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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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성한은 1958년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KBO 리그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활동한 야구인이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14시즌 동안 선수로 활약하며 KBO 리그 최초의 다회 MVP 수상자, 최초 30홈런 기록, KBO 리그 최초 20-20 클럽 가입 등 굵직한 기록을 세웠다. 1995년 은퇴 후 해태 타이거즈 코치를 거쳐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태 및 KIA 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했으며,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벤치 코치를 맡았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지냈으며, KBS-2TV 천하무적 야구단 등 방송 활동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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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195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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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김성한 |
한자 이름 | 金城漢 |
로마자 표기 | Gim Seonghan |
출생일 | 1958년 5월 18일 |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
신체 | 키: 178cm 몸무게: 85kg |
타격 | 우타 |
투구 | 우투 |
포지션 | 내야수, 투수 |
선수 경력 | |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
드래프트 | 1982년 선수 2차 드래프트 2위 |
첫 출장 | KBO / 1982년 3월 28일 구덕 대 롯데전 |
마지막 경기 | KBO / 1995년 9월 24일 광주 대 OB전 |
소속 팀 | 해태 타이거즈 (1982년 ~ 1995년) |
수상 | |
MVP | 정규 시즌 MVP 2회 (1985, 1988) |
골든 글러브 | 골든 글러브 6회 수상 (1루수, 1985, 1986, 1987, 1988, 1989, 1991) |
베스트 10 | 베스트 10 (1루수, 1983) |
지도자 경력 | |
코치 | 해태 타이거즈 수석코치 (1997년 ~ 2000년) 2009 WBC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9년)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2013년 ~ 2014년) |
감독 |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감독 (2001년 ~ 2004년) 군산상업고등학교 감독 (2004년 ~ 2005년) |
통계 | |
타율 | .286 |
안타 | 1,389 |
홈런 | 207 |
타점 | 781 |
승패 | 15승 10패 |
평균 자책점 | 3.02 |
탈삼진 | 69 |
기타 | |
우승 | 한국시리즈 7회 우승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
MVP 수상 | KBO 리그 MVP 2회 (1985, 1988) |
홈런왕 | KBO 홈런 타이틀 3회 (1985, 1988, 1989) |
2. 선수 경력
김성한은 전라북도 군산시 출신으로, 군산상업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를 졸업했다. 선수 경력 대부분을 내야수로 활동했지만, 초창기에는 투수로도 활약했다.
1982년 KBO 리그 출범 첫 해이자 데뷔 시즌에 투수로 10승 5패, 평균자책점 2.79를 기록했고, 타자로는 타율 0.305, 13홈런, 69타점으로 타점 1위를 기록하며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1985년에는 타율 0.333, 22홈런(리그 1위), 75타점(리그 2위)을 기록하며 생애 첫 MVP를 수상했다. 1988년에는 타율 0.333(리그 3위), 30홈런(리그 1위), 89타점으로 두 번째 MVP를 수상하며 해태 타이거즈를 KBO 리그 4번째 챔피언십으로 이끌었다. 특히 30홈런은 당시 KBO 리그 최초의 기록이었다. 1989년에는 26홈런으로 세 번째 홈런 타이틀을 획득했고, 93득점과 84볼넷으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김성한은 KBO 리그 역사상 MVP를 2번 이상 수상한 5명 중 한 명이다. 은퇴 당시 안타 (1389), 루타 (2285), 득점 (762), 2루타 (247) 부문에서 KBO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기록들은 모두 장종훈에 의해 깨졌다.
2. 1.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2-1995)
1982년 KBO 창설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14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1982년 시즌은 KBO 창설의 해였고, 각 팀 모두 전력 부족이라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태 역시 14명의 작은 선수단으로 시작했기에, 김성한은 3번 타자로서 팀을 이끌었다. 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경험하며, 타율.305, 홈런 13개를 기록했다. 한편 투수로서도 26경기에 등판하여 10승 5패, 평균자책점 2.88을 기록하며, '''10승 10홈런[1] 3할 타자 10도루에 타점왕[2]'''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다음 해인 1983년에는 팀의 전기 리그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6년까지 투수와 야수를 겸업하며, 투수로서 통산 15승 10패, 평균자책점 3.02를 기록했다. 1987년부터 타격에 전념하며 팀의 주포로 활약했다. 1986년~1989년의 4연패를 포함해 팀의 7번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88년에는 KBO 최초로 30홈런을 기록하며 두 번째 홈런왕에 올랐다. 발도 빨라 1989년에는 20홈런 20도루를 달성하기도 했다.
올스타전에는 12번 출전했다. 1992년에는 미스터 올스타(올스타 MVP)로 선정되었다.
