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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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응기는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1477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좌의정을 역임했다. 연산군 시대에 관직을 수행하다 갑자사화로 파직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재등용되어 여러 요직을 거쳤다. 그는 학문에 능통하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재상으로서의 역량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1519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문대이다.
1477년(성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충청도도사, 시강관, 시독관, 수찬, 검토관을 거쳐 우승지, 좌승지에 이어 도승지가 되고 홍문관의 직제학이 된다. 이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때 도총관, 동지사, 호조참판에 이어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로 있다가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민정을 잘 다스렸으며 지의금부사를 거쳐 지춘추관사, 지중추부사, 특진관, 세자우부빈객을 지내고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다 갑자사화로 파직되고, 중종 때 재등용되어 예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상의원제조,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 예조판서에 이어 영중추부사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김응기는 사람됨이 단정하고 무거우며(端重) 박학하여 천문, 지리, 산수 등의 학문에 정통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불렀다. 그러나 재상이 되어서는 그 공명이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증조부는 문경현감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김양보이다.[5] 조부는 덕산현감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김지이다.[5] 아버지는 유수를 지낸 김지경(1419년 ~ 1485년)이며, 어머니는 영덕현령 강거례의 딸이다.[5] 동생은 김응규인데, 요절하였다.[5] 첫째 부인은 전생서령 김맹치의 장녀이며, 외아들 김세효는 여산군수를 지냈다.[1] 둘째 부인은 사예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안돈후의 딸이다.[1]
[1]
서적
김응기 묘갈명
2. 생애
1517년(중종 12)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자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519년(중종 14) 졸했으며[3], 시호는 문대(文戴)이다.[4]
2. 1. 관직 생활
1477년(성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충청도도사, 시강관, 시독관, 수찬, 검토관을 거쳐 우승지, 좌승지에 이어 도승지가 되고 홍문관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때 도총관, 동지사, 호조참판에 이어 경기도관찰사가 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로 있다가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민정을 잘 다스렸다. 지의금부사를 거쳐 지춘추관사, 지중추부사, 특진관, 세자우부빈객을 지내고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다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 중종 때 재등용되어 예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상의원제조,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 예조판서에 이어 영중추부사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1517년(중종 12)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자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519년(중종 14) 사망했으며[3], 시호는 문대(文戴)이다.[4]
2. 2. 갑자사화와 중종반정
김응기는 1477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충청도도사, 시강관, 시독관, 수찬, 검토관을 거쳐 우승지, 좌승지에 이어 도승지가 되고 홍문관의 직제학이 되었다. 이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연산군 때 도총관, 동지사, 호조참판에 이어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로 있다가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잘 다스렸다. 지의금부사를 거쳐 지춘추관사, 지중추부사, 특진관, 세자우부빈객을 지내고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다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
중종반정이후 재등용되어 예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상의원제조, 지의금부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 예조판서에 이어 영중추부사를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1517년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자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1519년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4]
2. 3. 말년
1517년(중종 12) 병으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자 영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3] 1519년(중종 14) 사망했으며,[3] 시호는 문대(文戴)이다.[4]
3. 평가
4. 가족 관계
참조
[2]
서적
중종실록
[3]
서적
중종실록
[4]
서적
신증동국여지승람
[5]
서적
김지경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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