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기리시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기리시탄은 16세기 일본에서 기독교 신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선교 경쟁 속에서 예수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다이묘들의 개종을 통해 기독교가 확산되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다양한 평신도 단체를 중심으로 성장했지만, 도쿠가와 막부의 탄압으로 인해 쇠퇴했다. 예수회는 경제 활동과 군사적 지원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17세기 초 박해를 받았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쇄국 정책으로 기리시탄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야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 기리시탄은 일본 문학, 대중문화에서 외국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2. 역사

기리시탄의 역사는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스페인 선교사들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유력 다이묘들의 묵인 또는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예수회는 권력자에게 먼저 접근하는 전략을 통해 기독교를 전파했고, 그 결과 많은 다이묘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가 참전하기도 했다.[20][22] 17세기 초에는 기리시탄 신도 수가 37만 명을 넘어섰다는 추정도 있다.[55]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1596년 산 펠리페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의심을 품고 1587년 バテレン追放令|바테렌 추방령일본어을 공포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1][12][14][15] 1597년에는 26인의 일본 순교자를 처형하기도 했다.[17]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기독교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포르투갈스페인과의 무역은 중시했다. 도쿠가와 막부는 1614년 "일본에서 모든 선교사의 추방"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기리시탄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23] 이후 막부는 후미에를 사용하여 기독교인을 색출하고,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에는 쇄국령(1635년)을 통해 기독교를 강력하게 탄압했다.[56][57][58][60]

1853년 매튜 C. 페리에 의해 일본이 개항하고, 1858년 해리스 조약으로 외국인 거주가 가능해지면서 많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일본에 파견되었지만, 포교는 여전히 금지된 상태였다. 1865년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오우라 성당에서 베르나르 프티장 신부는 우라카미 마을의 일본인들이 기리시탄 신앙을 지켜왔음을 확인했다. 1873년 기독교 금지령이 해제되기 전까지 막부의 박해는 계속되었다.

2. 1. 배경

15세기 말, 교황 알렉산데르 6세교황 칙서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스페인은 세계를 분할하여 선교와 무역의 독점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2. 1. 1.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분할 경계선

교황 알렉산데르 6세교황 칙서(1493년)와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년)에 따라, 포르투갈스페인은 세계를 분할하여 각자의 영향권, 무역권, 식민지화 구역을 설정했다. 당시 일본은 이 두 나라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지만, 포르투갈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7]

두 나라는 일본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일본을 식민지화할 수는 없었지만, 기독교를 전파할 독점적인 권리는 일본과의 무역 독점을 의미했다.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은 예수회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주도로 1579년부터 일본 선교를 시작했고, 이는 1575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교황 칙서를 통해 승인되었다. 1588년에는 포르투갈의 보호 아래 후나이 교구가 설립되었다.[7]

스페인이 후원하는 탁발 수도회는 마닐라를 거쳐 일본 진출을 시도하며 예수회와 경쟁했다. 이들은 예수회의 활동을 비판하고 교황에게 로비를 벌였으며, 그 결과 1600년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칙령으로 스페인 수도사들이 포르투갈령 동인도를 통해 일본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1608년 교황 바오로 5세의 칙령은 이 경로에 대한 제한을 완전히 없앴다. 포르투갈은 스페인 예수회가 종교보다 조국을 위해 일한다고 비난했고, 예수회와 탁발 수도회 간의 권력 투쟁은 후나이 교구 내 분열을 야기했다. 탁발 수도회는 도호쿠 지방에 독자적인 교구를 설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7]

2. 1. 2. 종교 개혁과 국제 정세 변화

로마 가톨릭의 세계 질서는 네덜란드영국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17세기 초, 일본은 네덜란드 및 영국과 무역 관계를 맺었다. 영국은 제임스 1세 통치 10년 만에 수익성 부족으로 철수했지만, 네덜란드는 일본과의 무역을 지속했으며 19세기까지 일본과 무역 관계를 유지한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되었다. 무역 경쟁자로서 개신교 국가들은 가톨릭에 대한 비판적인 캠페인을 벌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쇼군의 이베리아 반도 왕국에 대한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56]

2. 2. 선교 전략

예수회는 권력자에게 먼저 접근하여 기독교를 전파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 결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유력 다이묘들이 기독교를 묵인하거나 지원하기도 했다.[56][57]

