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구림은 대한민국의 미술가로, 추상 회화, 실험 영화, 해프닝, 대지 예술, 비디오 아트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경상북도 예술 대학을 중퇴하고, 1960년대부터 실험적인 예술을 시도했으며,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1970년에는 제4집단을 결성하여 불을 지르는 행위를 벌인 후 해체되었고, 이후 일본, 뉴욕,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2000년 귀국하여 현재까지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태양의 죽음' 연작, 영화 '1/24초의 의미', '현상에서 흔적' 연작, '음과 양' 연작 등이 있으며, 이인성 미술상과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양화가 - 서동진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서양화가이자 정치인인 서동진은 대구 지역 서양화 운동을 이끌며 '대구 근대 미술의 대부'로 불렸고, 광복 후에는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 서양화가 - 김수자 (서양화가)
김수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대한민국미술대전과 중앙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서양화가로, 덕성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서양화과 교수를 역임하고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미술학부 서양화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한민국예술원 및 대한민국미술협회 회원으로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 주요 국제전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여 국제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 상주시 출신 - 노환균
노환균은 1957년생으로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 임용, 여러 검찰청에서 근무하며 경제범죄 및 부정부패 사건을 수사하고 울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며 현대미포조선 사외이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개방이사로 활동 중인 대한민국 검찰 출신 변호사이다. - 상주시 출신 - 이상배 (1939년)
이상배는 행정고시 합격 후 울진군수, 안동시장, 경상북도지사, 환경청장, 서울특별시장 등 주요 행정 관료를 역임하고 제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의 예술가 - 신영복
신영복은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사회운동가, 대학교수, 저술가로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수감 생활 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집필하여 반향을 일으켰고, 출소 후 관계론을 중심으로 사상을 발전시키며 독특한 서체로 민중과 소통했으며,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 대한민국의 예술가 - 문준용
문준용은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문재인 전 대통령의 아들로, 국제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나 한국고용정보원 채용 특혜 의혹으로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섰다.
김구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한글) | 김구림 |
이름 (로마자 표기) | Kim Kulim |
출생일 | 1936년 8월 22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상주군 |
국적 | 대한민국 |
성별 | 남성 |
직업 | 예술가 |
활동 분야 | |
분야 | 실험 미술, 메일 아트, 대지 미술, 퍼포먼스 아트 |
사조 | 실험 미술 |
대표작 | (정보 없음) |
수상 | |
수상 내역 | 은관문화훈장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정보 없음) |
자녀 | (정보 없음) |
기타 정보 | |
웹사이트 | (정보 없음) |
2. 생애와 경력
김구림은 한국미술협회 회원 및 감사를 역임했고, 한국아방가르드협회 회원이었다. 서울현대미술제 운영위원회 위원과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2. 1. 초기 생애 (1936~1957)
김구림은 한국의 중부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경상북도에 있는 인근 예술 대학에 입학했다.[5] 1학년 중 마티스와 세잔과 같은 프랑스 근대 거장들을 중심으로 한 학교의 학풍에 흥미를 잃고 자퇴했다.[6] 대신 김구림은 잭슨 폴락과 피에르 술라주 등 당대 현대미술가들을 공부하고 싶어했으며, 라이프와 타임 같은 미국 잡지(미국 군대에 의해 한국에 반입)를 통해 이들을 접했다.[6]2. 2. 대구에서의 활동 (1958~1967)
