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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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용건은 대한제국 시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으며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해방 후 북한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초대 민족보위상,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일성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휴전 후에는 당과 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아 외교 활동에도 힘썼다. 1976년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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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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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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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최용건 |
한자 표기 | 崔庸健 |
로마자 표기 | Choe Yonggeon |
출생 | |
출생일 | 1900년 6월 21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평안북도 태천군 |
사망 | |
사망일 | 1976년 9월 19일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
정치 | |
정당 | 조선공산당 → 조선사회민주당 → 조선로동당 |
경력 | |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 1957년 9월 20일 ~ 1972년 12월 28일 |
민족보위상 | 1948년 9월 2일 ~ 1957년 9월 20일 |
국가부주석 | 1972년 12월 28일 ~ 1976년 9월 19일 |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 1948년 2월 8일 ~ 1950년 7월 4일 |
군사 | |
소속 | 조선인민군 |
복무 기간 | 1927년 ~ 1976년 |
최종 계급 | 차수 |
참전 | 중국 내전 한국 독립운동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훈장 | |
수상 | 노력영웅 폴란드 복흥 훈장 |
2. 생애
최용건은 1900년 평안북도 염주군의 농가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난카이 대학과 윈난 육군강무당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 국민혁명군에 참가했으며, 1925년에는 황포군관학교 훈련대장이 되었다. 1926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북벌에 참가했고, 1927년 광저우 봉기에도 참여했다.
1928년 만주로 파견된 후에는 '최석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조선 공산당에 입당, '김지강'이라는 이름으로 화요파 만주총국 군사부장을 맡았다. 1930년부터는 야오허 현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 동북 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 항일연군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소련으로 탈출하여 김일성 등과 합류, 제88독립여단 부참모장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여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 조만식과 함께 당을 이끌었으나 신탁통치 문제로 결별하고 당권을 장악했다. 1946년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보안국장에 취임하여 군사 부문을 지도했고, 조선민주당 위원장으로서 친공산주의 노선으로 당을 이끌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초대 민족보위상(국방부 장관)이 되었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에는 군사위원회 위원, 조선인민군 부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도했다. 1953년 차수 칭호를 받았고, 1955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국가원수 직책을 맡았으나, 실권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총리인 김일성에게 있었다. 197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 공포 후 김일성이 국가 주석에 취임하자, 최용건은 국가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김일성 정권의 2인자였으며,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독살설도 제기되고 있다.
2. 1. 생애 초기
최용건은 1900년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9]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카이 대학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다.[9] 1922년에는 윈난 육군강무당으로 옮겨 졸업 후 국민혁명군에 참여했다.[9] 1925년 최추해라는 이름으로 황포군관학교 훈련대장이 되었고,[9] 1926년 3월 제5기 구대장이 되었다.[9] 같은 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북벌에 참가했으며, 1927년 특무영 제2연대 연대장으로서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9]2. 1. 1. 가계와 유년
최용건은 1900년 6월 21일 대한제국 평안북도 태천군 서성면에서 성리학자인 최니학의 아들로 태어나 태천소학교를 다녔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룡천군에서 살았다 한다. 선친 최니학은 1942년 김두운(아호는 충제), 문창수(아호는 강제), 김형로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습격을 모의했다가 검거되어 구치소에 투옥된 뒤, 1943년 총살형(사형)이 집행되었다.[19] 동생인 최형건은 을유년 해방 후 조선로동당의 초급당 비서(조선로동당 당무위원 겸무)와 평양 기업소 국제책무위원장 겸 당무비서 등을 역임했다. 이외 몇몇 형제가 있었지만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19]최용건은 유년 시절 고향에서 결혼한 본처가 있었지만, 슬하에 자녀 없이 이혼하였다. 이후 최용건이 중화민국 본토 국민정부 대륙으로 간 뒤에도 연락이 끊어졌다. 그는 두 곳의 군사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2. 1. 2. 오산학교 수학과 망명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8년 당시 교장으로 교사를 겸하던 조만식 외에 설립자 이승훈, 폐허지의 동인이며 상징파 시인인 김억 등도 교사였고, 동급생으로는 함석헌 등이 있었으며, 2년 선배로 훗날 대한민국의 반공주의 목사가 된 한경직 등이 재학 중이었다.[20]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투옥, 그해 말 풀려났다. 그 후에도 몇 차례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가 학교 측과 갈등하게 된다. 3학년 재학 중이던 1921년 4월, 8월에 미국인 선교사가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었다. 최용건은 미국인 선교사의 교장 취임 반대 운동을 주도했고, 이는 동맹휴학으로 발전했다. 이 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그 무렵 조만식이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임용 거부로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고, 9월 유영모가 교장으로 부임하고 사태는 종결되었다.[20]상하이 임시정부와 인맥이 닿았던 그는 몇 명의 청년들과 함께 1921년 4월 상하이에 도착했지만, 상하이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하여 임정에서 탈퇴하고 예관 신규식을 찾아갔다. 그는 군관학교 입학을 희망하여, 신규식이 운남육군강무당에 추천장을 써주었고, 최용건의 오산중학교 3년 선배이자 장개석의 국민당 혁명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김홍일 역시 추천장을 써주었다.[21] 1921년 8월 다시 돌아와 오산학교에 다녔다.[21] 최용건이 언제 오산학교를 그만두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22] 다만 함석헌의 회고록에 따르면, 함석헌이 1921년 오산학교에 편입학했을 당시 최용건은 오산학교에 아직 다니는 중이었다고 한다.[22]
2. 2. 청년기
崔庸健|최용건중국어은 1900년 대한제국 평안북도 염주군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난카이 대학에서 수학했다는 설이 있으나 불분명하다. 1922년 윈난 육군강무당으로 전입했다.졸업 후 국민혁명군에 참가했다. 1925년 최추해라는 이름으로 황포군관학교 훈련대장이 되었다. 1926년 3월에는 제5기 구대장이 되었고,[9] 같은 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북벌에 참가했다. 1927년 특무영 제2연대 연대장으로서 광저우 봉기에 참가했다.