2. 3. 초기 기독교 공동체

일본 선교에서는 도주쿠(dōjuku), 칸보(kanbō), 지히야쿠샤(jihiyakusha) 등 다양한 평신도 단체들이 기독교 생활을 지원했다.[56][57] 이들은 서품된 성직자가 없는 상황에서 주일 전례 집전, 종교 교육, 고해 준비, 병자들을 영적으로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성직자들을 도왔다. 16세기 말 칸보와 지히야쿠샤는 유사한 책임을 공유하며 장례를 치르고 로마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아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칸보는 세속적인 삶을 버렸지만 정식 서약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지히야쿠샤는 결혼하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단체들은 선교의 근간이었으며, 교계의 위계질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지배하는 다이묘들에게도 의존했다. 따라서 일본 선교가 성공할수 있었던 요인은 단지 훌륭한 선교사 그룹의 활동이나 몇몇 다이묘와 상인들의 상업적, 정치적 이익의 결과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2. 4. 경제 활동

예수회는 포르투갈 국왕으로부터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받기 어려웠기 때문에, 경제적 자립을 위해 무역에 참여했다.[9]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상인 무역을 통해 선교 비용을 충당했으며, 1550년대부터 1570년대까지 예수회는 무역 이익으로 경비를 충당하고 인도에 토지를 매입했다.

예수회의 주요 상업 활동은 마카오와 나가사키 간의 포르투갈 실크 무역이었다. 이들은 광저우에서 생사를 구매하여 나가사키에서 판매하는 마카오 무역 협회에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실크 직물, 금, 사향, 군수 물자, 노예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했으며, 때로는 스페인 무역에도 참여하여 포르투갈 상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9]

주로 프로쿠라토르(총대리)들이 포르투갈 무역을 중개했다. 이들은 마카오와 나가사키에 거주하며 일본 고객들의 구매 약정을 받았다. 중개를 통해 예수회는 리베이트와 당국의 호의적인 대우를 기대할 수 있었다. 가장 유명한 프로쿠라토르는 주앙 로드리게스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나가사키 행정에 참여하기도 했다.[9]

이러한 상업 활동은 사제들의 명예로운 가난이라는 이상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부 예수회원들은 사회 영향력 확대를 우선시했다. 탁발 수도회들은 예수회의 부패를 비난하고, 그들의 활동을 일본 가톨릭 금지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탁발 수도회들 역시 상업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9]

예수회는 다이묘들에게 개종의 대가로 무역 제안과 이국적인 선물을 제시하며 포르투갈과의 무역 중개인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2. 5. 군사 활동

선교사들은 필요하다면 군사 행동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독교 다이묘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일본을 기독교화하는 데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 6. 오다 노부나가와 기독교

오다 노부나가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예수회 선교사들을 우대했지만, 가톨릭에 대한 특별한 정책을 펼치지는 않았다.

2. 7.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기독교 다이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기독교를 묵인하는 듯 보였으나, 1596년에 발생한 산 펠리페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12] 이 사건으로 난파된 스페인 무역선의 선장이 선교사들이 일본 정복을 위해 왔다고 주장하면서, 히데요시는 외래 종교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가톨릭교를 억제하려 했지만, 포르투갈 및 스페인과의 우호적인 무역 관계는 유지하려 했다.[12] 많은 다이묘들이 화약 제조에 사용되는 초석을 얻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1553년에서 1620년 사이에 86명의 다이묘가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았다.[13]

1587년, 히데요시는 기독교 영주들이 가신과 평민들에게 강제 개종을 강요하고, 나가사키 시에 병력을 주둔시키며, 일본인들을 노예로 삼는다는 보고를 받고 그해 7월 24일 バテレン追放令|바테렌 추방령일본어을 공포했다.[14] 이 추방령에는 선교사 금지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1] 그러나 이 법령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15]

예수회는 무장 저항을 고려했지만,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예수회는 ''다이묘''들 간의 갈등에 개입하지 않고 무장을 해제하기로 결정했으며, 키리시탄 ''다이묘''들에게 은밀하게 식량과 재정 지원만 제공했다.

