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귀인 엄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귀인 엄씨는 조선 성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영월이며 본명은 은소사 또는 은소이이다. 중전 윤씨 폐위에 관여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받았으며, 갑자사화 때 정씨와 함께 처형당했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신분이 회복되어 귀인으로 추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04년 사망 - 윤필상
    윤필상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조와 성종 때 활약하며 이시애의 난 평정에 기여하고 좌의정을 거쳐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무오사화를 주도하여 사림을 숙청하고 갑자사화 때 사사된 후 중종반정으로 복권되었다.
  • 1504년 사망 - 효숙황후
    효숙황후는 명나라 영종의 후궁이자 성화제의 생모로, 후궁 시녀 출신으로 빈이 되었고 아들 성화제 즉위 후 황태후, 손자 홍치제 즉위 후 태황태후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명나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력 남용 논란 등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 조선 연산군 - 중종반정
    중종반정은 1506년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정변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왕권 약화, 붕당 정치 심화 등 조선 정치에 여러 문제점을 야기했다.
  • 조선 연산군 - 폐비 윤씨
    조선 성종의 왕비였던 폐비 윤씨는 질투심과 후궁을 해하려 했다는 의혹 등으로 폐위되어 사사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은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어 조선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조선 성종 - 성종 (조선)
    성종은 조선의 제9대 국왕으로, 세조의 손자이자 덕종의 아들이며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 친정 후 홍문관 설치, 경국대전 반포 등 조선의 통치 체제 확립과 문화 발전에 기여했으나, 폐비 윤씨 사사 사건과 서얼 차별 강화는 비판받기도 한다.
  • 조선 성종 - 경국대전
    《경국대전》은 조선 시대 국가 통치와 사회 전반을 규정한 성문법전으로, 세조 때 시작된 개정과 보완을 거쳐 성종 때 최종 반포되었으며, 6전으로 구성되어 조선 사회의 제도와 법규를 규정하고 법치주의 확립에 기여했으나 서자 차별을 제도화하는 등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 측면도 있다.
귀인 엄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귀인 엄씨
한자 표기貴人 嚴氏
로마자 표기Gwiin Eomssi
은소사 (銀召史) 또는 은조이 (銀召伊)
작위성종의 후궁
가족 관계
배우자성종
자녀1녀 공신옹주
아버지엄산수
어머니남양 홍씨
출생과 사망
출생일미상
출생지조선
사망일1504년 4월 14일 (양력)
사망지조선 한성부 창경궁

2. 생애

영월을 본관으로 하는 엄씨의 이름은 은소사(銀召史) 또는 은소이(銀召伊)이다. 엄산수의 딸로 태어났으며, 실록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7일 기록에 따르면, 언니 금소사(金召史)는 왕족인 단계부정의 아내가 되었고, 여동생 말금(末今)이 있었다.[11]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엄씨는 양반가의 적출(嫡出)로 추정된다.

엄씨는 성종의 후궁으로, 처음에는 정3품 소용(昭容)이었다가,[12] 후에 종2품 숙의(淑儀)를 거쳐[13] 종1품 귀인(貴人)으로 진봉되었다.[14]

귀인 정씨와 함께 중전 윤씨를 모함하여 폐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연산군은 그녀와 정씨를 극도로 미워하였다.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1504년 음력 3월 20일 밤, 창경궁 뒷뜰에 엄씨와 정씨를 결박하고 몽둥이로 때려 살해하였고, 그 시체는 찢겨 젓갈로 만들어져 아무데나 뿌려졌다.[15]

엄씨의 가족들은 모두 참형을 당하였고, 유일한 소생인 공신옹주는 폐서인이 된 후 유배되었다.[14]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중종 즉위 후, 엄씨와 그 가족들, 공신옹주는 모두 복위되었다. 공신옹주는 유배 중에도 남편의 신주를 품고 가 제사를 지낸 절의를 인정받아 곡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14]