1928년 만주로 파견되어 '''최석천'''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중국 공산당원 신분으로 조선 공산당에 입당, '''김지강'''이라는 이름으로 화요파 만주총국 군사부장을 맡았다. 1930년부터 야오허 현에서 조직 건설과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동북 인민혁명군 4군 4단 참모장이 되었다. 1936년 항일 유격대인 동북항일연군이 조직되자 4군 2사 참모장이 되었고, 이어서 7군 참모장, 7군 대군장, 제2로군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항일연군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소련 영토로 탈출, 김일성 등과 합류했다. 1942년 제88독립여단 부참모장(대위)을 지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귀국했다.
2. 2. 1. 운남군관학교 수학과 황포군관학교 활동
1923년 3월, 쿤밍의 운남군관학교(보병학과)에 17기로 입학하였다.[23] 당시 최용건은 푸젠성(福建省) 출신 근수길(根秀吉)이라는 가명으로 입교하였다.[24] 그는 좌익계 한국인 사회주의자 중 연장자에 속하였다.[25]1923년 10월 31일 일본 영사관에 폭탄 테러가 발생, 혐의자로 지목되었으나 혐의없음으로 풀려났다.[26]
운남군관학교 재학 당시 그는 '''최추해'''라는 가명을 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에서 활동하는 이범석 및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의 총사령이 될 저우바오중과 동창이었다. 운남강무당 재학 중 최용건은 저우언라이, 저우바오중 등과 친하게 지냈다. 1924년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의 견습교관이 되었다.
1924년 중국 윈난군관학교(雲南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5년 4월, 황푸군관학교 교육대에 교관으로 임관되어 4기, 5기의 훈련 교관, 5기에는 학생대 6구대장이 되어 1927년까지 초급 군사학 과목을 가르치면서 내무활동 지도 등 군사 부문에서 경력을 쌓았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에는 장제스가 주도하는 중국 국민당원들과 손을 잡은 중국공산당의 주은래 등이 있었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25] 1927년 초 최용건은 특무영 연대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2. 2. 2. 광저우 봉기 지도
1927년 12월 광저우 봉기에 참여하였다.[1]2. 2. 3. 항일무장투쟁
1945년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후, 최용건은 소련 극동군 제88특별여단 소속으로 소련의 대일 참전과 조국 해방을 고대했다.[34] 같은 해 7월 말, 저우바오중이 주최한 만주유격대회의(동북당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국인과 조선인 부대를 나누어 각자 고국 재건에 힘쓰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 강건, 최용건, 김책 등 조선인들은 김일성을 사령관으로, 최용건을 정치위원으로 하는 조선공작단을 설립했다.[34] 당시 최용건은 소련 인민군 대위였으며, 김일성은 소령으로 진급한 상태였다.1945년 5월, 소련군 내 조선인들 사이에 파벌 다툼이 있었으나, 최용건은 학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김일성에게 조선인 빨치산 지도자 자리를 양보했다. 1945년 8월 10일, 미국이 일본에 미사일을 투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최용건은 평안북도와 평양에 공작원을 파견했다.[33]
최용건은 1927년 중국 북벌에 참전하고, 같은 해 12월 광저우 봉기에도 참여했다. 이후 만주에서 항일 게릴라 조직과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게릴라 부대를 훈련시켰으며, 1936년 중국 공산당과 동북항일연군에 입당했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점령(만주국)하자, 최용건은 일본 제국에 맞서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었다. 1940년에는 소련-만주 국경으로 이동하여 소련군 제88독립여단에 합류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인 1945년에 귀국했다.
2. 2. 4. 소련 동북항일련군 활동
최용건은 1927년 중국 북벌에 참전했고, 같은 해 12월 광저우 봉기에도 참여했다.[1]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항일 게릴라 조직과 군사학교를 설립, 항일 게릴라 부대를 훈련시켰다. 1936년에는 중국 공산당과 동북항일연군에 입당했다.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점령(만주국)한 후, 최용건은 일본 제국에 대항하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었다.[1] 1940년, 최용건과 부대는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군 제88독립여단에 합류했다.
2. 3. 해방 이후의 활동
1945년 8월 광복 이후, 최용건은 김일성, 김책과는 다른 경로로 만주를 거쳐 육로로 귀국하여 평안남도 자치준비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귀국 직후, 조선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조만식과 함께 당을 이끌었으나,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조만식과 결별하고 조선민주당의 당권을 장악했다.1946년 2월 16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에 취임하여 군사 부문을 지도하였고, 7월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사령관을 맡았다. 또한, 함경남도 단천군에 광천남자고등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6년부터 조선민주당 위원장으로서, 이 조직을 친공산주의 노선으로 이끌었다.[1] 그러나 그는 동시에 집권 조선로동당의 비밀 당원이었으며, 조선민주당이 독립적인 정치 세력이 되는 것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2] 1948년 3월 제3차 조선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 강령과 유사한 강령을 채택, 조선로동당에 예속되었다.[48] 이후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에 장악된 기관이 되었다.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내 조선로동당 정책 반대자를 비판, 협박, 회유했다. 그는 사망 시까지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이었지만, 조선로동당 상무위원 등 당직도 겸했다.
1946년 8월 15일 보안대가 인민집단군 총사령부로 개칭되자 초대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 5월 17일 인민집단군 총사령관에 재선출되었다. 1948년 2월 4일 민족보위국 국장에 임명되었다.[1] 1948년 2월 22일 북조선 인민위원회 창립에 참석하고, 인민위원회 보안국장과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5월 2일까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와 8월 19일 해주에서 개최된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자격으로 참석하였으나, 협상은 별다른 내용 없이 결렬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회 위원과 교육문화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강건과 공동으로 조선인민군 총사령에 임명되었다.[1]
200px, 김일, 그리고 강건이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최초의 국산 49식 기관단총을 받는 모습, 1949년.]]