예수회와는 달리, 도미니코회, 프란체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는 평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설교를 했고, 히데요시는 충성심이 분열된 평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되었다.[16] 이로 인해 히데요시는 1597년에 26인의 일본 순교자를 처형했다.[17]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정권 승계의 혼란 속에서 기독교인 박해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었다.[18]

2. 8. 확장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1582년부터 일본 선교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적응을 장려했다. 16세기 말, 일본은 멕시코, 페루, 브라질, 필리핀, 인도 등 다른 나라들과 달리 유럽 열강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모든 구성원이 현지인인 가장 큰 해외 기독교 공동체가 되었다.[19]

대부분의 기리시탄은 규슈에 거주했지만, 기독교화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16세기 말에는 사실상 일본의 모든 지방에서 세례받은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수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15명의 다이묘가 세례를 받았으며, 그들의 영지는 규슈 남동부의 휴가에서 혼슈 북부의 데와까지 뻗어 있었다.[19] 일본 전역에 수백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기독교는 빈곤층부터 부유층, 농민, 상인, 선원, 무사, 기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 집단 사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교회의 일상 활동 대부분은 처음부터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일본 교회에 토착적인 면모를 부여했고, 성공의 이유 중 하나였다. 1590년까지 일본에는 일본 예수회의 절반에 해당하는 70명의 일본인 형제가 있었다.

1592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을 침략했고, 그의 주요 장군 중에는 기리시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었다.[20]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가 패배한 후,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념에 따라 할복을 거부하고 처형을 선택했다.[22]

2. 9. 도쿠가와 막부의 대응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일본 내 기독교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포르투갈스페인과의 무역은 중시했다. 1600년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확보하고 마닐라와 협상을 시도하는 등 무역 진흥을 꾀했지만, 이는 가톨릭교에 대한 그의 정책을 일관성 없게 만들었다. 한편, 네덜란드영국 상인들은 쇼군에게 스페인이 영토적 야심을 품고 있으며 가톨릭교가 그 주요 수단이라고 조언하며, 자신들은 무역에만 전념하고 선교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56]

도쿠가와 막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행정부보다 훨씬 강력하고 안정적임을 깨달은 예수회와 달리, 탁발 수도회들은 비교적 공공연하게 군사적 선택을 논의하기도 했다. 1615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의 프란체스코회 사절이 쇼군에게 스페인 요새 건설 부지를 요청하면서, 가톨릭교와 배후의 이베리아 반도 식민 열강에 대한 일본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56] 예수회와 탁발 수도회는 일본 선교를 두고 경쟁하며 서로 다른 제국 전략을 추구했다.

2. 9. 1. 초기 박해

도쿠가와 막부는 곤치인 수덴이 초안을 작성하고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이름으로 1614년에 발표된 "일본에서 모든 선교사의 추방"에 관한 성명을 통해 기리시탄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23] 이 성명은 기독교인들이 일본 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정부 규정을 위반하고, 신도를 비방하며, 진정한 법을 헐뜯고, 규정을 파괴하며, 선함을 부패시킨다"고 주장했다.[24]

같은 해, 바쿠후는 모든 영토의 모든 신민들에게 지역 불교 사찰에 등록할 것을 요구했고, 1666년에는 연례 요구 사항이 되어 불교 사찰을 국가 통제의 도구로 굳혔다.[25] 1630년대까지 사람들은 종교적 정통성, 사회적 수용성 및 정권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불교 사찰과의 소속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러한 금지 조치는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과 같은 배경 외에도, 쇼군이 이베리아 식민 열강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하고, 도요토미 씨족에 대한 조치와도 관련이 있었다.

17세기 중반, 쇼군은 모든 유럽 선교사의 추방과 모든 개종자의 처형을 요구했으며,[26] 이는 일본에서 공개적인 기독교의 종말을 알렸다. 바쿠후는 교차로와 다리에 전국적으로 게시판을 세워 기독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포함한 많은 금지 사항을 나열했다.[27]

1622년 겐나 대순교의 기독교 순교자들. 17세기 일본 그림.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기독교인 폭로를 위한 후미에


1614년에 시작된 조직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비밀리에 활동하는 소수의 성직자들을 가진 일본 교회는 평신도 회원들 중에서 지도자를 모집하여 자율적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나가사키는 17세기 초 수십 년 동안 기독교 도시로 남아 있었고, 시마바라, 기나이에도의 프란체스코회에서 다른 결사 단체가 설립되었다.

