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성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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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금성은 1927년 충청북도 충주 출생으로, 청주농업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한 대한민국 공군의 군인이다. 6.25 전쟁에 참전하여 193회 출격, 주요 작전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제10전투비행전대장을 역임하며 공군력 증강에 기여했다. 1961년 비행사고로 순직했으며,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태극무공훈장 등을 수여하고, 2019년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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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성 (192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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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일 | 1927년 11월 27일 |
출생지 |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
사망일 | 1961년 9월 11일 |
국적 | 대한민국 |
성별 | 남자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
군사 정보 | |
복무 | 대한민국 공군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공군 준장 |
임관 | 1950년 10월 15일 |
참전 | 6·25전쟁 |
훈장 | |
서훈 내역 | 이달의 호국영웅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수훈 비행 십자장 |
2. 생애
김금성은 1927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청주농업중학교 임업과를 2년간 수료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15일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1] 임관 후 제1전투비행단 정찰대에서 L형 연락기로 적정 정찰, 연락, 전단 살포 등의 비행임무를 수행했으며, 1951년에는 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였다.[1]
이후 1952년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과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1953년 3월 351고지 탈환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작전 등 한국 공군의 우수성을 알린 주요 작전들에 참가하였다.[1] 특히 전쟁 기간 중 전투비행대대장, 작전과장 등을 역임하며 비행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 전투 조종사로서는 두 번째로 많은 193회를 출격하였고, 작전 중 여덟 번이나 적의 대공포화에 전투기가 피탄되었으나 투철한 책임감과 우수한 조종 기량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하여 모든 출격 조종사의 표상이 되었다.[1]
6.25 전쟁 후에는 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근무하며 공군의 전력증강 및 발전에 기여하였다.[1] 1961년 9월 공군 제10전투비행단장으로 재직 중 불의의 비행사고로 순직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
정부는 김금성의 공적을 인정하여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였고, 미국 수훈비행십자훈장, 미국비행훈장 등도 수여하였다.[1] 2005년 4월 인천보훈지청에서 이달의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 2019년 11월 국가보훈처는 김금성을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김금성은 1927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청주농업중학교 임업과를 2년간 수료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비행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15일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1]2. 2. 6.25 전쟁 참전
김금성은 1950년 10월 15일 공군 소위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1] 임관 후 제1전투비행단 정찰대에서 L형 연락기로 적정 정찰, 연락, 전단 살포 등의 비행임무를 수행하였고, 1951년에는 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였다.[1]1952년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과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1953년 3월 351고지 탈환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작전 등 한국 공군의 우수성을 알린 주요 작전들에 참가하였다.[1] 특히 전쟁 기간 중 전투비행대대장, 작전과장 등을 역임하며 비행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 전투 조종사로서는 두 번째로 많은 193회를 출격하였다.[1] 작전 중 여덟 번이나 적의 대공포화에 전투기가 피탄되었으나, 투철한 책임감과 우수한 조종 기량을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모든 출격 조종사의 표상이 되었다.[1]
2. 3. 전후 활동과 순직
6.25 전쟁 후 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근무하며 공군의 전력증강 및 발전에 기여하였다.[1] 공군 제10전투비행단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1년 9월 불의의 비행사고로 순직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정부는 김금성의 수많은 공적을 인정하여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1] 이외에도 미국 수훈비행십자훈장, 미국비행훈장 등을 수상하였고, 2005년 4월 인천보훈지청에서 이달의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다.[1] 국가보훈처에서는 2019년 11월 김금성을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1]
3. 주요 참전 전투
김금성 장군은 한국 전쟁 당시 다음과 같은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1952년 1월, 김신 대령의 지휘 아래 평양 인근 승호리 철교를 폭파하는 작전에 참가했다. 김금성 준장은 F-51 전폭기 편대의 3호기에 탑승하여, 적의 대공포화 진지를 공격하고 철교에 폭탄을 투하했다.[2]
-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1952년 3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 이어 북한의 주요 산업 시설인 송림제철소를 폭격하는 작전에 편대장으로 참가하여, 적의 군수시설과 제철소를 공격했다.
- 351고지 탈환작전: 1953년 3월, 351고지 탈환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작전에 참여했다.[3] 김금성은 F-51 전투기를 조종하며 적의 벙커와 야포 진지를 공격했다.
