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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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린컵은 1978년 일본 축구 협회가 일본 대표팀 강화를 위해 창설한 국제 축구 대회이다. 초기에는 해외 클럽팀과 국가대표팀이 참가하는 대회였으나, 1992년부터는 FIFA 공인 국제 A매치 대회로 전환되어 해외 국가대표팀 간의 리그전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기린 맥주의 후원을 받아 '기린컵'으로 명칭되었으며, 일본 대표팀의 국제 경기 일정에 따라 개최되지 않는 해에도 기린 챌린지컵이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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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컵 | |
---|---|
기본 정보 | |
주최 | JFA |
창립 | 1978년 |
참가 팀 수 | 4팀 (2016년부터) |
지역 | 일본 (AFC) |
현재 우승팀 | 튀니지 (1회 우승) |
최다 우승팀 | 일본 (11회 우승) |
웹사이트 | https://www.kirin.co.jp/soccer/%7Ckirin.co.jp/soccer |
현재 대회 | 2022년 기린컵 축구 대회 |
명칭 | |
한국어 | 기린컵 축구 |
일본어 | キリンカップサッカー (키린캇푸 삿카-) |
영어 | KIRIN CUP SOCCER |
2. 역사
기린컵은 1978년 '재팬컵'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국제 축구 대회이다.[4][5][6][7][8] 초기에는 유럽이나 남미의 유명 클럽팀과 국가대표팀을 초청하여 일본 대표팀 및 클럽팀과 함께 경쟁하는 혼합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4][8][9][10] 1980년 기린 맥주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며 대회 명칭이 변경되었고,[4][6][9][10][15] 1992년부터는 국제 축구 연맹(FIFA) 공인 국제 A매치 대회로 전환되었다.[8][16] 주로 3~4개국이 참가하여 풀 리그전 또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팀을 가리며, FIFA 월드컵이나 AFC 아시안컵 등 주요 국제 대회를 앞둔 일본 대표팀의 평가전 성격으로 개최되기도 한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대회가 열리지 않는 해도 있었다.
아래는 역대 기린컵 우승팀 목록이다.
연도 | 우승팀 |
---|---|
1978 | 서독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브라질 SE 파우메이라스 (공동 우승) |
1979 | 잉글랜드 토트넘 홋스퍼 |
1980 | 잉글랜드 미들즈브러 |
1981 | 벨기에 클뤼프 브뤼허 |
1982 | 서독 베르더 브레멘 |
1983 | 잉글랜드 뉴캐슬 유나이티드 |
1984 | 브라질 인테르나시오나우 |
1985 | 브라질 산투스 |
1986 | 서독 베르더 브레멘 |
1987 | 브라질 플루미넨세 |
1988 | 브라질 CR 플라멩구 |
1989 | 미개최 |
1990 | 미개최 |
1991 | 일본 |
1992 | 아르헨티나 |
1993 | 헝가리 |
1994 | 프랑스 |
1995 | 일본 |
1996 | 일본 |
1997 | 일본 |
1998 | 체코 |
1999 | 벨기에 및 페루 (공동 우승) |
2000 | 일본 및 슬로바키아 (공동 우승) |
2001 | 유고슬라비아 |
2002 | 순위 없음[9][10] |
2003 | 순위 없음[9][10] |
2004 | 일본 |
2005 | 페루 및 아랍에미리트 (공동 우승) |
2006 | 스코틀랜드 |
2007 | 일본 |
2008 | 일본 |
2009 | 일본 |
2010 | 미개최 |
2011 | 일본, 체코 및 페루 (공동 우승)[18] |
2012 | 미개최 |
2013 | 미개최 |
2014 | 미개최 |
2015 | 미개최 |
2016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2017 | 미개최 |
2018 | 미개최 |
2019 | 미개최 |
2020 | 미개최 |
2021 | 미개최 |
2022 | 튀니지 |
2. 1. 창설 배경 (1978년 이전)