일본 정부는 가톨릭 신자와 동조자를 드러내기 위해 ''후미에''를 사용했다. ''후미에''는 성모 마리아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으로, 그림을 밟기를 꺼리는 사람들은 기독교인으로 식별되어 나가사키로 끌려갔다. 그들이 종교를 포기하지 않으면 고문을 받았고, 여전히 거부하는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활동적인 기독교인의 수는 1582년에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며,[28] 선교 기간 동안 약 1,000명의 알려진 순교자가 있었다.

2. 9. 2. 시마바라의 난과 쇄국

1637년,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가 이끈 시마바라의 난이 쇼군 정권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이 반란은 경제적 궁핍과 정부의 압제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이후 종교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56][57] 약 27,000명이 이 봉기에 가담했지만, 쇼군 정권은 장기간의 작전 끝에 이 반란을 진압했다. 2년 전 무역을 제한하고 일본을 사실상 고립시키는 쇄국령(1635년)을 발포한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기독교인들을 강력하게 탄압했다.[58] 많은 일본인들이 마카오 또는 스페인령 필리핀으로 추방되었다. 많은 마카오인과 필리핀계 일본인 메스티소들은 추방된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의 혼혈 후손이다. 약 400명이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되었지만, 수천 명의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이주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약 10,000명의 마카오인과 3,000명의 일본인이 마닐라로 이주했다.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들은 "숨은 기독교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부 사제들이 불법적으로 일본에 남아 있었는데, 여기에는 18명의 예수회 사제, 7명의 프란체스코회 사제, 7명의 도미니코회 사제, 1명의 아우구스티노회 사제, 5명의 일반 사제와 알려지지 않은 수의 예수회 ''이르마오''와 ''도주쿠''가 포함되었다. 이 시기는 독일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30년 전쟁과 일치하므로, 유럽에서 가톨릭의 세력을 억제한 것이 일본의 가톨릭 선교에 대한 자금 유입을 줄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그들이 이 시기에 실패하고 이전에는 실패하지 않았던 이유일 수 있다. 에도 시대 동안, 가쿠레 키리시탄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켰다. 성경 구절이나 기도는 구두로 부모에서 자녀에게 전해졌으며, 그들의 지하 공동체에서는 아이들을 세례하기 위해 비밀 장소(미즈카타)가 지정되었고, 지방 정부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후미에''를 시행했다.

2. 9. 3. 후미에

踏絵|후미에일본어막부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60]

2. 9. 4. 후기 박해

1637년, 아마쿠사 시로가 이끈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지만,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쇄국령(1635년)을 통해 기독교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많은 일본인들이 마카오나 스페인령 필리핀으로 추방되었고, 이들의 혼혈 후손들이 필리핀 메스티소를 형성했다.[59]

일본에 남은 가톨릭 신자들은 가쿠레 키리시탄이라 불리며 비밀리에 신앙을 유지했다. 이들은 후미에를 통해 감시받았지만, 성경 구절과 기도를 구전으로 전하고 비밀 장소에서 세례를 주는 등 신앙을 지켜나갔다.[59]

2. 10. 재발견과 귀환

1853년 매튜 C. 페리에 의해 일본이 강제로 개항하면서 외국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1858년 해리스 조약으로 외국인들의 일본 거주가 가능해졌고,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 많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일본에 파견되었지만, 포교는 여전히 금지된 상태였다.

1865년,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근처 우라카미 마을의 일본인들이 파리 외방전교회가 지은 오우라 성당을 방문하여, 베르나르 프티장 신부에게 자신들의 가족이 기리시탄 신앙을 지켜왔다고 고백했다. 이들은 성모 마리아상을 보고 신부가 독신이며 로마 교황청에서 왔는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프티장은 이들의 지하 조직을 조사하여, 유럽 신부 없이도 거의 250년 동안 세례 의식과 전례력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를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에도 막부의 기독교 금지령은 여전히 유효하여 1867년까지 박해가 계속되었다. 로버트 브루스 반 발켄버그 미국 공사가 나가사키 지방관에게 항의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1868년 메이지 정부 초기에도 이러한 기조는 유지되었고, 수천 명이 추방되었다(우라카미 요반 쿠즈레).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비판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는 1873년에 금지령을 해제했다. 추방되었던 많은 이들이 돌아와 1895년 우라카미 성당을 완공했다.