김구림은 대구에서 예술가로 데뷔, 1958년 대구 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추상 회화를 선보였다.[6] 1960년대부터는 실험적인 예술 형태로 전환했다. 1967년 부산에서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행위를 통해 회화적, 물질적 추상을 추구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6]2. 3. 서울에서의 활동과 제4집단 (1968~1972)
1968년 김구림은 대구의 대학 졸업생 예술계에서 소외감을 느껴 서울로 이주했고, 유우영 산업의 기획 이사직을 맡았다.[7]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2][6] 1970년, 제도적 관습에 불만을 품고 예술이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믿었던 예술가, 공연자, 종교, 정치, 연극, 음악, 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과 함께 제4집단을 결성했다.[2][6] 제4집단은 대중 앞에서 불을 지르는 행사를 벌인 후, 정부의 집중적인 심문과 김구림의 체포 및 구금으로 인해 해체되었다.[6][1]2. 4. 일본에서의 활동 (1973~1975)
제4집단이 정부의 조사로 인해 해체된 후, 김구림은 일본 미술계로 떠났다.[2]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일본에 머물면서 1973년, 1974년, 1977년에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1]일본에서 김구림은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했다. 그의 비디오 작품 《걸레질》(1974)은 비디오 편집 기술을 활용하여 한 사람이 걸레로 더러워진 탁자를 끊임없이 닦는 과정을 단 몇 분으로 압축했다. 걸레는 점점 더러워지고 낡아 해지다가 마침내 탁자 위에서 부서져 다시 탁자를 더럽게 만든다.[2]
김구림은 일상적인 오브제를 활용한 조각 작품도 제작했다. 그는 평범한 물건을 전시 공간에 설치하여 예술로 바꾸는 뒤샹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1] 그러나 한 일본 미술 평론가의 질문에 따라, 김구림은 오브제를 더욱 명백하게 변형하는 방식으로 작업 방식을 전환했다.[1] 이후 식탁보에 얼룩진 부분을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고, 삽날을 조각내고, 찻잔 자체에 찻잔의 형태를 그리는 등 오브제 자체를 변형하는 작품을 선보였다.[1]
2. 5. 미국에서의 활동 (1984~2000)
1984년부터 1991년까지 김구림은 뉴욕에서 거주하며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에서 판화를 전공했다.[5] 1991년 그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2. 6. 한국으로의 귀환 (2000~현재)
2000년 김구림은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현재까지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1]3. 주요 작품
김구림은 회화, 조각, 설치, 퍼포먼스, 판화, 대지 예술, 비디오 아트,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 '태양의 죽음' 연작 (1964): 1960년대 중반부터 김구림은 플라스틱, 강철, 비닐 등 독창적인 재료와 방법을 사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태양의 죽음' 연작은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회화와 퍼포먼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테이트 모던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6]
- 서울에서의 실험 (1969~1970): 1968년 서울로 이주한 후, 김구림은 영화, 해프닝 등 새로운 예술 형식을 실험했다.[7] 한국 최초의 아방가르드 영화로 불리는 ''1/24초의 의미''(1969)를 제작하여 서울의 풍경을 통해 도시화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드러냈다.[6][2] 김차섭과 함께 우편엽서 예술 ''대중매체의 유물''(1969)을 제작하여 예술의 의미를 탐구했고,[6] 1970년에는 '현상에서 흔적'이라는 해프닝 프로젝트를 통해 시간성을 표현하고 제도적 관습에 도전했다.[6]
- 일본에서의 작품 (1973~1975): 일본에서 김구림은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 그리고 일상적인 물건을 조각으로 만드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비디오 작품 《걸레질》(1974)은 비디오 편집을 통해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주었다.[2]
- '음과 양' 연작 (1980년대 후반~현재): 1984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김구림은 동양 사상의 음양 개념을 차용한 '음과 양' 연작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회화, 판화, 콜라주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현되었다.[1]
3. 1. '태양의 죽음' 연작 (1964)
