교위를 지낸 권치명의 딸로,[1] 양반 출신으로 정식 간택 절차를 거쳐 입궁하였다.[2]

1456년(세조 2년) 음력 8월 23일 당시 세자였던 덕종(의경세자)의 소훈으로 간택되었고,[1] 같은 해 음력 11월 3일 동궁에 들어왔다.[3] 그러나 이듬해인 1457년(세조 3년) 음력 9월 2일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여 소생은 없었다.[2] 이후 남편 덕종이 추존되면서 권씨는 종2품 숙의로 진봉되었고, 여러 후궁들을 총괄하여 다스렸다.[4] 1483년(성종 14년) 음력 6월 15일 세조, 덕종, 예종의 여러 후궁들과 함께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5]

2. 2. 익명서 사건과 폐비 윤씨

성종 즉위 후인 1477년(성종 8년) 음력 3월 20일, 남편 덕종 사망 후 궁 밖에서 살던 권씨의 집에 익명서 한 장이 투입되었다. 익명서에는 성종의 후궁인 숙용 정씨숙의 엄씨왕비 윤씨(훗날의 폐비 윤씨)와 그 소생인 원자(훗날의 연산군)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익명서는 권씨의 하인을 통해 궁궐 내부로 보고되었는데, 여러 정황을 통해 익명서를 투입한 것이 중전 윤씨의 소행임이 밝혀지면서 결국 윤씨는 왕비 자리에서 폐위된다.[4]

이로부터 27년 후인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4월 23일, 연산군은 이미 사망한 권씨가 폐비 윤씨 폐위에 함께 모의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모두 삭탈하고, 권씨의 묘를 이장하는 동시에 묘소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6]

2. 3. 무오사화와 김일손의 사초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12일,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던 김일손이 작성한 실록 내용 일부가 문제가 되어 의금부에 잡혀왔다. 문제가 된 내용은 "권 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인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라는 것으로, 세조가 며느리인 권씨와 관계를 가지려 했다는 것이다.[7] 연산군은 이 내용을 듣고 매우 분노하여 김일손에게 출처를 추궁했고, 김일손은 권씨의 조카인 허반에게서 들었다고 답했다. 그러나 허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결국 허반은 곤장 30대를 맞았으나 끝까지 함구했고, 김일손은 계속 심문을 받았다.[7]

음력 7월 20일, 허반은 "덕종의 상중에 '세조께서 권씨에게 고기를 권했는데, 권씨가 먹지 않으니, 상이 노하시자 권씨가 달아났다.'는 일은 집안에서 항상 말하던 이야기라 김일손에게 말했는데, 윤씨의 일을 말할 때 권씨의 일까지 연속해서 말하다 보니 말이 오가는 사이에 착오가 생겨 김일손이 그렇게 기록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8]

김일손은 의금부 압송 다음 날인 음력 7월 13일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실록에 쓴 사실도 밝혀지는 등[9]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결국 능지처참 형을 받고 죽었다. 이 사건을 근거로 유자광과 이극돈 등은 무오사화를 일으켰다.[10][11]

2. 4. 사망과 논란

권씨는 1494년(성종 25년) 음력 4월 26일에 사망하였다.[12] 사후 폐비 윤씨 폐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작위가 삭탈되고 무덤이 파헤쳐졌다. 그러나 무덤 안에서 권씨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권씨는 평소 불교를 믿었는데, 권씨가 죽자 비구니 혜명 등이 권씨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몰래 화장한 후 거짓으로 무덤을 만든 것이었다. 이 일로 연산군은 매우 분노하여 혜명 등을 국문하게 하였다.[13]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권치명 (權致命)생몰년 미상
시아버지세조 (世祖)1417~1468, 재위:1455~1468
시어머니정희왕후 (貞熹王后)1418~1483
남편덕종 (德宗, 의경세자)1438~1457
조카, 양자허반 (許磐)생몰년 미상


4. 평가 및 의의

권씨는 당대 정치적 격변기에 왕실과 관련된 여러 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그 삶은 조선 전기 왕실 여성의 삶과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권씨는 남편 덕종 사후 궁 밖에서 살던 중 성종의 후궁들이 왕비 윤씨와 그 아들 원자를 해치려 한다는 익명서를 받았다. 이 사건은 결국 왕비 윤씨의 폐위로 이어졌다.[4] 훗날 연산군은 권씨가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여겨 작위를 삭탈하고 묘를 이장하게 했으며, 묘소를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6]

1498년(연산군 4년)에는 김일손실록에 "세조가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따르지 않았다"는 내용을 기록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는 세조가 며느리인 권씨와 관계를 가지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으로, 연산군은 이에 분노하여 김일손을 추궁했고, 김일손은 이 내용의 출처가 권씨의 조카 허반이라고 답했다.[7] 그러나 허반은 이를 부인했고,[7] 8일 뒤에는 세조가 권씨에게 고기를 권했으나 먹지 않아 화를 냈다는 집안 이야기를 김일손에게 전한 것이 와전되었다고 진술했다.[8] 이 사건은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과 함께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다.[9][10][11]

권씨는 불교 신자였는데, 사후 비구니들이 권씨의 시신을 화장하고 거짓 무덤을 만들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연산군은 이에 분노하여 관련자들을 국문하였다.[13]

5. 기타

(귀인 권씨 (덕종) 문서의 기타 섹션 내용 없음)

5. 1. 관련 자료

현재 관련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참조

[1] 조선왕조실록 세조 5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 7년) 8월 23일(경신) 2번째기사 1456-08-23
[2] 조선왕조실록 세조 10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 1년) 11월 24일(갑신) 2번째기사 1457-11-24
[3] 조선왕조실록 세조 5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 7년) 11월 3일(기사) 2번째기사 1456-11-03
[4] 조선왕조실록 성종 105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 15년) 6월 5일(경인) 4번째기사 1479-06-05
[5] 조선왕조실록 성종 155권, 14년(1483 계묘 / 명 성화 19년) 6월 15일(병자) 2번째기사 1483-06-15
[6] 조선왕조실록 연산 52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 17년) 4월 23일(갑인) 4번째기사 1504-04-23
[7] 조선왕조실록 연산 30권, 4년(1498 무오 / 명 홍치 11년) 7월 12일(병오) 2번째기사 1498-07-12
[8] 조선왕조실록 연산 30권, 4년(1498 무오 / 명 홍치 11년) 7월 20일(갑인) 1번째기사 1498-07-20
[9] 조선왕조실록 연산 30권, 4년(1498 무오 / 명 홍치 11년) 7월 13일(정미) 3번째기사 1498-07-13
[10] 웹인용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김일손〉 https://web.archive.[...] 2012-07-22
[11] 드라마 왕과 비 174회 해설 1998-2000
[12] 조선왕조실록 성종 289권, 25년(1494 갑인 / 명 홍치 7년) 4월 26일(갑신) 1번째기사 1494-04-26
[13] 조선왕조실록 연산 52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 17년) 4월 26일(정사) 2번째기사 1504-04-26
[14] 조선왕조실록 중종 28권, 12년(1517 정축 / 명 정덕 12년) 6월 5일(기유) 1번째기사 1517-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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