이후 나가사키 인근 지역에서 수만 명의 기리시탄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부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돌아갔지만, 다른 이들은 가쿠레 기리시탄으로 남아 전통 신앙을 유지했다. 이들은 공동체와 의식을 유지하기 어려워 불교신토로 개종하기도 했다.[30]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나가사키를 방문했을 때, 가쿠레 기리시탄 가족 출신의 젊은이들을 세례하기도 했다.[31]

3. 조선인 기리시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예수회 선교사의 선교 활동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이들이 있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들을 “조선 그리스도교인들은 우리가 전한 신덕(信德)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교리 교육도 잘 받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3. 1. 조선인 기리시탄 순교자

조선인 기리시탄 순교자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복자 고스마 다케야(コスマ竹屋)
  • 복자 안토니오(Antonio)
  • 복자 가이오(Caio):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평신도 사목을 하였으며, 화형으로 순교했다.
  • 권(權) 빈첸시오 (Vincentio): 예수회 수사였다.
  • 복자 가이오 지우에몬(カイオ次右衛門)
  • 복자 가스파르 바스(Caspar Vaz)

3. 2. 주목받는 조선인 기리시탄

오타 주리아고니시 유키나가의 양녀였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를 거쳐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4. 누에바 에스파냐의 키리시탄

누에바 에스파냐에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한 키리시탄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상업이나 학문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56][57] 일본인이나 중국인 등의 동양인은 법적으로 인디오(원주민)으로 간주되었다.[58]

누에바 갈리시아의 수도인 과달라하라에서는 이주에 성공한 일본인들이 몇몇 기록되어 있다. 후안 데 파에스는 1620년대에 이주한 후 Lambanog|비노 데 코코스영어메스칼 등의 증류주를 판매하여 1650년에는 가게 주인이 되었다. 1653년에는 과달라하라 상위 20인 "albacea, heredero y tenedor de bienes"가 될 정도로 부유해졌고, 1657년부터 1661년까지는 "mayordomo y administrador de los propios y rentas de la catedral"에 취임했다. 1675년에 사망했을 때에는 대성당을 소유한 영주의 묘와 같은 구역에 매장되었고, 수만 페소에 달하는 재산을 유언으로 남겼다.[62][63] 1679년 국세 조사에서는 일본인 이민 루이스 데 엔시오의 미망인 마르가리타 데 엔시오의 집에 10명의 메스티소와 4명의 흑인 사용인이 있었는데, 이는 다른 2명의 상인의 집만 능가하는 숫자로 엔시오 가문의 번영을 보여준다.[64][65]

17세기 일본인 루이스 데 사산다는 수도회 입회를 허락받았다. 1613년 순교한 일본인 미겔 사산다의 아들이었다는 점이 입회를 용이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66][67] 일본계 마누엘 데 산타페는 대학의 철학부를 졸업한 후, 1674년 의학부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18세기 초 아우구스티노회 총장이었던 프레이 가스팔 데 산 아구스틴은 일본인 키리시탄을 "아시아스페인인"이라고 칭하며, 문화적인 면에서 구분된다고 주장했다.[68]

유럽에서는 을 차는 행위(대검)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었지만,[69] 키리시탄 사무라이 후안 데 라 바란카는 대도와 납세 면제 특권을 부여받았다. 키리시탄 사무라이들의 대부모는 누에바 에스파냐의 상류 계급에서 선택되었으며, 그들은 치노스 중에서도 특권적인 계층에 속했다.[71] 오아하카 주로 이주했던 일본인 프란시스코 데 카르데나스와 그의 아들들도 1644년 대도 특권을 인정받았으며, 많은 키리시탄 사무라이들이 대도 특권을 부여받았다.[70] 베라크루스 주에서 병사로 복무한 일본인 키리시탄도 마찬가지로 대도를 허용받았다고 한다.[71]

5. 키리시탄 탄압 시대에 대한 연구사

C. R. 복서의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영어(1951)과 조지 엘리슨의 Deus Destroyed영어(1973)는 키리시탄 연구의 초기 주요 저작으로 평가받는다.[55]

6. 쇄국부터 19세기까지의 키리시탄 묘사

17세기 초,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기리시탄(키리시탄)이 일본에서 제거된 후, 이들에 의한 일본 정복을 다룬 위서(僞書)가 대량으로 조작되었다.[59][60] 시간이 지나면서 기리시탄은 중세 설화에 등장하는 악역과 같이 기괴하게 묘사되었고, 이는 신성하고 문명화된 일본을 구성하는데 기여했다.