2. 1. 초기 생애

엄씨는 흔히 출생년도가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략적인 해는 추정할 수 있다. 엄씨의 아버지 엄산수의 차남 엄회는 1455년생이고, 삼남 엄계는 1456년생이다.[16] 그런데 엄회는 소용 엄씨의 오빠[兄]로 기록되어 있다.[17] 이들은 모두 엄산수의 정실부인 남양 홍씨 소생이므로, 엄씨는 빨라도 1457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또한 엄씨의 친언니 엄금소사가 1457년 이후에 태어났으므로[18], 엄씨의 생년은 1458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엄씨가 정확히 언제 후궁이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처음으로 사료에 등장한 것은 1477년 음력 3월 20일의 기록이다. 따라서 1477년 이전에 이미 후궁이 된 것으로 보이나, 만약 1477년에 후궁이 되었다 해도 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 후 1481년 3월 11일에 딸 공신옹주를 낳았다.(성종대왕 왕녀 태지석)[19]

엄씨가 1481년에 공신옹주를 낳았다면, 늦어도 1466년 이전에는 태어났어야 한다. 그러나 1477년의 기록을 보면, 엄씨와 정씨폐비 윤씨의 투기를 받을 정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는데, 21살의 성종이 12살밖에 되지 않은 엄씨를 총애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엄씨의 생년은 오차 없이 넓게 추정하면 1458년에서 1466년 사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늦어도 1462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의 다른 부인들과의 나이 차이를 보면, 1456년생인 공혜왕후, 1455년생인 폐비 윤씨보다는 나이가 적고, 1471년생인 숙의 권씨보다는 나이가 많다. 또 1462년생인 정현왕후와는 또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현왕후와 엄씨의 첫 출산 연도도 비슷하다. 엄씨와 가장 친밀했던 것으로 보이는 귀인 정씨와도 나이가 비슷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귀인 정씨가 먼저 임신(1477년)했던 것을 보면 귀인 정씨가 약간 나이가 많았던 것 같다. 최근 한 드라마에서 성종의 후궁들의 나이에 관해 언급하면서 이들의 나이가 '귀인 정씨-소용 엄씨-숙의 권씨-정현왕후' 순이며, 정귀인과 엄소용이 성종보다 연상이라는 언급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20]

엄산수의 딸로 태어났으며, 언니와 여동생이 있었다. 언니는 왕족 중 한 명인 단계부정 이린(李潾)에게 시집갔고, 여동생은 말금(末今)이라는 이름으로 허칙동(許則同)의 아내가 되었다.

2. 2. 후궁 생활과 폐비 윤씨 사건

영월 엄씨는 소용(昭容)으로 입궁하여, 후에 종2품 숙의(淑儀)를 거쳐 종1품 귀인(貴人)에 올랐다.[12][13][14]

그녀는 성종의 또 다른 후궁인 귀인 정씨와 함께 중전 윤씨를 모함하여 폐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5][6] 이 때문에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의 폐위와 죽음에 대한 원한으로 그녀와 정씨를 극도로 미워하였다.[5]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당시, 연산군은 음력 3월 20일창경궁 뜰에 엄씨와 정씨를 결박하고 몽둥이로 때려 살해하였다. 정씨의 아들들인 안양군(이㤚|이항한국어)과 봉안군(이㦀|이봉한국어)에게 몽둥이로 두 사람이 숨질 때까지 때리게 하였다. 시체는 찢겨 젓갈로 만들어져 산과 들에 흩뿌려졌다.[7][15]

엄씨의 아버지 엄산수는 80세가 넘어 연좌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1504년 음력 4월에 참수되었고,[1][8] 엄씨의 유일한 소생인 공신옹주(恭愼翁主)는 폐서인이 된 후 아산으로 유배되었다.[9] 세 명의 오빠들 또한 유배형에 처해진 후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3]

중종반정으로 중종 즉위 후, 엄씨와 그 가족들, 공신옹주는 모두 복위되었으며,[10] 공신옹주는 유배 시 남편의 신주를 품고 가 제사를 지내어 그 절의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곡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14]

2. 3. 갑자사화와 죽음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폐위와 죽음이 정씨와 엄씨 때문이라고 원망하였다.[5] 1504년(연산군 10년) 음력 3월 20일 밤,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일으켜 창경궁 뒷뜰에 엄씨와 정씨를 결박하고 몽둥이로 때려 살해하였다.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봉안군에게 몽둥이로 두 사람이 숨질 때까지 때리게 하였다.[7] 엄씨가 죽은 뒤 그 시체는 찢겨 젓갈로 만들어졌고, 연산군은 그것을 아무데나 뿌려버리도록 지시하였다.[15]

