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문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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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문인협회는 1939년 10월 29일 설립된 단체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어용 단체였다. 이광수가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김동환, 박영희, 정지용 등 많은 문인들이 참여했다. 협회는 조선 문학계의 일본어화, 일본적 단련, 국책 협력 등을 강령으로 내세우며, 친일 문학을 강요했다. 1943년 조선 하이쿠 작가 협회 등과 합병하여 조선문인보국회가 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친일 단체로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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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인협회 | |
---|---|
조선문인협회 | |
![]() | |
개요 | |
국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종류 | 협회 |
설립 | 1953년 3월 20일 |
해산 | 2006년 |
후신 | 조선작가동맹 |
상세 정보 | |
이전 명칭 | 조선문학가동맹 |
지도자 | 이기영 |
위치 | 평양 |
기타 | |
로마자 표기 | Joseon Muninhyeophoe |
2. 주요 참가자
직책 | 이름 | 비고 |
---|---|---|
초대 회장 | 이광수 | |
간사 |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 | |
평의원 | 계광순 | 조선총독부 학무국 |
간사장 (1942년) | 박영희 | |
상무 (1942년) | 이석훈, 김용제 | |
임원 | 정지용, 김기림, 최재서, 이태준, 백철, 임화, 임학수, 이하윤, 김상용, 김억, 김동인, 김기진, 방인근, 김소운, 김형원, 박태원, 유진오, 함대훈, 이극로, 전영택, 조용만, 노창성,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 이헌구, 이무영 |
2. 1. 친일 논란
1939년 10월에 결성된 친일 단체이다. 중일 전쟁에 대한 총력적 지원을 위하여 현역 문인이 대동단결하고 총동원체제 하에서 문필보국한다는 취지에서 창설되었다. 물론 단체의 창립배경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알선과 조종이 있었다.창립 취지는 다음과 같으며, 목표와 활동에서 친일성이 뚜렷했다.
1943년에 조선문인보국회로 통합되어 해체되었다.
3. 주요 활동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9년 10월에 결성된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는 중일 전쟁에 대한 지원 및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문필보국을 목표로 하였다. 창립 취지문에서는 "새로운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을 내세웠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연도 | 활동 내용 |
---|---|
1939년 11월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가입, 조선군사령부에 위문대 전달 |
1939년 12월 | 문예의 밤 개최 (경성부) |
1940년 2월 | 문예대강연회 개최 (평양) |
1940년 10월 | 육군지원병훈련소 방문 |
1940년 11월 | 전국 순회강연회 개최 |
1941년 7월 | 지식인의 전쟁 지원 촉구 성명서 발표 |
1941년 8월 | 문학부 신설 |
1941년 12월 | 결전하 문화인대강연회 개최 (경성부) |
1942년 9월 | 황민단결 및 대동아 지도 역할 선언서 발표 |
1942년 12월 | 전사자 유가족 방문, 대동아 전쟁 1주년 기념 국민시낭독회 개최 (경성부) |
1942년 태평양 전쟁 전황이 악화되자, 조선문인협회는 조직을 확충하고 "황민(皇民) 단결의 정신적 지주"를 내세우며, ① 조선 문학계의 일본어화, ② 조선 문사의 일본적 단련, ③ 작품의 국책 협력, ④ 현지 작가 동원을 강령으로 제시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로 통합되어 해체되었다.
3. 1. 조직 구성
초대 회장은 소설가 이광수가 맡았으며, 간사는 김동환, 정인섭, 주요한, 이기영, 박영희, 김문집이 맡았다. 조선총독부 학무국 계광순은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1942년 간사장으로 박영희, 상무로 이석훈과 김용제가 선임되었다.이 단체의 임원으로는 정지용, 김기림, 최재서, 이태준, 백철, 임화, 임학수, 이하윤, 김상용, 김억, 김동인, 김기진, 방인근, 김소운, 김형원, 박태원, 유진오, 함대훈, 이극로, 전영택, 조용만, 노창성, 최정희, 모윤숙, 노천명, 이헌구, 이무영 등이 있다.
