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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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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홍미는 1557년에 태어나 1600년대 초반에 사망한 조선시대의 문신이다. 남명 조식과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경상좌도 도사로 활약했으며, 이후 홍문관 교리, 이조 정랑 등을 거쳤다. 1597년에는 이순신을 탄핵하는 데 가담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성극당집 (省克堂集)》이 있다. 상주의 봉산서원에 배향되었다.

2. 생애

김홍미는 1557년(명종 12년)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 또는 성극(省克)이다. 집현전 부제학을 지낸 김상직(金尙直)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김범(金範)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어려서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후에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류성룡의 형인 운룡(雲龍)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1579년(선조 12) 식년진사시에 제2등으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85년(선조 1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고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승문원부정자, 홍문관정자, 저작, 부수찬, 예문관검열, 홍문관 부수찬 등을 역임했다. 1588년 선조는 이조에 특명을 내려 홍문관의 빈자리에 그를 임명할 것을 지시했다.

1589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임명되었다가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파면되었다. 이후 상주에 내려가 칩거하였으며, 동인남인북인으로 나뉠 때 남인(南人)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경상좌도도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1595년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교리 겸 시강원문학을 거쳐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며, 경연관으로 《주역경연을 맡았다. 이후 홍문관응교,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원균(元均)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후 우부승지, 좌부승지, 훈련도감제조, 형조참의, 사간원대사간, 이조참의, 비변사(備邊司), 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8년 1월 경상좌도 해안가의 전선 제작 및 격군(格軍) 충당, 황해도 목수의 판옥선(板屋船) 및 거북선 제작 등을 지시받았다. 그해 가을 조정의 변화에 뜻이 맞지 않아 병으로 사퇴하였다. 1599년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부임했다가 1601년 봄 병으로 사퇴하고 상주로 돌아갔다. 1602년 여주목사가 되었으며, 1604년 강릉부사로 임명되어 병중에도 부임하였다. 1605년 강릉부사 재직 중 큰 수재(水災)로 사망자 조문, 재산 피해 및 굶주린 백성 진휼(賑恤)과 구제에 힘쓰다가 병이 악화되어 사직하였다.

사직 후 고향으로 돌아오다 사망하여 부인 류씨가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근처에 매장하였다. 묘비명은 장유가 썼다. 상주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2. 1. 생애 초반

1557년(명종 12년) 경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지낸 김상직(金尙直)의 6대손으로, 증조부는 김예강(金禮康)이고, 할아버지는 장사랑 김윤검(金允儉)이며, 아버지는 옥과현감(玉果縣監) 김범(金範)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이다. 자는 창원(昌遠), 호는 성극당(省克堂), 성극(省克)이다.

그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잘 외웠다고 한다. 어려서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나중에는 류성룡의 형인 운룡(雲龍)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관례(冠禮)를 치르기 이전에 그는 향시(鄕試)에 응시하였는데, 향시의 응제 "사마온공(司馬溫公) 염중론(念中論)"으로 향시에서 장원하였다. 그 문장이 정미롭고 아름다웠으므로 합격자 발표 후에는 그의 글을 돌려가면서 암송하는 이들도 나타났다고 한다. 남명 조식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제문을 지었다. 그는 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바로 대과를 응시하지 않고 사마시에 응시하였다. 1579년(선조 12) 식년진사시에 제2등으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2. 2. 관료 생활과 임진왜란

1585년(선조 1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발탁되고, 홍문관정자, 저작, 부수찬 등을 거쳐 예문관검열, 다시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형인 김홍민(金弘敏)도 옥당(玉堂)에서 근무하여, 형제가 모두 옥당에 근무한 일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1588년 홍문관의 관직에 결원이 생기자 선조는 이조에 특명을 내려 홍문관의 빈자리에 그를 임명할 것을 지시했다.

1589년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누군가 그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지목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파면되었다. 이후 상주에 내려가 몇 년 간 집에서 칩거하였다. 그 뒤 동인남인북인으로 나뉠 때 그는 남인(南人)이 되었다. 1589년 그에 대한 복권 여론이 나타나자 사헌부가 이를 지적하며 그가 이진길(李震吉)의 집에서 유숙한 일을 들었고,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복관되어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그해 7월 경상좌도도사에 임명되고, 이듬해 어머니 창녕조씨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그러나 상중으로 내려간 뒤에도 선조는 정경세를 시켜 그와 그의 형의 안부를 묻고, 그의 학식이 어느 정도인가를 묻기도 했다.

탈상 후 1595년 9월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교리 겸 시강원문학(校理兼侍講院文學)을 거쳐 그 다음해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며, 경연관으로 《주역》의 경연을 맡아보았다. 선조가 《주역 (周易)》을 강론하기 앞서 경학(經學)에 정통한 선비를 선발하여 경연의 강관(講官)을 충원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그는 경연에서의 강론에 고전의 의리를 인용하여 정밀하게 분석하였으며, 가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예로 들어 10여 줄을 연달아 외웠으므로, 임금이 싫증내지 않고 경청하면서 그가 박식하다고 거듭 칭찬하였다.

이후 홍문관응교가 되어 진선(進善)과 필선(弼善)을 겸임하였으며,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과 대사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종종 여러 번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으로 거듭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1597년 승정원동부승지로 있을 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탄핵하는데 참여하여 이순신을 파면하게 하고, 원균(元均)을 통제사로 삼게 하는 데 가담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명을 내려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지시했다. 이때 이순신원균의 성인인 아들을 어린아들인데 없는 공을 만들었다는 거짓 장계를 내린 것을 선조가 그에게 지적하기도 했다.

그 뒤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훈련도감제조 등을 역임하고, 다시 형조참의, 사간원대사간, 이조참의, 비변사(備邊司), 승문원부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2. 3. 생애 후반

1598년 1월 경상좌도 해안가의 전선 제작 및 격군(格軍) 충당, 황해도 목수의 판옥선(板屋船) 및 거북선 제작 등을 지시받았다. 다시 형조참의가 되었다가, 그해 가을 조정의 변화에 뜻이 맞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이후 대사간, 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599년 청송부사(靑松府使)로 부임했다가 1601년 봄 병으로 사퇴하고 상주로 돌아갔다. 1602년 여주목사가 되었으며, 1604년 강릉부사로 임명되어 병중에도 부임하였다. 1605년 강릉부사 재직 중 큰 수재(水災)가 발생하자,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직접 현장을 찾아 사망자 조문, 재산 피해 및 굶주린 백성 진휼(賑恤)과 구제에 힘쓰다가 병이 악화되어 사직하였다.

2. 4. 사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사망하여 부인 류씨가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근처에 매장하였다. 묘비명은 장유가 썼다. 상주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3. 저서


  • 성극당집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김윤검(金允儉)
아버지김범(金範)
어머니창녕 조씨(昌寧曺氏)
부인풍산 류씨 (류운룡의 딸)
아들김형(金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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