7. 픽션·대중문화 속 키리시탄 묘사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일본 가톨릭 공동체의 구술 역사를 바탕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겪었던 박해와 교회의 탄압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은 1971년과 2016년에 두 차례 영화로 각색되었다.[10]

참조

[1] 문서 Jansen
[2] 문서 Documentos de Japon
[3] 문서 Cultural Interactions
[4] 문서 Catholic Encyclopedia, Xavier entry
[5] 문서 Catholic Forum
[6] 문서 Jansen
[7] 문서 Jansen
[8] 문서 St Francis Xavier and the Shimazu Family
[9] 문서 Foreign Affairs and Frontiers
[10] 문서 Kondō Hōryū-ji
[11] 문서 Gojyūnotō Hōryū-ji
[12] 문서 Cooper
[13] 문서 Toshihiko
[14] 문서 Elison
[15] 문서 Nosco, 1993
[16] 문서 Jansen
[17] 문서 Jansen
[18] 문서 Jansen
[19] 문서 Misericordias
[20] 문서 Jansen
[21] 문서 Kiernan
[22] 문서 Jansen
[23] 문서 Higashibaba
[24] 문서 Shimizu
[25] 문서 Jansen
[26] 문서 Mullins
[27] 문서 Jansen
[28] 문서 Catholic Encyclopedia, Japan entry
[29] 문서 Miyazaki
[30] 문서 Miyazaki
[31] 문서 Miyazaki
[32]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33] 웹사이트 吉利支丹墓碑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3-12-20
[34] 문서 Japan’s Encounters with the West through the VOC. Western Paintings and Their Appropriation in Japan, Mediating Netherlandish Art and Material Culture in Asia 2014-12
[35] 문서 Nederlandse Factorij Japan 67 1654:37
[36] 서적 The Deshima dagregisters: their original tables of contents, Vol. XI: 1641–1650 Institute for the Studyof European Expansion, Intercontinenta 23 2001
[37] 간행물 2005
[38] 간행물 2005
[39] 간행물 2004
[40] 문서
[41] 문서 2004
[42] 논문 The Great Ship From Amacon (Review Article) 1961
[43] 학위논문 The Door Ajar: Japan's Foreign Trade in the Seventeenth Century 1980
[44] 논문 The English and the Control of Christianity in the Early Edo Period 2012
[45] 논문 The English and the Control of Christianity in the Early Edo Period 2012
[46] 논문 The English and the Control of Christianity in the Early Edo Period 2012
[47] 논문 The English and the Control of Christianity in the Early Edo Period 2012
[48] 논문 The English and the Control of Christianity in the Early Edo Period 2012
[49] 논문 The English and the Control of Christianity in the Early Edo Period 2012
[50] 서적 The Dutch and English East India Companies Diplomacy, Trade and Violence in Early Modern Asia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18
[51] 서적 Imagining Global Amsterdam: History, Culture, and Geography in a World City Amsterdam University Press, Amsterdam 2012
[52] 논문 Gulliver’s Travels, Japan and Engelbert Kaempfer
[53] 서적 Voyage Round the World 1700
[54] 학위논문 RETHINKING THE HISTORY OF CONVERSION TO CHRISTIANITY IN JAPAN: 1549-1644 2018
[55] 서적 Portuguese merchants and missionaries in feudal Japan, 1543-1640 Variorum, Aldershot 1986
[56] 서적 El japonés que conquistó Guadalajara. La historia de Juan de Páez en la Guadalajara del siglo XVII Universidad de Guadalajara, Biblioteca Pública del Estado de Jalisco Juan José Arreola 2009
[57] 논문 “Japoneses en Guadalajara: ‘Blancos de Honor’ durante el Seiscientos mexicano,” La Nueva Galicia en los siglos XVI y XVII El Colegio de Jalisco, Centro de Estudios Mexicanos y Centroamericanos, Guadalajara 1989
[58] 학위논문 Los “indios chinos” en la Nueva España: la inmigración de la nao de China, 1565-1700 2007
[59] 학위논문 Los “indios chinos” en la Nueva España: la inmigración de la nao de China, 1565-1700 2007
[60] 학위논문 Los “indios chinos” en la Nueva España: la inmigración de la nao de China, 1565-1700 2007
[61] 학위논문 Los “indios chinos” en la Nueva España: la inmigración de la nao de China, 1565-1700 2007
[62] 학위논문 Los “indios chinos” en la Nueva España: la inmigración de la nao de China, 1565-1700 2007