200px 공식 방문 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류사오치와 함께.]]
2. 3. 1. 귀국과 광복 직후
1945년 8월 광복 후, 최용건은 평안남도 자치준비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김일성, 김책과는 별도로 만주를 거쳐 육로로 귀국하였다. 9월 귀국 후, 11월 3일 조선민주당 조직에 참여하여[35] 오산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조만식과 함께 조선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중앙당 부당수에 선출되었다.[35]김일성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이 없어 소련 군정의 후원 밖에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연안파가 주축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적절히 조정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측근인 최용건과 김책을 각각 서기장과 정치부장으로 추천했다.[36] 조만식은 주변에서 최용건을 공산당의 프락치라며 반대했지만, 1920년대 상하이에서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한 점을 들어 그를 받아들였다.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창당 후, 만주와 중국 등지에서 귀국한 공산주의자 및 중국공산당원이었던 한인들을 대거 조선민주당에 입당시키며 당의 여론을 장악해나갔다. 그의 부당수 선출 배경에는 김일성이 정치적 복선으로 잠입시킨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35] '조선민주당을 와해·장악할 목적으로 김일성의 천거를 받아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장직을 겸임시켰다[21]'는 것이다. 최용건은 1945년 12월부터 1946년 1월까지 비밀리에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상무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있었다.[37]
조선민주당은 외견상 위원장 조만식, 부위원장 이윤영, 최용건으로 출발했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조만식과 소련 측이 결렬되자 최용건의 태도가 돌변한다.[38] 최용건은 조만식을 민족 반역자로 규탄하고 위원장을 차지한다.[38] 조선민주당 부당수 한근조는 최용건을 기피하다 월남하였다. 결국 조선민주당 조만식은 최용건으로 대체되었다. 그는 미 군정청에도 사람을 심어 미 군정청 내의 정보를 얻었고, 1948년 3월 23일에 미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에 의해 적발되었다.
1945년 10월 10일, 최용건은 김일성, 김책, 김용범, 안길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서북5도 열성자 대회에 참석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창설하였다. 같은 날 최용건은 북조선분국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45년 12월 17일,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중앙확대집행위원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상무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북조선로동당의 당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적을 숨기고 조선민주당에서 활동했다.
1946년 2월 16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이 되었다. 7월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46년 최용건은 함경남도 단천군 광천면에 광천남자고등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1946년 1월 5일, 당수 조만식이 평양의 고려호텔에 감금당하자, 그는 조선민주당의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조만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발표 후 5도임시인민휘원회의 찬탁 결정과는 달리 반탁을 주장하여 위원장에서 물러나고 연금되었다.[39] 조만식의 가택 연금은 최용건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조선민주당은 김일성의 측근인 최용건에 의해 이끌어졌다.[39] 최용건은 1월 5일 회의가 끝나자 조만식을 연행, 평양직할시 중구역 동흥동의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하였다. 조만식을 구출하려는 청년들이나 그를 방문한 미 군정청의 브라운 소장, 이승만, 김구가 파견한 밀사 등이 도착했지만 조만식은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며 월남을 거부하였다.
조선로동당 기관지 정로(正路) 1946년 2월 7일자에는 당수에 홍기황, 부당수에 최용건으로 되어 있으나[40], 2월 12일 7개 정당 및 사회단체 명의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결성 대회 주석단에서 '스달린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강량욱이 조선민주당 임시 당수로 되어 있다.[41] 2월 13일자에 실린 조선민주당 당 혁신 열성자 협의회에서의 '결정서'를 보면, 부당수는 최용건, 임시 당수 겸 총무부장에 강량욱을 선출하고, 홍기황은 여러 위원 중의 하나로 선출되었다고 되어 있다.[40]
1946년 2월 5일 진보적인 인사로 구성된 '조선민주당 열성자 협의회' 가 소집되어 '보수 독선적인 조만식선생 일파를 민족 통일의 파괴자요, 배반자요, 결과에 있어서는 조국 건설의 방해자'로 규정하였다.[42] 같은 날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열성자 협의회의 임시 회장에 추대되었다. 최용건은 조만식이 미국 제국주의에 현혹되어 민족을 배신하였다고 규탄하였다. 이어 2월 20일 내로 정식 당대회를 소집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당을 이끌 조선민주당 임시 중앙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강량욱이 임시 당수로 선출되고, 나중에 최용건이 정식 당수가 되었다.[42] 1946년 2월 28일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55년까지 그는 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다.
1946년 1월 29일 가칭 북조선행정청 보안국장에 임명됐다.[43]
1946년 1월 29일부터 북조선체육회와 조선빙협 공동 주최하는 평양체육동맹간부 환영회에 참석했다.[44] 이 자리에서 그는 8.15 이후 3.8도선 이북 지역의 체육단체를 주관하는 평양체육동맹의 위원장으로 선포되었다.[44]
2. 3. 2. 조선민주당 당권 장악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이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되자,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당권을 장악했다.[39] 조만식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발표 후 반탁을 주장해 연금되었는데, 이는 최용건이 주도했다.[39] 최용건은 1월 5일 회의 후 조만식을 평양직할시 중구역 동흥동 고려호텔에 감금했다.1946년 2월 5일 '조선민주당 열성자 협의회'는 조만식을 '민족 통일 파괴자, 배반자'로 규정했다.[42] 최용건은 협의회 임시 회장에 추대되어 조만식이 미국에 현혹되어 민족을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2월 20일 조선민주당 임시 중앙위원회를 조직, 강량욱을 임시 당수로 선출하고, 이후 최용건이 정식 당수가 되었다.[42] 1946년 2월 28일 조선민주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어 1955년까지 재임했다.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장악 후 '반동 숙청'을 했다. 4월 1일 제2차 조선민주당 중앙위에서 조만식을 성토하고, 4월 말까지 전 당원 성분 심사를 선언했다. 1946년 크리스마스에는 조선민주당 제6차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당내 '봉건적 사고', '프티부르주아적 태도', '반소·반공 분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47]
1948년 3월 제3차 조선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 강령과 유사한 강령을 채택, 조선로동당에 예속되었다.[48] 이후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에 장악된 허수아비 기관이 되었다.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내 조선로동당 정책 반대자를 비판, 협박, 회유했다. 그는 사망 시까지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이었지만, 조선로동당 상무위원 등 당직도 겸했다.