엄씨의 가족들은 모두 참형을 당하였으며,[14] 아버지 엄산수는 80세가 넘은 고령자여서 연좌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4월 참수형에 처해졌다.[1][8] 세 명의 오빠들 또한 유배형에 처해진 후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3] 그녀의 유일한 소생인 공신옹주는 폐서인이 된 후 아산으로 유배되었다.[9][14]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중종 즉위 후 엄씨와 그 가족들, 공신옹주는 모두 복위되었으며, 공신옹주는 유배 시 남편의 신주를 품고 가 제사를 지내어 그 절의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곡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14]

2. 4. 사후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폐위와 죽음이 정씨와 귀인 엄씨 때문이라고 원망하였다.[5] 1504년 (연산군 10년) 음력 3월 20일 밤, 연산군은 창경궁 뒷뜰에 엄씨와 정씨를 결박하고 몽둥이로 때려 살해하였다.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봉안군에게 몽둥이로 두 사람이 숨질 때까지 때리게 하였다. 시체는 찢겨 젓갈로 만들어져 산과 들에 흩뿌려졌다.[7][15]

아버지 엄산수는 80세가 넘어 연좌 대상이 아니었음에도[1] 같은 해 4월 참수형에 처해졌으며[8], 딸 공신옹주는 아산으로 유배되었다.[9] 세 명의 오빠들 또한 유배형에 처해진 후 유배지에서 처형되었다.[3]

중종 즉위 후 중종반정으로 엄씨와 그 가족들, 공신옹주는 모두 복위되었으며, 공신옹주는 유배 시 남편의 신주를 품고 가 제사를 지내어 절의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곡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14] 귀인으로 추증되었다.[10]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및 추가 정보
증조부엄유온 (嚴有溫, 조선개국원종공신, 삼군도총제부 좌군동지총제)
조부엄극인 (진사, 이조판서 최부의 사위)
아버지엄산수 (嚴山壽, 1423년-1504년, 사직, 경기도 파주, 갑자사화 참형)
어머니남양 홍씨
숙부엄송수 (세종 식년시 생원, 세조 춘장시 병과, 교리, 허업의 사위)
숙부엄강수 (세종 식년시 생원)
오빠엄훈 (선공감봉사, 경기도 이천으로 피신)
오빠엄회 (금천현감, 증공조참의, 갑자사화 참형)
오빠엄계 (증공조참의, 갑자사화 참형)
부군성종 (成宗, 1457년-1494년, 재위:1469년-1494년)
공신옹주 (恭愼翁主, 1481 ~ 1549) - 한명회의 손자 한경침에게 하가
조카엄용순(嚴用順, 엄훈의 아들, 사마시, 갑자사화에 생존, 경기도 이천 육괴정), 엄용공(嚴用恭), 엄용홍(嚴用弘), 엄용관(嚴用寬)
조카엄한백(嚴漢伯), 엄한경(嚴漢卿), 엄한우(嚴漢友), 엄한붕(嚴漢朋)
언니이린실
여동생엄말금 (허측 동실)
기타형 3명


4. 기타

다음은 귀인 엄씨와 관련된 작품들이다.