김구림은 초기 구상적인 제스처가 특징인 추상 회화에서 시작하여 1960년대 중반부터 매우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방법과 재료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1963년 '묘비' 연작과 1964년 '핵' 연작에서 패널 위에 유화를 플라스틱, 강철, 비닐과 결합했다. 그의 '태양의 죽음'(1967) 연작([https://www.tate.org.uk/art/artworks/kim-death-of-sun-i-t14359](https://www.tate.org.uk/art/artworks/kim-death-of-sun-i-t14359) 예시)는 테이트 모던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은 불태우는 파괴적인 행위를 통해 이전 연작을 발전시켰으며, 미술사학자 조앤 키는 이러한 행위가 이 작품들을 회화뿐만 아니라 퍼포먼스로도 규정한다고 주장했다.[6] '태양의 죽음 I'(1967)에서 김구림은 먼저 패널을 비닐로 덮고 유화로 칠한 다음 불을 지르고, 마지막으로 담요로 덮어 불을 껐다.[6] '태양의 죽음 II'에서 김구림은 작품 표면에 금속 와셔를 콜라주하여 키가 "예술 작품의 상품적 본질을 중심적으로 인식한 한국 최초의 예술 작품 중 하나"라고 선언한 작품을 만들었다.[6] 실제로, 많은 공장이 설립된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 시대에 제작된 '태양의 죽음 II'는 김구림이 당시 관리자로 있던 섬유 공장에서 나온 부품(와셔)을 통합했다.[6] 마찬가지로, 작품의 두 번째 재료인 비닐은 이 시기 한국 공장에서 보편적으로 생산되었다. 김구림이 이 두 가지 재료를 통합한 것을 통해 키는 '태양의 죽음 II'가 국가 개발의 민첩함 속에서 한국의 다량의 물질 생산을 암시한다고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림이 작품에 불을 지르는 폭력적이고 최종적인 선택을 통해 키는 '태양의 죽음' 작품이 예술적 관습에 도전하며, 어떤 재료와 행위가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고 본다.[6]3. 2. 서울에서의 실험 (1969~1970)
1968년 서울로 이주한 김구림은 영화, 해프닝 등 새로운 예술 형식을 실험하며 예술 행위의 지평을 넓혔다.[7] 유영산업 홍보 담당으로 일하면서 영화 장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그는, 1969년 초 8mm 영화 《문명, 여자, 돈》 연출을 시도했으나 여배우가 촬영에 나오지 않아 미완성으로 남았다.[8] 이후 정찬승을 기용하여 한국 최초의 아방가르드 영화로 불리는 [https://ubu.com/film/gulim_24.html ''1/24초의 의미'' (1969)]를 제작, 서울의 풍경을 빠르게 몽타주로 보여주며 도시화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드러냈다.[6][2]1969년 가을에는 김차섭과 함께 우편엽서 예술 ''대중매체의 유물''을 제작, 수신자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예술의 의미를 탐구했다.[6] 1970년에는 '현상에서 흔적'이라는 해프닝 프로젝트를 통해 시간성을 표현하고 제도적 관습에 도전했다.[6] 경복궁에서 열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얼음 덩어리 작품을 출품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6] 경복궁 박물관 외부를 흰색 천으로 감싼 작품은 철거되었다.[4][9] 한강 둔치에서 불을 지르는 퍼포먼스는 대지 예술로 인정받으며, 예술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했다.[1]
3. 2. 1. '문명, 여자, 돈' (1969, 미완성)
김구림은 1969년 초 8mm 영화 《문명, 여자, 돈》 연출을 시작했다.[6] 이 영화는 당시 많은 젊은 여성들처럼 공장 일을 찾기 위해 서울로 이주했지만, 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해 매춘에 빠진 젊은 여성의 삶을 엿보는 시각을 제공한다. 촬영 시작 후, 여배우가 이틀째 촬영에 나타나지 않아 영화는 미완성으로 남겨졌다.[8] 이 영화는 2016년에 완성되었다.3. 2. 2. '1/24초의 의미' (1969)
https://ubu.com/film/gulim_24.html ''1/24초의 의미'' (1969)는 정찬승이 출연한 한국 최초의 아방가르드 영화이다.[2] 16mm 필름으로 촬영되었으며, 제목은 영화의 속도(초당 24프레임)를 뜻한다. 이 영화는 고가도로 난간, 거리의 군중,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건설 중인 고층 건물 등 서울의 다양한 풍경을 빠르게 몽타주로 보여준다.[6] 빠르게 도시화되는 서울의 일상을 담아낸 이 영화에는 정찬승이 느리게 하품하는 장면을 넣어 한국의 새로운 현대성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보여주기도 한다.[6]1969년 서울 아카데미 음악당에서 처음 공개될 당시,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계획대로 상영되지 못했다.[6] 이에 정찬승은 김구림, 그리고 흰색 옷을 입은 정강자의 몸에 세 개의 슬라이드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작품을 상영했다.[6]
3. 2. 3. '대중매체의 유물' (1969)
1969년 가을, 김구림은 김차섭과 함께 한국 최초의 우편엽서 예술로 평가받는 ''대중매체의 유물''을 제작했다.[6] 이들은 100명의 사람들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편지에는 두 예술가의 이름이 적힌 찢어진 종이가 들어 있었고 봉투에는 지문이 찍혀 있었다. 세 번째 편지에는 "당신은 하루 전에 대중 매체의 유물을 즐겼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 작품은 수신자의 반응과 참여를 통해 예술 작품의 의미를 확장하고자 했다.[4][6]3. 2. 4. '현상에서 흔적' (1970)