2. 3. 3. 북조선 인민위원회 보안국장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45]에 선출되었다. 2월 9일에 선출됐다고 한다.[46] 1946년 8월에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부사령관이 되었다.최용건은 조선민주당을 장악하자 '반동 숙청' 작업을 벌였다. 4월 1일 조선민주당 중앙 위원회에서 조만식을 성토하고, 4월 말까지 전 당원 성분 심사를 선언하였다. 이때 김동명 등은 탈출하였고, 한근조 등은 남한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1946년 크리스마스에 최용건은 조선민주당 제6차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연설을 통해 당의 역사, 과오, 그리고 전망을 검토했다. 최용건은 ‘봉건적 사고’, ‘프티부르주아’적인 태도, 그리고 ‘반소 · 반공 분자들’의 문제를 일소할 것을 당원들에게 권고했다.[47]
2. 3. 4. 백의사의 암살 미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서울특별시에 있던 임정 정치공작대원 김정의, 최기성 등을 1946년 3월에 파견해 최용건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21] 정치공작대는 북한 공산당 중추부에 공격을 가해 반탁 우익 진영 인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정치활동을 돕기 위해 월남한 20대 전후의 청년들로 구성된 요원들을 평양에 파견했다.[49] 이들은 김일성, 최용건, 김책, 강량욱 등 "친소 스탈린주의자들을 처단"하기로 합의하였다.[49] 그러나 백의사 단원들은 최용건을 저격하는데 실패하고 도주하였다.2. 3. 5. 북조선 정부 수립 활동
1946년 8월 15일 보안대가 인민집단군 총사령부로 개칭되자 초대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 5월 17일 인민집단군 총사령관에 재선출되었다. 1948년 2월 4일 민족보위국 국장에 임명되었다.[1]1948년 2월 22일 북조선 인민위원회 창립에 참석하고, 인민위원회 보안국장과 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4월 19일부터 5월 2일까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서 북조선측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협상은 별다른 내용 없이 결렬되었다.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강건과 공동으로 조선인민군 총사령에 임명되었다.[1]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회 위원과 교육문화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8월 19일 해주에서 개최된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도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46년 조선민주당 위원장이 되어 이 조직을 친공산주의 노선으로 이끌었다.[1] 그러나 그는 동시에 집권 조선로동당의 비밀 당원이었으며, 조선민주당이 독립적인 정치 세력이 되는 것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2] 김일성은 1956년 최용건을 조선로동당 부위원장에 임명함으로써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에 예속되었다.[51]
2.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상무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30일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이 통합되어 조선로동당으로 개편되자, 최용건은 통합 과정에 참여하였다. 6월 24일부터 30일까지 통합준비위원회 임시위원장을 맡았고, 통합이 확정된 날에도 임시위원장 직을 수행했다. 7월 1일에는 김일성을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추대할 때 박헌영 등과 함께 공동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1950년 6월 김일성, 박헌영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최용건은 조선공산당 내에서 사석에서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1953년 부원수로 승진했고 국방상이 되었다.[1] 1957년 9월, 국방상에서 물러나 형식적인 자리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1] 이 직책에서 그는 북한의 명목상 국가 원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 이 직에서 물러났다.[3][4] 1976년 평양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6]
2. 4.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48년 9월 9일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민족보위성상에 임명되었다.[53] 그는 초대 내각의 민족보위상,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등 군사 부문의 실세로서 부각되었으며 김일성 그룹의 권력 장악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45] 조선인민군 창군 과정에서 최용건은 연안파 출신인 김무정과 조선인민군 주도권을 놓고 심하게 갈등하였다. 당시 무정이 군사 쿠데타를 기도하였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으나, 1948년 중반 즈음에는 최용건이 북한군의 실권을 쥐고 무정을 집중 견제했기 때문에 무정이 구체적으로 쿠데타 계획을 성안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52]1948년 4월부터 5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1차 남북 협상에 북조선측 대표자의 한 사람이자 조선사회민주당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대표자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50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 제2주기 기념연설에서 최용건은 한경철이라는 포병장교의 무공을 치하하면서 이 장교가 1949년 8월의 국경분쟁에서 99발의 포탄 중 90발을, 10월의 국경분쟁에서 72발 중 54발을 명중시켰다고 주장하였다.[54] 이를 두고 김영호는 '인민군의 포사격 명중률의 증가가 소련 군사고문단의 작전 참가로 인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최용건은 밝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54]
2. 4. 2.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최용건은 참전하였다. 그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을 맡고 있었는데, 일설에는 김두봉, 김원봉, 박헌영 등과 함께 한국전쟁에 적극 반대하였다고 한다. 특히 최용건은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들어 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다.[55] 6월 29일에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서 서울특별시를 장악하고 경무대에 입성하였다.