4. 1. 관련 작품

참조

[1] 실록 義禁府堂上許琛, 金勘啓 嚴氏父山壽年八十二, 其姊金召史爲丹溪副正妻, 孽妹末今爲許則同妻, 兄嚴誨爲山松繼後, 鄭氏父仁石年八十一. 律云 年八十以上者, 不在緣坐之限, 出嫁及過房者, 皆不坐. 조선왕조실록 1504-03-27
[2] 실록 推刷都監提調朴崇質, 金壽童, 金勘啓 王子女四家及鄭金伊, (銀召史)〔銀召伊〕 家, 今已封署, 請令郞廳帶軍士守直. 傳曰 㤚等家金銀, 珠玉, 寶器等, 輸置于尙衣院. 鄭金伊卽鄭氏, (銀召史)〔銀召伊〕 卽嚴氏。 조선왕조실록 1504-03-28
[3] 웹사이트 귀인 엄씨 [貴人嚴氏] https://terms.naver.[...] 2019-03-16
[4] 실록 我成宗, 粹乎無以議爲。 初在潛邸, 聘領議政韓明澮之女, 卽位封爲妃, 無子薨諡曰恭惠。 陞淑儀 尹氏爲妃, 卽判奉常寺事起畎之女, 寔誕今上殿下。 又陞淑儀 尹氏爲妃, 卽領敦寧府事壕之女, 生一男曰懌, 封晋城大君。 淑儀 嚴氏生一女, 曰恭愼翁主, 下嫁淸寧尉 韓景琛 조선왕조실록
[5] 웹사이트 귀인정씨(貴人鄭氏) http://people.aks.ac[...] 2019-02-02
[6] 서적 有人詐稱監察尚宮家人。当初于権淑儀家。淑儀上之。其投書。厳鄭両昭容。将謀害中宮及元子云云。・・・上将廃中宮。・・・己酉夏五月。賜廃妃尹氏死。 https://dl.ndl.go.jp[...] 燃藜室記述
[7] 실록 㤚, 㦀 鄭氏之出. 王以母妃尹氏廢死, 由於嚴, 鄭之譖, 夜縛嚴, 鄭于宮庭, 手自亂撃踐踏之, 召㤚, 㦀, 指嚴, 鄭曰 撲此罪人. 㤚暗不知爲誰撲之, 㤚心知其爲母, 不忍加杖. 王不之快, 令人亂撲, 備諸慘酷, 竟殺之. 王手劎立慈順王大妃寢殿外, 厲聲連叫曰 速出庭下. 甚迫. 侍女皆散走, 大妃猶不出, 賴王妃愼氏追到力救, 得不危. 王捽 㤚, 㦀髮, 至仁粹大妃寢殿, 開戸辱之曰 此大妃愛孫, 所進觴可一嘗. 督 㤚進爵, 大妃不得已許之. 王又曰 愛孫其無賜乎? 大妃驚, 遽取布二匹賜之. 王曰 大妃何殺我母? 多有不遜之辭. 後令內需司取嚴, 鄭屍, 裂而醢之, 散棄山野. 조선왕조실록 1504-03-20
[8] 실록 命斬嚴山壽, 鄭仁石. 조선왕조실록 1504-04-01
[9] 실록 安置鄭氏子㤚于堤川, 㦀于伊川, 女韓紀妻于白川. 嚴氏女韓景琛妻于牙山, 諭其道觀察使, 勿令所經郡邑迎接供饋. 조선왕조실록 1504-03-27
[10] 실록 傳曰 卒嚴貴人, 鄭貴人 【被害於燕山】 三年祭物, 磨鍊題給.」 조선왕조실록 1506-11-11
[11] 문서 '부정(副正)'은 왕족에게 붙는 호칭이다.
[12] 서적 연려실기술》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祖故事本末) 연려실기술
[13] 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1527) 3월 24일 3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1527-03-24
[14] 실록 조선왕조실록》 중종 10년(1515) 6월 1일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1515-06-01
[15] 실록 조선왕조실록》 연산 10년(1504) 3월 20일 5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1504-03-20
[16] 서적 영월엄씨대동보 영월엄씨대동보
[17] 실록 조선왕조실록》연산 52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3월 27일(무자) 2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1504-03-27
[18] 문서 엄금소사의 두 번째 출산이 1498년(무오년)에 있었는데, 그 뒤로도 자식을 둘이나 더 낳았으므로 1455년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기 힘들다. 또한 엄금소사의 남편인 단게부정 이인이 1460년경 탄생했으므로 엄금소사의 나이를 아무리 많게 잡아도 1457년 이후에 탄생한 것이 분명하다.
[19] 문서 혜숙옹주가 1478년, 경순옹주가 1482년 생이다. 공신옹주는 혜숙옹주에게는 동생, 경순옹주에게는 언니가 된다.
[20] 드라마 JTBC드라마 《인수대비》에서 인수대비(채시라)가 "나이가 많은 걸로 치자면, 정귀인이 으뜸이고 그 다음은 엄소용이겠지.", 숙의 권씨(강초희)가 "윤숙의(정현왕후)가 우리 중에 제일 젊으시니.", 폐비 윤씨(전혜빈)가 "엄소용과 정귀인은 모두 전하보다 연상이에요."라고 언급함 JTB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