1970년, 김구림은 '현상에서 흔적'이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해프닝과 같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각 프로젝트는 시간성을 물리적, 물질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제도적 관습과의 마찰을 초래했다.[6]- 현상에서 흔적 A: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구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열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붉은 천으로 덮인 거대한 얼음 덩어리(전시 기간 동안 녹을 예정)를 설치하려 했으나, 전시 주최 측은 물 피해를 우려하여 거부했다.[6]
- 현상에서 흔적 D: 경복궁 박물관 외부를 흰색 면포로 감쌌고, 그 위에 "900만 원의 합계"라고 적었다. 박물관은 이 작품이 애도하는 집처럼 보이게 한다고 인식하여,[4] 이 작품은 불과 26시간 만에 철거되었다.[9]
- 현상에서 흔적 C: 1970년 4월 11일 한강 둔치에서 진행된 퍼포먼스. 잔디밭 둔치에 총 100m에 걸쳐 다섯 개의 삼각형을 그린 후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6] 몇 달 후, 둔치의 풀은 다시 자라나 작품의 모든 흔적을 지웠다. 이 작품은 한국 최초의 대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예술을 공공과 자연 모두에 속하는 공간에 삽입하고, 환경이 창작 행위에 참여하도록 했다.[1] 비평가 오광수는 이 작품이 작품의 구상부터 파괴에 이르기까지 시간성이 어떻게 예술 작품 내에 내재되고 실현되는지에 대한 김구림의 관심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1]
3. 3. 일본에서의 작품 (1973~1975)
제4집단이 정부의 조사로 인해 해체된 후, 김구림은 일본 미술계로 떠났다.[2] 그곳에서 김구림은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의 교차점, 그리고 일상적인 물건을 조각으로 만드는 가능성 등을 탐구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비디오 작품 《걸레질》(1974)은 비디오 편집을 통해 광범위한 과정을 단 몇 분으로 압축했다.[2] 《걸레질》은 한 사람이 걸레로 더러워진 탁자를 끊임없이 닦는 모습을 보여주며, 걸레 자체가 완전히 더러워지고 낡아 해지며, 마침내 탁자 위에서 부서져 다시 탁자를 더럽게 만든다. 김구림은 몇몇 작품에서 일상적인 물건을 실용적인 가치를 벗어난 방식으로 사용했다.[1] 그는 이러한 물건들을 전시 공간에 설치하는 간단한 행동으로 시작하여, 전시 공간을 재맥락화함으로써 평범한 것을 예술로 바꾸는 뒤샹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김구림은 한 일본 미술 평론가가 100년 후 이 예술 작품들이 일상적인 물건과 어떻게 다를지에 대해 질문한 후 이 방식을 다시 생각했다.[1] 이 질문에 대해 3개월 동안 숙고한 후, 김구림은 물건을 더욱 명백하게 변형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결정했다.[1] 그 후 그는 물건을 변형하기 시작했다. 그는 식탁보에 얼룩진 부분을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하고, 삽날을 조각내고, 찻잔 자체에 찻잔의 형태를 그렸다.3. 4. '음과 양' 연작 (1980년대 후반~현재)
1984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 김구림은 아트 학생 연맹(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판화를 공부하면서 2차원적인 예술 매체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5] 이 시기에 시작된 그의 ''음과 양'' 연작(1980년대 후반 시작)은 동양 사상의 음양 개념을 차용하여 이중성을 강조하며, 회화, 판화, 콜라주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현되었다.[1] 오광수는 이 연작에 대해, 현실을 그대로 포착하기보다는 예술적 과정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미완성과 삭제 사이를 오가는 듯 불완전하게 묘사된 평범한 사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고 설명했다.[1]4. 수상 내역
연도 | 상 이름 |
---|---|
2006년 | 이인성 미술상 |
2017년 | 은관문화훈장 |
5. 기타 경력
- 한국아방가르드협회 회원
- 한국미술협회 회원, 감사
- 서울현대미술제 운영위원회 위원
-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회 위원
참조
[1]
서적
Kim Ku-lim
Modern Museum of Art
[2]
서적
Renegades in Resistance and Challenge: 50-Year History of Performance Art in Korea, 1967–2017
Daegu Art Museum
[3]
웹사이트
Why Performance in Authoritarian Korea? – Tate Papers
https://www.tate.org[...]
2022-06-27
[4]
서적
Kim Ku-lim
AMart Publications
[5]
서적
Passages of Korean Media Art (한국 미디어아트의 흐름: 미디어 아티스트 37팀 의 인터뷰)
Buk Koria
[6]
서적
Kim Ku-lim: Like You Know It All
Seoul Museum of Art
[7]
웹사이트
MMCA Artist Talk: Kim Kulim
https://www.youtube.[...]
2020-12-24
[8]
간행물
Pivotal Moments in Korean Video Art
https://www.theartro[...]
2020-02
[9]
서적
Traces of Existence
The Korean Arts & Culture Foundation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