6월 29일 한국전쟁 직후 서울지구방위사령부를 구성하고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9월 28일 서울을 미군에게 잃었다.[56] 8월 말 인천 상륙 작전에 대한 소문이 무성해지자 김일성은 최용건을 내세워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설치하고 편성된 지 1개월밖에 안 된 제18사단 등을 인천과 서울지역에 배치하였다.[57] 8월 28일에는 인천지역 방어계획을 마련하라는 상륙저지 방어 명령을 내리고 이를 위해 정규군은 물론 일반 인민들까지 총동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7] 그는 인천 상륙 작전의 정보를 사전 입수하였고, 같은 날부터 인천지구 방어사령관을 겸직했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로 인천지역에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바로 조선인민군 서해안 방위사령부가 패하였다. 9월 28일에는 서울도 맥아더군에게 함락되었다.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서울을 미군에게 빼앗긴 뒤 김일성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 이때 최용건은 25려단장 오기찬을 불러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급장을 뜯어버리기도 했다.[56]
1950년 가을, 그는 후방 방어총사령관을 맡아 후방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한국전쟁에 최소한의 협력만을 수행하였다. 10월 1일 인민군은 최용건을 서해안방어사령관에, 전선사령관 김책을 동부전선 사령관에 임명하였다.[58] 1950년 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상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소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조선인민군 차수인 김책이 관여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미군이 개입하자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는 서울 수복 작전과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1950년 9월 8일 강건이 전사하자 그는 강건의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1951년 1월 31일 김책이 심장마비 또는 일산화탄소 가스 중독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김책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최용건은 김책의 장례식에서 대성통곡하며 오열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들어 대륙파나 연안파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그는 긴장하게 된다. 1953년 2월 7일 휴전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次帥)에 임명된 뒤, 박헌영과 리승엽이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등 남로당 계열 숙청에 앞장섰다.
2. 4. 3. 휴전 직후의 정치 활동
한국 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53년부터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1953년 2월 7일 공화국 차수에 임명되었고,[21] 1954년 내각 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5년 4월 조선로동당 정치위원, 1955년 7월 내각 부총리 겸 민족보위성 상이 되었다.[21] 1955년 12월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 재판관으로 박헌영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중국 마오쩌둥, 저우 언라이에게서 박헌영을 살려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당시 최용건은 친중국 인사 또는 종파분자로 의심받았다. 1955년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보안부장에 선출되었다. 1956년 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1956년 4월 23일부터 4월 29일까지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출되었고, 로동당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조선로동당 조직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이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중공업우선,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발전' 노선에 반대하자, 최고재판소 소장으로서 윤공흠을 비롯한 내각 각료들을 단죄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달 8월 종파 사건으로 김두봉, 최창익 등이 숙청되었는데, 최용건도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 실각을 모면했다. 1957년 9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2. 5. 북조선 국가 수반 및 외교 활동
1958년 3월 김두봉이 실각하자, 최용건은 제2대 국가수반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 조선로동당 정치위원, 조선로동당 당비서 등을 겸하면서 외교 활동에 주력하여 소련, 동유럽, 중국, 중동,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내각은 김일성이 장악하고 있어, 최용건은 국가원수 겸 의회 의장이었지만 실권은 없었다.1958년 12월 내각 중앙위생지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61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1966년 조선로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역임했다. 1960년 11월 1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최용건은 남북연방제와 대한민국 측에 최고민족회의 조직을 제안하였다. 그는 연방제가 남한 인민의 생활을 개선하고 민족적 유대를 강화하며, 국제적 지위도 높일 것이라고 기대했다.[59] 특히 교류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남북한이 공동으로 논의하고 활동할 기관들을 제안했다.[59] 최용건은 '과도적 연방제[60]'를 제안하며, 문화, 예술, 체육, 과학 등 7개 분야를 교류 협력대상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11월 20일 윤보선 대한민국 대통령은 통일 한국보다는 남한 사회안정과 경제 건설에 주력해야 한다며 최용건의 제의를 반박하였다.
1962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재선되었으나, 실권 없이 주로 외교 활동에 치중하였다. 그는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미국과의 화해 정책에 반대하였다. 1963년 6월 5일부터 23일까지 류사오치 주석의 요청으로 중국을 방문,[61] 6월 23일 류사오치와 함께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62][63] 6월 24일 『인민일보』는 최용건의 방문이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깊은 우의와 긴밀한 협조의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고 평가했다.[63] 10월 5일부터 10월 7일까지 다시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을 만나 소련의 개방 정책 반대에 대해 공동 행동을 취하기로 협의하였다. 1964년 11월 아랍권 순방을 다녀왔다.
1965년 3월 최용건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요청을 받고 중국을 방문하였다. 마오쩌둥은 이 자리에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도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에서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 이에 대해서,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64] 1966년 10월 5일부터 12월 24일 열린 제2차 당대표자 대회에 참가, 10월 24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다. 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상무위원, 조직위원, 외교위원에 모두 선출되어 그는 당(黨)과 정(政)·군(軍)의 요인으로 부상했다.
1969년 무렵 그는 대동맥 관련 질환을 앓았지만, 5월에 방문한 소련 측 인사 니콜라이 포드고르니의 환영 행사와 만찬회를 직접 주관하였다. 1969년 10월 최용건은 북조선 국가원수 자격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2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때부터 북조선, 중국간 인사 교류가 시작되었다. 11월에는 베트남의 국가 주석 호치민의 장례식에 국빈으로 참석, 하노이를 다녀왔다.
1970년 11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임되고,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 당 비서국 비서에도 선출되었다.
1972년 12월 국가수반이 주석직으로 변경되면서 그는 부수반인 국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부주석에 선출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겸임했다. 박헌영의 몰락 이후부터 197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사실상 김일성 정권의 2인자였다.