에 개최된 제1회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에도 KBO 선발로 출전해 3개의 홈런을 쳤다. 제1전에서 이라부 히데키(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홈런을 쳐, 도쿄 돔에서 홈런을 기록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 당시 사용했던 배트는 야구전당박물관(도쿄 돔)에 전시되어 있다.
1995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MVP 2회(1985, 1988), 홈런왕 3회(1985, 1988, 1989), 타점왕 2회(1982, 1988), 골든글러브상 6회(1루수, 1985, 1986, 1987, 1988, 1989, 1991) 등 화려한 성적을 남겼으며, 공수주 삼박자를 갖춘 선수로서 해태의 대표적인 인기 선수였다.
2. 2. 국가대표 경력
에 개최된 제1회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에 KBO 선발로 출전해 3개의 홈런을 쳤다. 제1전에서 이라부 히데키(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홈런을 쳐, 도쿄 돔에서 홈런을 기록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 당시 사용했던 배트는 야구전당박물관(도쿄 돔)에 전시되어 있다.[1]3. 지도자 경력
1995년 선수 은퇴 후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해태 타이거즈 코치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와 KIA 타이거즈 감독을 맡아 4년 동안 세 번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는 모교인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고, 2007년 MBC ESPN의 야구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우자동차의 티코 CM에 출연하기도 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벤치 코치를 맡아 준우승에 기여했다.
3. 1.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감독 (2001-2004)
1996년 해태 타이거즈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해 선동열과 함께 일본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3] 2001년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1년 8월부터 팀명이 KIA 타이거즈로 변경되었다.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2002년-2004년) 팀을 세 차례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으나(2002년, 2003년, 2004년), 한국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다.[3] 2002년과 2003년 시즌에는 2위를 기록했지만, 두 해 모두 플레이오프에서 패했다.[3] 2004년 시즌 중 성적 부진으로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3]3. 2.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2013-2014)
김성한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한화 이글스의 수석 코치를 역임했다.[3]3. 3. 기타 경력
2004년부터 2005년까지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역임했다.[3] 2006년에는 KBO 경기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고, 2007년에는 MBC ESPN 야구 해설 위원을 맡았다. 2012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야구박람회 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아 준우승에 기여했다.[3]4. 주요 기록 및 수상
김성한은 KBO 리그 통산 7번의 한국시리즈 우승(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을 경험했다. 정규시즌 MVP 2회(1985, 1988), 미스터 올스타(1992)에 선정되었고, 선발 올스타 출전 10회를 기록했다. 또한, 골든 글러브를 6회 수상(1루수 부문: 1985, 1986, 1987, 1988, 1989, 1991)했다.
기록 | 날짜 | 소속 | 구장 | 상대팀 | 상대 투수 | 경기수 | 달성 당시 나이 | 기타 | 각주 |
---|---|---|---|---|---|---|---|---|---|
150경기 출장 | 1983. 8. 10 | 해태 | 사직 | 롯데 | [8] | ||||
500득점 | 1990. 6. 5 | 해태 | 청주 | LG | 798 | 32세 17일 | [9][10] | ||
600타점 | 1991. 5. 23 | 해태 | 대전 | 빙그레 | 두 번째 | ||||
600득점 | 1991. 7. 14 | 해태 | 대구 | 삼성 | 947 | 33세 1개월 26일 | [9] | ||
2000루타 | 1992. 8. 20 | 해태 | 광주 | 롯데 | 1087 | 34세 3개월 2일 | [9] | ||
700득점 | 1993. 5. 26 | 해태 | 광주 | 롯데 | 1140 | 35세 8일 | DH1[11] |
김성한은 1982년 유일무이한 10승(3선발승)-10홈런, 타점왕을 기록했다.[1][2] 1988년에는 KBO 최초로 30홈런을 돌파했으며, 1989년에는 KBO 최초로 20-20 클럽(26홈런 32도루)에 가입했다.
4. 1. 선수 시절
김성한은 선수 경력 대부분을 내야수로 활동했으며, 초창기 몇 년 동안은 투수로도 활약했다. 투수로서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한 해는 1982년으로, KBO 리그 출범 첫 해이자 그의 데뷔 시즌이었다. 이 해에 10승 5패, 평균자책점 2.79를 기록했다. 타자로서 그는 타율 0.305, 13홈런, 69타점으로 타점 1위를 기록했다.[2]1985년 김성한은 생애 첫 MVP를 수상하며, 타율 0.333, 리그 1위인 22홈런, 75타점으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그해 그는 또한 133개의 안타와 29개의 2루타로 KBO 리그를 이끌었다.
1988년 김성한은 두 번째 MVP를 수상하며, 타율 0.333(리그 3위), 리그 1위인 30홈런, 89타점을 기록하고 타이거즈를 KBO 리그 4번째 챔피언십으로 이끌었다. 그의 30홈런은 당시 KBO 리그에서 30홈런 고지에 도달한 최초의 기록이었다.
