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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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규장각은 조선 정조 때 왕실 도서관으로 설립되어 역대 왕의 글과 책을 보관하고, 문신을 교육하는 등 비서실과 학술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세조 때 처음 설치를 논의했으나 숙종 때 작은 전각으로 이름만 존재했고, 정조가 1776년 창덕궁에 정식으로 설치했다. 규장각은 왕실 관련 자료를 수집, 보관하고, 문교 진흥을 위한 정책을 펼쳤으며, 갑오개혁 이후 궁내부 산하로 편입되었다가 경술국치로 폐지되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로 이어졌으며, 현재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의 서적이 프랑스로 약탈되었으나, 2011년 5년 갱신 임대 방식으로 일부 반환되었다. 규장각은 26만 점이 넘는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며, 현재는 서울대학교의 일부로 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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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한글 | 규장각 |
한자 | 奎章閣 |
로마자 표기 | Gyujanggak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
용도 | 왕실 도서관 및 학술, 정책 연구기관 |
기공 | 1776년 3월 |
역사 | |
설립 | 정조 |
상세 정보 | |
설명 | 규장각은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이자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이었다. 정조는 1776년 3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역대 임금의 친필과 서적 등을 보관하였다. |
2. 역사
규장각은 '규성(奎星)의 글'이라는 뜻으로, 황제의 글을 의미한다.[4][5] 1776년 정조가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립하여 중국과 조선의 전적을 수장하고, 실학파 문관들이 교육받고 연구 및 정책 입안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1781년에는 강화도에 별관인 외규장각을 설치했다.[19]
1894년 갑오개혁 이후 1922년 경성제국대학 관할로 이전되었다가 서울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1990년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고, 1992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독립했다.[17]
규장각은 26만 점 이상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 중에는 대한민국의 국보인 조선왕조실록 원본도 포함되어 있다. 많은 자료가 디지털화되어 온라인으로 검색 가능하다. 규장각은 조선 역사 연구를 지원하며, 《규장각》이라는 학술지를 후원한다.
2. 1. 설립 이전
조선 세조 때 양성지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할 규장각 설치를 건의하였으나[13], 설치되지는 않았다. 이후 조선 숙종 때 작은 전각을 만들어 규장각이라 이름 붙였으나[14], 관직 체계는 갖추지 않았다.2. 2. 정조 시대의 설립과 발전
정조는 즉위한 해인 1776년 11월 5일(정조 1년 음력 9월 25일) 창덕궁 금원 북쪽에 규장각을 설치했다.[15] '규장'(奎章)은 임금의 글을 뜻하며,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 역할을 했다. 정조는 규장각에 비서실과 문한(文翰) 기능을 부여하고 과거 시험 주관, 문신 교육 임무까지 맡겼다.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문신들을 모아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내세워 문화 정치를 펼쳤다.[16]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규장각에서 많은 책을 출판하게 했다.[16] 작인지화는 인재 양성을 위한 정책으로, 정조는 규장각에서 젊은 문신을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 하여 평가했다.[16]
규장각은 조선 후기 문예 부흥의 중심 기관으로, 실학자와 서얼 출신 학자들도 채용되었다.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이 대표적이다. 정조는 신분 차별 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여, 개혁 정치와 문화 정책을 추진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을 견제하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과 함께 정치와 백성의 삶을 살피는 데 있었다. 또한 문화를 발전시키고 타락한 풍습을 바로잡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2. 2. 1. 이설
1781년(정조 5년) 궐내각사 지역으로 이설되었다.[4][5]2. 3. 강화도 외규장각
1782년(정조 6년) 강화도에 외규장각이 완성되면서, 기존의 규장각은 내규장각으로 불리게 되었고,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게 되었다.[19] 외규장각에는 국왕이 직접 열람하는 어람용 필사본이 주로 보관되었다.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공격하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은괴, 왕실 유물, 의궤 297책 등을 약탈하고 건물을 불태웠다.[6] 대한민국 정부는 프랑스 법률이 국외 자산 이전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영구 대여 형식으로 왕실 문서 반환을 추진했다.