2. 5. 1. 북조선 국가 수반 취임
1953년, 최용건은 부원수로 승진했고 국방상이 되었다.[1] 1957년 9월, 국방상 자리에서 물러나 형식적인 자리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1] 이 직책에서 북한의 명목상 국가 원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 이 직에서 물러났다.[3][4] 그는 1976년 평양에서 사망했고,[5] 사후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6]2. 5. 2. 외교 활동
2. 5. 3. 국가부주석 취임
1957년 9월, 최용건은 국방상 자리에서 물러나 형식적인 자리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1] 이 직책에서 그는 북한의 명목상 국가 원수였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 이 직에서 물러났다.[3][4]
2. 6. 생애 최후와 사후
최용건은 1970년대 들어 건강이 악화되어 동독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1976년 9월 19일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독살설도 제기되고 있다.[66] 장례식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단이 참석했지만, 김일성은 참석하지 않았다.최용건은 사망 직전 부인 왕옥환에게 "내가 죽으면 이곳에 있지 말고 중국에 가서 사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이 있는데,[29] 이 때문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분노를 사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잊혀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그의 장례는 소홀하게 치러졌고, 북한 매체에서도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하지만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용건을 높이 평가했다. 최용건의 부인 왕옥환은 1991년 북한으로 돌아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아들 최운주도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최용건은 대성산혁명렬사릉이 아닌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지만, 1993년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고, 후에 부인 왕옥환과 합장되었다.
2. 6. 1. 최후
1970년 11월 17일 동맥 관련 병세가 악화되어 비행기 편으로 동독의 베를린 군병원에 입원했다가 1971년 초 귀국했다. 1974년 9월 9일 9.9절 행사,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 30주년 기념보고회와 조선로동당 대회에 부축을 받고 나타났다. 1976년 6월 초 후계자 문제로 김정일을 반대해 감금당했다가 풀려났다. 1976년 6월 5일자 통일일보에 따르면 김일성 신격화와 김정일 후계 승계에 반대하여 최현 무력상이 체포될 때 연금됐다고 한다.[65] 1976년 9월 19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76세였다.그의 사망 원인이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66] 9월 22일 장례식에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단이 참석했으나 김일성은 불참하였다.
2. 6. 2. 사후
최용건은 유언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잊혀졌다는 설이 있다. 김일성이 후계자에게 정권을 물려주려 하자 최용건은 죽기 직전 부인 왕옥환에게 "내가 죽으면 이곳에 있지 말고 중국에 가서 사시오"라고 유언했다는 설이 있다.[29]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일성과 김정일은 크게 노하여 최용건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묻어버리고 공적을 일절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29] 1976년 9월 최용건이 사망한 후, 그에 대한 장례는 소홀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텔레비전과 신문은 최용건에 대해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김일성의 빨치산 선배인 최현이 사망한 후 영화 '혁명가'를 만들어 최현의 공적을 선전해준 것과는 대비된다[29]'는 설도 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용건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1991년 한때 왕옥환은 북조선으로 귀국하여 최고인민회의 여성 몫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아들 최운주는 조선사회민주당의 명목상 당수이자, 북조선 내각 국제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원래 최용건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사망할 경우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어야 하지만, 김일성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성산혁명렬사릉이 아닌, 그보다 급이 낮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93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그의 부인 왕옥환이 사망하자 최용건이 안장되어 있는 애국렬사릉에 최용건과 합장되었다.
3. 사상과 신념
최용건은 1946년 조선민주당을 장악하면서 당원들에게 헌금을 요구했고, 개인주의와 쁘띠부르주아주의를 비판했다.[47] 그는 조선민주당 지방위원장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예로 들며, 북조선로동당을 비판하는 당원들에게 조선민주당 당원들은 북조선로동당과 협력해야 하고, "이씨 왕조와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남긴 병폐"인 파벌주의를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47]
최용건은 개인주의와 폭리 추구 행위를 비난하며, "봉건적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이것은 민족의 이익보다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특히 농촌마을에서 이런 종류의 생각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47] 도시의 문제는 폭리를 추구하는 것, 즉 민족의 번영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 당과 국가경제에 중대한 위험이 된다"고 경고했다.[47]
그는 조선왕조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는데, 1946년 조선민주당 당대회에서 '리씨조선과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남긴 병폐인 파벌주의를 회피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다.'[47]고 지적하며, 조선의 사색붕당 역시 일종의 파벌주의이며 민족의 병폐라고 비판했다.
최용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및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 자격으로 외교활동과 외국 순방을 했다.[21] 그는 중국, 일본, 인도 등의 아시아 국가와 말리, 기니, 캄보디아,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알제리, 탄자니아, 소련, 쿠바 등을 방문했다.[21] 중국의 주덕, 주은래, 하룡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북한-중국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해결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29] 그는 중국에서 오랜 기간 생활했지만, 한문과 중국어에 능숙하지 못해 여러 통역관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황장엽도 그 중 한 명이었다.
1961년 11월 19일 최용건은 대한민국 정부에 주한 미군 철수를 제의했다. 1962년 6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제2기 11차 대회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67] 그는 '남조선에서 미국 군대를 철거시키기 위한 전민족적 투쟁을 전개할 데 대하여'에서 미군 주둔 이후 발생한 만행들을 언급하며, '반미구국투쟁'을 호소했다. 또한, 남북 간 무력 불사용 협약 체결과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남북한 병력 감축안(각각 10만 명 이내)을 제시했다.[67] 1963년 9월 8일 '9.9절 5주년 기념 보고'[68]에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유성철은 최용건이 겉보기에는 훌륭했지만, 실제로는 명민하지 못하고 오히려 둔중한 면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연설과 말솜씨가 부족했고, 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더불어 소심한 면이 있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최용건의 아내는 중국인이었지만, 조선어를 남편보다 더 잘했다고 한다.