[63] 논문 “Japoneses en Guadalajara: ‘Blancos de Honor’ durante el Seiscientos mexicano,” La Nueva Galicia en los siglos XVI y XVII El Colegio de Jalisco, Centro de Estudios Mexicanos y Centroamericanos, Guadalajara 1989
[64] 논문 “Japoneses en Guadalajara: ‘Blancos de Honor’ durante el Seiscientos mexicano,” La Nueva Galicia en los siglos XVI y XVII El Colegio de Jalisco, Centro de Estudios Mexicanos y Centroamericanos, Guadalajara 1989
[65] 학위논문 Los “indios chinos” en la Nueva España: la inmigración de la nao de China, 1565-1700 2007
[66] 학위논문 Los “indios chinos” en la Nueva España: la inmigración de la nao de China, 1565-1700 2007
[67] 서적 Ethnic and Social Background of the Franciscan Friars in Seventeenth-Century Mexico Academy of American Franciscan History, Washington D.C 1973
[68] 학위논문 Los “indios chinos” en la Nueva España: la inmigración de la nao de China, 1565-1700 2007
[69] 서적 Fashion and Armour in Renaissance Europe: Proud Lookes and Brave Attire Harry N. Abrams, New York 2009
[70] 문서 ASIANS TO NEW SPAIN ASIAN CULTURAL AND MIGRATORY FLOWS IN MEXICO IN THE EARLY STAGES OF “GLOBALIZATION” (1565-1816) 2015
[71] 간행물 ASIANS TO NEW SPAIN ASIAN CULTURAL AND MIGRATORY FLOWS IN MEXICO IN THE EARLY STAGES OF “GLOBALIZATION” (1565-1816) 2015
[72] 논문 Interactions between Rivals: The Christian Mission and Buddhist Sects in Japan (c. 1549–c. 1647) Peter Lang 2021
[73] 논문 Conquering Demons: The “Kirishitan”, Japan, and the World in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Center for Japanese Studies, The University of Michigan 2013
[74] 학위논문 RETHINKING THE HISTORY OF CONVERSION TO CHRISTIANITY IN JAPAN: 1549-1644 University of St Andrews 2018
[75] 논문 Deus Destroyed. The Image of Christianity in Early Modern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76] 서적 Deus Destroyed, The Image of Christianity in Early Modern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1973
[77] 간행물 THE “KURODA PLOT” AND THE LEGACY OF JESUIT SCIENTIFIC INFLUENCE IN SEVENTEENTH CENTURY JAPAN Universidade Nova de Lisboa Lisboa, Portugal 2005-06/12
[78] 논문 Conquering Demonns 2014
[79] 서적 Conquering Demons: The “Kirishitan”, Japan, and the World in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2013
[80] 서적 Conquering Demons: The “Kirishitan”, Japan, and the World in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2013
[81] 서적 Conquering Demons: The “Kirishitan”, Japan, and the World in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2013
[82] 서적 Conquering Demons: The “Kirishitan”, Japan, and the World in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2013
[83] 서적 Conquering Demons: The “Kirishitan”, Japan, and the World in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2013
[84] 논문 Holy Ghosts: The Christian Century in Modern Japanese Fiction The Society for Japanese Studies
[85] 서적 Holy Ghosts: The Christian Century in Modern Japanese Fictio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5
[86] 서적 Holy Ghosts: The Christian Century in Modern Japanese Fictio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5
[87] 서적 Holy Ghosts: The Christian Century in Modern Japanese Fictio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5
[88] 서적 The Representation of Japanese Politics in Manga
[89] 서적 The Representation of Japanese Politics in Manga
[90] 웹사이트 The Calendar https://www.churchof[...] 2021-04-02
[91] 웹사이트 Holy Men and Holy Women http://diobeth.typep[...] 2022-06-01
[92] 웹사이트 Notable Lutheran Saints https://web.archive.[...] 2019-07-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