1989년 김성한은 26홈런으로 세 번째 홈런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93득점과 84볼넷으로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김성한은 KBO 최초의 다회 MVP 수상자이며, KBO 리그 역사상 MVP를 2번 이상 수상한 5명 중 한 명이다.
전라북도 군산시 출신으로, 군산상업고등학교, 동국대학교를 거쳐 1982년 KBO 창설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14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했다. MVP 2회(1985, 1988), 홈런왕 3회(1985, 1988, 1989), 타점왕 2회(1982, 1988), 골든글러브상 6회(1루수, 1985, 1986, 1987, 1988, 1989, 1991) 등 화려한 성적을 남겼으며, 공수주 삼박자를 갖춘 선수로서 해태의 대표적인 인기 선수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1982년 시즌이다. 이 해는 KBO 창설의 해였고, 각 팀 모두 전력 부족이라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태 역시 14명의 작은 선수단으로 시작했기에, 김성한은 3번 타자로서 팀을 이끌었다. 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경험하며, 타율.305, 홈런 13개를 기록했다. 한편 투수로서도 26경기에 등판하여 10승 5패, 평균자책점 2.88을 기록하며, '''10승 10홈런[1] 3할 타자 10도루에 타점왕[2]'''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다음 해인 1983년에는 팀의 전기 리그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86년까지 투수와 야수를 겸업하며, 투수로서 통산 15승 10패, 평균자책점 3.02를 기록했다. 1987년부터 타격에 전념하며 팀의 주포로 활약했다. 1986년~89년의 4연패를 포함해 팀의 7번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88년에는 KBO 최초로 30홈런을 기록하며 두 번째 홈런왕에 올랐다. 발도 빨라 1989년에는 20홈런 20도루를 달성하기도 했다.
올스타전에는 12번 출전했다. 1992년에는 미스터 올스타(올스타 MVP)로 선정되었다.
국제 경기에서는 1991년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에 KBO 선발로 출전해 3개의 홈런을 쳤다. 제1전에서 이라부 히데키(롯데 오리온즈)를 상대로 홈런을 쳐, 도쿄 돔에서 홈런을 기록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 당시 사용했던 배트는 야구전당박물관(도쿄 돔)에 전시되어 있다.
1995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당시 안타 (1389), 루타 (2285), 득점 (762), 2루타 (247) 부문에서 KBO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장종훈(빙그레(후 한화))에 의해 깨졌다.
종류 | 횟수 | 연도 |
---|---|---|
MVP | 2회 | 1985, 1988 |
미스터 올스타(올스타 MVP) | 1회 | 1992 |
최다 홈런 | 3회 | 1985, 1988, 1989 |
최다 타점 | 2회 | 1982, 1988 |
골든 글러브 | 6회 | 1루수 (1985, 1986, 1987, 1988, 1989, 1991) |
연 도 | 소 속 | 나 이 | 출 장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타 점 | 도 루 | 도 실 | 볼 넷 | 삼 진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루 타 | 병 살 타 | 몸 맞 | 희 타 | 희 플 | 고 4 |
---|---|---|---|---|---|---|---|---|---|---|---|---|---|---|---|---|---|---|---|---|---|---|---|---|---|
1982 | 해태 | 24 | 80 | 340 | 318 | 48 | 97 | 17 | 4 | 13 | 69 | 10 | 5 | 9 | 55 | .305 | .340 | .506 | .847 | 161 | 7 | 8 | 0 | 5 | 0 |
1983 | 25 | 96 | 382 | 339 | 59 | 111 | 20 | 0 | 7 | 40 | 13 | 7 | 38 | 38 | .327 | .402 | .448 | .850 | 152 | 7 | 4 | 0 | 1 | 2 | |
1984 | 26 | 98 | 410 | 365 | 48 | 94 | 16 | 2 | 12 | 41 | 7 | 5 | 39 | 59 | .258 | .336 | .411 | .747 | 150 | 6 | 4 | 0 | 2 | 2 | |
1985 | 27 | 105 | 455 | 400 | 66 | 133 | 29 | 1 | 22 | 75 | 8 | 5 | 42 | 37 | .333 | .400 | .575 | .975 | 230 | 6 | 3 | 4 | 6 | 2 | |
1986 | 28 | 104 | 449 | 404 | 64 | 113 | 16 | 0 | 18 | 57 | 10 | 10 | 32 | 45 | .280 | .340 | .453 | .793 | 183 | 8 | 6 | 5 | 2 | 1 | |
1987 | 29 | 81 | 342 | 306 | 43 | 96 | 22 | 0 | 15 | 46 | 3 | 1 | 30 | 29 | .314 | .378 | .533 | .911 | 163 | 5 | 3 | 1 | 2 | 5 | |
1988 | 30 | 104 | 457 | 404 | 72 | 131 | 12 | 0 | 30 | 89 | 16 | 5 | 31 | 52 | .324 | .382 | .577 | .959 | 233 | 4 | 11 | 4 | 7 | 3 | |
1989 | 31 | 118 | 513 | 414 | 93 | 116 | 18 | 0 | 26 | 84 | 32 | 8 | 84 | 62 | .280 | .407 | .512 | .920 | 212 | 7 | 9 | 0 | 6 | 11 | |