3. 2. 활동 내용
1939년 10월, 중일 전쟁에 대한 총력적 지원을 위하여 현역 문인이 대동단결하고 총동원체제 하에서 문필보국한다는 취지로 조선문인협회가 창설되었다. 단체 창립 배경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알선과 조종이 있었다. 창립 취지문에서는 "새로운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을 목표로 제시하였으며, 이는 인류가 국민생활을 떠나 생활한 일이 없고 문학도 국민 생활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에 기반하였다. 따라서 반도문단의 새로운 건설은 내선일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조선문인협회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1939년 11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가입, 회원 자작 위문글을 모은 위문대를 조선군사령부에 전달
- 1939년 12월: 전쟁 지원을 위한 '문예의 밤' 개최 (경성부)
- 1940년 2월: 문예대강연회 개최 (평양)
- 1940년 10월: 육군지원병훈련소 방문
- 1940년 11월: 전국 순회강연회 개최
- 1941년 7월: 지식인의 전쟁 지원을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서 발표
- 1941년 8월: 국민문학 건설을 위하여 문학부 신설
- 1941년 12월: '결전하 문화인대강연회' 개최 (경성부)
- 1942년 9월: 황민단결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대동아 제민족 지도의 선구적 역할을 하겠다는 내용의 선언서 발표
- 1942년 12월: 전사자 유가족 방문, '대동아 전쟁 1주년 기념 국민시낭독회' 개최 (경성부)
1942년 10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전황이 악화되자, 조선문인협회는 조직을 확충하고, "황민(皇民) 단결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대동아 제 민족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내걸었다. 구체적인 강령은 ① 조선 문학계의 일본어화 촉진, ② 조선 문사의 일본적 단련, ③ 작품의 국책 협력, ④ 현지 작가 동원의 4항목이었다.
조선문인협회는 최재서가 주관하는 『인문평론』이 토대였던 『국민문학』을 매체로 활동했다. 1941년 11월 이후, 일본의 문단 탄압 속에서 조선에서 유일한 문예 잡지였던 『국민문학』은 일본어판과 한글판이 있었지만, 1942년 5월 이후 한글판은 폐지되었다. 이는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한 조치였다.
1943년에 조선문인보국회로 통합되어 해체되었다.
3. 3. 기관지 『국민문학』
1941년 11월, 최재서가 주관하던 『인문평론』을 토대로 조선문인협회의 기관지 『국민문학』이 발행되었다. 『국민문학』은 당시 일본의 문단 탄압 속에서 조선에서 유일한 문예 잡지였다. 『국민문학』은 일본어판과 한글판으로 발행되었으나, 1942년 5월 이후 한글판은 폐지되었다. 이는 조선인의 황민화를 위한 조치였다.당시 일본의 언론 탄압으로 인해, 조선의 문사들은 어용 작가가 되거나, 붓을 꺾고 은둔하거나, 항일 작품을 써서 투옥되는 길을 걸어야 했다. 문단에서 활동하려면 총독부가 조종하는 조선문인협회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발표할 수 있는 문예 잡지는 일본어로 투고해야 하는『국민문학』뿐이었다. 조선문인협회는 조선 문사의 활동을 감시하고, 적극적으로 시국 소설을 쓴 문사를 찬양하는 한편, 침묵한 문사를 비난하고, 일본의 전황을 찬미하는 소설을 쓸 것을 강요했다. 1945년 해방까지 작품을 남긴 문사들 대부분은, 후에 친일파로 비난받게 된다.