여정에 따르면, 최용건은 간부 문제에 대해 김일성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이 간부들을 장기의 졸처럼 쓰고 처벌하거나 이동시키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무정, 김일에 대한 김일성의 비판과 강등 처분에 동의하지 않았고,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을 질타했지만, 김일성의 대숙청에는 반대했다. 1958년 5월 제1차 조선인민군당대표대회에서는 "사상 투쟁이라고 물귀신처럼 덤벼들거나, 물밑으로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고, 같은 달 사회안전성 당회의에서도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핍박하지 말라. 핍박받고 나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최용건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군인과 민중 사이에서 그의 위신이 높았고, 동료 항일 연군 출신자들도 최용건을 더 추켜세우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최용건의 재종제 최혁은 연안파 군인으로, 반당 종파 분자로 체포되어 20년 형을 받았다.
미국 극동군 정보부는 최용건을 필요에 따라 무자비해질 수 있는 강하고 굳건한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본래는 친절하고 사려 깊으며, 부하들의 복지를 항상 걱정한다고 한다. 그는 군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였으며, 일부에서는 김일성이 아닌 그가 진정한 지도자라고 보기도 했다. 그는 최고의 전략가, 지휘관, 관리자로 평가받았다.
한동육(동북사범대학 부학장)은 최용건이 1962년 말 또는 1963년 봄 무렵, 주은래 총리에게 중국 동북 지방의 고고학 조사와 발굴을 요구했다고 전한다.[14] 최용건은 국제사회가 북한을 소국, 소민족으로 비방하며 역사와 문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고조선의 발상지를 찾고 역사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은래는 이에 동의하면서도, 고조선이 중국 동북 지방에 기원을 둔다는 관점에는 반대하며, 푸젠성 기원 가능성을 제시했다. 주은래는 조선인들이 벼농사를 짓고 쌀을 먹으며 나막신을 신는 등 음식과 생활 습관이 푸젠성과 유사하고, 조선어와 푸젠성 방언의 숫자 발음이 같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4. 논란과 의혹
- 김좌진 암살 가담 의혹
일설에는 최용건이 김좌진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있다. 1930년 1월 김좌진 피살 당시,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군사부장이었다.
- 한국 전쟁 반대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최용건은 전쟁에 반대했다는 설이 있다. 미군은 최용건을 조선인민군 내 전쟁 반대자로 지목했다. 미국 극동군사령부 본부가 1952년 작성한 "조선인민군사"에는 최용건의 전쟁 반대 사실이 기록돼 있다.[69] 미군 극동군사령부 문건에 따르면 "최용건은 인민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한 범위 내에서 대남 침략을 반대했다. 그는 남침을 준비하기 위해 온 소련의 새로운 군사고문단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이전의 고문관들과는 관계가 좋았었다. 그러나 바실리예프 고문단장을 비롯한 새로운 고문단과의 관계는 냉랭했다. 최용건은 전쟁을 위한 전투 훈련과 장비 확충을 꾸물거렸다. 이에 바실리예프는 그를 배제하고 직접 전쟁을 준비했다. 최용건은 이 준비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군사위원회 위원이었으나 작전 지시에서는 아무런 능동적 역할을 하지 못했고 군대의 배치 문제를 다루는 데 만족했다.[69]"는 것이다.
1950년 초 김일성이 소집한 북조선 정권의 수뇌부 회의에서 최용건은 신중론을 제시했다.[69]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면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므로 이 점에 대한 결론을 내린 뒤 남침 계획을 다시 토론하자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중론에 대해 김일성은 크게 화를 내면서 "민족보위상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디에 쓰겠느냐"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69]
사학자 박명림은 북조선 지도부 내에서 전쟁을 반대했던 사람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며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었다고 지목했다.[70]
반면, 개전 후에도 최용건이 민족보위상 직을 그대로 유지했고, 6월 26일 조직된 7인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그가 전쟁에 반대했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는 반론도 있다.[69]
- 1949년 국경 분쟁
1950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 제2주기 기념 연설에서 한경찰이라는 포병 장교의 무공을 치하하면서, 이 장교가 1949년 8월의 국경 분쟁에서 99발의 포탄 중 90발을, 10월의 국경 분쟁에서 72발 중 54발을 명중시켰다고 주장하였다.[71]
- 기타
유성철은 "최용건은 겉보기에 훌륭했지만, 겉보기뿐이었어. 당당한 체격이었고, 얼굴도 좋았지. 그러나 머리는 명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오히려 둔중한 면이 있었지. 게다가 연설을 못했고, 말솜씨도 엉망이었어.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의미 불명의 말을 했고, 그가 조선어로 말하면 조선인 대원 중에는 서기 동지가 중국어로 말하는 건가 하고 묻는 대원이 있을 정도였고, 중국인 대원은 그가 중국어로 말하면, 역시 서기 동지가 조선어로 말하는 건가 하고 물을 정도로 알아듣기 힘든 말솜씨였어. 게다가 겉보기와 달리 소심한 면이 있어서, 영도의 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내는 중국인이었지만, 조선어를 잘해서 남편 최용건보다 잘한다고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여정에 따르면, 간부 문제에 대한 관점은 김일성과 달랐다고 한다. 김일성이 간부들을 장기의 졸(장기에서 보병에 해당하는 말)처럼 아낌없이 쓰고, 무슨 일이 있으면 처벌하거나 이동시키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 제3기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무정과 김일을 심하게 비판하고 강등 처분을 적용하려 했을 때, 최용건은 동의하지 않았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을 질타했지만, 김일성이 대숙청을 단행했을 때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1958년 5월 제1차 조선인민군당대표대회에서 "사상 투쟁이라고 물귀신처럼 덤벼들거나, 물밑으로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고, 같은 달 사회안전성 당회의에서도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핍박하지 말라. 핍박받고 나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그런 최용건을 밉게 여겼지만, 군인과 민중 사이에서 큰 위신을 가지고 있었고, 동료 항일 연군 출신자들도 자신보다 최용건을 추켜세우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재종제에 연안파 군인인 최혁이 있었다. 반당 종파 분자로 체포되어 20년 형을 받았다.