1990 | 32 | 89 | 385 | 331 | 61 | 93 | 17 | 2 | 11 | 49 | 14 | 4 | 39 | 53 | .281 | .361 | .444 | .805 | 147 | 4 | 6 | 3 | 6 | 0 | |
1991 | 33 | 112 | 482 | 411 | 69 | 121 | 25 | 5 | 23 | 83 | 16 | 9 | 51 | 70 | .294 | .388 | .547 | .935 | 225 | 7 | 15 | 0 | 5 | 2 | |
1992 | 34 | 117 | 458 | 410 | 62 | 107 | 18 | 0 | 15 | 59 | 6 | 2 | 37 | 59 | .261 | .331 | .415 | .746 | 170 | 9 | 7 | 2 | 2 | 1 | |
1993 | 35 | 107 | 403 | 362 | 45 | 99 | 23 | 0 | 6 | 52 | 4 | 2 | 27 | 59 | .273 | .331 | .387 | .718 | 140 | 12 | 6 | 4 | 4 | 0 | |
1994 | 36 | 45 | 171 | 157 | 17 | 37 | 10 | 0 | 1 | 14 | 4 | 3 | 9 | 31 | .236 | .288 | .318 | .607 | 50 | 0 | 3 | 1 | 1 | 0 | |
1995 | 37 | 82 | 255 | 229 | 15 | 41 | 4 | 0 | 8 | 23 | 0 | 1 | 15 | 47 | .179 | .236 | .301 | .537 | 69 | 9 | 3 | 5 | 3 | 2 | |
KBO 통산 : 14년 | 1338 | 5502 | 4850 | 762 | 1389 | 247 | 14 | 207 | 781 | 143 | 67 | 483 | 696 | .286 | .358 | .471 | .829 | 2285 | 91 | 88 | 29 | 52 | 31 |
4. 2. 지도자 시절
김성한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해태 타이거즈 코치를 역임했다.[3] 1996년에는 선동열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으며, 당시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의 지도를 받았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해태 타이거즈(2001년 8월부터 KIA 타이거즈) 감독을 맡아 팀을 4년 중 3번이나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지만, 우승에는 실패했다. (최고 성적은 2002년과 2003년 시즌 2위)[3] 2002년 말에는 2군 포수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3] 2004년 시즌 중 성적 부진으로 KIA 타이거즈 감독에서 해임된 후, 2004년 8월부터 2005년까지 모교인 군산상업고등학교 감독을 맡았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를 맡아 준우승에 기여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역임했다.5. 등번호
기간 | 소속팀 | 등번호 |
---|---|---|
1982년 - 1995년 | 해태 타이거즈 | 11 |
1996년 - 2000년 | 해태 타이거즈 (코치) | 79 |
2001년 - 2004년 |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감독) | 90 |
2013년 - 2014년 | 한화 이글스 (코치) | 71 |
6. 방송 및 기타 활동
김성한은 KBS-2TV '천하무적 야구단' 기술고문 및 해설위원, 온게임넷 G마켓 마구마구 프로리그 해설위원, KNN '섬마을 할매' MC 등 다양한 방송 활동을 했다. 한국GM 티코 광고에도 출연했다.
6. 1. 방송 출연
6. 2. 광고 출연
한국GM 티코7. 출신 학교
참조
[1]
문서
KBO 唯一の記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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打点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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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기아·김성한 감독, 선수 폭행의 파문 확산
http://japanese.dong[...]
동아일보
2002-09-26
[4]
뉴스
김성한 감독 폭행 파문 일단락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5]
뉴스인용
올 MVP 김성한…두번째 영광 프로야구 사상 최다득표 MBC 이용철 신인왕 차지
https://newslibrary.[...]
한겨레신문
1988-10-15
[6]
뉴스인용
金城漢(김성한) 팔목골절 8週(주)부상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88-09-08
[7]
뉴스인용
해태 短期戰(단기전)선"天下無敵(천하무적)"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
1988-10-27
[8]
뉴스
'이선희 비운 언제까지'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3-08-11
[9]
서적
2010 Korean Baseball Record Book
(사)한국야구위원회
2010
[10]
뉴스
'투고타저 갈수록 뚜렷'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90-06-06
[11]
뉴스
'삼성 통산 첫 700승 금자탑..해태 김성한 700득점 기록'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9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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