2010년 서울의 한 시민단체는 반환 운동을 주도했으나, 파리 법원은 불법 취득 재산을 국립 자산 목록에서 제외하라는 요청을 기각했다.[6] 그러나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왕실 문서를 5년 갱신 임대 방식으로 반환하기로 합의했다.[7] 이에 따라 2011년 4월부터 6월까지 191종 297책의 의궤가 네 차례에 걸쳐 반환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8]
2. 4.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 산하로 재편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폐지되었다.[17] 1922년 경성제국대학 관할로 이전되었으며, 이후 서울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1990년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고, 1992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독립했다.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의궤를 포함한 많은 유물을 약탈해갔다. 1922년, 창덕궁 내 규장각 본관에 보관되어 있던 167책의 의궤를 포함한 약 1,000여 점의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10] 2010년 8월, 당시 일본 간 나오토 총리는 한일 병합 100주년을 기념하여 의궤를 반환하겠다고 발표했다.[9] 2011년 12월, 150책의 의궤를 포함한 1,200책이 반환되었으며, 이후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었다.[10]
한편,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의궤 297책은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한민국 대통령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간 합의에 따라 5년 갱신 임대 방식으로 반환되었다.[7] 2011년 4월부터 6월까지, 191종의 서로 다른 의궤가 포함된 297책이 네 차례에 걸쳐 반환되었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8]
3. 규장각의 구성
규장각은 문관 6명, 잡직 35명, 이속 86명으로 구성되었다.[18]
품계 | 관직 | 정원 | 비고 |
---|---|---|---|
정1품 | 대제학 | ||
종1품, 정2품, 종2품 | 제학 | 2명 | |
종2품, 정3품 당상관 | 직제학 | 2명 | |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 종5품, 정6품, 종6품 | 직각 | 1명 | |
정5품, 종5품, 정6품, 종6품, 정7품, 종7품 | 대교 | 1명 | |
문관 총원 | 6명 |
잡직으로는 각감(규장각 청사 관리) 2명, 사권(도서 및 문헌 총괄) 2명, 검서관(도서 관리) 4명, 영첨(문헌의 이름표 관리) 2명, 사자관(문서 필사 관리) 8명, 화사(그림 자료 관리) 10명, 감서(서적 수량 관리) 6명, 검률(법률서적 관리) 1명과 임시직으로 겸검서(검서관 보좌)가 있었다.
행정 실무는 이속이 담당하였는데, 서리 14명(《대전통편》에는 10명이었으나 《대전회통》에서 14명으로 복원), 서사 2명, 겸리 6명, 정서조보리(조보 비치와 관리) 2명, 각동 10명, 직 2명, 대청직 2명, 사령 15명, 인배 4명, 간배 4명, 조라치 2명, 방직 2명, 수공 2명, 군사 7명, 구종 6명, 정원사령 2명, 궐외대령사령 1명, 근장군사 2명, 검서관사령 1명이 있었다.
4. 규장각의 역할과 기능
정조는 1776년 창덕궁 금원에 규장각을 설치하고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검서관 등의 관리를 두었다.[15] 규장각은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 역할을 수행했다. 정조는 규장각에 비서실과 문한(文翰) 기능을 부여하고, 과거 시험 주관과 문신 교육 임무까지 맡겼다. 규장각은 조선 후기 문운을 일으킨 중심 기관으로, 실학자와 서얼 출신 학자들도 참여하여 많은 책을 편찬했다. 주요 인물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이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내세워 문화 정치를 펼쳤다.[16]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 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규장각에서 많은 책을 출판하도록 했다.[16] '작인지화'는 인재 양성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규장각에서 젊은 문신을 뽑아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 하여 평가했다.[16]
규장각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을 견제하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과 경사를 토론하여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문교를 진흥하고 타락한 풍습을 순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규장각은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 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보관하고 수집했다는 점에서 국립중앙도서관과 비슷하며, 《일성록》 등의 특정 주제의 기록물을 간행하는 일도 담당했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국회 도서관과 비슷하다.