3. 4. 강제적 친일 문학 강요
1940년대 조선 문단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조선문인협회는 총독부의 어용 단체로서 신도효, 쓰다 고우가 일으켰다. 창립 총회에서 회장에 이광수, 간사에 박영희, 김동환, 정인섭, 유진오, 이기영, 주요한 등의 조선 문인을 지명하여, 조선인 어용 작가를 육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조선문인협회는 "흥아(興亞)의 대업을 완수해야 할 섬나라의 신문화 창조"를 내걸었다.1942년 10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전황이 악화되자, 조선문인협회는 조직을 확충하여 총무부와 문학부를 두고, 상임 간사를 14명으로 증원, 12명의 간사를 정하고, 새롭게 "황민(皇民) 단결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대동아 제 민족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내걸었다. 구체적인 강령은 다음과 같다.
- 조선 문학계의 일본어화 촉진
- 조선 문사의 일본적 단련
- 작품의 국책 협력
- 현지 작가 동원
1943년, 조선 하이쿠 작가 협회, 조선 센류 협회, 국민 시가 연맹 등과 합병하여 조선문인보국회가 된다.
조선문인협회의 활동은 『국민문학』을 매체로 했다. 『국민문학』은 최재서가 주관하는 『인문평론』이 토대였으며, 1941년 11월 이후 일본의 문단 탄압 속에서 조선에서 유일한 문예 잡지가 되었다. 『국민문학』은 일본어판과 한글판이 있었지만, 1942년 5월 이후 한글판은 폐지되었다. 이는 조선인의 황민화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본에 의한 언론 탄압으로 인해 조선의 문사들은 어용 작가가 되거나, 붓을 꺾고 은둔하거나, 항일 작품을 써서 투옥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문단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총독부가 조종하는 조선문인협회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발표할 수 있는 문예 잡지는 『국민문학』밖에 없었다. 그것도 일본어로 투고해야 했고, 조선어로 집필 활동은 불가능했다. 또한, 조선문인협회는 조선 문사의 활동을 감시하고, 적극적으로 시국 소설을 쓴 문사를 찬양하는 한편, 붓을 놓거나 침묵한 문사를 비난하고, 일본의 전황을 찬미하는 소설을 쓸 것을 강요했다. 1945년 해방까지 작품을 남긴 문사들의 대부분은 후에 친일파, 전향 작가로 비난받게 된다.
4. 역사적 평가
1939년 10월에 결성된 친일 단체로, 중일 전쟁에 대한 총력 지원과 문필보국을 표방하며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알선과 조종으로 창립되었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로 통합되어 해체될 때까지 1940년대 조선 문단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단체로 평가받는다.
창립 취지문에서 "새로운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을 내세웠고, "반도문단의 새로운 건설은 내선일체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목표와 활동에서 친일성이 뚜렷했음을 보여준다.
1942년 10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전황이 악화되자, 조선문인협회는 "황민(皇民) 단결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대동아 제 민족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할 것을 내걸고, ① 조선 문학계의 일본어화 촉진, ② 조선 문사의 일본적 단련, ③ 작품의 국책 협력, ④ 현지 작가 동원의 4가지 강령을 내세웠다.
최재서가 주관하던 『인문평론』을 토대로 한 『국민문학』을 매체로 활동했다. 『국민문학』은 1941년 11월 이후 일본의 문단 탄압 속에서 조선에서 유일한 문예 잡지였으며, 1942년 5월 이후에는 한글판이 폐지되어 조선인의 황민화가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 탄압으로 인해 조선 문사들은 어용 작가가 되거나, 은둔하거나, 항일 작품을 써서 투옥되는 길을 걸어야 했다. 문단에서 활동하려면 총독부가 조종하는 조선문인협회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일본어로만 투고해야 했다. 조선문인협회는 조선 문사의 활동을 감시하고, 시국 소설을 쓴 문사를 찬양하는 한편, 침묵한 문사를 비난하며 일본의 전황을 찬미하는 소설을 쓸 것을 강요했다. 1945년 해방까지 작품을 남긴 문사들의 대부분은 후에 친일파, 전향 작가로 비난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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