1976년, 일본 축구 협회(JFA) 전무 이사로 취임한 나가누마 겐은 당시 일본 축구의 부흥을 위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었다[4][5]。 그는 "아시아와의 교류를 심화하고, 유럽이나 남미의 강호 클럽과 아시아 국가 대표팀을 초청하는 토너먼트" 개최를 구상했다[4][5]。 이는 나가누마 자신이 감독으로서 일본 대표팀을 이끌고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에서 성과를 거둔 이후, 점차 하락세를 걷던 일본 대표팀의 성적과 인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방안이었다[4]。 당시 일본 축구 리그(JSL)의 관중 수도 감소하는 등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JFA의 어려운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가누마는 대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추진했다[4]。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8년 5월, 일본 대표팀 강화를 목적으로 "재팬 컵"이라는 이름의 대회가 창설되었다[4][5][6][7][8]。 이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국제 축구 대회였다[9][10]。 당시 일본 대표팀은 니노미야 히로시 감독 아래 나가이 요시카즈, 카네다 키노리, 니시노 아키라, 가토 히사시 등이 주축 선수였다[11]。 제1회 대회에는 전년도 발롱도르 수상자인 알랑 시몽센을 비롯해 유프 하인케스, 헤르베르트 비머 등이 속한 분데스리가 3연패 중이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일본인 최초의 유럽 프로 선수 오쿠데라 야스히코가 소속된 1. FC 쾰른이 참가하여 화제를 모았다[7][11]。 쾰른에는 골키퍼 하랄트 슈마허와 명장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도 포함되어 있었다[4]。 하지만 큰 기대와 달리 대회는 흥행에 실패하여 15경기 총 관중 16만 2,500명, 유료 입장객 8만 416명으로 경기당 평균 5,000명 수준에 그쳤고, 약 6000만엔의 적자를 기록했다[4][6]。
제2회 대회(1979년)에는 1978년 FIFA 월드컵 우승 멤버인 리카르도 비야, 오스발도 아르딜레스가 속한 토트넘 홋스퍼 FC와 잔카를로 안토니오니가 이끄는 ACF 피오렌티나 등이 참가했지만, 흥행은 더욱 부진했고 적자는 계속되었다[4][6][7][11][12]。 재정난 타개를 위해 나가누마는 오카노 슌이치로와 함께 기린 맥주 본사를 찾아가 코니시 히데쓰구 당시 사장에게 직접 후원을 요청했고, 타이틀 스폰서 계약을 성사시켰다[6][11][12][13][14]。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린 맥주의 축구 일본 대표팀 공식 후원의 시작이었다[5][13][14]。 당시만 해도 타이틀 스폰서 개념이 생소했고, 상금 대회 개최 보도에 일본 체육 협회가 아마추어리즘을 이유로 항의하기도 했다[4][5]。 이에 JFA는 대회가 흥행이 아닌 강화 목적임을 강조하며 상금 대신 경기당 개런티 제도를 도입했다[5]。 기린 맥주는 이미 제1회 대회부터 광고판 협찬을 하고 있었으며[4], 1980년 제3회 대회부터 본격적인 후원을 시작했다[4]。 대회 명칭은 일본 체육 협회 등의 반대를 고려하여 "재팬컵 기린 월드 축구"로 변경되었다가[6][9][10][15], 1985년부터 "기린컵 축구"로 다시 변경되었다[4][6][9][10][15]。
2. 2. 초창기 (1978년 ~ 1991년)
1978년, 일본 축구 협회(JFA)의 나가누마 켄 전무이사(당시) 주도로 '재팬컵'이라는 이름의 국제 축구 대회가 창설되었다.[4][8][9][10] 나가누마는 하라주쿠의 협회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기린 맥주 본사를 보고 후원을 요청할 생각을 했고, 광고 대행사 없이 직접 오카노 슌이치로와 함께 기린 맥주 사장을 만나 타이틀 스폰서 계약을 성사시켰다.[6][11][12][13][14] 이로써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기린 맥주의 축구 일본 대표팀 공식 후원이 시작되었다.[5][13][14] 당시에는 상금 지급이 아마추어 규정에 어긋난다는 일본 체육 협회의 반발이 있어, 상금 대신 경기당 개런티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4][5] 기린 그룹은 이미 1회 대회부터 광고판 협찬을 하고 있었으며,[4] 1980년 제3회 대회부터 본격적인 후원을 시작했다.[4] 대회 명칭은 초기에 "재팬컵 기린 월드 축구"였다가[6][9][10][15], 1985년부터 "기린컵 축구"로 변경되었다.[4][6][9][10][15]1978년부터 1991년까지 대회는 나가누마의 초기 구상대로 해외 국가대표팀과 클럽팀을 초청하여 일본 대표팀과 클럽팀이 함께 경쟁하는 혼합 방식으로 진행되었다.[4][8][9][10] 이는 당시 1970년대 일본 대표팀의 실력이 부족하여, 시즌 오프 기간에 일본을 방문하는 해외 클럽팀에게도 고전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방식이었다.[8] 실제로 제1회부터 제11회 대회까지 모두 해외 클럽팀이 우승을 차지했다.[9][10] 초기 대회 우승팀으로는 토트넘 홋스퍼(1979년), 미들즈브러 FC(1980년), 클럽 브뤼헤(1981년), 뉴캐슬 유나이티드(1983년) 등이 있다. 1985년까지는 일본 대표팀 외에 다른 일본 팀(초기에는 일본 선발팀, 1980년부터는 전년도 천황배 우승팀)도 참가했다.[9][10] 1987년 대회에는 UC 삼프도리아가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UEFA컵 출전 문제로 불참하고 토리노 FC가 대신 참가하기도 했다.