규장각 소장품은 26만 점이 넘으며, 그중 많은 수가 디지털화되어 온라인에서 이용 가능하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는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토지 거래, 위임장과 같은 왕실, 정부, 개인 문서, 조선 시대의 자연, 지리 및 사회상을 담은 지도도 소장하고 있다. 고지도에는 1872년의 지방 지도, 비변사에서 날인한 방안 지도, 조선 지도, 팔도 지도 등이 있다. 각 도 및 군에서 보관했던 관청 기록, 관찬 문서, 외교 문서, 대외 무역 관련 자료, 재판 기록도 소장하여, 국가의 근대화 정책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대처를 보여준다. 1894년부터 1910년까지의 재판 기록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생활 방식, 사고방식, 국가 행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1,249권의 내각일력과 1779년부터 1883년까지 규장각에서 보관했던 일일 기록도 포함되어 있으며, 동 시기를 다룬 다른 연대기 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5. 규장각 소장 자료
규장각은 26만 점이 넘는 자료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 중 상당수는 디지털화되어 온라인에서 이용 가능하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는 약탈되지 않고 한국에 남아있어 유명하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국보이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1]
토지 거래, 위임장 등 왕실, 정부, 개인 문서와 조선 시대의 자연 및 사회 모습을 담은 지도도 소장하고 있다. 고지도에는 1872년 지방 지도, 비변사 날인 방안 지도, 조선 지도, 팔도 지도 등이 있다. 또한 각 도와 군에서 보관하던 관청 기록(10종 110권), 관찬 문서(99종), 외교 문서(149권), 대외 무역 관련 자료(180권), 재판 기록(180권)도 있다.[1]
이 자료들은 국가의 근대화 정책 추진 과정과 서구 열강 침략에 대한 대응을 보여준다. 특히 1894년부터 1910년까지의 재판 기록은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생활 방식, 사고방식, 국가 행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내각일력(1,249권)과 1779년부터 1883년까지 규장각에서 보관했던 일일 기록도 있는데, 이 기록들은 같은 시기를 다룬 다른 연대기 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1]
6. 현대적 의의
규장각은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 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보관하고 수집하였다는 점에서 국립중앙도서관과 비슷하며, 《일성록》 등의 특정 주제의 기록물을 간행하는 일을 담당했다는 점에서는 오늘날의 국회 도서관과 비슷하다.[1]
26만 점이 넘는 소장품 중 많은 수가 디지털화되어 온라인에서 이용 가능하다.[1] 특히,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는 약탈당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어 유명하며,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1]
규장각은 조선 역사 연구를 지원하며, 《규장각》이라는 학술지를 후원하고 있다.[6]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서울대학교의 일부인 규장각은 촬영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2008년 SBS 드라마 ''스타의 연인''에 등장했다.[12] 유지태가 연기한 김철수의 직장, 그의 강의, 최지우가 연기한 이마리의 학교 방문 장소로 사용되었다. 갤러리와 박물관 길도 촬영에 사용되었다.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촬영 장소로 사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12]
참조
[1]
웹사이트
규장각(奎章閣) Kyujanggak
https://encykorea.ak[...]
2023-07-17
[2]
웹사이트
정조(正祖) King Jeongjo
https://encykorea.ak[...]
2023-07-17
[3]
웹사이트
History: Kyujanggak
http://e-kyujanggak.[...]
2012-04-24
[4]
웹사이트
Official site's old history page
https://web.archive.[...]
2011-06-22
[5]
웹사이트
Dictionary entry on ‘奎’
http://www.zdic.net/[...]
[6]
뉴스
NGO to Demand Return of Royal Texts From France
https://www.koreatim[...]
Korea Times
2010-01-26
[7]
뉴스
Korea, France Clinch Deal on Return of Royal Archive
http://english.chosu[...]
Chosun Ilbo
2010-11-13
[8]
뉴스
Ancient Korean royal books welcomed back home
http://www.koreahera[...]
Korea Herald
2011-12-06
[9]
뉴스
Looted Korean Texts Return Home from Japan
http://english.chosu[...]
2012-04-23
[10]
뉴스
Looted Korean royal texts return home
http://www.koreahera[...]
Korea Herald
2012-04-23
[11]
웹사이트
Seoul National University’s Kyujanggak Royal Library
https://web.archive.[...]
2012-04-24
[12]
웹사이트
A Star's Lover
https://web.archive.[...]
Korea Tourism Organization
2012-05-30
[13]
문서
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1463년) 5월 30일(무오)
[14]
문서
정조실록 권13, 정조 6년(1782년) 5월 29일(을축) 2번째 기사
[15]
문서
정조실록 권2 정조 즉위년 9월 25일 계사(癸巳)일 조
[16]
서적
단원 김홍도
열화당
[17]
웹사이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웹사이트
http://kyujanggak.sn[...]
[18]
문서
제학이 정1품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관직에 임명되면 대제학으로 직함을 올린다는 규정이 대전회통에 있었으나 실제 적용된 사례는 없다.
[1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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