3. 1.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승호리 철교폭파작전은 3차에 걸쳐 평양 인근 승호리에 위치한 교량을 폭파하는 작전이었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km 지점에 위치하여, 만주와 평양을 거쳐 중동부전선으로 막대한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북한군의 후방보급로 요충지였다. 미 제5공군은 북한 후방보급로 차단을 위해 승호리 철교에 36회에 걸쳐 포격작전을 추진했으나 실패했고, 이 작전을 한국 공군에 인계했다. 당시 한국 공군은 F-51 전폭기 10대를 미국에서 지원받아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김신 대령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서 이 철교를 반드시 차단해야 한다고 조종사들에게 강조하며 김두만 소령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1952년 1월 12일 오전 7시 40분, 김두만 소령을 편대장으로 한 F-51 전폭기 5대가 첫 출격했고, 3호기에는 김금성 준장이 탑승했다. 편대원들은 평양 동남쪽 상공에서 적 대공포화 진지에 로켓과 기관총을 집중하여 폭파시킨 후, 승호리 철교에 10개의 폭탄을 투하하는 등 수차례 공격을 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2] 같은 날 오후 윤응렬 대위가 이끄는 3대가 출격했으나, 두 번의 출격 모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작전 책임자였던 김신 대령은 미 공군 전술교리에 따른 고공투하가 실패 원인이라고 결론짓고, 약 1219.20m 고도에서 강하하여 약 457.20m에서 공격하는 초저공침투공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조종사들에게 매우 위험한 방법이었다. 1월 15일, 이 방법으로 2개 편대 6대의 전폭기가 출격하여 철교 중앙 경간 2개를 폭파하며 작전에 성공했다. 미 공군이 실패한 작전을 한국 공군이 성공시키면서 유엔군은 한국 조종사들의 전투기량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한국 공군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승호리 철교폭파작전을 담은 영화 빨간 마후라가 1964년 개봉되었다.
3. 2.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송림제철소 폭격작전은 승호리 철교폭파작전 두 달 뒤인 1952년 3월부터 4월까지 공군이 수행한 북한 공업 도시 송림시 폭격 작전이었다. 송림시는 대동강 어귀에서 약 50km 올라가 황주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경의선 황주역에서 13km에 이르는 지선이 설치되어 있었고 대동강 수로를 이용해 5000ton급 선박의 정박도 가능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다.UN의 공군은 북한의 전쟁 잠재력을 조기에 제거하기 위해 전쟁 초기 1950년 7월 초 흥남, 원산, 평양, 나진 등 북한의 산업중심지를 파괴했으며 이후 중소도시의 산업시설에 대한 폭격도 계속 이어갔다. 미 5공군은 이러한 산업시설 폭격작전의 하나로 대한민국 공군에 북한의 공업도시인 송림시를 폭격하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이에 따라 강릉기지의 제10전투비행전대에서는 1952년 3월 28일 오전 옥만혹, 김금성 대위를 편대장으로 한 2개 편대의 8대 F-51 전투기를 출격시켰고, 송림의 공장지대 상공에서 적의 군수시설인 조차장과 유류 및 탄약저장소를 폭격한 후 귀환하였다. 오후에 이기협, 나창준 대위를 편대장으로 하는 8대의 전투기가 같은 지역으로 출격하여 송림제철소를 폭격하였다. F-51 전투기에 약 226.80kg의 폭탄 2발과 로켓탄 4발을 각각 장착하여 용광로 2개소, 건물 4개동, 인근 철도 1개소를 파괴하였다.
나흘간 총 61회 출격하며 송림지역의 공장지대와 제철소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 작전으로 광로, 부속건물, 군수공장, 유류집적소와 송림시 공장지역으로 연결되는 주변의 철도와 철교 등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3. 3. 351고지 탈환작전
1953년 3월, 김금성은 351고지 탈환을 위한 근접항공지원작전을 수행하였다.[3] 휴전협정이 시작되기 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국군과 북한군은 351고지를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1952년 10월 28일, 육군 제1군단 예하 제5사단이 방어하던 351고지와 339고지에 북한군 제7사단이 공격해왔다. 이에 강릉기지의 제10전투비행단에서 F-51 전투기 4대가 출격하여 적의 벙커를 공격하였다. 이후 국군과 북한군은 351고지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전투를 계속했고, 결국 고지는 북한군에게 넘어갔다.
휴전 협정 체결 직전, 국군은 351고지 탈환을 위해 총 60대(15개 편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적의 벙커와 야포진지 등을 공격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는 계속되었지만, 351고지를 탈환하지 못한 채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비록 351고지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이 작전으로 속초, 양양, 금강산 이남의 고성을 지킬 수 있었다.
4. 전공과 훈장
김금성 장군은 6.25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1] 미국 정부로부터는 수훈비행십자훈장, 비행훈장 등을 받았다.[1]
2005년 4월 인천보훈지청에서 이달의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었고, 2019년 11월 국가보훈처에서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1]
5. 평가와 유산
김금성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5. 1. 대한민국 공군 내 평가
김금성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6.25 전쟁 당시 F-51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며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등 주요 작전에 참여하여 한국 공군의 우수성을 알렸다.[1] 한국 전투 조종사로서는 두 번째로 많은 193회 출격 기록을 세웠으며, 여덟 번이나 적의 대공포화에 피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조종 기량으로 위기를 극복하여 모든 출격 조종사의 귀감이 되었다.[1]전쟁 이후에는 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제10전투비행전대장 등을 역임하며 공군 전력 증강 및 발전에 기여하였다.[1]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미국 수훈비행십자훈장, 미국비행훈장 등도 수상하였다.[1] 국가보훈처는 2019년 11월 김금성 장군을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1]
참조
[1]
웹인용
김금성(金錦成)
http://people.aks.ac[...]
[2]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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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band.[...]
뉴스밴드
201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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