미국 극동군 정보부의 자료에 따르면, 필요에 따라 무자비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강하고 바위처럼 굳은 성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는 친절하고 사려 깊으며, 항상 부하들의 복지를 걱정한다. 그는 군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일부에서는 김일성이 아니라 그가 진정한 지도자라고 본다. 그는 최고의 전략가, 지휘관, 관리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동육(동북사범대학 부학장)은 최용건에 관한 다음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5. 평가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이나 88여단 시절, 직접적인 군사활동보다는 이론가형으로 정치 교육 등 당 쪽의 고위 직책을 주로 맡았다.[25] 애국자로도 평가된다. 최용건은 사석에서 김일성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던, 또는 김일성의 별명 중 하나인 마두(馬頭)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던 조선공산당 내에 몇 안 되는 우직한 군인, 정치인이었다고 한다. 존칭을 쓸 경우에도 '일성 동지' 또는 '김 장군'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최용건은 감성적으로 눈물을 잘 흘렸는데, 후일 대한민국으로 귀순한 한 북조선 사람은 최용건을 가리켜 "공산당답게 표독스럽지 못하고 무골호인의 기풍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남파 간첩으로 왔던 이수근은 최용건을 경멸하여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지적했다.[72]
김일성이 아닌 최용건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을 담당한 이유는 두 사람의 인망 때문이었는데, 최용건은 진짜 독립운동가인 반면 김일성은 고작 마적단이라는,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강도질을 하는 강도단의 두목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특히 김일성 측에서 독립운동이라고 내세우는 보천보 전투는 말이 전투지 실상은 200여 명의 병력으로 고작 5명과 맞서서 2살 배기 아기와 요리사, 이렇게 단 2명만 사살한, 전투라고 칭하기조차 민망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얼마 못 가 김일성이 사회주의 헌법을 선포하면서 김일성은 최용건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에서 보직해임 시키고 본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수반의 자리에 취임했다.
유성철은 "최용건은 겉보기에 훌륭했지만, 겉보기뿐이었어. 당당한 체격이었고, 얼굴도 좋았지. 그러나 머리는 명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오히려 둔중한 면이 있었지. 게다가 연설을 못했고, 말솜씨도 엉망이었어.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의미 불명의 말을 했고, 그가 조선어로 말하면 조선인 대원 중에는 서기 동지가 중국어로 말하는 건가 하고 묻는 대원이 있을 정도였고, 중국인 대원은 그가 중국어로 말하면, 역시 서기 동지가 조선어로 말하는 건가 하고 물을 정도로 알아듣기 힘든 말솜씨였어. 게다가 겉보기와 달리 소심한 면이 있어서, 영도의 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아내는 중국인이었지만, 조선어를 잘해서 남편 최용건보다 잘한다고 평판이 자자했다고 한다.
여정에 따르면, 간부 문제에 대한 관점은 김일성과 달랐다고 한다. 김일성이 간부들을 장기의 졸(장기에서 보병에 해당하는 말)처럼 아낌없이 쓰고, 무슨 일이 있으면 처벌하거나 이동시키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 제3기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무정과 김일을 심하게 비판하고 강등 처분을 적용하려 했을 때, 최용건은 동의하지 않았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을 질타했지만, 김일성이 대숙청을 단행했을 때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1958년 5월 제1차 조선인민군당대표대회에서 "사상 투쟁이라고 물귀신처럼 덤벼들거나, 물밑으로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고, 같은 달 사회안전성 당회의에서도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핍박하지 말라. 핍박받고 나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그런 최용건을 밉게 여겼지만, 군인과 민중 사이에서 큰 위신을 가지고 있었고, 동료 항일 연군 출신자들도 자신보다 최용건을 추켜세우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재종제에 연안파 군인인 최혁이 있었다. 반당 종파 분자로 체포되어 20년의 형을 받았다.
미국 극동군 정보부의 자료에 따르면, 필요에 따라 무자비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강하고 바위처럼 굳은 성격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래는 친절하고 사려 깊으며, 항상 부하들의 복지를 걱정한다. 그는 군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일부에서는 김일성이 아니라 그가 진정한 지도자라고 본다. 그는 최고의 전략가, 지휘관, 관리자로 평가받고 있다.
한동육(동북사범대학 부학장)은 최용건에 관한 다음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14]
6. 가족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최니학(崔尼學) | ? ~ 1943년 |
어머니 | 미상 | |
초배 | 미상 | 이혼 |
계배 | 왕옥환(王玉環) | ? ~ 2007년 1월 17일, 중국인[29] |
아들 | 최운주 |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북조선 내각 국제부장 |
동생 | 최형건 | 조선로동당 초급 당비서, 기업소 비서 |
7. 상훈
수여 날짜 | 훈장 및 표창 |
---|---|
1950년 7월 9일 | 국기훈장 제1급 |
1955년 9월 | 자유독립훈장 |
1958년 9월 | 국기훈장 제1급 |
1960년 6월 | 로력영웅 칭호 |
(날짜 미상) | 국기훈장 제1급[73] |
(날짜 미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메달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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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석천, 자(字)는 추해(秋海), 룡건(龍建), 용근(龍根) 다른 이름으로는 근수길(根秀吉), 영수사(嶺秀舍), 최용건(崔鏞健), 최룡건(崔龍建), 최석천(崔石泉), 최추해(崔秋海), 최용진(崔勇進), 김지강(金志剛) 등
[19]
문서
북조선에서 해외에 운영하는 회사의 책임자
[20]
문서
김일성은 최용건이 김일성에게 진술한 바에 따라 자신의 저서 세기의 회고록에서 오산중학교를 다니던 중 미국인 교장이 오산학교에 부임해온다 하자, 선교사 반대 동맹휴학이 일어났고 최용건이 이 동맹휴학의 주모자였다고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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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전 중국총리 “고구려 · 발해는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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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선배' 최용건의 부인은 왜 중국에서 죽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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