1988년에 한 해 대회가 중단되었다가 1991년에 재개되었는데, 이 대회에서 일본 대표팀은 태국 대표팀과 잉글랜드의 토트넘 홋스퍼 등을 꺾고 마침내 국제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8] 비록 동남아시아 원정 중이던 리네커가 급히 합류하는 등 토트넘의 컨디션이 최상은 아니었지만,[8] 미우라 가즈요시의 2골 활약에 힘입어 4–0으로 완승을 거둔 이 경기는 오랫동안 유럽 및 남미 강호 클럽에 고전하던 일본 축구가 분명히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8]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미야모토 쓰네야스 현 일본 축구 협회 회장도 이 경기가 매우 충격적이었다고 회고했다.[13]
2. 3. 국가대표팀 대회로 전환 (1992년 ~ 현재)
일본 프로 축구 리그(J리그)가 시작되기 전 해인 1992년부터 기린컵은 국제 축구 연맹(FIFA) 공인의 국제 A매치 대회로 전환되었다[8][16]. 이에 따라 해외에서 2개의 국가대표팀을 초청하여 풀 리그전 방식으로 우승팀을 가리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4]. 같은 해 일본 대표팀은 첫 외국인 감독으로 한스 오프트를 선임했는데[7][8], 그의 감독 데뷔 무대가 바로 이 기린컵이었다[8]. 첫 상대는 1990 FIFA 월드컵 준우승팀인 강호 아르헨티나였다[7][8]. 당시 알피오 바실레 감독이 이끌던 아르헨티나는 바티스투타, 카니히아, 루제리, 고이코체아 등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나[7][8], 오프트 감독이 이끈 일본 대표팀은 0-1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7]. 이 경기에서는 모리야스 하지메와 다카기 다쿠야가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7].1994년 대회에는 본래 아르헨티나가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팀의 핵심 선수인 디에고 마라도나가 과거 마약 관련 문제로 일본 입국 허가를 받지 못하면서 아르헨티나 대표팀 전체가 대회 출전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했다[17]. 이에 따라 호주 대표팀이 급하게 대체 참가하게 되었다.

대회는 일반적으로 유럽의 주요 리그가 종료되는 5월에서 6월 사이에 열렸지만, 점차 FIFA 월드컵 예선이나 AFC 아시안컵 본선 진출팀의 출정식 성격을 띠게 되면서 대회 자체의 성적보다는 해당 국제 대회를 대비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가 커졌다. 예를 들어 1993년 대회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1차 예선 출정식을 겸하여 3월 7일과 14일에 일본 대표팀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2002년과 2003년에는 국제 대회 일정(특히 2002년은 한일 월드컵 개최 준비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지 못했고, 최종 순위를 가리지 않았다[9][10].
2011년 대회에서는 모든 경기가 득점 없이 0-0 무승부로 끝나는 진기록이 세워졌다. 그 결과 참가국인 일본, 체코, 페루 3개국이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18].
2016년에는 5년 만에 대회가 다시 열렸으며, 기존의 리그 방식 대신 4개국이 참가하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변경되었다(이 방식은 2022년 대회에도 적용되었다)[19].
2010년대 이후로는 일본 대표팀의 빡빡한 국제 경기 일정 때문에 기린컵이 열리지 않는 해가 늘어났다. 대회가 열리지 않는 해에는 비슷한 시기에 기린 챌린지컵이라는 이름의 친선 경기가 대신 개최되기도 한다.
3. 역대 대회 결과
페루 (공동 우승)
슬로바키아 (공동 우승)
아랍에미리트 (공동 우승)
페루
체코 (공동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